김형래 편집장의 '아침마다 지혜' podcast artwork

PODCAST · news

김형래 편집장의 '아침마다 지혜'

인생의 굴곡을 겪으며 깨달은 교훈, 나이 들어 알게 된 진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마음의 힘까지—짧지만 깊이 있는 메시지로 하루의 방향을 잡아드립니다. 시니어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울림이 있는 아침 인사. 커피 한 잔과 함께 듣는 ‘아침마다 지혜’로 오늘도 마음을 단단히, 부드럽게 채워보세요. 37년간의 1막을 이겨내고 인터넷 신문사 편집장으로 2막을 펼쳐가고 있는 김형래 편집장이 매일 아침을 열어드립니다.

Publisher-supplied feed metadata · PodParley refreshed Sep 18, 2026 · Source feed

  1. 482

    [아침마다 지혜 #479] 3,085개의 안타가 증언한 한 시대

    히로시마의 섬광을 딛고 일어선 재일한국인 야구 전설 장훈 선생, 86세로 영면하다 일본 프로야구 통산 최다 안타 기록의 주인공 장훈(張勲 チャン・フン, 張本 勲 はりもと いさお 하리모토 이사오) 선생이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일본의 대기록 보유 선수들로 구성된 엘리트 단체인 골든 플레이어스 클럽(Golden Players Club)은 장훈 선생이 지난 수요일 별세했다고 발표했으나, 구체적인 사인은 밝히지 않았습니다.그의 생애를 요약하는 숫자는 단연 3,085라는 안타 기록입니다. 1980년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로 통산 3,000안타 고지를 밟았고, 은퇴 시점의 최종 기록인 3,085안타는 지금까지도 일본 프로야구 통산 최다 안타로 남아 있습니다. 23년의 선수 생활 동안 504개의 홈런을 때렸고, 2,752경기에 출전했으며, 올스타에는 열여덟 차례 선정되었습니다. '타격 기계'라는 별명은 과장된 수식이 아니라 기록이 스스로 붙여 준 이름이었습니다. 1990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습니다.그러나 이 화려한 숫자 뒤에 놓인 출발점은 참혹했습니다. 장훈 선생은 1940년 히로시마에서 한국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네 살 때 오른손에 심각한 화상을 입어 손의 운동 능력을 대부분 잃었습니다. 운동선수에게 손은 생명과 같은 도구입니다. 그 도구의 절반을 잃은 소년이 훗날 일본 야구사에서 가장 정교한 타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결핍이 곧 운명의 선고는 아니라는 점을 웅변합니다. 그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처음부터 왼손타자로 야구를 배웠습니다.1945년 8월 6일, 미군이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을 때 그의 나이는 다섯 살이었습니다. 그의 집은 산 뒤편에 있어 폭발의 직접적인 충격파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피를 흘리는 어머니의 품 안에서 정신을 차렸다고 훗날 증언했습니다. 폭심지 근처에 있던 누나는 심각한 화상을 입고 며칠 뒤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훈 선생은 그 며칠 동안 이어진 누나의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평생 잊은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전쟁이 끝난 직후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가 식당을 운영하며 가족을 부양했습니다. 초등학생 때 야구를 시작한 소년은 중학교 시절 분명한 목표 하나를 품습니다. 어머니에게 조금이라도 편안한 삶을 드릴 수 있을 만큼 돈을 벌기 위해 프로야구 선수가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소박하다 못해 투박한 동기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을 23년 동안 그라운드에 세운 힘은 거창한 이념이 아니라 바로 그 소박한 효심이었습니다.그는 자신의 재능을 빠르게 증명했습니다. 1959년 도에이 플라이어스(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에 입단해 115안타를 기록하며 신인왕에 올랐고, 이듬해 첫 올스타에 선정되었습니다. 1961년에는 첫 타격왕 타이틀을 차지했으며, 선수 생활 중 유일하게 일본시리즈 우승을 맛본 1962년에는 처음으로 30홈런 시즌을 만들어 냈습니다. 1976년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해 통산 868홈런의 오 사다하루(왕정치) 선수와 한솥밥을 먹었고, 1980년 지금의 지바 롯데 마린스로 옮겨 통산 3,000안타와 500홈런을 완성한 뒤 1981년 방망이를 내려놓았습니다.은퇴 후 그는 직설적인 화법으로 이름을 떨친 인기 야구 해설가로 제2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동시에 그는 반전과 핵군축을 호소하는 목소리를 냈습니다. 그 계기는 정치적 각성이 아니라 일종의 충격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젊은 세대 가운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이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후 그는 TBS 방송 인터뷰 등을 통해 섬광과 폭발, 그리고 의식을 잃었던 그날의 기억을 반복해서 증언했습니다.그는 "야구 선수로서 나는 언젠가 원폭 후유증 증상이 나타나지 않을까 항상 걱정했다"고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전성기의 기록 뒤에는 자신의 몸을 믿지 못하는 불안이 늘 따라다녔던 것입니다. 만년의 그는 피폭 생존자들의 고령화를 자주 우려했고, '살아 있는 마지막 전달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이 고통스러운 역사를 계속 전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여기서 한 가지는 분명히 구분해 두어야 하겠습니다. 그의 증언은 특정한 정치적 주장을 위한 도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다섯 살 아이가 두 눈으로 본 것에 대한 사실의 기록이었습니다. 역사의 해석은 세대마다 갈릴 수 있으나, 겪은 사람이 남긴 목격담은 해석 이전의 자산입니다. 그 자산이 사라지면 후대는 판단할 재료조차 잃게 됩니다. 증언자가 한 사람씩 세상을 떠나는 지금, 우리가 안타까워해야 할 것은 한 유명인의 부고가 아니라 검증 가능한 기억이 통째로 소멸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장훈 선생의 생애는 우리 시니어 세대에게 두 가지를 묻습니다. 첫째, 조건이 나쁘다는 이유로 스스로 접어 둔 일은 없었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그는 오른손을 잃은 채 왼손으로 3,085개의 안타를 쳤습니다. 둘째, 우리가 살아온 시간을 다음 세대에게 제대로 건네고 있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전쟁과 가난, 산업화와 외환위기를 통과한 우리 세대 역시 저마다 증언자입니다. 기록되지 않은 경험은 한 세대가 끝나는 순간 함께 끝납니다.한 소년이 어머니를 편히 모시겠다는 마음으로 방망이를 들었고, 그 성실이 23년 동안 쌓여 누구도 넘지 못한 기록이 되었으며, 노년의 그는 그 이름값을 기억을 전하는 일에 썼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캐어유뉴스 편집장 김형래

  2. 481

    [아침마다 지혜 #478] 고등어 통조림에 고등어가 없다는 소식

    우리 식탁에는 무엇이 없어지고 있나요? 영국의 일간지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가 2026년 9월 12일 자 지면을 통해, 영국 주요 슈퍼마켓에서 팔리는 고등어 통조림에 더 이상 진짜 고등어가 들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도하였습니다. 보도에 따르면 통조림 공급업체인 프린스(Princes)는 원재료를 대서양 고등어에서 칠레전갱이(Chilean jack mackerel)로 바꾸었습니다. 이름은 비슷하게 불리지만 전갱이과(Carangidae)에 속하는 전혀 다른 어종으로, 페루전갱이라고도 불리며 주로 남미 해역에서 잡힙니다. 테스코(Tesco)와 세인즈버리(Sainsbury's)가 이 제품을 판매하고 있고, 리들(Lidl)과 웨이트로즈(Waitrose)를 포함한 다른 대형 유통업체들도 신선 고등어 취급을 줄여가는 중이라고 합니다. 웨이트로즈는 지난 4월 남획 우려를 이유로 기존 재고가 소진되는 대로 통조림 제품을 단계적으로 중단하겠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이 대체가 단순한 상표 문제로 그치지 않는 까닭은 영양 성분의 차이에 있습니다. 보도된 내용을 그대로 옮기면, 칠레전갱이는 진짜 고등어에 비해 100그램당 열량이 100킬로칼로리가량 적고, 오메가-3 함량은 절반 수준에 머무릅니다. 소비자들은 가시가 굵어진 점과 금속성 냄새에 대해서도 불만을 제기하고 있다고 합니다. 시니어 독자 여러분께서 고등어 통조림을 찾으시는 이유가 대체로 값이 저렴하고 보관이 쉬우며 등푸른생선의 지방산을 간편하게 섭취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결코 사소한 변화가 아닙니다.바뀐 배경에는 자원 고갈이라는 엄연한 사실이 놓여 있습니다. 국제해양탐사협의회(ICES)에 따르면 지난 10년 사이 고등어 자원량은 4분의 3이 줄었습니다. 과학자들은 지난해 북동 대서양 어획량을 70퍼센트 이상 감축해야 자원 고갈을 막을 수 있다고 경고하였습니다. 그럼에도 2010년 이후 설정된 어획 쿼터는 과학적 권고치보다 평균 39퍼센트 높았습니다. 영국과 노르웨이, 유럽연합, 러시아,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페로 제도 사이에서 벌어진 이른바 고등어 전쟁이 그 배경이며, 일부 관리 조치가 시행되고는 있으나 단속과 이행이 여전히 미흡하다는 지적이 최근에도 나왔습니다.여기까지는 자연이 정한 한계에 인간이 뒤늦게 적응하는 과정이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업계 자료를 근거로 한 보도에 따르면 칠레전갱이의 도매가격은 대서양 고등어의 약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지만, 여러 슈퍼마켓에서는 통조림을 이전과 비슷한 가격에 팔고 있습니다. 리들과 같은 일부 유통업체는 어종이 다름에도 고등어라는 표지판 아래 전갱이 제품을 진열하고 있다고 전해집니다. 리들 영국 법인은 책임 있게 관리되는 어장에서 수산물을 조달하고자 노력하고 있으며, 훈제 고등어의 다음 구매 시점 이전에 조달 정책과 과학적 권고 부합 여부를 다시 검토하겠다는 취지로 답하였습니다.영국의 소비자 단체 위치(Which?)의 식품 정책 책임자 슈 데이비스(Sue Davies)는 통조림 생선이 주 2회 생선 섭취, 그중 1회는 등푸른생선이라는 권장 기준을 지키는 저렴하고 편리한 수단이라는 점을 짚으면서, 제조업체가 이러한 생필품의 품질을 조용히 낮추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비판하였습니다. 소비자가 영양가가 현저히 떨어진 제품에 같은 값을 치르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공급망 압박과 지속가능성 문제가 실재한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배합이나 원재료를 바꿀 때는 소비자에게 완전하고 솔직하게 알릴 의무가 있다고 그는 강조하였습니다. 비용을 줄이려 원재료를 슬그머니 바꾸는 이른바 스킴플레이션(skimpflation)이 점차 흔해지고 있으나, 소비자가 집에 가져가 먹어보기 전까지는 알아차리기 어렵다는 점에서 특히 온당치 못하다는 지적도 덧붙였습니다. 업계에서 오래 일한 스튜어트 하퍼(Stewart Harper) 전 노스 대서양 피싱 컴퍼니(North Atlantic Fishing Company) 사장 역시 파이낸셜 타임스(FT)와의 대담에서, 가까운 바다의 생선 대신 먼 곳에서 실어온 생선을 먹게 된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그 손해가 결국 소비자에게 돌아간다는 취지로 말하였습니다.저는 이 사안을 기업을 나무라는 이야기로만 읽지 않습니다. 어족 자원이 줄면 값이 오르고, 값이 오르면 대체재를 찾는 것은 시장의 자연스러운 작동입니다. 어느 기업도 없는 고등어를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다만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한 최소한의 전제가 있습니다. 파는 쪽과 사는 쪽이 같은 정보를 보고 값을 흥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재료가 바뀌었는데 이름과 가격이 그대로라면, 그것은 경쟁이 아니라 정보의 비대칭을 이용한 이익입니다. 시장을 신뢰하는 사람일수록 표시와 공시의 정직성에 더 엄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이 문제가 남의 나라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우리 식탁에 오르는 고등어 역시 상당 부분을 원양과 수입에 기대고 있으며, 통조림과 가공품의 원재료 표기는 뒷면의 작은 글씨에 적혀 있습니다. 시니어 세대에게 통조림 한 통은 단백질과 불포화지방산을 손쉽게 챙기는 현실적인 수단입니다. 그렇기에 제품 뒷면의 원재료명과 원산지, 100그램당 영양성분을 한 번 더 확인하시는 습관이 결국 가장 확실한 자기 방어가 됩니다. 아울러 우리 관계 당국도 어종명 표기와 가공품 원재료 변경 고지에 관한 기준이 소비자가 알아볼 수 있는 수준으로 운영되고 있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값이 싸진 것도 아니고 몸에 더 이로워진 것도 아닌데 내용물만 조용히 바뀌었다면, 소비자는 마땅히 그 사실을 알 권리가 있습니다. 정직한 표시는 규제의 부담이 아니라 시장의 자산입니다.캐어유뉴스 편집장 김형래

  3. 480

    [아침마다 지혜 #477] 영국 하원의 선택, 시니어에게 던진 질문

    지난 금요일 영국 하원에서 말기 환자의 조력자살을 허용하려던 법안이 반대 286표, 찬성 270표로 부결되었습니다. 열여섯 표 차이였습니다. 불과 1년 전 같은 의사당에서 314대 291로 통과되었던 사안이 정반대의 결론에 이른 것이니, 이 문제가 얼마나 깊은 균열 위에 놓여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라 하겠습니다.부결된 법안은 「말기 성인 환자 법안(Terminally Ill Adults bill)」이라 불렸습니다. 잉글랜드와 웨일스에 거주하는 성인 가운데 의사로부터 기대여명 6개월 미만이라는 진단을 받은 사람이 치명적인 약물을 처방받아 스스로 투약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의사가 직접 주사를 놓는 방식은 아니었습니다. 신청자는 증인이 서명한 두 장의 선언서를 통해 의사를 밝혀야 하고, 두 명의 독립적인 의사가 진단을 확인하며 환자가 정확한 정보를 제공받았고 강요당하지 않았음을 보증해야 했습니다. 여기에 판사와 사회복지사, 정신과 의사 세 사람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사례를 검토해 만장일치로 서명하는 절차까지 두었습니다. 의사와 약사, 요양시설은 참여하지 않을 권리를 보장받았습니다. 절차만 놓고 보면 상당히 촘촘한 설계였습니다.그럼에도 부결된 이유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반대 측이 가장 집요하게 파고든 지점은 안전장치의 두께가 아니라, 그 장치가 지켜야 할 사람들의 처지였습니다. 시니어와 장애인, 빈곤층이 가족이나 사회에 짐이 되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죽음을 선택하도록 떠밀릴 수 있다는 우려였습니다. 서류상의 절차가 아무리 정교해도, 병실에서 자녀의 지친 얼굴을 마주한 시니어 환자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심사할 수는 없다는 지적입니다.여기에 완화의료(palliative care)의 현실이 겹쳤습니다. 올해 유방암 말기 진단을 받고 보건부 장관직에서 물러난 노동당 애슐리 달튼 의원은 토론에서, 필요한 모든 사람이 양질의 완화의료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는 누구에게도 진정한 선택권이 없다는 취지로 발언했습니다.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음을 알면서도 서둘러 만든 법이 통과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고 밝힌 대목에서, 찬반 양측 의원들이 그를 끌어안았다고 전해집니다. 당사자의 입에서 나온 이 말은 이번 표결의 성격을 압축해 보여줍니다. 고통을 덜어줄 다른 길이 충분히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죽음을 선택지로 먼저 제도화하는 것이 과연 자기결정권의 확대인가 하는 물음입니다.물론 찬성 측의 호소도 가볍지 않았습니다. 발의자 중 한 사람인 킴 리드비터 의원은 생을 마감하려 강가로 향하던 말기 암 환자가 전동휠체어의 배터리가 다해 그 자리에서 흐느끼다 발견된 사연을 전했습니다. 또 다른 발의자 로렌 에드워즈 의원은 표결 직후 현행법이 그대로 두기에는 너무 잔인하다며 이 사안이 반드시 다시 다뤄질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여론조사에서는 영국인의 4분의 3가량이 원칙적 합법화에 찬성한다고 나타납니다. 그러나 원칙에 대한 찬성과 구체적 제도에 대한 동의는 다른 문제였던 셈입니다.정치적 변수도 있었습니다. 지난해 표결에서 찬성표를 던졌던 키어 스타머 전 총리와 달리, 지난 7월 취임한 앤디 번햄 총리는 조력자살 표결에 앞서 완화의료와 돌봄 체계 강화가 먼저라는 입장을 밝히고 이번 표결에서는 기권했습니다. 앞선 법안이 상원에서 1,200건이 넘는 수정안 제출로 사실상 지연 저지되었던 전례도 남아 있습니다. 분석가들은 2029년으로 예상되는 다음 총선 전까지 전면적인 재추진은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이로써 영국은 조력자살을 어떤 형태로든 허용하는 나라들의 대열에서 당분간 비켜서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1997년 연방대법원이 판단을 각 주에 맡긴 뒤 오리건주를 시작으로 현재 13개 주와 워싱턴 D.C. 등 14개 관할 구역에서 허용되고 있습니다. 오스트리아와 벨기에, 스페인, 네덜란드에도 관련 법률이 있고, 일부는 시한부 진단을 요건으로 두지 않습니다. 프랑스 의회도 최근 관련 법안을 승인했습니다. 1942년부터 조력자살이 합법인 스위스에는 매년 500명 이상이 이 제도를 이용하기 위해 국경을 넘습니다. 여든여섯 살의 방송인 출신 활동가 에스더 란첸은 법안 처리가 늦어지는 사이 스위스로 떠날 기력조차 잃었다며, 건강하고 여유 있는 사람만 선택할 수 있는 현실을 문제 삼았습니다.우리 사회도 이 논의에서 멀리 있지 않습니다. 연명의료결정제도가 시행된 지 여러 해가 지났고, 조력존엄사를 둘러싼 입법 논의도 이미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영국의 이번 표결이 우리에게 남기는 교훈은 찬반의 승패가 아니라 순서에 있다고 봅니다. 통증을 제대로 다스려 주는 의료, 혼자 앓지 않게 하는 돌봄, 가족에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적 부양 구조가 먼저 갖추어져야 합니다. 그 토대가 없는 상태에서 주어지는 선택권은 자유가 아니라 압력이 되기 쉽습니다. 시니어 세대가 마지막 순간에 붙들어야 할 것은 떠날 권리이기 이전에, 끝까지 존중받으며 머무를 권리이기 때문입니다.

  4. 479

    [아침마다 지혜 #476] 행복만 좇는 삶은 과연 행복할까

    쇼펜하우어·보부아르·니체가 건네는 경고, "안락한 자리에 너무 오래 머물지 말라" 여름이 저물어 갑니다. 바닷가의 파도 소리나 숲 그늘의 고요함을 벌써 그리워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상담가나 요가 강사들은 이런 곳을 '나만의 행복한 장소'라고 부르곤 합니다. 누구나 마음속에 그런 장소 하나쯤은 품고 삽니다. 그러나 그 안락함이 인생의 최종 목적지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우리 사회에서 은퇴 설계라고 하면 대개 비슷한 그림이 떠오릅니다. 평생 부지런히 일해 모은 재산으로 남은 생을 편안히 누리는 삶, 여행과 맛집과 취미로 채워진 나날입니다. 미국 버지니아대학교 마크 에드먼드슨 교수는 최근 뉴욕타임스 국제판 기고에서 바로 이 통념에 질문을 던졌습니다. 쾌락과 안락으로서의 행복이 과연 삶의 궁극적 목표가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즐거움을 향한 오래된 찬가행복을 쾌락으로 이해하는 전통은 뿌리가 깊습니다.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은 인간이 즐거움을 최대화하고 고통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살아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향락의 삶을 산 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1897년 감옥에서 쓴 긴 편지 『옥중기(De Profundis)』에서 즐거움을 위해 살았던 순간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고백했습니다. 에드먼드슨 교수는 이런 행복을 완전히 배척하지는 않되, 경계하며 절제된 분량으로만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에 섭니다. 그 근거로 세 명의 철학자를 증인으로 불러냅니다.쇼펜하우어가 말한 두 번째 적, 권태독일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두 적으로 고통과 권태를 꼽았습니다. 인간은 지성을 동원해 고통을 피하지만, 고통에서 벗어나는 순간 쉬지 못하는 마음은 새로운 자극을 찾아 헤맵니다. 그 끝에 도박으로 재산을 잃고, 불륜으로 가정을 깨뜨리며, 공연한 다툼을 벌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삶의 지혜를 위한 아포리즘』에서 사교 모임, 연극, 카드놀이, 음주, 여행 같은 오락은 잠시의 처방일 뿐 곧 다시 지루해진다고 보았습니다. 그의 해법은 지성을 채울 대상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수집, 자연 관찰, 외국어 공부, 좋은 책을 읽고 요약하는 일 등입니다. 에드먼드슨 교수는 사람들이 행복의 상징으로 여기는 금빛 해변과 폭포 풍경 상당수가 실은 권태의 덫이라고 지적합니다.보부아르가 권한 '자신만의 프로젝트'프랑스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 역시 수동적 행복보다 능동적 활동을 옹호했습니다. 그녀는 장폴 사르트르와 마찬가지로, 이미 완성된 틀에 자신을 끼워 맞추려는 태도인 즉자존재(être-en-soi)를 가장 위험한 유혹으로 보았습니다. 사회가 승인하는 외모와 행동의 규범에 순응해 흠 없는 모습을 보이려는 삶입니다. 보부아르는 『제2의 성』에서 특히 여성이 이런 압력을 강하게 받는다고 비판했지만, 남성 역시 하나의 정체성에 갇히라는 요구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 대안이 대자존재(être-pour-soi)입니다. 주어진 정체성만으로는 삶의 의미가 보장되지 않음을 깨닫고, 스스로 세운 '프로젝트'를 통해 가치를 만들어 가며 삶을 빚는 태도입니다. 이런 사람은 늘 행복하지는 않을지라도 자유를 스스로 떠맡았기에 삶이 의미를 얻는다는 것이 보부아르의 생각이었습니다.니체가 경고한 '마지막 인간'세 번째 증인은 프리드리히 니체입니다. 그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마지막 인간(der letzte Mensch)'이라는 인간형을 그렸습니다. 낮에도 밤에도 소소한 즐거움만 누리고, 결코 전력을 다하지 않으며, 큰 결실을 위해 무언가를 걸지도 않는 사람입니다. 약간의 자극과 공허한 오락이 그의 기쁨입니다. 작품 속 차라투스트라가 이 인간형을 경계하라고 외치자, 군중은 도리어 자신들을 그렇게 만들어 달라고 환호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마지막 인간이 되어 있었습니다.은퇴 이후의 긴 시간이 던지는 질문에드먼드슨 교수의 결론은 균형 잡혀 있습니다. 모든 만족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쾌락보다 의미를 추구하는 편이 낫다는 것입니다. 의미를 좇는 사람에게도 휴식은 필요합니다. 니체조차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한동안 안락한 생활을 즐겼습니다. 다만 행복한 장소에 너무 오래 머물거나 평생 그곳에 눌러앉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이 경고는 한국의 시니어에게 특히 무겁게 다가옵니다. 수명이 늘어나면서 퇴직 이후의 시간은 어느 세대보다 길어졌습니다. 그 긴 시간을 휴식과 오락만으로 채운다면 권태가 찾아오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무료함 끝에 도박이나 과음, 과도한 스마트폰 사용에 빠지는 일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반대로 배움을 이어 가고, 지역 사회에서 봉사하고, 평생의 경험을 다음 세대에 전하는 시니어들의 삶은 한결 단단합니다.쉬되 멈추지 않는 삶우리 선조들은 이 지혜를 일찍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주역(周易)』은 하늘의 운행이 굳건하듯 군자는 스스로 힘써 쉬지 않는다는 자강불식(自强不息)을 가르쳤습니다. 근면과 절제, 자기 수양을 삶의 근본으로 삼은 전통적 가치는 서구 철학자들의 결론과 놀랍도록 맞닿아 있습니다. 은퇴는 일에서 물러나는 것이지, 삶의 책임에서 물러나는 것이 아닙니다.물론 평생 치열하게 살아온 시니어에게 휴식은 마땅한 권리이며, 쉼을 게으름으로 몰아세울 이유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쉼과 의미의 균형입니다. 바닷가에서 한 계절을 보냈다면, 다음 계절에는 책 한 권을 읽고 정리하거나, 새 언어를 익히거나, 이웃에게 손을 내미는 자신만의 프로젝트를 세워 보시기 바랍니다. 행복은 붙잡으려 할수록 달아나지만, 의미 있는 일에 몰두하는 사람 곁에는 어느새 와 있기 마련입니다. 편안한 자리를 잠시 즐기되 그곳에 주저앉지 않는 삶, 그것이 긴 인생 후반전을 품위 있게 사는 길일 것입니다.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5. 478

    [아침마다 지혜 #475] 마지막 선물, 호스피스 돌봄과 사후 뇌 기증이 의학 진단과 공중보건에 갖는 의미

    죽음을 준비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있습니다한 세대 전만 해도 우리 사회에서 죽음을 미리 입에 올리는 일은 금기에 가까웠습니다. 수의를 미리 마련하고 묏자리를 살펴 두는 것까지는 미덕으로 여겼으나, 임종의 순간을 어떻게 맞을지 가족과 마주 앉아 의논하는 일은 불경한 짓으로 치부되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나 최근 서구 사회에서는 임종을 맞는 과정 자체를 미리 설계하고 곁에서 돕는 새로운 직역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임종 둘라(death doula)라 불리는 이들이 그 주인공입니다. 산모의 출산을 곁에서 돕는 둘라의 역할을 삶의 마지막 국면으로 옮겨 온 셈입니다.미국의 시사 주간지 《뉴요커(The New Yorker)》는 지난 8월 17일 자에 알렉산드라 슈워츠 기자가 취재한 임종 둘라와 호스피스 돌봄의 변화에 관한 장편 기사를 실었습니다. 그리고 9월 14일 자 독자편지란에는 이 기사를 읽은 한 임상 신경병리학자의 짧은 편지가 게재되었습니다. 뉴욕주 하이폴스에 거주하는 R. D. 폴커스 박사가 보낸 글입니다.한 신경병리학자가 짚어낸 대목폴커스 박사가 주목한 것은 기사 본문의 화려한 서사가 아니라, 많은 독자가 무심코 지나쳤을 법한 짧은 한 장면이었습니다. 둘라로 일하는 버지니아 창이 자신이 돌보던 엘리너 레너드에게 과학 연구를 위한 사후 뇌 기증을 권했고, 레너드가 이를 반기며 받아들였다는 대목입니다.사후 인간의 뇌를 직접 관찰하고 연구해 온 오랜 경력의 전문가로서, 폴커스 박사는 이러한 기증이 극히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고 단언하였습니다. 그가 제시한 근거는 명료합니다. 임상 생체지표(biomarker)와 뇌 영상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였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해답을 얻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알츠하이머병이나 특정 유형의 뇌졸중을 비롯한 상당수 질환은 진단을 최종적으로 확정하기 위해 여전히 사후 조직 분석을 필수적으로 요구합니다. 살아 있는 동안의 검사 결과는 어디까지나 추정에 머무는 경우가 적지 않으며, 확진의 마지막 열쇠는 세상을 떠난 뒤에야 손에 쥘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박사는 이러한 기증이 그 밖에도 수많은 공중보건상의 이점을 제공한다고 덧붙였습니다.선의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편지에서 가장 실질적인 대목은 마지막 괄호 안에 담겨 있습니다. 폴커스 박사는 뇌 기증이 운전면허증이나 신분증에 장기 기증자(organ donor)라고 표시해 두는 것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뇌 은행(brain bank)이나 미국 국립보건원(NIH)을 통해 별도의 등록과 진행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것입니다.이 지적은 결코 사소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장기 기증은 다른 환자의 생명을 살리기 위한 이식이 목적이며, 연구를 위한 뇌 기증은 목적도 절차도 관리 기관도 다릅니다. 더구나 뇌 조직은 사망 이후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채취되어야 연구 자료로서의 가치를 유지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본인의 뜻이 아무리 굳건하여도 그 뜻이 문서로 등록되어 있지 않고 가족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면, 선의는 임종의 혼란 속에서 그대로 흩어지고 맙니다. 뜻을 세우는 일과 절차를 밟아 두는 일은 전혀 별개의 문제인 것입니다.우리 사회가 새겨야 할 대목우리나라도 사정이 다르지 않습니다. 치매를 비롯한 뇌 질환은 이미 시니어 세대와 그 가족이 감당해야 할 가장 무거운 짐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럼에도 뇌 연구에 필요한 조직 자원의 확보는 여전히 넉넉하지 않은 형편입니다. 국내에서도 뇌 연구 전문기관을 중심으로 뇌 조직 기증과 보관을 담당하는 체계가 운영되고 있으나, 일반 시민에게 그 존재와 절차가 충분히 알려져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여기서 한 가지 오해를 경계해야 합니다. 기증을 미덕으로 권장하는 일과, 기증을 사회적 압력으로 만드는 일은 전혀 다릅니다. 자신의 몸을 어떻게 할 것인지는 끝까지 본인의 결정에 속하며, 유족의 정서와 가족의 합의 또한 존중받아야 마땅합니다. 죽음을 지나치게 담담한 기술적 절차로만 다루는 서구식 접근을 그대로 옮겨 오는 것도 신중할 일입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알지 못해서 선택하지 못하는 일만은 없어야 한다는 점입니다.시니어 세대는 평생 가족과 사회를 위해 무엇인가를 남기는 일에 익숙한 세대입니다. 재산을 남기고 이름을 남기고 가르침을 남겨 왔습니다. 그 오랜 습관의 연장선에서, 자신이 앓았던 병의 정체를 후손과 후학에게 밝혀 주는 일 또한 하나의 유산이 될 수 있습니다. 폴커스 박사의 편지가 우리에게 건네는 조언은 결국 단순합니다. 뜻이 있다면 미리 알아보고, 미리 등록하고, 미리 가족에게 말해 두시라는 것입니다. 준비된 뜻만이 마지막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독자 실용 정보보건복지상담센터 129치매상담콜센터 1899-9988국민건강보험공단 1577-1000연구 목적의 뇌 조직 기증 절차는 일반 장기 기증 등록과 별개이며, 국내에서는 뇌 연구 전문기관 및 관련 의료기관을 통해 문의하실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등록 방법과 요건은 기관에 직접 확인하시기 바랍니다.출처 및 편집자 주: 원문 출처: The New Yorker 2026년 9월 14일 자 5쪽 독자편지란(THE MAIL), R. D. 폴커스(의학박사, 뉴욕주 하이폴스) 기고. 인용 대상 기사는 알렉산드라 슈워츠, 2026년 8월 17일 자 리포트. 본 칼럼은 원문을 직접 인용하지 않고 사실 관계를 재구성하여 작성하였습니다.국내 뇌 조직 기증 관련 기관명과 절차, 사후 조직 채취 소요 시간에 관한 서술은 확인이 필요한 사항으로, 게재 전 검토를 권고드립니다.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6. 477

    [아침마다 지혜 #474]아트펑크 괴짜들의 자화상

    회한으로 완성된 반세기의 기록텍사스 출신의 아방가르드 펑크 밴드 버트홀 서퍼스(Butthole Surfers)의 45년 역사를 조명한 다큐멘터리 《홀 트루스 앤 나씽 벗(The Hole Truth and Nothing Butt)》이 최근 미국 알라모 드래프트하우스 시네마(Alamo Drafthouse Cinema) 체인을 통해 개봉했습니다. 배급사 없는 독립 영화를 지원하는 '알라모 익스클루시브' 프로그램의 첫 작품으로 선정된 이 영화는 시작부터 파격적인 경고 문구를 내세웁니다. 섬광 조명과 약물 사용, 인형 폭력, 그리고 '회한'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문구는 이 밴드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 줍니다.파격의 이면에 감춰진 회한1970년대 후반 프론트맨 기비 헤인즈(Gibby Haynes)와 기타리스트 폴 리어리(Paul Leary)의 만남으로 시작된 이 그룹은 강력한 섬광 조명과 기괴한 영상 투사, 충격적인 무대 연출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했습니다. 그러나 연출을 맡은 탐 스턴(Tom Stern) 감독은 이러한 충격적인 겉모습 아래에 수많은 감정의 층위가 존재했다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밴드는 1991년 제1회 롤라팔루자 투어 참가와 1996년 "Pepper"의 빌보드 모던 록 차트 1위 등 대중적 성공을 거두는 동시에, 구성원 각자의 개인사에서는 결코 가볍지 않은 시련을 겪어 왔습니다.성공과 중독, 그리고 이별"Pepper"의 성공 이후 소속 레이블은 후속 히트곡을 요구했고, 당시 헤인즈는 헤로인 중독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드러머 킹 코피(King Coffey)는 이 시기를 밴드의 가장 어두운 국면으로 회고했습니다. 헤인즈는 현재 약 12년째 약물을 끊은 상태라고 밝혔으며, 밴드에 대한 부정적 평가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한편 오랫동안 밴드와 함께한 드러머 테레사 테일러(Teresa Taylor)는 2023년 6월 폐기종으로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코피는 그녀가 사실상 작별 인사를 건네는 장면이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대목이라고 전했습니다.유년의 상처와 가족이라는 답영화에서 가장 무겁게 다가오는 장면은 헤인즈가 네 살 무렵 이웃으로부터 성적 학대를 당했다고 고백하는 대목입니다. 그는 이 사건을 밴드 동료들에게조차 오랫동안 밝히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올해 66세인 헤인즈는 현재 변호사인 아내, 11세 아들과 함께 브루클린에 거주하며 안정된 가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극단적인 무대 연출로 사회적 존중을 받지 못했다고 토로하던 그가, 이제는 가정을 지키며 자신의 상처와 정면으로 마주하는 모습은 이 다큐멘터리가 전하는 또 하나의 축이라 할 수 있습니다.세대를 넘어 전하는 메시지리어리는 9·11 테러 이후 무대 위 광기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며 투어 재개를 거부하고 있으나, 밴드는 2025년 9월 할리우드 상영회에서 8년 만에 다시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젊은 시절의 방종이 결국 가족과의 화해, 정직한 자기 고백으로 귀결되는 이 서사는 이제 시니어 세대에 접어든 예술가들이 자신의 인생 전체를 어떻게 정리하는가를 보여 주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파격적인 표현의 자유는 존중받아야 하나, 그 자유에는 반드시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과 가족에 대한 도리가 함께 따라야 한다는 점을 이 다큐멘터리는 우회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화려한 성공 이면의 중독과 상실을 냉정하게 되짚는 태도야말로, 질서와 균형을 중시하는 사회가 예술적 파격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전제 조건이 아닐까 생각합니다.현재까지 이 다큐멘터리의 국내 개봉이나 스트리밍 서비스 제공 일정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관심 있는 독자께서는 해외 영화 배급 소식과 국내 OTT 서비스 편성표를 통해 개별적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7. 476

    [아침마다 지혜 #473] 고통보다 평범함, 진짜 행복은 그렇게 찾아왔다

    오지브웨 작가 데이비드 트루어가 프린스턴에서 발견한 역설미국 미네소타주 리치 레이크(Leech Lake) 인디언 보호구역 출신의 작가 데이비드 트루어(David Treuer)가 최근 뉴욕타임스 인터내셔널 에디션에 기고한 개인적 회고는, 소수자에게 사회가 오랫동안 강요해 온 '고통의 서사'라는 관행을 정면으로 되짚어 보게 합니다. 오지브웨(Ojibwe) 부족 출신인 그는 1985년 봄 프린스턴 대학교 합격 통지를 받고, 그해 가을 어머니의 승합차를 타고 뉴저지로 향하면서 가난과 편견으로 얼룩진 과거를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던 현실은 기대와 전혀 달랐습니다.트루어는 백인 아버지를 두었다는 이유로 정작 고향 보호구역에서조차 '진짜 인디언'으로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인물입니다. 그럼에도 프린스턴 캠퍼스에서는 인디언이라는 사실만으로 동정 어린 관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습니다. 그의 집에 전기와 수돗물이 들어오고 알코올 중독 문제도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그에게 쏠렸던 관심은 순식간에 식어버렸습니다. 그는 동정받을 이유가 없는 평범한 존재가 되는 순간 오히려 주변에서 소외된다는 사실을 절감했다고 고백합니다. 한 백인 교수는 그에게 학자와 전통 치료사 가운데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고 조언하기도 했는데, 이는 명문 대학의 지식사회조차 소수자를 정형화된 틀 안에서만 이해하려 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트루어로 하여금 한동안 자신의 출신 배경을 실제보다 훨씬 비참하게 과장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마을이나 자동차를 처음 본 순간의 두려움 같은 이야기를 지어낼수록, 주변 사람들은 그것을 더욱 진실로 받아들였다고 그는 전합니다. 그는 미국의 건국 문서에서 인디언이 한때 '무자비한 야만인'이라는 표현으로만 잠시 언급되었다가 본문에서 제외되었던 역사를 함께 짚으며, 이러한 법적·역사적 배제가 소수자를 결핍과 고통으로만 규정해 온 뿌리 깊은 인식과 맞닿아 있다고 지적합니다. 공교롭게도 1980년대 들어 다수의 보호구역에 카지노 산업이 들어서며 형편이 나아지기 시작했고, 리치 레이크 역시 생활 수준이 다소 개선되고 있었습니다. 트루어는 그제야 자신이 거짓 서사를 지어냈을 뿐 아니라, 그 거짓 서사를 소비하는 사회 전체의 일부였음을 깨달았다고 회고합니다.주목할 대목은 트루어가 결국 '고통받는 인디언'이라는 서사도, 그 반대편에 놓인 '역경을 극복한 특별한 인디언'이라는 서사도 함께 거부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대학원 과정을 중도에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 사냥과 낚시, 자작나무 공예 같은 화려하지 않은 생업을 이어가며 평범한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삶을 택했습니다. 그는 보호구역 사람들의 삶이 결핍과 비극이 아니라 이혼, 자동차 대출, 소소한 성취와 실패로 채워진 지극히 평범하고 복잡한 인간의 삶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발견했다고 밝힙니다. 그리고 그 평범한 일상 한가운데서, 첫 소설의 출간 제안을 전화 자동응답기로 확인했던 순간의 벅찬 기쁨을 통해 비로소 진정한 행복을 확인했다고 담담히 글을 맺습니다.이 회고가 시사하는 바는 특정 소수민족의 이야기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어떤 집단이든 사회가 정해 놓은 단일한 틀, 즉 동정받아야 할 약자이거나 혹은 역경을 극복한 영웅이어야 한다는 이분법에 갇히는 순간, 그 구성원 개개인이 지닌 평범하고 온전한 삶의 존엄은 오히려 지워지기 쉽습니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시니어 세대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적지 않은 시사점을 줍니다. 시니어를 일방적인 돌봄의 대상으로만 규정하거나, 반대로 특별한 성공 사례로만 조명하는 방식 모두, 정작 대다수 시니어가 살아가는 평범하고 존엄한 일상의 가치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결국 이 회고가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어떤 집단에 대한 연민이나 배려도, 그 집단을 정해진 서사 안에 가두는 순간 또 다른 형태의 편견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존중은 특정한 이야기를 요구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평범한 삶과 그 삶이 뿌리내린 공동체적 유대, 그리고 개인의 성실한 노력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감상적인 동정도, 무비판적인 영웅화도 아닌, 있는 그대로를 존중하는 합리적 기준이야말로 소수자와 시니어를 비롯한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를 대하는 데 있어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라 할 것입니다.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8. 475

    [아침마다 지혜 #472] 로봇이 넘어질 때, 인간이 웃는 까닭

    넘어지는 로봇, 새로운 오락이 되다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인간의 자리를 위협하는 시대에, 오히려 인간을 가장 크게 웃게 만드는 영상은 따로 있습니다. 두 발로 걷고 뛰도록 설계된 로봇이 벽에 정면으로 부딪히거나,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다 쓰러지는 장면입니다. 최근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이 보도한 바에 따르면, 이러한 '로봇 실패 영상'은 순수한 신체적 희극과 더불어 죄책감 없는 고소해함(Schadenfreude), 그리고 '아직은 인간이 낫다'는 은근한 우월감을 동시에 안겨주며 새로운 오락 장르로 자리 잡고 있다고 합니다.베이징 로봇대회가 보여준 두 얼굴지난달 베이징에서 열린 세계 휴머노이드 로봇대회는 이러한 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두 다리로 달리는 로봇들의 트랙 경기에서 일부는 우사인 볼트의 100미터 기록을 뛰어넘는 놀라운 성과를 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로봇들은 장벽에 그대로 돌진해 무너지거나, 만화처럼 불꽃을 튀기며 뒤로 자빠지기도 했습니다. 특히 역도 종목에서는 바벨을 놓친 로봇이 얼굴부터 바닥에 넘어지자, 무표정한 진행 요원들이 이를 들것에 실어 나르는 장면이 관중의 폭소를 자아냈다고 전해집니다. 높이뛰기와 권투, 치어리딩까지 선보이며 로봇공학의 비약적 발전을 과시하려던 이 대회는, 역설적으로 인간이 가장 즐겨 찾는 '실패 로봇' 콘텐츠의 산실이 된 셈입니다.웃음 뒤에 숨어 있는 불안미국 UCLA의 로봇공학 교수이자 로봇 메카트로닉스 연구소(RoMeLa) 소장인 데니스 홍은, 세탁기가 고장 나는 것을 보고 웃는 사람은 없지만 배달 로봇이 부두 아래로 떨어지거나 휴머노이드가 춤 동작 중 고꾸라지는 모습에는 사람들이 단순한 슬랩스틱 이상의 반응을 보인다고 설명했습니다. 로봇을 개선하는 데 매진하는 그 자신조차 남의 로봇이 실패하는 영상을 보며 즐거움을 느낀다고 인정했습니다. 카네기멜론 대학교의 류창류 교수 역시 학생들에게 로봇 실패 영상 모음을 보여주는데, 이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실제 환경에서 벌어질 수 있는 더 큰 위험을 점검하는 교육 자료로 활용됩니다. 그는 로봇이 무대를 벗어나 예측 불가능한 인파 속으로 들어갈 때 진짜 문제가 시작된다고 지적하며, 인증 기준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무대를 벗어난 로봇, 커지는 우려문제는 이러한 실패가 통제된 무대를 벗어나 실제 대중 앞에서 벌어질 때입니다. 로봇을 비교적 저렴하게 제작해 곳곳에 배치하는 일부 국가에서는, 회전 동작을 자랑하던 로봇이 실수로 어린아이를 가격하거나, 사무용 로봇이 갑자기 위협적인 동작을 취해 동료들이 놀라 도망치는 사례까지 보고되고 있습니다. 홍 교수는 과거 로봇이 호기심의 대상이자 미래의 집사로 기대를 모았다면, 이제는 일자리를 빼앗거나 위협이 될 수 있는 존재로 경계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이는 재난 대응처럼 유익한 로봇 기술을 개발하는 이들에게는 안타까운 변화라는 것입니다.균형 잡힌 시선이 필요하다로봇의 실패를 보며 웃는 인간의 심리에는, 거대 언어 모델(LLM)과 자동화 기술이 인간의 자리를 빠르게 대체해 가는 데 대한 깊은 불안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웃음은 그 불안을 잠시 잊게 해주는 위안일 뿐, 근본적인 해법은 아닙니다. 따라서 로봇 기술의 발전을 무조건 예찬하거나 반대로 막연히 경계하는 태도 모두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혁신을 지원하되, 사람들이 모이는 공공장소에 로봇을 배치할 때는 엄격한 안전 인증과 책임 기준을 함께 요구하는 균형 잡힌 접근이 필요합니다. 기술은 결국 인간의 존엄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존재해야 하며, 그 원칙이 흔들리지 않을 때 비로소 로봇의 발전도 시니어를 포함한 모든 세대에게 신뢰받는 진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9. 474

    [아침마다 지혜 #471] 경험은 자를 수 있는 비용인가

    하늘에서 뛰어내리는 사람들이 남긴 질문 최근 미국 사회에서는 정부 효율화라는 명분 아래 대대적인 공공 부문 인력 감축이 추진되면서, 정작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최전선 인력까지 감축 대상에 오르는 사례가 잇달아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미국만의 사정이 아닙니다. 저출생·고령화 속에서 공공서비스 효율화를 고민해야 하는 한국 사회 역시, 숙련된 경력자의 경험을 어떻게 평가하고 대우할 것인가라는 같은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최근 미국 시사주간지 뉴요커(The New Yorker)가 심층 취재한 미국 산불 진화 특수부대 '스모크점퍼(Smokejumper)'의 이야기는 이 질문에 대한 유의미한 시사점을 던져줍니다.87년 역사, 낙하산으로 산불에 뛰어드는 사람들스모크점퍼는 도로가 없는 험준한 오지에서 산불이 발생했을 때, 수송기에서 낙하산을 타고 곧바로 현장에 투입되는 소방대원을 말합니다. 미국 알래스카를 비롯해 서부 지역 아홉 곳의 기지에 소속되어 있으며, 1939년 워싱턴주에서 하나의 실험으로 시작된 이래 87년 동안 약 6,000명이 이 직업을 거쳐 갔습니다. 이들 가운데는 훗날 외교관, 대학교수, 우주비행 관계자로 성장한 이들도 있을 만큼, 혹독한 훈련과 실전 경험이 만들어 내는 인재의 폭은 넓습니다.신참 대원은 오십 킬로그램에 가까운 배낭을 메고 장거리를 주파하는 등 5~6주에 걸친 극한 훈련을 거치며, 그중 3분의 1가량이 중도에 탈락합니다. 이렇게 살아남은 이들은 이후 수십 년에 걸쳐 현장 판단력을 쌓아 갑니다. 32년의 경력을 지닌 78세의 시니어 베테랑 로드 다우(Rod Dow)는 은퇴한 뒤에도 여전히 알래스카 기지를 찾아 후배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고, 37년 차 베테랑이자 정년퇴직을 앞둔 빌 크레이머(Bill Cramer) 대장은 산불 현장에서 신참들에게 지휘권을 넘기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 조직은 경력에 따른 서열이 아니라, 그날 가장 준비된 사람이 지휘를 맡는 구조를 87년째 유지해 오고 있습니다.효율화의 이름 아래 흔들린 안전망그런데 2025년, 미국의 정부효율성부(DOGE)가 예산 절감을 이유로 연방 인력 감축 대상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화재 감시원과 스모크점퍼를 포함하는 '산림 기술자' 범주 전체가 한때 감축 명단에 오르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내무부 산하 토지관리국의 소방 지도부가 공공안전 인력은 감축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한다고 강하게 반발한 끝에 스모크점퍼들은 직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이웃한 몬태나주에서는 산림청 소속 산림 기술자 약 360명에 대한 해고 지시가 그대로 집행되었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화재 진화 대원으로도 근무하는 인력으로, 스모크점퍼의 초임 시급은 약 25달러(약 3만5,000원), 초과 근무 수당은 시간당 약 38달러(약 5만3,000원) 수준에 그친다는 사실이 함께 알려지며 논란을 키웠습니다. 이 감축에 항의했던 4년 차 대원 샘 포스태그는 결국 소속 기관으로부터 사실상의 인사 보복을 겪었고, 이후 정치에 투신해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하기에 이르렀습니다.경험은 비용이 아니라 자산입니다이 사건이 보여 주는 구조적 문제는 명확합니다. 효율화 정책이 인력을 단순한 숫자와 직급명으로만 분류할 때, 수십 년에 걸쳐 축적된 위기 대응 판단력이라는, 결코 예산 항목으로 환산되지 않는 가치를 놓치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는 점입니다. 스모크점퍼 조직이 87년간 유지해 온 힘은 다름 아닌 베테랑에서 신참으로 이어지는 경험의 전수 체계였습니다. 이 체계를 정교하게 들여다보지 않은 채 일률적인 잣대로 인력을 재단한다면, 정작 위기의 순간 그 공백을 메울 방법이 없습니다.한국 사회를 향한 시사점이는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한국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교훈입니다. 시니어 세대를 단순한 복지 수혜자나 인건비 부담으로만 바라보는 시각은, 정작 이들이 오랜 세월 축적해 온 위기 대응 능력과 조직 운영의 지혜라는 자산을 사장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독일 사회정책에서 강조되어 온 지원(Fördern)과 요구(Fordern)의 균형 원리는 여기서도 유효합니다. 정부는 숙련된 인력에게 정당한 지원과 예우를 제공하는 동시에, 합리적인 성과 기준과 책임을 요구해야 합니다. 어느 한쪽만을 앞세운 정책은 반드시 부작용을 낳습니다.전통과 안전을 지키는 합리적 기준이 필요합니다산불 앞에서 낙하산을 메고 뛰어내리는 이들의 이야기는 결국 한 사회가 안전과 질서를 어떻게 지켜 낼 것인가에 관한 질문으로 귀결됩니다. 무분별한 감정적 감축도, 무비판적인 조직 존속도 답이 될 수 없습니다. 오랜 세월 검증되어 온 경험과 질서의 가치를 존중하면서도, 시대 변화에 걸맞은 합리적 기준으로 공공서비스를 재정비하는 균형 잡힌 개혁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방향입니다. 시니어 세대의 경험을 사회적 자산으로 존중하는 문화가 뿌리내릴 때, 우리 사회의 안전망 역시 더욱 굳건해질 것입니다.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10. 473

    [아침마다 지혜 #470] 75세에 다시 피어난 붓끝, 침묵이 그려낸 세계

    말을 잃은 손이 세상과 나눈 대화뉴질랜드 출신의 화가 수잔 테 카후랑기 킹(Susan Te Kahurangi King)은 올해 일흔다섯을 맞은 시니어 예술가입니다. 그녀는 세 살 무렵 갑자기 언어를 잃고 자폐 스펙트럼(Autism Spectrum) 특유의 세계 속으로 침잠했지만, 연필을 쥔 손끝만큼은 어린 시절부터 남달랐습니다.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MoMA)과 필라델피아 미술관이 그녀의 드로잉을 영구 소장품으로 등재했고, 뉴욕의 저명한 미술평론가는 그녀를 20세기 거장 빌럼 데 쿠닝(Willem de Kooning)에 견주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정작 고국 뉴질랜드에서조차 그녀를 아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최근 미국 시사주간지 뉴요커(The New Yorker, 2026년 9월 7일 자)가 그녀의 삶을 심층 보도하면서, 한 시니어의 늦은 재능이 세상에 다시 드러나기까지의 과정이 새삼 주목받고 있습니다. 마흔 살의 절필, 그리고 열여섯 해의 침묵킹은 1950년대부터 30여 년간 쉼 없이 그림을 그렸으나, 마흔 살 무렵 돌연 붓을 놓았습니다. 가족의 증언에 따르면 이후 16년 동안 그녀는 거실에 앉아 텔레비전만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1973년, 지적장애 아동을 돕기 위한 한 자선 전시에 그녀의 드로잉 두 점이 출품되어 단 3파운드(현재 환율 기준 약 5,900원, 2026년 9월 5일 서울 외환시장 기준)에 팔린 적도 있었습니다. 그녀의 재능이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하던 시절의 단면입니다. 그러다 2008년, 가족들이 다시 그림 도구를 손에 쥐여준 것을 계기로 창작이 재개되었고, 이듬해 58세의 나이로 생애 첫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이후 그녀는 한 점당 수천 달러에 이르는 수표를 받는 작가로 거듭났습니다. 2013년 파리에서 열린 아웃사이더 아트 페어(Outsider Art Fair)에서는 출품작 전량이 팔려나가는 성과도 거두었습니다.가족이 지켜낸 70년의 기록킹의 재기를 가능케 한 것은 다름 아닌 가족의 헌신이었습니다. 그녀의 외조모는 손녀가 말 대신 그림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챈 인물이었고, 어머니는 평생 딸의 상태를 세세히 기록했습니다. 여동생은 지난 20년간 언니가 남긴 약 2만 장의 드로잉을 손수 정리하고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해 왔습니다. 반면 1965년 정신과 병동에 입원했을 당시에는, 스스로 의사를 말로 표현하도록 유도한다는 명분 아래 목욕과 식사는 물론 그림 도구까지 박탈당하는 시련을 겪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녀를 지켜낸 것은 제도가 아니라 가족의 곁이었다는 사실이 이 보도의 핵심입니다.아웃사이더라는 이름의 두 얼굴미술계는 킹과 같이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이들의 작품을 아웃사이더 아트(Outsider Art)라 부릅니다. 이는 1940년대 프랑스 작가 장 뒤뷔페(Jean Dubuffet)가 창안한 아르 브뤼(art brut, 가공되지 않은 예술)라는 개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나 큐레이터들 사이에서조차 이 명칭이 예술 그 자체가 아니라 제작자의 사회적 지위만을 지칭한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됩니다. 킹을 대변하는 갤러리스트 역시 그녀의 신경다양성(Neurodiversity)이 작품 평가의 본질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재능은 재능 그 자체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이 원칙은, 시니어의 능력을 나이나 질환이라는 틀로만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우리 사회의 과제와도 맞닿아 있습니다.한국 역시 초고령사회 진입을 앞두고, 시니어와 발달장애를 지닌 가족 구성원을 어떻게 돌볼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킹의 사례는 국가·시설의 역할과 가족의 역할이 상호 보완적이어야 함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지원(Fördern)이라는 이름 아래 제도가 개입하더라도, 그 방식이 인격을 무시한 획일적 통제로 흐를 경우 오히려 당사자를 해칠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사례가 증언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부담을 가족의 헌신에만 지우는 것 또한 지속 가능하지 않습니다. 결국 필요한 것은 가족의 곁을 국가가 합리적으로 뒷받침하는 기준, 즉 요구(Fordern)와 지원의 균형입니다. 전통적인 가족 질서를 존중하되, 그것이 무너지지 않도록 합리적인 사회적 안전망이 함께 작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늦게 핀 꽃이 전하는 메시지킹의 이야기는 나이가 들어서도 인생의 절정이 다시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그녀는 58세에 첫 전시를 열었고, 64세에 정식 진단을 받았으며, 지금 75세에도 세계 유수의 갤러리에서 신작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는 시니어를 은퇴 이후 소진된 존재가 아니라, 여전히 성장하고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사회적 자산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시각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전통적인 가족의 유대와 합리적인 사회적 지원이 함께할 때, 시니어의 잠재력은 나이와 무관하게 다시 꽃필 수 있다는 사실을 이 노년의 화가는 붓으로, 그리고 침묵으로 웅변하고 있습니다.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11. 472

    [아침마다 지혜 #469] 79세, 범고래와 그루브를 타다

    79세 사운드 아티스트가 들려준 범고래와의 13년 협연, '평생 현역'을 증명하다지난 8월 어느 저녁, 미국 뉴욕 로어 이스트 사이드의 한 호텔 옥상에는 200여 명의 문화 애호가가 모여들었습니다. 이들이 모인 이유는 새 음반 '범고래의 최대 히트곡(Orcas' Greatest Hits)'의 발매를 축하하고, 그 음반을 만든 79세의 사운드 아티스트 짐 놀먼(Jim Nollman)의 오랜만의 뉴욕 방문을 환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백발에 흰 수염을 기른 그는 범고래가 그려진 티셔츠 차림으로 행사에 등장해 함께 소리를 나눈 범고래들에게 먼저 고마움을 전했다고 합니다. 이날 발매된 음반에는 놀먼과 동료들이 수중 마이크와 신중하게 배치한 보트를 이용해 야생 범고래와 즉흥 합주를 펼친 13년간의 기록이 담겨 있습니다.놀먼의 이력은 결코 평범하지 않습니다. 매사추세츠에서 성장해 터프츠 대학교(Tufts University)에 다니던 시절부터 실험적 무대 연출에 관심을 보였던 그는, 이후 멕시코 치아파스에서 점토 피리로 이웃집 칠면조를 울게 하거나, 샌프란시스코 인근 농장에서 300마리의 칠면조와 함께 민요를 녹음하는 등 수십 년에 걸쳐 다양한 동물과의 음악적 교감을 시도해 왔습니다. 이후 그의 실험은 캥거루쥐와 늑대를 거쳐 하와이의 돌고래로 확장되었으나, 정작 바다에서 돌고래의 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해 좌절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대중과 후원자들의 관심은 계속 이어졌고, 그는 마침내 직접 큰 배 위에 세계 최초의 수중 녹음 스튜디오를 만들어 냈습니다.주목할 점은 이 도전이 어떤 거대한 제도적 지원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가 '오르카난다(Orcananda)'라 이름 붙인 이 작은 만의 스튜디오는, 범고래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그들이 스스로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는 방식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전기기타 연주로 범고래의 호기심을 유도하고, 노래가 시작될 때만 녹음 버튼을 눌렀다는 그의 방식에는 카디시(유대교 기도문)를 읊는 한 시니어부터 티베트 라마승, 신시사이저 연주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들이 동참했습니다. 놀먼은 범고래가 인간의 기교보다 강한 리듬, 즉 그루브(groove)에 반응한다는 점을 일찍이 깨달았다고 전해집니다. 실제로 제임스 브라운 풍의 리프를 연주하자 범고래 무리가 함께 춤을 추듯 반응했고, 인도 음악 양식인 라가(raga)를 바탕으로 47마리의 범고래 한가운데서 즉흥 연주를 펼친 사례, 12마디 블루스 진행에서 범고래가 코드 변화를 함께 만들어 낸 사례 등은 그의 예술적 통찰을 뒷받침하는 구체적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이렇게 13년간 쌓인 약 60시간 분량의 테이프는 오랫동안 창고에 잠들어 있다가, 최근 미국의 저명한 음반 아카이브인 스미소니언 포크웨이스(Smithsonian Folkways)와 연이 닿으면서 비로소 정식 음반으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날 행사에서는 곤충과 혹등고래의 소리와도 협연해 온 재즈 음악가 데이비드 로텐버그(David Rothenberg)가 향유고래와 혹등고래의 녹음에 맞춰 클라리넷을 연주하며 무대의 마지막을 장식했다고 합니다.이 일화가 시니어 독자에게 시사하는 바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79세라는 나이는 흔히 은퇴 이후의 정적인 삶을 떠올리게 하지만, 놀먼의 사례는 오랜 세월 축적된 경험과 전문성이 새로운 도전의 밑거름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더욱 눈여겨볼 대목은, 그가 먼저 제도적 지원을 요구하기보다 스스로 도구를 만들고 방법을 개척한 뒤에야 비로소 스미소니언과 같은 권위 있는 기관의 인정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이는 무조건적인 지원이 아니라 개인의 자발적 노력과 검증된 성과에 상응하는 합리적 지원이 뒤따라야 한다는 원칙을 다시금 확인시켜 줍니다.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우리 사회에서도 시니어를 복지의 수동적 수혜자로만 바라보는 시선에서 벗어나, 오랜 경험과 축적된 통찰을 지닌 사회적 자산으로 재평가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재평가가 막연한 이상화에 그치지 않으려면, 개인의 자립적 도전 정신을 존중하는 전통적 가치와 더불어 객관적 성과에 기반한 합리적 지원 기준이 함께 자리 잡아야 할 것입니다. 평생을 실험과 도전으로 채운 한 시니어 예술가의 이야기는, 나이가 창조와 기여의 한계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12. 471

    [아침마다 지혜 #468] 학교 안 스마트폰, 금지가 답인가

    스위스 취리히주 의회, 찬성 92 반대 82로 개인기기 전면 금지 가결스위스 취리히주에서 날아온 소식 한 토막이 교육 현장의 오래된 질문을 다시 소환했습니다. 아이들 손에서 스마트폰을 떼어놓는 일이 과연 국가가 나설 사안인가, 아니면 가정과 학교의 자율에 맡길 문제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손주 세대의 학습과 정서 건강을 지켜보아 온 시니어 독자라면 결코 낯설지 않은 고민일 것입니다.지난 9월 1일 자 스위스 유력지 노이에취르허차이퉁(Neue Zürcher Zeitung, NZZ) 보도에 따르면, 취리히주 의회는 우파 정당인 스위스 국민당(Schweizerische Volkspartei, SVP)이 발의한 학교 내 개인 디지털기기 사용 전면 금지 포스툴라트(Postulat, 주 정부에 정책 검토를 요구하는 구속력 있는 건의안)를 찬성 92표, 반대 82표로 가결했습니다. 이 규정은 유치원부터 9학년, 우리로 치면 중학교 과정까지의 학생들에게 적용되며, 수업 시간은 물론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 방과 후 돌봄 교실을 포함한 학교 전 구역에서 스마트폰과 태블릿, 노트북 등 개인 소유 기기 사용을 금지합니다. 다만 교사가 수업 목적으로 명시적으로 활용하도록 지시한 기기는 예외로 인정됩니다.찬성 진영을 이끈 SVP 의원단 대표 토비아스 바이드만(Tobias Weidmann)은 미국의 관련 연구를 근거로 스마트폰 과다 노출이 우울감과 수면 부족, 비만 등 청소년 건강 문제와 연관된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그는 학교 안에서만이라도 모든 아이에게 이른바 디지털 휴식을 보장해야 한다며, 학습 환경에 대한 책임은 결국 정치의 몫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실제로 아르가우, 발레, 바젤슈타트, 니트발덴 등 스위스의 다른 여러 주는 이미 유사한 금지 조치를 시행하고 있어, 이번 결정이 고립된 사례는 아닙니다.반면 반대 진영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대안진보당(Alternative Liste, AL) 소속 다비드 가르시아 누녜스(David Garcia Nuñez) 의원은 이번 조치를 온정주의적(paternalistisch) 발상이라 비판하며,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일률적 금지가 아니라 스스로 절제하고 활용할 줄 아는 디지털 역량(Digitalkompetenz)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많은 학교가 이미 자체 규정으로 문제를 관리하고 있는 만큼 주 차원의 획일적 통제는 불필요하며, 진짜 규제 대상은 학생이 아니라 거대 플랫폼이어야 한다는 논리였습니다. 자유민주당(FDP)과 녹색자유당(GLP), 복음국민당(EVP) 역시 대체로 이 입장에 동조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사회민주당(SP)과 녹색당(Grüne)은 당론이 갈렸는데, SP는 명확한 규칙이 모두의 부담을 덜어준다며 찬성한 반면 녹색당은 학교 자율성 침해를 우려하며 반대했습니다.이번 논쟁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SVP 소속 마르쿠스 보프(Markus Bopp) 의원의 발언입니다. 그는 이 사안이 전통적인 좌우 진영 논리를 벗어난다는 점을 정확히 짚어내며, 학교에서 술과 담배를 금지하듯 중독성 높은 스마트폰 역시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쉬는 시간에 화면 대신 탁구와 축구를 즐기는 아이들이 늘고 있다는 사례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학교가 최근 다시 아날로그적 접근으로 돌아서고 있다는 사례도 함께 언급되었습니다.표결 이후 실비아 슈타이너(Silvia Steiner) 취리히주 교육장관은 이 건의안을 검토해 보고서를 작성하겠다고 밝히면서도, 스마트폰 문제의 일차적 책임은 어디까지나 학부모에게 있다는 원칙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 발언은 이번 논쟁의 균형점을 시사합니다. 국가와 학교가 최소한의 울타리를 세우되, 가정의 교육적 책임을 대체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이 사안이 한국 사회에 던지는 시사점은 작지 않습니다. 국내에서도 학교별로 스마트폰 소지 및 사용에 관한 자율 규정을 운영하고 있으나, 지역과 학교마다 기준이 제각각이어서 혼선이 빚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시니어 세대는 활자와 대면 소통을 중심으로 집중력과 절제를 체득해 온 경험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손주 세대에게 옛 시절의 향수가 아니라, 화면에 잠식된 학습 환경을 되돌아보게 하는 실질적 자산이 될 수 있습니다. 세대 간 갈등의 구도가 아니라, 시니어의 축적된 지혜와 학부모 세대의 실천이 맞물릴 때 비로소 실효성 있는 대안이 마련될 것입니다.결론적으로 이번 취리히주의 결정은 규제 만능주의로 단정 짓기 어렵습니다. 수업 목적 기기는 예외로 두고, 궁극적 책임은 가정에 두는 균형 잡힌 설계이기 때문입니다. 학교라는 공간이 최소한의 절제와 집중이라는 전통적 가치를 지켜내야 한다는 원칙은 존중받아 마땅하되, 그 실행은 획일적 금지가 아니라 합리적 예외와 부모의 책임을 함께 아우르는 방향이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 역시 감정적 찬반이 아닌, 이러한 균형 잡힌 기준 마련에 나서야 할 때입니다.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13. 470

    [아침마다 지혜 #467] "기억이 사라지기 전 존엄을 지킬 수 있는가"

    독일의 최신 소설이 던지는 질문최근 독일 문단에서 고령화 시대의 가장 예민한 화두인 치매와 삶의 마지막 순간을 정면으로 다룬 소설 한 편이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 작품이 시니어 세대에게 던지는 질문은 결코 낯설지 않습니다. 기억이 흐려지고 자아가 조금씩 흩어지는 순간에도, 인간은 여전히 존엄을 지킬 수 있는가 하는 물음입니다.독일의 유력 일간지 쥐트도이체 차이퉁(Süddeutsche Zeitung)은 지난 9월 2일자 문화면에서 미국 작가 엠마 클라인(Emma Cline)의 세 번째 장편소설 《스위스로(In die Schweiz)》를 비중 있게 조명했습니다. 니콜라스 프로인트(Nicolas Freund) 기자가 집필한 이 서평은 소설을 "끔찍하도록 아름답다"는 표현으로 극찬하며 마무리됩니다. 소설의 주인공 데이비드는 중증 치매를 앓고 있는 고령의 남성으로, 조수와 함께 런던을 거쳐 스위스 취리히로 향합니다.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본인의 의사에 따라 조직적으로 시행되는 조력사(Sterbehilfe), 즉 존엄사의 일종인 스스로의 삶을 마감하는 절차입니다. 병이 자신의 정신을 완전히 앗아가기 전, 그는 런던의 딸과 손자를 마지막으로 만나고, 오래전 소원해진 학창 시절 친구를 찾아가 사과하려 합니다.이 작품이 특히 주목받는 이유는 소재 자체보다 서술 방식에 있습니다. 올해 37세의 젊은 작가인 클라인은 자신보다 나이가 두 배 이상 많고 인지 기능이 쇠퇴해가는 인물의 내면을 3인칭 시점으로 형상화했습니다. 소설은 짧은 문단과 파편화된 장면들로 구성되어, 독자 스스로가 주인공처럼 기억의 공백과 혼란을 함께 체험하도록 이끕니다. 평론가들은 이러한 서술 기법이 치매를 앓는 이의 의식 세계를 관음증적 시선 없이, 그러나 어떠한 미화도 없이 담아낸 드문 문학적 성취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작품은 영미권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부커상 후보 목록에도 이름을 올렸습니다.이러한 흐름은 한국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2016년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 이른바 연명의료결정법을 제정하여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할 권리를 제도적으로 보장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스위스를 비롯한 일부 유럽 국가처럼 본인의 의사에 따라 적극적으로 삶을 마감하는 조력사까지 허용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사회적 합의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국내 65세 이상 치매 환자 수는 이미 상당한 규모에 이른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정확한 최신 통계는 별도 확인이 필요합니다), 초고령사회 진입을 앞둔 우리 사회가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임은 분명해 보입니다.다만 본지는 이 문제를 단순히 개인의 선택권 확대라는 관점만으로 바라보는 데는 신중해야 한다고 봅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는 존중받아 마땅하나, 그 결정이 온전히 자유로운 것이 되려면 무엇보다 가족과 공동체의 돌봄, 그리고 국가의 촘촘한 사회안전망이 먼저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돌봄의 부담이나 경제적 곤궁이 죽음을 앞당기는 선택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성숙한 사회의 책무일 것입니다. 소설 속 데이비드가 삶을 정리하기에 앞서 딸과 옛 친구를 마지막으로 찾아가듯, 존엄한 마무리의 출발점은 제도의 확대에 앞서 관계의 회복과 곁을 지키는 이들의 존재에 있음을 이 작품은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기억이 흐려지는 순간에도 인간의 존엄은 지켜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 존엄을 지키는 길이 삶을 끝내는 제도의 확대에만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전통적인 가족 공동체의 가치와 촘촘한 돌봄 체계 안에서 그 답을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할 때입니다.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14. 469

    [아침마다 지혜 #466]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 "도움을 청하는 용기"

    자수성가 신화, 다시 짚어볼 때가 되었습니다 홀로 역경을 이겨내고 정상에 오른 인물의 서사는 예나 지금이나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혼자 힘으로 일어섰다"는 표현은 성공한 인물을 수식하는 가장 흔한 찬사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최근 미국 학계의 연구는 이러한 통념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독자적인 능력만으로 성과를 완성한 사람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며, 뛰어난 성취 뒤에는 예외 없이 촘촘한 조력의 관계망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더크워스 교수가 밝힌 고성과자의 공통 습관심리학자이자 저술가인 앤절라 더크워스(Angela Duckworth)는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 기고를 통해 이 같은 연구 결과를 소개했습니다. 그녀에 따르면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고성과자들은 자신의 성취를 스스로의 재능이나 노력만으로 돌리지 않고, 곁에서 힘을 보탠 조력자들에게 공을 돌리는 공통된 태도를 보였습니다. 아울러 이들은 필요한 순간 주저 없이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습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겸손의 표현이 아니라, 목표 달성을 위한 실질적이고 전략적인 행동 양식이라는 것이 더크워스 교수의 분석입니다.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구하는 행위를 자신의 약점이나 능력 부족의 증거로 여기고 이를 꺼립니다. 그러나 연구 결과는 정반대의 결론을 보여줍니다. 적절한 시점에 정확히 필요한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고도의 자기 인식과 전략적 판단력을 요구하는 역량이며, 오히려 성취를 가늠하는 핵심 지표로 작동한다는 것입니다.도움 요청을 가로막는 심리적 장벽그렇다면 왜 많은 이들이 도움을 청하기를 주저하는 것일까요.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을 곧 실패로 받아들이는 심리적 저항에 있습니다. 그러나 더크워스 교수가 관찰한 고성과자들은 이와 정반대의 자세를 취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면서도 이를 부끄러움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고, 주변 전문가와 동료의 경험과 지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습니다. 이러한 겸손하면서도 능동적인 태도는 개인의 역량을 여러 방향으로 확장시키는 동력이 되었으며,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고 더 높은 목표에 다다르게 하는 실질적인 자산이 되었습니다.이러한 연구 결과는 우리 시니어 사회에도 적지 않은 시사점을 던집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오랜 세월 "자식이나 이웃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겨온 문화적 전통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는 스스로를 다스리는 절제와 책임의 정신으로서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가치입니다. 그러나 그 정신이 지나쳐 은퇴 이후의 새로운 도전이나 재취업, 사회 참여의 문턱에서조차 도움을 청하기를 꺼리는 태도로 이어진다면, 이는 오히려 시니어 세대가 보유한 경험과 지혜가 사회 속에서 온전히 발휘되는 길을 스스로 가로막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시니어 세대에게 필요한 것은 무분별한 의존이 아니라, 공식적이고 검증된 채널을 통한 합리적인 도움 요청입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중장년 재취업 지원 기관, 평생학습 프로그램, 그리고 동년배 간의 재능 나눔과 멘토링 네트워크는 바로 이러한 목적을 위해 마련된 제도적 장치입니다.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결코 자존심을 굽히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남은 가능성을 온전히 실현하기 위한 지혜로운 선택이라 할 수 있습니다.전통의 자립 정신과 합리적 도움 요청의 균형물론 도움을 청하는 태도가 모든 상황에서 무조건 미덕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까지 습관적으로 타인에게 의탁하는 것은 개인의 존엄과 사회의 건강한 질서를 동시에 훼손할 위험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립의 정신을 굳건히 지키되, 자신의 한계를 냉정하게 인식하고 필요한 순간에는 검증된 통로를 통해 도움을 구하는 균형 감각입니다. 전통적으로 이어져 온 책임과 절제의 가치와, 시대가 요구하는 합리적이고 전략적인 협력의 자세가 조화를 이룰 때, 우리 시니어 세대는 비로소 후반생의 무대에서 더욱 당당한 주체로 설 수 있을 것입니다.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15. 468

    [아침마다 지혜 #465] 성장하는 중소기업, 인재 갈증에 시달리다

    정작 인재가 없다 — 대졸 청년을 애타게 찾는 중소기업들의 역설인공지능(AI) 기술의 확산과 경기 둔화로 청년 취업난이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산업 현장에서는 정반대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빠르게 성장하는 중소기업들이 정작 필요한 대졸 신입 인재를 구하지 못해 사업 확장에 발목이 잡히고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 영국 유력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Financial Times)가 보도한 내용은 이러한 역설적 현실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습니다.영국의 히트펌프 설치 전문 중소기업 히트 기크(Heat Geek)는 올여름에만 여덟 개 직무를 새로 열어 전체 인력을 25퍼센트 이상 늘릴 계획입니다. 그러나 운영, 엔지니어링, 마케팅 등 신입 직무에 곧바로 투입할 수 있는 야심 찬 대졸 인재를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회사 측은 이러한 인재들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토로했습니다.통계가 보여주는 역설영국 통계청(ONS)에 따르면 올여름 구인 공고는 지속적으로 감소했으며, 특히 소규모 기업과 청년층이 선호하는 업종에서 감소폭이 두드러졌습니다. 학생고용주협회(ISE) 조사에서는 구인 직무가 8퍼센트 줄어들면서 대졸 신입직 한 자리를 두고 평균 140명이 경쟁하는 역대 최고 수준의 경쟁률이 나타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대학협회(Universities UK)가 지난 6월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는 구인 중인 고용주의 절반이 대졸 신입 직무를 채우지 못하고 있다고 답해, 전체 직급 가운데 가장 높은 미충원율을 기록했습니다. 국립대학기업센터(NCUB)가 정부 통계를 분석한 자료 역시, 소기업이 대기업보다 채용 규모를 더 빠르게 줄였음에도 특정 역량을 갖춘 인력을 구하지 못해 채우지 못하는 이른바 기술 부족 구인의 비율이 신입급에서 여전히 높다는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왜 중소기업은 인재를 놓치는가업계 관계자들은 그 원인을 여러 갈래로 짚고 있습니다. 첫째, 대학 취업지원 프로그램이 대기업 위주로 운영되면서, 채용 박람회나 홍보 자리에서 중소기업이 소외되는 이른바 인지도 격차가 존재합니다. 둘째, 제조업 등 일부 업종에 대해 청년들이 과거의 부정적 이미지, 즉 열악한 근무 환경과 낮은 보수를 떠올리는 편견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업계 단체 메이크 UK(Make UK)는 제조업 구인 직무 약 5만 개 가운데 3분의 1 이상이 이러한 이유로 채워지지 못하고 있다고 추산합니다. 셋째, 대기업과 달리 체계적인 신입 교육 프로그램을 갖추기 어려운 중소기업의 현실도 걸림돌로 작용합니다. 넷째, 채용 광고와 헤드헌팅에 드는 비용 부담 역시 인력난에 허덕이는 성장기업에는 만만치 않은 부담입니다.극복한 기업들의 공통점반면 이러한 난관을 극복한 사례도 있습니다. 알루미늄 주조업체 그레인저 앤 워럴(Grainger & Worrall)은 대도시가 아닌 지역 출신 대졸자에게 눈을 돌려 채용 방식을 전환한 결과, 최근 채용에서 목표보다 많은 인재를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의료기기 제조업체 유로플라즈(Europlaz) 역시 대학과 직접 접촉하며 적극적으로 인재를 발굴한 끝에 우수한 신입 사원들을 채용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 기업의 공통점은 유연 근무, 빠른 직무 성장 기회, 최고경영자(CEO)와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수평적 조직문화 등 대기업과는 다른 강점을 적극적으로 내세웠다는 점입니다.한국 중소기업에 주는 시사점이러한 현상은 결코 영국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한국 역시 청년 취업난과 중소기업 구인난이 동시에 존재하는 구조적 모순을 오랫동안 안고 있습니다. 대기업과 공공부문 쏠림 현상, 중소기업에 대한 낮은 인지도와 처우 격차, 지역 소재 기업에 대한 기피 현상 등은 영국의 사례와 상당 부분 겹칩니다. 여기서 시니어 세대의 역할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수십 년간 산업 현장에서 조직을 운영하고 신입 인력을 길러낸 경험을 가진 시니어들은, 체계적인 온보딩 프로그램을 갖추기 어려운 중소기업에 실질적인 멘토링과 자문을 제공할 수 있는 자산입니다. 시니어를 단순한 재취업 대상이 아니라, 중소기업과 청년 인재를 잇는 가교로 활용하는 정책적 고민이 필요한 시점입니다.물론 이 문제를 기업의 노력만으로 풀 수는 없습니다. 정부와 지역사회가 중소기업의 채용 홍보를 지원하고, 대학이 대기업 편중 취업지원 구조를 개선하는 등 제도적 뒷받침이 병행되어야 합니다. 동시에 청년들에게도 성실함과 주도성이라는 기본적 직업윤리에 대한 요구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기업이 유연근무와 성장기회로 지원하고, 청년이 역량과 책임감으로 화답하는 균형이야말로 이 역설을 풀어가는 합리적 해법일 것입니다. 성실과 신뢰라는 전통적 가치를 지키면서도, 변화하는 노동시장의 합리적 기준을 함께 세워가는 지혜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합니다.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16. 467

    [아침마다 지혜 #464] 몸은 정밀기계가 아닙니다… '최적화' 강박을 넘어서

    최적화라는 이름의 유혹땀이 흥건한 요가원에서 강사가 나지막이 말합니다. "호흡을 최적화하십시오." 얼핏 자연스럽게 들리는 이 한마디는 사실 수천 년 전통을 지닌 요가 수련에 비교적 최근에 끼어든 낯선 손님입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inancial Times)에 실린 구루 마다반(Guru Madhavan)의 기고문은 바로 이 장면에서 출발해, 현대인이 자신의 몸을 하나의 정밀기계처럼 여기게 된 사고방식의 뿌리를 되짚습니다.운동량과 수면 시간, 섭취 칼로리를 숫자로 관리하고 웨어러블 기기로 심박과 혈당을 실시간으로 확인하는 일은 이제 낯설지 않습니다. 몸을 정교하게 조율하면 언제까지나 최상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믿음은, 건강과 노화에 대한 관심이 높은 시니어 세대를 겨냥한 각종 항노화 제품과 건강 정보의 홍수 속에서 더욱 힘을 얻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몸을 기계로 본 400년의 역사기고문에 따르면 이러한 발상의 뿌리는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영국의 의학자 윌리엄 하비(William Harvey)는 1628년 저서에서 심장을 펌프에, 혈액 순환을 하나의 순환 고리에 비유하며 신체를 기계로 이해하는 관점의 문을 열었습니다. 이어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는 동물의 몸을 자동인형(automata)에 견주었고,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의 역학 법칙은 뼈와 인대의 움직임조차 수학 공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발상에 힘을 실었습니다. 18세기 프랑스의 의사 라 메트리(Julien Offray de La Mettrie)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사고와 감정도 물질의 작용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으며, 20세기 초 프레더릭 테일러(Frederick Winslow Taylor)의 '과학적 관리법'은 공장 노동자의 생산성 관리 기법을 인간의 몸 전반으로 확장시켰습니다. 이 같은 환원주의적 접근은 인류에게 방대한 과학적 지식을 안겨주었지만, 동시에 상업적으로도 적지 않은 이익을 가져다주었기에 그 한계를 간과하는 경향을 낳았다고 기고문은 짚습니다.다만 기고문은 이러한 기계론적 은유가 막힌 동맥을 치료하거나 손상된 관절을 교체하는 것처럼 특정한 의료 상황에서는 유용할 수 있어도, 삶 전체를 이끄는 근본 원리로 삼기에는 위험하다고 지적합니다.진화의학의 선구자인 랜돌프 네스(Randolph Nesse)는 이러한 착각을 암묵적 창조론(tacit creationism)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우리 몸이 마치 정밀한 설계도에 따라 오차 없이 제작된 것처럼 여기지만, 실제로는 오랜 진화 과정에서 쌓인 '타협'의 산물이라는 뜻입니다. 후두로 가는 신경(recurrent laryngeal nerve)이 굳이 가슴까지 내려갔다가 대동맥을 돌아 다시 올라오는 비효율적인 경로를 갖게 된 것도, 시신경이 망막을 빠져나가는 자리에는 광수용체가 없어 이른바 맹점이 생기는 것도, 아기의 머리와 어깨가 좁은 산도를 지나야 하는 출산의 고통도 모두 그러한 진화적 타협의 흔적이라는 설명입니다. 장내 미생물군 유전체(마이크로바이옴) 역시 신경계·면역계와 긴밀히 신호를 주고받는데, 만성적인 스트레스가 이 신호 체계를 교란하면 가라앉아야 할 염증 반응이 오히려 길게 이어지는 사례도 몸이 지닌 복잡한 연결망의 한 단면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흥미로운 점은, 정작 요가 수련이 뿌리를 둔 고대 인도 철학(상키야 철학)은 몸과 마음이라는 물질적 영역과 이를 지켜보는 순수한 의식을 구분하며, 인간을 단순한 신체적 과정으로 환원하는 것에 오히려 저항해 왔다는 사실입니다. 결과를 향해 몸을 다그치기보다 관찰과 깨달음 그 자체를 소중히 여겨온 전통인 셈입니다.시니어에게 필요한 것은 균형입니다이러한 지적은 시니어 세대에게 특별한 울림을 줍니다. 나이가 들며 관절이 예전 같지 않고 각종 건강 지표가 젊은 시절과 달라졌다고 해서, 이를 곧바로 '고장'이나 '실패'로 단정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오랜 세월 함께해 온 몸이 지나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일 수 있습니다.일부 항노화 제품과 극단적인 건강관리법이 '젊음의 회복'과 '완벽한 최적화'를 앞세워 시니어 소비자를 파고드는 상황에서, 이러한 기계론적 환상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태도는 불필요한 불안과 과소비, 때로는 무리한 운동으로 인한 부상으로까지 이어질 위험이 있습니다.물론 현대 의학이 제공하는 정밀한 진단과 치료의 혜택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정기적인 건강검진과 전문의의 진료는 여전히 중요한 삶의 안전장치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모든 과정의 중심에는 숫자만으로는 환원할 수 없는, 오랜 경험과 삶의 지혜를 쌓아 온 시니어 자신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몸을 부품의 집합이 아닌 하나의 유기적 전체로 존중하는 태도, 그리고 완벽한 최적화보다 자신의 몸이 보내는 신호에 차분히 귀 기울이는 절제된 균형 감각이야말로, 오랜 세월 몸과 마음을 함께 다스려 온 시니어 세대가 오히려 젊은 세대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지혜일 것입니다.전통적으로 이어져 온 몸에 대한 겸허한 이해와 현대 의학이 제공하는 합리적인 도움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일, 그것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라 하겠습니다.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17. 466

    [아침마다 지혜 #463] 청년이 떠난 도시, 시니어만 남았다 — 베네수엘라가 보내는 경고

    2018년 이후 처음으로 조국 땅을 밟은 한 언론인이 있습니다. 스페인 일간지 엘파이스(El País)가 지난 8월 23일자 오피니언면에 실은 이 칼럼니스트의 카라카스 방문기는, 재난과 궁핍이 뒤섞인 나라의 풍경을 생생하게 전합니다. 그런데 그 풍경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무너진 건물도, 텅 빈 상점도 아니었습니다. 거리를 메운 얼굴 대부분이 백발의 시니어였다는 사실입니다. 청년이 떠난 자리를 시니어가 지키고 있는 나라, 베네수엘라의 오늘은 우리에게도 결코 남의 일만은 아닙니다.지진이 드러낸 나라의 민낯지난 6월 24일 저녁, 베네수엘라 서북부 해안 지역에서는 규모 7.2와 7.5의 지진이 30여 초 간격으로 잇달아 발생했습니다. 수도 카라카스와 인근 라구아이라(La Guaira) 일대가 특히 큰 피해를 입어 다수의 건물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국제 구호기구와 외신 집계에 따르면 8월 말 현재 사망자는 6,500명을 넘어선 것으로 파악되며, 참사 발생 두 달이 다 되도록 잔해 속에서 실종자를 찾는 수색 작업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칼럼니스트가 전한 라구아이라의 풍경은 참혹합니다. 해수욕장은 텅 비었고, 무너진 건물 주변에는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려는 주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합니다.재난은 이미 취약했던 일상 위에 겹쳐졌습니다. 수도 한복판에서조차 수돗물은 일주일에 두 번만 공급되고, 정전은 예고 없이 되풀이됩니다. 공식 통화는 볼리바르이지만 2019년 이후 사실상 달러 경제가 자리를 잡아, 상점 가격표는 대부분 달러로 매겨져 있습니다. 거스름돈으로 줄 동전이 없어 승객이 요금을 웃돈 채로 내는 대중교통 풍경도 이제는 낯설지 않은 일상이 되었습니다.인구 보너스를 삼켜버린 이주의 물결낡은 미니버스에 오른 칼럼니스트는 승객 대다수가 시니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습니다. 대중적인 술집에서도, 도심 거리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13년 동안 베네수엘라는 지도자의 사망과 권위주의 체제의 공고화, 초인플레이션, 대규모 난민 발생, 만성적 정전과 식량난을 차례로 겪어 왔습니다. 여기에 더해 올해 1월 3일에는 미국의 군사작전으로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 부부가 나포되어 국외로 이송되고, 델시 로드리게스 부통령이 임시 대통령직을 승계하는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 이 작전의 국제법적 정당성을 둘러싸고는 지지와 비판이 첨예하게 엇갈리고 있어, 논쟁은 당분간 계속될 전망입니다.이러한 연쇄적 위기 속에서 800만 명이 넘는 국민이, 그것도 대부분 청장년층이 해외로 떠났습니다. 그 결과 베네수엘라는 인구 배당(Demographic Dividend), 즉 두터운 생산연령인구가 경제 성장의 동력이 되는 인구 구조상의 이점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노동 연령대가 통째로 빠져나가면서, 아이들은 부모의 보살핌을 잃었고 시니어들은 곁을 지켜 줄 자녀를 잃었습니다. 빈부 격차 역시 극단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카라카스 일부 지역에서는 차이 라테 한 잔이 7달러(약 9,700원)에 팔리는 반면, 상당수 국민의 월수입은 최대 50달러(약 6만 9,000원)에 그친다고 칼럼니스트는 전합니다. (환율은 2026년 8월 하순 시장환율인 1달러=약 1,380원을 기준으로 환산하였습니다.)베네수엘라의 몰락은 전쟁에 가까운 정치적 격변과 극단적 실정에서 비롯되었으므로, 저출산이 근본 원인인 한국의 고령화와는 성격이 다르다는 지적은 타당합니다. 그러나 두 나라가 공유하는 본질은 같습니다. 생산연령인구가 어떤 이유로든 빠르게 줄어들면, 그 부담은 고스란히 남겨진 세대, 즉 어린이와 시니어에게 전가된다는 사실입니다. 베네수엘라는 그 가장 극단적인 사례를 보여줄 뿐입니다.한국 사회가 새겨야 할 지점은 분명합니다. 화폐 가치와 재정 건전성이 무너지면 연금과 의료보험 같은 사회안전망은 하루아침에 종잇조각이 될 수 있습니다. 정치적 안정과 법치, 그리고 절제된 재정 운용이야말로 시니어의 노후와 다음 세대의 미래를 동시에 지켜내는 최소한의 조건입니다. 세대 간 갈등을 부추기는 프레임 대신, 구조적 원인을 직시하고 제도를 미리 정비하는 지혜가 필요한 이유입니다.질서와 존엄을 지키는 힘그럼에도 칼럼니스트는 카라카스 사람들에게서 다정함과 존엄을 잃지 않으려는 안간힘을 발견합니다. 무너진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시니어들의 모습에서, 그는 완전히 무너지지 않으려는 공동체의 저력을 읽어냅니다. 이는 시니어가 단순한 돌봄의 대상이 아니라, 위기 속에서도 공동체의 존엄을 지탱하는 사회적 자산임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줍니다.베네수엘라의 비극이 한국에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전통적 질서와 가족 공동체의 가치를 지키려는 보수적 지혜와, 재정·제도적 지속가능성을 냉철하게 계산하는 합리적 기준이 함께 갈 때에만, 어떤 위기 속에서도 시니어와 다음 세대가 함께 존엄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18. 465

    [아침마다 지혜 #462] 눈높이를 낮추면 마음의 평정이 보인다

    요즘 서점가에는 성공과 행복을 약속하는 자기계발서가 넘쳐납니다. 그러나 정작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는 이야기는 좀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독일의 원로 철학자 오트프리트 회페(Otfried Höffe) 튀빙겐대 명예교수는 최근 독일 일간지 디 벨트(Die Welt)와의 인터뷰에서 바로 이 지점을 정면으로 짚었습니다. 그는 오늘날의 조언서들이 오히려 삶의 본질에서 시선을 딴 데로 돌리고 있다고 진단하며, 참된 마음의 평정(Gelassenheit)에 이르는 길은 화려한 성공 공식이 아니라 세네카와 에피쿠로스 같은 고전 철학자들의 소박한 지혜에 있다고 말했습니다.회페 교수가 새 저서를 통해 재조명한 것은 유럽의 도덕주의자(Moralist) 전통입니다. 오늘날 이 단어는 흔히 타인에게 손가락질하며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을 연상시키지만, 그가 말하는 도덕주의자는 이와 정반대입니다. 세네카, 에피쿠로스, 라 로슈푸코, 파스칼, 니체로 이어지는 이 지적 전통은 인간의 실제 모습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겉으로 내세운 미덕 뒤에 숨은 동기까지 냉철하게 들여다본 사상가들이었습니다. 이들의 공통된 무기는 오랜 경험에서 우러난 처세의 지혜(Weltklugheit)와, 장황하지 않고 간결한 문장이었습니다.회페 교수는 이를 오늘날의 처세서들과 뚜렷이 대비시킵니다. 현대의 자기계발서가 평범한 언어로 장황하게 조언을 늘어놓는 데 비해, 옛 도덕주의자들은 짧고 날카로운 경구로 세월이 흘러도 곱씹을 만한 지혜를 남겼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가 짧은 글을 선호하는 오늘날의 SNS를 반긴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이를 소화할 시간조차 갖지 못하는 현대인의 처지를 우려하며, 어린 시절부터 인터넷에 지나치게 노출될 경우 스스로 사고하고 호흡하는 능력을 잃을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물질과 쾌락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그의 통찰은 이어집니다. 그는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가 자주 오해받아 왔다고 말하며,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일찍이 쾌락 그 자체를 인생의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음을 상기시켰습니다. 정작 에피쿠로스가 말한 좋은 삶의 조건은 작은 정원과 소박한 먹거리, 그리고 몇몇 좋은 벗이 전부였다는 것입니다. 회페 교수는 이 이치가 오늘날에도 다르지 않다고 강조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이도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즉 자신과 세계에 대한 신뢰와 안도감은 가난한 가정에서도 얼마든지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해외여행에 대한 통념에도 그는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낯선 여행지의 언어나 역사를 진지하게 익히는 이가 실제로 얼마나 되는지 되물으며, 평생 고향 쾨니히스베르크를 떠나지 않고도 학술 서적과 여행자들의 기록, 방문객과의 대화만으로 세계를 이해했던 이마누엘 칸트를 진정한 세계인의 모범으로 제시했습니다. 자원과 소비가 곧 성장이자 미덕으로 여겨지는 오늘의 소비사회에 던지는 무거운 질문이라 할 만합니다.삶의 본질을 이야기하며 그는 죽음의 문제도 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프랑스 사상가 몽테뉴가 늘 떠날 채비를 갖추고 살라고 조언했던 대목을 인용하며, 기대수명이 늘고 의학이 발전했다고 해서 삶의 한가운데에 이미 죽음이 자리하고 있다는 오랜 통찰을 낡은 것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건강하던 지인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는 일을 우리는 이미 여러 차례 겪지 않았습니까. 장례를 치른 뒤 가족과 지인들이 한데 모여 음식을 나누며 슬픔 속에서도 서서히 다시 웃음을 되찾는 독일의 오랜 관습 역시, 상실 이후에도 삶은 계속된다는 인간적인 진리를 보여준다고 그는 덧붙였습니다.이러한 회페 교수의 통찰은 우리 시니어 세대의 삶의 경험과 맞닿아 있는 대목이 적지 않습니다. 물질적으로 넉넉하지 않던 시절을 통과해 온 시니어 세대는 소박한 살림 속에서도 가족과 우정, 신의를 지켜온 경험을 몸소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회페 교수가 강조한 처세의 지혜, 즉 온갖 역경 속에서도 마음의 중심을 잃지 않는 능력과 다르지 않습니다. SNS를 통해 끊임없이 타인의 성취와 소비를 확인하며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는 젊은 세대에게, 오히려 시니어 세대의 이러한 삶의 태도는 배움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다만 회페 교수의 조언을 성장과 소비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합니다. 그가 말한 절제는 자기를 억누르는 금욕이 아니라,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에 집중하기 위한 합리적 기준을 세우자는 취지에 가깝습니다. 가족의 결속과 벗과의 신의를 지키고,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하루하루를 정직하게 살아가는 태도. 이것이야말로 시대와 국경을 넘어 시니어 세대가 다음 세대에 전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유산이 아닐까 합니다. 눈높이를 낮추되 삶의 본질만은 놓치지 않는 것, 그것이 오늘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처세의 지혜일 것입니다.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19. 464

    [아침마다 지혜 #461] 위기의 학교를 되살린 베를린 교육자의 해법

    흔들리는 교실, 사라진 기준최근 여러 나라에서 학교 현장의 혼란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교권은 흔들리고, 다문화·이민 배경을 지닌 학생의 비율은 꾸준히 늘어나며, 교사와 학생, 학교와 지역사회 사이의 신뢰는 예전 같지 않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른들은 흔히 두 갈래 길에 놓이게 됩니다. 하나는 문제를 외면하거나 소극적으로만 대응하는 방임이며, 다른 하나는 학생의 처지를 지나치게 동정한 나머지 원칙 없이 감싸기만 하는 온정주의입니다. 이 두 가지 태도 모두 청소년의 성장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최근 독일 베를린에서 다시 한번 확인되었습니다.방임과 구원자 증후군 사이독일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FAZ)이 지난 8월 24일자(하이케 슈몰 기자, 베를린) 지면에서 소개한 바에 따르면, 베를린의 교육자 엔긴 차틱(Engin Çatık)은 폭력과 저성취로 악명 높던 위기 지역 학교 두 곳을 짧은 기간 안에 안정시킨 인물입니다. 그는 터키계 손님노동자(Gastarbeiter, 1960년대 노동력 부족을 겪던 독일이 협정을 통해 받아들인 외국인 노동자를 이르는 말) 가정의 후손으로, 부친이 도박으로 가정을 파탄시키고 끝내 장기간 수감되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홀로 네 자녀를 키워낸 어머니, 그리고 그를 믿어준 교사와 축구 감독들 덕분에 그는 어려운 환경을 딛고 교육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전해집니다.교장으로 부임한 차틱은 매일 아침 교문에 서서 모든 학생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고 이름을 기억하며 지각과 복장을 점검했습니다. 동시에 그는 쉬는 시간에 벌어지는 이른바 '목덜미 때리기' 같은 사소해 보이는 장난이 실은 서열 다툼과 맞닿아 있음을 놓치지 않고 지적했습니다. 그가 시종일관 경계한 것은 두 가지, 즉 학생을 방치하는 무관심과, 학생의 처지에 지나치게 몰입한 나머지 원칙 없이 감싸는 이른바 '구원자 증후군(Helfersyndrom)'이었습니다. 그는 설령 베를린 학생의 70퍼센트가 최소 학업 기준에 미달하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해당 보도에 인용된 발언으로 공식 통계와는 별도의 확인이 필요한 수치임을 밝혀 둡니다.방임과 과보호, 두 극단의 함정차틱의 사례가 시사하는 구조적 원인은 비교적 명확합니다. 청소년에게 명확한 한계와 기대치를 제시하지 않으면 소속감과 자기 존중감을 기를 기회를 잃습니다. 반대로 잘못된 행동조차 문제 삼지 않고 무조건 감싸기만 하면, 학생은 스스로 자신의 처지를 극복해 낼 동기를 갖지 못합니다. 특히 이민자·소수자 가정의 청소년일수록, 자신을 믿어주면서도 잘못은 분명히 지적해 주는 어른을 만난 경험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훗날 극단주의 단체에 포섭될 위험도 달라진다는 것이 해당 보도의 핵심 진단입니다.다만 이러한 변화가 한 개인의 헌신만으로 지속되기는 어렵습니다. 차틱 자신도 정서적 소진을 겪은 뒤 코칭의 도움을 받았으며, 이후 개별 학교를 넘어 교원 행정 기관으로 자리를 옮겨 교사들이 소진되지 않도록 뒷받침하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결국 애정과 훈육은 대립하는 가치가 아니라, 제도적 지원 위에서 함께 작동해야 하는 두 축이라는 것입니다.한국 사회에 던지는 질문이러한 진단은 한국 사회에도 결코 낯설지 않습니다. 학교 폭력과 교권 침해 논란이 반복되고 다문화 가정 자녀 수가 꾸준히 늘어나는 가운데, 우리 사회 역시 원칙 없는 관용과 애정 없는 통제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시니어 세대의 역할이 새롭게 조명될 수 있습니다.오랜 사회생활과 자녀 양육의 경험을 축적한 시니어들은 원칙을 지키면서도 애정을 표현할 줄 아는, 이른바 지원(Fördern)과 요구(Fordern)를 함께 실천할 수 있는 세대입니다. 은퇴한 교사와 전문직 종사자를 비롯한 각계 시니어들이 학교 멘토링이나 교육 봉사에 참여한다면, 이는 단순한 사회공헌 차원을 넘어 흔들리는 교육 현장에 실질적인 안정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원칙 있는 신뢰가 답이다방임은 자유가 아니며, 무조건적 포용 역시 진정한 사랑이라 할 수 없습니다. 청소년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을 믿어주되 잘못은 분명히 짚어 주는 어른, 그리고 그 신뢰가 흔들리지 않도록 곁을 지키는 원칙입니다. 이는 전통적으로 우리 사회가 지켜 온 어른과 아이 사이의 위계와 책임의 질서이기도 합니다. 다만 그 질서는 일방적 통제가 아니라 합리적 기준과 상호 존중 위에서 작동해야 지속될 수 있습니다. 베를린의 한 교육자가 보여 주었듯, 원칙과 애정을 함께 실천하는 어른이 많아질 때 비로소 다음 세대는 안전하게 자랄 수 있을 것입니다.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20. 463

    [아침마다 지혜 #460] AI 대전환, 준비 없는 질주를 우려한다

    질주하는 기술, 준비 없는 사회 — 한국 시니어 사회에 던지는 경고기술은 앞서가고, 대비는 뒤처진다인공지능(AI)이 몰고 올 변화의 폭과 속도를 둘러싸고 기대와 불안이 교차하고 있습니다. 낙관론자들은 AI가 에너지와 의료, 농업 등 전 산업에 걸쳐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릴 것이라 전망하는 반면, 신중론자들은 이 기술이 고용 시장을 근본적으로 뒤흔들 것이라 우려합니다. 그러나 정작 기업들은 저마다 더 빠르고 강력한 AI 모델을 내놓기 위한 경쟁에만 몰두할 뿐, 이 기술이 몰고 올 사회적 충격에 대해서는 명확한 대비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이런 가운데 세계적인 기술 기업가로부터 나온 무거운 경고가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빌 게이츠의 이례적 경고: "아무런 계획이 없다"마이크로소프트 공동 창업자이자 자선사업가인 빌 게이츠는 최근 자신의 개인 웹사이트에 12페이지 분량의 에세이를 발표하며, AI가 고용과 인류의 삶에 미칠 위험성에 대해 이례적으로 강경한 어조로 경고했습니다. 그는 최상의 시나리오를 가정하더라도 AI 시대로의 전환이 인류 역사상 가장 격동적인 시기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진단하며, 현재 지도자와 전문가, 지역 사회 그 누구도 이 문제에 충분히 대비하고 있다는 증거를 찾아볼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이는 그가 2023년 발표했던 에세이와는 확연히 다른 어조입니다. 당시 그는 AI를 인터넷과 개인용 컴퓨터(PC)의 보급에 견줄 만한 혁신으로서 기대감을 드러낸 바 있습니다. 이번 에세이에서도 에너지와 의료, 농업 분야에서의 AI의 순기능을 인정하기는 했으나, 전환 과정이 제대로 관리되지 못할 경우 상황이 얼마나 악화될 수 있는지에 훨씬 더 큰 무게를 실었습니다. 그는 "아무런 계획이 없다"고 단언하며 보다 강력한 제도적 규율을 촉구했습니다. 게이츠 벤처스(Gates Ventures) 측은 그가 지금 이 시점에 목소리를 낸 이유에 대해, 사회가 이 전환을 준비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절박함 때문이라고 전했습니다. 그는 미국 의회 관계자들과도 이 문제를 직접 논의할 계획이라고 밝히며, 실업률이 급격히 치솟기 전인 바로 지금이 행동에 나설 기회라고 강조했습니다.(월스트리트저널, 2026년 8월 27일 자 B1면 보도)속도의 경제, 그리고 계획의 부재이러한 간극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기업의 생존과 성장은 경쟁사보다 빠른 기술 개발과 시장 선점에 달려 있는 반면, 그 기술이 초래할 사회적 비용을 계산하고 완충하는 일은 애초에 개별 기업의 책임 범위 밖에 놓여 있습니다. 규제와 사회 안전망은 대개 위기가 현실화된 이후에야 뒤늦게 정비되어 온 것이 역사에서 반복되어 온 패턴입니다. 문제는 AI가 초래할 노동시장 충격의 속도가 과거 산업혁명기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르다는 데 있습니다. 교육과 재훈련 체계가 새로운 기술 환경에 적응하는 데는 통상 수년이 걸리지만, AI 모델의 성능은 불과 몇 달 단위로 갱신되고 있습니다. 더욱이 AI 개발은 국경을 넘나드는 반면, 이를 규율할 노동 정책과 사회 안전망은 여전히 개별 국가 단위에 머물러 있어 통일된 대응을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준비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게이츠의 경고는 바로 이 속도의 비대칭을 겨냥하고 있는 것입니다.이 경고는 한국 사회에도 결코 남의 일이 아닙니다. 이미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고령화가 진행 중이며 노동인구 감소 압박을 받고 있는 한국은, 여기에 AI로 인한 일자리 재편까지 겹칠 경우 이중, 삼중의 도전에 직면하게 됩니다. 특히 정년을 앞두거나 이미 정년을 지난 시니어 세대는 재고용 시장에서부터 이미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AI발 고용 충격이 본격화된다면 이러한 어려움은 한층 가중될 소지가 큽니다.기술의 진보 자체를 막을 수는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될 것입니다. 다만 그 진보가 사회 구성원 다수의 삶의 기반을 무너뜨리지 않도록 질서 있게 관리되어야 한다는 것이 지금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이라 하겠습니다. 특히 시니어 세대를 포함한 중장년 노동자에 대한 선제적 직무 전환 지원과 사회보험 사각지대 해소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입니다. 이러한 균형 위에서만 전통적인 노동 질서와 세대 간 신뢰라는 사회의 안전판을 지켜낼 수 있을 것입니다. 빌 게이츠의 경고가 일회성 우려에 그치지 않고, 한국 사회가 한발 앞서 준비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21. 462

    [아침마다 지혜 #459] 진료실 문을 열자마자 병명부터 꺼내는 아이들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증상을 검색하고 스스로 진단손녀가 “나 우울증이야”라고 말할 때미국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는 2026년 8월 25일 자 오피니언면에 심리치료 전문용어(therapy-speak)의 확산을 다룬 정신과 임상의의 글을 실었습니다. 필자가 진료 현장에서 관찰한 변화는 이렇습니다. 과거의 젊은 환자들은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진단을 듣는 것 자체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상담실을 찾는 10대 소녀와 젊은 여성들은 자기 이름을 말하기도 전에 주의력결핍 과다행동장애(ADHD), 강박장애, 불안장애, 우울증 같은 병명을 먼저 내놓는다는 것입니다.이들이 그 병명을 얻은 경로는 병원이 아니었습니다.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증상을 검색하고, 짧은 영상 플랫폼에서 자가 진단 퀴즈를 풀고, 친구들과 서로의 상태를 대조해 본 결과였습니다. 학교 성적이나 가정 형편, 성향과도 무관하게 이 흐름은 폭넓게 퍼져 있다고 필자는 적었습니다.왜 병명이 위로가 되는가이 대목에서 임상의의 관찰은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젊은 환자들이 말하는 진단명은 반드시 의학적 사실을 주장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설명하기 어려운 개인적 고통을 담아 둘 그릇, 즉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서사를 찾으려는 대처 기제에 가깝다는 분석입니다.필자가 소개한 사례들은 구체적입니다. 어떤 소녀는 우울증이라고 말해야 어른이 자신을 신경 써 줄 것 같았다고 털어놓았습니다. 다른 소녀는 ADHD라는 이름표를 통해 활발한 온라인 공동체에 소속되면서 외로움을 덜었다고 했습니다. 또 어떤 젊은 여성들은 가까운 사람을 향한 분노와 그 감정에 대한 죄책감이라는 진짜 원인을 들여다보는 것보다, 자기 뇌의 결함 탓으로 돌리는 편이 덜 무서웠다고 합니다. 필자는 이를 두고, 심리치료 전문용어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정리했습니다.물론 자가 진단이 정확히 들어맞는 경우도 있었다고 필자는 덧붙였습니다. 다만 상당수는 불편한 감정과 사회적 인정에 대한 갈망 사이에서 타협한 결과처럼 보였다는 것입니다.언어는 밝히기도 하고 가리기도 합니다여기서 짚어야 할 것은 이 현상을 나약함이나 자기 탐닉으로 몰아붙이는 태도의 위험입니다. 필자는 정신의학의 진단 범주가 다른 의학 분야보다 유연하며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한다고 설명합니다. 같은 병명을 완전히 똑같은 방식으로 겪는 사람은 둘도 없기에, 임상에서는 병명보다 사람을 먼저 이해하려 한다는 것입니다.그러나 동시에 우려도 분명히 밝힙니다. 감정을 설명하는 대신 진단 용어를 앞세우면, 곁에 있는 가족과 친구는 자신이 도울 능력이 없다고 느끼고 전문가에게 맡긴 채 물러서게 됩니다. 젊은이가 스스로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도 중간에 끊길 수 있습니다. 필자가 인용한 화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말처럼, 어떤 이름은 사물의 한 면을 비추면서 다른 면을 가려 버립니다.우리 사회에 던지는 질문이 이야기는 결코 남의 나라 사정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짧은 영상과 검색 몇 번으로 자신의 상태에 이름을 붙이는 일이 흔해졌습니다. 손주 세대가 식탁에서 낯선 심리학 용어를 꺼낼 때, 시니어 세대가 보이는 반응은 대체로 두 갈래입니다. 큰일이 났다며 지나치게 놀라거나, 다 괜찮으니 마음 굳게 먹으라며 서둘러 덮으려 하는 것입니다.필자의 지적대로 두 반응 모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과잉 반응은 문제의 초점을 아이의 고통에서 어른의 두려움으로 옮겨 놓습니다. 성급한 안심시키기는 아이의 고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신호로 읽힙니다.대신 필자가 권하는 것은 작은 번역의 행동입니다. ADHD라고 말하는 아이는 머릿속이 산만하고 감당하기 벅차며 자신이 엉망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말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불안하다는 말은 마음이 쓰이고 자신이 없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우울증이라는 단어에 놀라기 전에, 그 아이가 왜 절망스럽고 외로운지를 먼저 헤아려 보라는 것입니다. 상대를 반박하기 위한 되묻기가 아니라, 이해하기 위한 되묻기입니다.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심각하게저는 이 대목에서 시니어 세대가 가진 자산을 봅니다. 우리 세대는 마음의 고통을 말할 언어가 부족했던 시절을 통과해 왔습니다. 참는 것이 미덕이었고, 병원 문턱을 넘는 일은 흠으로 여겨졌습니다. 그 결핍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우리는 몸으로 압니다. 그러므로 요즘 젊은 세대가 감정을 말한다는 사실 자체를 나무랄 일은 아닙니다.다만 이름표가 성장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진단은 출발선이지 종착지가 아닙니다. 자신의 어려움을 설명할 언어를 갖는 것과, 그 언어 뒤에 숨어 책임과 관계로부터 물러서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지원과 요구는 함께 가야 합니다. 아이의 고통을 진지하게 듣되,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몫이 있다는 사실도 조용히 일러 주는 균형이 필요합니다.그 균형을 잡아 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오랜 세월을 살아 낸 시니어입니다. 유행어의 표면에 흔들리지 않고, 그 아래 흐르는 진짜 감정을 알아보는 눈은 경험에서 나옵니다. 손주가 낯선 용어를 꺼낼 때 놀라지도 무시하지도 않고 조용히 되묻는 그 한마디가, 어쩌면 어떤 처방보다 먼저 필요한 첫걸음일 것입니다.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22. 461

    [아침마다 지혜 #458] 개 유모차가 유아차를 앞질렀다

    프랑스 일간지가 들여다본 서울의 ‘펫팸’ 현상과 그 이면프랑스 일간지 르 피가로(Le Figaro)가 2026년 8월 21일 자 지면에서 서울을 특집으로 다루었습니다. ‘아시아의 열풍’ 기획 시리즈의 두 번째 편으로, 서울 특파원이 강남과 청담동, 코엑스 전시장을 직접 취재해 쓴 기사입니다. 제목은 도발적입니다. 아이가 있어야 할 자리를 반려견이 채우고 있다는 것입니다.숫자가 먼저 말합니다기사가 인용한 가장 상징적인 지표는 유모차입니다. 국내 전자상거래 플랫폼 지마켓 집계를 근거로, 2023년 반려견용 유모차 판매량이 유아용 유모차 판매량을 넘어섰다고 전했습니다. 같은 해 서울의 합계출산율은 가임 여성 1명당 0.55명으로 세계 최저 수준을 기록했습니다. 인구를 현 수준으로 유지하는 데 필요한 2.1명의 4분의 1에 불과한 수치입니다.시장의 규모도 함께 소개했습니다. 반려동물 관련 산업, 이른바 펫 이코노미(pet economy)는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추산 약 8조 원(약 53억 달러) 규모로 성장했습니다. 반려인 수는 인구의 약 30퍼센트에 해당하는 1,500만 명으로, 10년이 채 안 되는 사이 두 배 가까이 늘었다고 기사는 전합니다. 정치권이 이들을 하나의 유권자 집단으로 의식하기 시작했다는 현지 동물보호단체 관계자의 관측도 함께 실렸습니다.취재 현장에서 확인된 풍경도 구체적입니다. 반려견에게 사람이 먹는 이탈리아 요리를 내놓는 식당, 개 이름을 새긴 금도금 명판이 달린 80만 원(약 474유로)짜리 고급 유모차, 백내장 예방용이라며 판매되는 30만 원(약 200유로) 상당의 반려견 선글라스, 운구와 입관식과 화장까지 갖춘 반려동물 장례 서비스가 소개되었습니다. 항공사가 반려동물 전용 좌석을 시범 운영한 사례도 언급되었습니다.한 세대 만에 뒤집힌 인식기사가 주목한 것은 변화의 속도입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 개고기를 소비하던 사회가 반려견을 가족 구성원으로 대우하는 사회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2024년 제정된 개 식용 종식 특별법에 따라 2027년 2월 7일부터 식용 목적의 사육과 도살, 유통이 전면 금지됩니다. 종로 일대 전통 음식점들이 이미 손님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현장 관찰도 실렸습니다.이러한 급격한 전환을 프랑스 기자는 흥미로운 사회 현상으로 보면서도, 그 배경에 놓인 구조적 압력을 놓치지 않았습니다.왜 아이 대신 반려견인가기사가 지목한 원인은 세 가지입니다.첫째, 주거 비용입니다. 2017년부터 2021년 사이 서울 부동산 가격이 두 배로 뛰었고 금리마저 오르면서, 아파트 구입이 사실상 도달 불가능한 목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택 마련은 여전히 결혼의 사실상 전제 조건으로 작동합니다. 진입 장벽이 결합 자체를 가로막는 구조입니다.둘째, 교육 경쟁입니다. 유치원 단계부터 명문대 입학 경쟁이 시작되고, 야간 학원 수업이 가계를 압박합니다. 기사는 사교육비가 10년 만에 60퍼센트 급증해 연간 200억 달러(약 27조 6,000억 원)를 넘어섰다고 전했습니다.셋째, 정서적 공백입니다. 취재에 응한 30대 프리랜서는 “개는 새로운 아기”라고 말하며 서울에서 아이를 키울 여력이 없다고 털어놓았습니다. 또 다른 응답자는 “아무도 당신의 반려견이 어느 대학에 다니는지 묻지 않는다”는 말로 압박 없는 관계의 매력을 요약했습니다.다만 기사는 반려 문화 역시 과시 경쟁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대형견은 넓은 집이 필요하기에 부의 상징이 되고, 반려동물은 인스타그램에서 새로운 전시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시니어 세대가 눈여겨볼 대목이 기사를 남의 이야기로 읽어서는 곤란합니다. 세 가지 이유에서입니다.우선 부양 구조의 문제입니다. 출산율 붕괴는 20년 뒤 연금과 건강보험의 지속 가능성 문제로 되돌아옵니다. 지금 청년이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를 청년의 가치관 탓으로만 돌리면 해법을 찾을 수 없습니다. 주거와 교육이라는 두 개의 벽을 낮추는 일이 먼저입니다.다음으로 시니어 자신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반려동물은 이미 많은 시니어 가정에서 정서적 동반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다만 반려동물의 기대 수명, 병원비, 돌봄 부담을 충분히 계산하지 않은 채 입양했다가 어려움을 겪는 사례도 적지 않습니다. 애정만으로는 감당되지 않는 영역이 분명히 있습니다.끝으로 세대 간 이해의 문제입니다. 기사에 등장한 30대 카페 주인은 반려견을 아끼면서도 “동물을 사람처럼 대해서는 안 되며, 반려견이 아이를 대신할 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여전히 두 아이를 갖기를 꿈꾼다고 했습니다. 청년 세대를 하나의 덩어리로 재단하는 일이 얼마나 부정확한지 보여주는 대목입니다.맺으며가족의 형태가 달라지는 것 자체를 개탄할 일은 아닙니다. 다만 형태가 달라졌다고 해서 가족이 감당해 온 기능까지 사라져도 좋은 것은 아닙니다. 세대를 잇고, 서로를 돌보며, 사회를 지탱해 온 그 기능은 여전히 누군가가 맡아야 합니다.지금 필요한 것은 청년을 나무라는 목소리가 아니라, 아이를 낳고 기르는 선택이 무모한 모험이 되지 않도록 조건을 정비하는 일입니다. 지원할 것은 확실히 지원하고, 요구할 것은 분명히 요구하는 균형입니다. 그것이 오랜 세월 가정을 지켜 온 시니어 세대가 지금 사회에 건넬 수 있는 가장 실질적인 조언이라고 생각합니다.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23. 460

    [아침마다 지혜 #457] 영국 제로 시간 계약 논쟁, 시니어 노동에 던지는 질문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inancial Times) 2026년 8월 21일 자 오피니언 지면에는 영국 노동조합회의(TUC) 폴 노박(Paul Nowak) 사무총장의 기고문이 실렸습니다. 영국 정부가 추진 중인 착취적 제로 시간 계약(zero-hours contracts) 금지 법안을 두고 기업 로비 단체들이 내세운 비용 추산이 부풀려졌다는 것이 요지입니다. 제로 시간 계약이란 근무 시간을 미리 정하지 않고, 사용자가 필요할 때마다 호출해 일을 시키는 고용 형태를 말합니다. 계약은 존재하지만 보장된 근무 시간은 없습니다.쟁점의 실체논쟁의 발단은 같은 신문이 8월 12일 자로 보도한 기사였습니다. 제로 시간 계약을 규제할 경우 영국 기업이 연간 최대 50억 파운드(약 9조 2,500억 원)의 비용을 부담하게 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노박 사무총장은 이 수치가 매우 넓은 추정 구간의 최상단 값일 뿐이라고 반박했습니다. 같은 추정에서 가장 낮은 금액은 3억 5,000만 파운드(약 6,475억 원)로, 두 수치의 차이는 열네 배에 이릅니다.더 주목할 대목은 최상단 수치가 성립하는 전제 조건입니다. 그에 따르면 50억 파운드라는 금액에 도달하려면 고용주들이 새 법을 사실상 무시하고 임박한 근무 취소를 계속하며, 그 결과 노동자에게 29억 파운드(약 5조 3,650억 원)의 보상금을 지급하는 상황을 가정해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법을 지키기만 해도 추산 비용의 절반 가까이는 애초에 발생하지 않습니다. 위법을 전제로 산출한 비용을 규제 반대의 근거로 삼는 것은 논리적으로 성립하기 어렵다는 지적입니다.누가 비용을 부담하고 있는가노박 사무총장은 불안정 노동자 세 명 중 한 명이 근무 취소와 시간 단축 등으로 연평균 5,000파운드(약 925만 원) 이상의 소득 손실을 겪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이 금액은 통계 수치에 그치지 않습니다. 주거를 유지할 수 있는지, 난방을 켤 수 있는지, 자녀에게 따뜻한 식사를 차릴 수 있는지를 가르는 실질적 경계선이라는 것입니다.그는 또한 기업이 부담할 비용은 최대치로 부각하면서, 불안정 고용을 보전하기 위해 복지제도(Universal Credit)를 통해 납세자가 이미 지출하고 있는 비용은 계산에서 빠져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수십 년 전 최저임금 도입 당시 동원된 논리가 되풀이되고 있다는 것이 그의 판단입니다.균형 잡힌 시각을 위하여다만 이 기고문은 노동조합 대표의 의견이며, 반대편의 주장 역시 함께 살펴야 공정합니다. 사용자 단체들은 호출형 근로가 계절적 수요 변동이 큰 소매·요식·물류 업종의 현실적 대응 수단이며, 규제가 지나치면 채용 자체가 줄어 가장 약한 노동자가 먼저 배제된다고 반박해 왔습니다. 실제로 유연 근무를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학생이나 은퇴 후 소득 보완을 원하는 계층도 존재합니다. 문제는 유연성 자체가 아니라, 그 유연성의 위험을 누가 떠안느냐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우리 사회에 주는 시사점이 논쟁은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노동시장에도 주 15시간 미만 초단시간 근로가 상당한 규모로 존재하며, 그 상당 부분을 시니어 세대가 담당하고 있습니다. 공공형 일자리, 시설 관리, 경비, 배송 보조, 플랫폼 호출 노동에 이르기까지 근무 일정이 사후에 통보되거나 갑작스레 취소되는 사례는 드물지 않습니다. 초단시간 근로는 주휴수당과 퇴직급여 적용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많아, 근로시간이 조금만 조정되어도 소득과 사회보험 자격이 함께 흔들립니다.시니어 노동자에게 예측 가능성은 젊은 세대보다 더 절실합니다. 병원 진료 일정, 손자녀 돌봄, 연금 수급 시기와의 조율이 모두 근무 일정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질서와 안정은 보수적 가치의 핵심입니다. 계약이 지켜지고 약속한 일정이 통보 없이 뒤집히지 않는 것, 이는 규제가 아니라 신뢰의 기본입니다. 기업의 활력을 위축시키는 과잉 입법은 경계해야 하지만, 지원(Fördern)과 요구(Fordern)는 함께 가야 합니다. 유연성을 허용하되 최소한의 사전 통보 기간과 근무 취소 시 보상 기준을 명확히 세우는 것, 그리고 그 기준을 예외 없이 적용하는 것이 우리가 취할 합리적 균형점이라고 생각합니다.부풀려진 숫자로 벌이는 공방보다, 검증된 자료를 놓고 벌이는 토론이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 사회 역시 초단시간 근로 실태에 대한 정확한 통계부터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24. 459

    [아침마다 지혜 #456] 절주하는 미국인들, 알코올 사용 장애 감소

    음주 문제를 겪는 미국인의 비율이 최근 5년 사이 뚜렷한 감소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미국 약물남용 및 정신건강서비스청(SAMHSA)의 최신 전국 약물 사용 및 건강 조사에 따르면, 12세 이상 미국인 가운데 알코올 사용 장애(AUD·Alcohol Use Disorder) 진단 기준에 해당하는 비율은 2021년 10.6%에서 2025년 8.9%로 낮아졌습니다. 인원으로는 약 300만 명이 감소한 규모입니다.다만 이 수치를 해석할 때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해당 조사의 방법론이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 변경돼 2021년 이전 자료와 직접 비교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컬럼비아대학교와 미시간대학교 등의 장기 연구, 갤럽 조사 등 다른 자료에서도 미국인의 음주 감소 현상이 확인되고 있어 단순한 통계상의 착시로만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판단입니다.알코올 사용 장애는 단순히 술을 많이 마시는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건강이나 직장생활, 가족관계 등에 문제가 발생하는데도 음주를 계속하거나 스스로 음주량을 통제하기 어려운 상태를 말합니다. 현대 의학에서는 이를 ‘술을 끊을 수 있는 사람’과 ‘끊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누기보다 연속적인 스펙트럼으로 이해합니다.임상적으로는 갈망, 계획보다 많은 음주, 음주를 줄이거나 중단하려는 반복적인 실패 등 11개 증상을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해당 증상이 2~3개이면 경증, 4~5개이면 중등도, 6개 이상이면 중증 알코올 사용 장애로 분류합니다.이번 감소에서 특히 눈여겨볼 부분은 경증 장애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감소입니다. 전체 문제 음주자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경증 집단에서 감소 폭이 크게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중등도와 중증 장애의 감소 폭은 상대적으로 작았습니다. 전문가들이 이번 변화를 공중보건 측면에서 의미 있는 성과라고 평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왜 미국인들은 술을 덜 마시게 되었을까요. 전문가들은 하나의 원인으로 설명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특히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음주를 당연한 사회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이던 문화가 약해진 것이 중요한 배경으로 거론됩니다.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술이 암을 비롯한 여러 질환의 위험을 높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사람도 늘었습니다. 술 대신 운동이나 취미, 온라인 활동 등 다른 형태의 여가를 선택하는 문화도 확산되고 있습니다.최근에는 비만 치료제로 널리 알려진 세마글루타이드(semaglutide) 계열 약물이 음주 욕구를 감소시킬 수 있다는 연구도 발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알코올 사용 장애 감소를 이 약물의 영향으로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약물의 효과가 상대적으로 중증 음주자에게서 더 크게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진 반면, 이번 통계에서는 오히려 중증 장애의 감소 폭이 가장 작았기 때문입니다.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긍정적인 변화가 미국 정부의 공중보건 정책 변화와 반드시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지는 않다는 점입니다. 최근 음주 관련 식생활 지침에서는 과거 남성 하루 2잔, 여성 하루 1잔이라는 구체적인 기준 대신 보다 포괄적인 ‘음주 제한’이라는 표현이 사용되면서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국민에게 혼란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습니다.여기에 알코올 관련 공중보건 조직과 연구 인력의 축소도 변수입니다. 개인과 사회의 음주 습관이 개선되고 있다고 해서 정부 차원의 감시와 예방 체계까지 약화시켜도 된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긍정적인 추세가 지속되도록 정확한 통계를 축적하고 위험 음주자를 조기에 발견하며, 중증 환자에게는 적절한 치료를 제공하는 체계가 필요합니다.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술은 오랫동안 인간관계와 사회생활의 중요한 매개였지만, 건강수명이 길어진 시대에는 음주에 대한 생각도 달라질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시니어에게는 젊은 시절의 음주 습관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반드시 현명한 선택은 아닙니다. 나이가 들수록 신체의 알코올 처리 능력과 약물에 대한 반응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음주량을 자연스럽게 줄이는 것은 건강관리의 한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무엇보다 이번 미국의 변화가 보여주는 것은 ‘절주’가 반드시 강제적인 금욕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건강에 관한 정보가 축적되고 사회적 분위기가 변하며 술을 대신할 수 있는 다양한 활동이 늘어나면 개인의 선택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정책 역시 이러한 자발적인 변화를 뒷받침하는 방향으로 설계될 필요가 있습니다.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 무조건 옳다고 말할 필요도 없고, 술을 즐기는 사람을 문제시할 이유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음주가 건강과 가족관계, 일상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스스로 돌아보는 일입니다. 특히 음주를 줄이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거나, 건강상의 문제가 생겼는데도 계속 술을 찾는다면 단순한 ‘절제력 부족’으로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의료적 도움이 필요한 신호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미국에서 나타난 음주 감소세가 일시적인 현상인지 장기적인 사회 변화인지는 앞으로 더 지켜봐야 합니다. 그러나 건강을 위해 술을 덜 마시려는 선택이 개인의 결심을 넘어 하나의 사회적 흐름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오래 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술을 얼마나 마실 것인가 역시 결국 그 목표를 향해 자신의 생활습관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절주는 거창한 결심이라기보다 앞으로의 삶을 조금 더 건강하게 설계하는 작은 선택에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캐어유뉴스 편집장 김형래

  25. 458

    [아침마다 지혜 #455] 나이가 들수록 사람은 자신의 삶을 조금 더 멀리서 바라보게 됩니다.

    젊었을 때에는 눈앞의 일과 앞으로 이루어야 할 목표가 중요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이미 지나온 시간과 그 안에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놓쳤는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롭 모스(Robb Moss)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더 벤드 인 더 리버(The Bend in the River)』는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합니다. 특별한 성공을 거둔 유명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평범하게 살아온 다섯 친구의 인생을 수십 년에 걸쳐 다시 들여다본다는 점에서 오히려 깊은 울림을 줍니다.모스 감독은 1978년 단편영화 『리버독스(Riverdogs)』에서 당시 20대였던 자신과 친구들의 모습을 기록했습니다. 이들은 콜로라도강에서 래프팅 가이드로 일하며 젊음과 자유를 만끽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25년이 지난 2003년, 감독은 다시 카메라를 들고 이들을 찾아 『더 세임 리버 트와이스(The Same River Twice)』를 만들었습니다. 젊음의 한가운데 있던 사람들이 중년이 되어 가족과 직업, 책임과 관계의 무게를 짊어진 모습을 기록한 작품이었습니다.이번 영화는 다시 약 20년의 시간이 흐른 뒤 시작됩니다. 대니 실버(Danny Silver), 짐 티케너(Jim Tickenor), 캐시 쇼(Cathy Shaw), 제프 골든(Jeff Golden), 해리 와서만(Harry Wasserman) 등 다섯 친구는 어느덧 70대에 접어들었습니다. 감독은 과거 영화의 장면과 현재의 대화를 교차시키면서 시간이 한 사람의 얼굴과 몸뿐 아니라 생각과 가치관까지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보여줍니다.젊은 시절의 화면 속 인물들은 강변을 자유롭게 누비며 자신들의 미래가 얼마나 길게 펼쳐져 있는지 의식하지 않는 듯합니다. 중년의 모습에서는 가족과 직업에 대한 고민이 나타나고, 70대가 된 현재에는 지나온 삶을 평가하는 시선이 두드러집니다. 같은 사람이지만 서로 다른 시기의 모습을 한 화면에서 바라보게 되면서 관객은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을 마주하게 됩니다. 우리는 젊었을 때 정말 무엇이 중요한지 알고 살았던 것일까요.영화 속 친구들은 자신들이 젊었을 당시의 모습을 다시 보면서 그때는 자신들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몰랐다고 이야기합니다. 당시에는 나이 든다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전혀 알지 못했다는 고백도 이어집니다. 젊을 때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가운데 상당수는 시간이 지나면서 의미가 작아지고, 반대로 별것 아니라고 여겼던 관계와 순간들이 인생에서 훨씬 중요한 것으로 남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 것입니다.이것은 나이 듦이 가져오는 가장 현실적인 지혜인지도 모릅니다. 젊은 사람에게는 선택할 시간이 많기 때문에 하나의 실패나 후회가 인생 전체를 결정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70대에 이르면 인생은 이미 상당 부분 현실이 되어 있습니다. 무엇을 했는지뿐 아니라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도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일부가 됩니다. 영화 속 한 인물의 말처럼, 이 시점에서는 삶이 제공한 것을 이미 했거나 하지 않은 것 가운데 하나로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후회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유머가 있고 인간적인 따뜻함이 있습니다. 이들은 유명 인사도, 역사책에 기록될 정도의 특별한 인물도 아닙니다. 일부는 공직에 도전했고, 각자의 삶에서 실패와 갈등을 경험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평범한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평범함 때문에 이들의 이야기는 관객 자신의 삶을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특히 과거의 인간관계와 선택을 다시 바라보는 장면에서는 세월의 의미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당시에는 자신에게 정당하다고 생각했던 행동도 시간이 지나면 다르게 보일 수 있고, 반대로 그때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인생에서 오래 남는 존재가 되기도 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고,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과거의 장면들이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더 벤드 인 더 리버』가 시니어에게 특히 의미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시니어 세대는 이미 수십 년의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젊은 세대가 아직 경험하지 못한 시간의 변화를 알고 있습니다. 경제적 성공도, 사회적 지위도, 경쟁에서의 승리도 시간이 지나면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결국 오래 남는 것은 사람과의 관계, 가족과의 기억, 자신이 누군가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그리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일 가능성이 큽니다.이 영화는 거창한 성공의 공식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평범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을 다시 바라보는 모습을 통해 충만한 삶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앞으로 살아갈 시간이 지나온 시간보다 짧아졌을 때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게 되는가, 그리고 그때까지도 붙잡고 있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입니다.어쩌면 나이가 든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계속 얻는 과정만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무엇이 정말 중요한지 알게 되면서 불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는 과정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젊었을 때는 많은 것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음을 깨닫게 됩니다.그래서 『더 벤드 인 더 리버』는 다섯 친구의 이야기를 넘어 우리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게 합니다. 젊은 날의 나와 지금의 나는 얼마나 달라졌는지, 한때 중요했던 것들은 지금도 중요한지, 그리고 정작 소중했던 것들을 우리는 얼마나 잘 지켜왔는지를 묻게 합니다.세월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흘러갑니다. 그러나 그 세월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마지막에 남는 삶의 표정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지나간 시간을 후회하는 것만으로는 돌아오지 않는 시간을 되찾을 수 없습니다. 반대로 지금까지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앞으로 남은 시간에서 정말 중요한 것을 선택하는 것은 아직 가능합니다.나이가 든다는 것은 단순히 젊음을 잃어가는 일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살아본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관점과 분별력을 갖게 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지혜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 지나온 수많은 경험 속에서 천천히 쌓입니다.『더 벤드 인 더 리버』가 보여주는 것은 결국 강물처럼 흘러온 한 사람의 인생입니다. 강물의 방향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굽이를 돌아선 뒤 어디를 바라볼 것인지는 여전히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후반부에 필요한 것은 지나온 길을 부정하는 일이 아니라, 그 길에서 얻은 지혜를 바탕으로 남은 길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는 일일 것입니다.캐어유뉴스 편집장 김형래

  26. 457

    [아침마다 지혜 #453] 감시 카메라를 향한 총성, 미국이 겪는 진통

    도로변에 선 카메라 한 대가 미국 사회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습니다미국에서 자동차 번호판을 자동으로 읽어 기록하는 감시 장비가 훼손되는 사건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워싱턴 포스트가 지난 8월 19일 자로 전한 바에 따르면, 동부 테네시주에서 강 안내인으로 일하며 무소속 연방 하원의원 후보로 출마한 서른일곱 살의 애덤 하이머먼 씨는 지난 7월 예배가 진행 중이던 교회 인근의 장비를 포함해 모두 네 대의 카메라에 총격을 가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대학생, 컴퓨터 기술자, 심지어 공군 소속 기술자까지 유사한 혐의로 고발되었고, 미네소타주 위노나에서는 시내에 설치된 여덟 대가 모두 절단된 뒤 사라졌습니다.문제의 장비는 자동 번호판 인식기(ALPR·Automated License Plate Recognition)라 불립니다. 감시 장비 위치를 시민들이 직접 등록하는 사이트 디플록(DeFlock.org)의 집계로는 미국 전역에 13만 대 이상이 설치되어 있다고 합니다(집계 주체가 민간 크라우드소싱이므로 수치는 확인이 필요합니다). 대표 기업인 플록 세이프티는 6천 개가 넘는 지역사회에서 장비를 운영하며 월 200억 건의 번호판 기록을 수집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수사에는 유용하나, 기록은 남습니다이 기술의 효용을 부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운영사는 자사 장비가 지난해 발생한 대학 총격 사건의 범인 신원을 특정하는 데 기여했다고 설명합니다. 문제는 이 장비가 특정 범죄자만을 골라 보지 않는다는 점에 있습니다. 병원을 드나든 기록, 사격장을 찾은 기록, 특정 판매점 앞을 지나간 기록이 모두 남습니다. 정부 감시를 감독하는 비영리 단체의 연구 책임자 엘레니 마니스 씨는 원하는 때 원하는 곳으로 이동할 자유가 침해되는 사안이기에 이 비판이 진영을 가리지 않는다고 지적하였습니다.우려는 현실로 확인되었습니다. 워싱턴 포스트 보도에 따르면 전·현직 연인을 추적하는 등 인가되지 않은 목적으로 장비를 사용한 혐의로 최소 50명의 경찰관이 기소되거나 고발되었습니다. 이민 당국 요원들이 지역 기관을 경유해 전국 데이터베이스에 접근한 사실도 드러났습니다. 논란이 커지자 운영사는 검색 시 형사 사건 번호 기재를 의무화하고 데이터 보관 기간을 30일에서 7일로 줄이는 개선안을 내놓았습니다. 최근 몇 달 사이 100곳의 지방자치단체가 계약을 중단하거나 해지하였습니다.분노의 정체는 기술이 아니라 절차입니다주목해야 할 대목은 반발의 성격입니다. 시민들은 기술 자체를 몰라서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동의한 적 없는 감시가 조용히 늘어났고, 반대 의견을 전달할 통로가 막혀 있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하이머먼 씨 역시 조용히 편지나 쓰라는 조언에 사람들이 지쳤다는 취지로 말하였습니다. 우파 논객 터커 칼슨 씨가 훼손 행위자들을 애국적 시민으로 묘사하고, 반대 진영의 정치 활동가 릭 윌슨 씨가 장비를 방해하는 도구를 방송에서 언급한 사실은 이 사안이 좌우의 문제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의 변호 비용 모금 사이트에는 1만 3천 달러(약 1,807만 원, 1달러 1,390원 기준·환율은 게재 전 확인 필요)가 넘게 모였습니다.그러나 본지는 이 저항 방식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사유든 공유든 타인의 재산을 파손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미시간주 워터포드 경찰은 스물네 살 피의자가 카메라를 훼손하던 차량의 번호판이 바로 그 카메라에 찍혀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감시가 싫어 감시 장비를 부수다가 감시에 걸린 셈이니, 이보다 분명한 역설도 드뭅니다. 온라인에서 허위 알리바이를 대신 제공하는 행태 또한 공동체의 신뢰를 갉아먹을 뿐입니다.우리 사회가 먼저 점검해야 할 것들한국은 미국보다 폐쇄회로 텔레비전과 차량번호 인식 설비가 훨씬 촘촘한 나라입니다. 아파트 주차장, 공공 청사, 도심 도로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설비는 시니어 세대에게 실질적 도움을 주어 왔습니다. 인지 저하로 길을 잃은 분을 찾아내고, 야간 골목의 범죄를 억제하며, 뺑소니 차량을 추적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안전을 지키는 장치를 무턱대고 걷어내자는 주장은 무책임합니다.다만 우리가 미국의 사례에서 배워야 할 것은 기술의 존폐가 아니라 관리의 원칙입니다. 누가, 어떤 근거로, 얼마 동안 기록을 보관하고 열람하는지가 명확해야 합니다. 열람 사유를 기록으로 남기고, 목적을 벗어난 조회를 실질적으로 제재하며, 보관 기간을 필요한 최소한으로 정하는 일은 기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을 오래 쓰기 위한 조건입니다. 지원과 요구는 함께 가야 합니다. 공적 안전을 위한 장비 도입을 지원하되, 운용 주체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절차적 책임을 엄격히 요구해야 합니다.시니어의 경험이 필요한 자리입니다우리 세대는 통금이 있던 시절과 지문 날인이 당연하던 시절을 지나, 손 안의 기기 하나로 모든 것이 기록되는 시대까지 살아왔습니다. 안전이 절실하다는 것도 알고, 안전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쉽게 남용될 수 있는지도 압니다. 그 균형 감각은 어느 세대도 대신 갖지 못하는 자산입니다.기술을 부수는 손이 아니라, 규칙을 세우는 목소리가 필요합니다. 질서를 지키면서도 자유를 잃지 않는 길을 찾는 일, 그것이 우리 시니어 세대가 이 사회에 내어놓을 수 있는 가장 실질적인 기여라고 생각합니다.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수정삭제 주소복사안전과 자유 사이, 기술은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는가▲ 본 이미지는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생성형 인공지능으로 제작된 것입니다.

  27. 456

    [아침마다 지혜 #452] 기다림이 일상이 된 섬, 쿠바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빵 배급과 끝없는 정전, 인내의 임계점세상에는 기다림을 훈련받지 않고도 기다림의 전문가가 되어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국 뉴욕타임스 국제판이 지난 8월 18일 오피니언 면에 실은 마이클 J. 부스타만테 마이애미대학교 교수의 기고문은 오늘날 쿠바 국민들의 처지를 바로 그렇게 요약합니다. 하루치 빵 배급을 기다리고, 초만원 버스를 기다리고, 섬을 떠날 비자를 기다리는 삶입니다. 여기에 하루 한두 시간만 들어오는 전기를 기다리고, 해외 친척이 보내주는 상비약을 기다리는 일이 더해졌습니다.이 기다림이 서서히 조여오는 질식으로 바뀐 시점을 필자는 두 가지로 짚습니다. 하나는 감염병 대유행이 섬 경제를 깊은 침체로 몰아넣은 일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 행정부가 지난 1월 사실상의 석유 봉쇄를 시행한 일입니다. 전력망이 무너지자 냄비를 두드리는 항의, 이른바 카세롤라소(cacerolazo)와 불붙은 쓰레기로 만든 거리 봉쇄가 거의 매일 밤 벌어진다고 합니다. 정부 브리핑 도중 실수로 화면에 노출된 자료에서 당국이 '사회적 폭발(estallido social)'을 우려하고 있음이 드러났다는 대목은, 통치자들 스스로 한계를 감지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붕괴를 기대하는 시선과 그렇지 않은 현실일부, 특히 해외 이주 쿠바인 사회에서는 1989년 동유럽 공산 정권의 연쇄 붕괴가 이 섬에서 재현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필자의 진단은 냉정합니다. 당시 동유럽의 변화는 대중의 불만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지배 엘리트 내부의 분열과 실질적 지지 기반을 가진 야당이 함께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쿠바에서는 강압적 국가기구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고, 탄압의 위협이 야당의 힘을 약화시켰으며, 무엇보다 대규모 동원의 자리를 대규모 이민이 대신하고 있습니다. 2020년 이후 최대 200만 명이 섬을 떠난 것으로 필자는 전합니다. 분노가 광장으로 모이는 대신 국경 밖으로 흩어진 셈입니다.바깥에서 변화가 올 가능성도 필자는 회의적으로 봅니다. 미국 국무장관과 중앙정보국(CIA) 국장이 접촉을 통해 일정한 타협 가능성을 내비쳤으나, 지도부 교체 요구가 거부되면서 2차 제재, 이른바 세컨더리 보이콧이 시행되었고 외국 기업들이 철수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 경제 자유화 조치나 저명한 정치범 석방도 교착을 풀지 못했습니다. 필자는 군사적 개입 시나리오에 대해서도 1898년 미군 점령 이후 미국의 이해에 종속된 공화국이 탄생했던 역사를 상기시키며, 개입이 민주주의를 보장하기보다 새로운 종속 질서를 낳을 가능성이 높다고 경계합니다.구조를 보는 눈, 이념보다 살림입니다여기서 저는 이 글이 좌우의 문제로 소비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쿠바의 곤경은 수십 년에 걸친 권위주의 통치와 경제 운영의 실패라는 내부 원인, 그리고 외부의 제재라는 외부 원인이 맞물린 결과입니다. 어느 한쪽만 지목하는 설명은 절반의 진실입니다. 분명한 것은, 양측이 상대가 먼저 양보하기를 기다리는 밀고 당기기, 스페인어로 티라 이 아플로하(tira y afloja)를 이어가는 동안 그 비용을 온전히 치르는 쪽은 평범한 시민이라는 사실입니다. 정부는 기다릴 여유가 있으나 국민은 그렇지 못하다는 필자의 결론은, 정치의 시간과 생활의 시간이 결코 같지 않다는 오래된 진실을 다시 확인해 줍니다.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28. 455

    [아침마다 지혜 #451] 문해력의 죽음이라는 소문, 과장되었습니다

    독서는 다시 광장으로 나오고 있습니다요즘 신문과 방송을 조금만 들여다보아도 문해력이 무너지고 있다는 경고가 쏟아집니다. 미국에서는 고등학교 졸업반 학생들의 읽기 성취도가 20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으로 내려앉았고, 대학생들조차 책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하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8월 17일 자 뉴욕타임스 국제판에 실린 피터 슈미트의 기고문은 이 익숙한 비관론에 흥미로운 반론을 제기합니다. 문해력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는 지나치게 부풀려져 있다는 것입니다.코로나19 봉쇄와 소셜 미디어 속에서 성년을 맞은 미국의 젊은 세대가 지금 갈망하는 것은 화면 너머의 세계가 아니라 실제로 몸을 부딪치며 살아가는 세계의 관계라는 진단입니다. 함께 읽고, 묻고, 생각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의 낯섦을 마주 보는 일 말입니다. 그리고 책이야말로 그런 만남을 조직하는 데 가장 강력한 매개라는 것이 필자의 주장입니다.모임이 된 책, 파티가 된 독서실제 사례들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조용히 각자 책을 읽기 위해 모이는 커뮤니티인 사일런트 북 클럽은 현재 60개국에 2,000개가 넘는 지부를 두고 있습니다. 배드 비치 북 클럽이 여는 독서 수련회와 여름 캠프에는 열다섯 명에서 서른 명가량이 주말 내내 함께 머뭅니다. 문학과 요리를 결합한 컨섬션 북클럽은 소설의 세계를 주제가 있는 만찬으로 재현합니다. 뉴욕 워싱턴 스퀘어 파크에서 열린 앨런 긴즈버그 시 낭독회에는 수백 명이 몰렸습니다. 오클라호마주 털사의 한 서점 관계자는 책을 좋아하는 이들이 대체로 내향적인 성향이라, 오히려 서로 통하는 사람을 확인할 공간이 절실하다고 설명합니다.필자 자신도 지난달 브루클린 강변에서 월트 휘트먼의 시를 밤새워 낭독하는 모임을 준비했습니다. 스물다섯 명이 신청했으나 예순 명 가까이 모였고, 새벽 두 시 무렵 함께 목청껏 소리를 지른 뒤 찾아온 정적 속에서 한 대학 졸업생이 사실 휘트먼을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다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다시 하자고 제안했다는 대목이 인상적입니다.혼자 읽기가 오히려 새로운 방식이었습니다여기서 짚어둘 역사적 사실이 있습니다. 오늘날 교육자들이 지키려는 방식, 즉 홀로 조용히 앉아 눈으로만 읽는 묵독은 사실 인류사에서 비교적 늦게 등장한 관행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가 소리를 내지 않은 채 눈으로만 책장을 따라가던 장면을 신기한 일처럼 기록했습니다. 그가 굳이 이를 적어둔 것 자체가, 고대 세계의 독서란 글을 아는 이와 모르는 이가 함께 모인 자리에서 소리 내어 읽는 공적 행위였음을 말해 줍니다. 헤로도토스는 자신의 역사서를 낭독한 것으로 전해지고, 로마 제국에서 낭송은 유력한 오락이자 토론의 형식이었습니다. 인쇄술의 확산과 문해력의 대중화가 비로소 고독한 묵독을 독서의 표준 이미지로 굳혔을 뿐입니다.시니어 세대에게 주는 시사점이 대목에서 우리 시니어 독자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방과 서당, 마을 정자에서 함께 읽고 함께 외우던 기억을 가진 세대가 바로 우리입니다. 지금 미국의 젊은이들이 새롭게 발견했다고 말하는 것은, 실은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일에 가깝습니다.물론 냉정하게 볼 부분도 있습니다. 스마트폰 과다 사용과 인공지능에 대한 지나친 인지적 의존이 젊은 세대의 읽기 능력을 갉아먹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함께 모여 낭독하는 즐거움이 긴 글을 끝까지 붙들고 씨름하는 훈련을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정독과 완독의 규율은 여전히 학교와 가정이 지켜야 할 기본입니다.다만 그 규율을 지키는 방법이 반드시 고립일 필요는 없습니다. 지역 도서관과 복지관, 종교 시설에서 시니어가 주도하는 낭독 모임을 만들고, 손자녀 세대를 초대해 함께 소리 내어 읽는 자리를 마련한다면, 이는 문해력 회복인 동시에 세대 간 다리를 놓는 일이 됩니다. 젊은 세대의 조바심과 시니어 세대의 축적된 독서 경험이 만나는 지점에서 공동체의 언어가 회복됩니다.책은 정보를 나르는 도구로서의 역할은 줄어들지 몰라도, 사람을 한자리에 모으는 힘은 오히려 커지고 있습니다. 읽는 일이 다시 광장으로 나오는 이 흐름을, 우리 시니어 세대가 뒷짐 지고 구경할 이유는 없습니다.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29. 454

    [아침마다 지혜 #450] 찾아가는 진료, 시니어 돌봄의 마지막 한 뼘을 메우다

    미국 '거리 의학'이 던지는 질문 — 스스로 병원에 오지 못하는 시니어는 누가 돌보는가병원 문 앞에서 멈춰 서는 사람들의료 제도의 성패는 흔히 병원 안에서 측정됩니다. 의료진의 수준, 장비의 성능, 수술 성공률 같은 지표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지표에는 한 가지 전제가 숨어 있습니다. 환자가 스스로 병원 문을 열고 들어온다는 전제입니다.이 전제가 무너지는 지점에 시니어가 있습니다. 거동이 불편해 버스 두어 번을 갈아탈 수 없는 분, 인지 기능이 떨어져 예약 시간을 지키기 어려운 분, 과거의 진료 경험에서 상처를 입어 병원 자체를 기피하게 된 분들입니다. 이들에게 "필요하면 오시라"는 말은 사실상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미국이 30여 년에 걸쳐 확인한 것미국에서는 1990년대에 짐 위더스(Jim Withers) 박사가 병원 밖으로 나가 취약계층을 직접 진료하기 시작했고, 이 방식은 오늘날 '거리 의학(Street Medicine)'이라는 이름으로 전국 150개 이상의 프로그램으로 확산되었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습니다.주목할 것은 성과 지표입니다. 남캘리포니아대학교(USC) 프로그램의 경우 대상 환자의 응급실 방문이 약 80퍼센트 줄었고, 입원 기간은 평균 2.5일 단축되었으며, 재입원율은 3분의 2가량 감소했다고 합니다. 매일 수개월간 약을 복용해야 하는 C형 간염 치료에서도 완치율이 80퍼센트를 넘었습니다. 찾아가는 방식이 온정주의적 시혜가 아니라 임상적으로 유효한 전략임을 보여주는 수치입니다.미국 공공의료보험인 메디케이드(Medicaid)는 2023년 10월 이 진료 방식에 처음으로 공식 수가를 인정했습니다. 비주류로 취급받던 활동이 제도권에 들어선 것입니다.제도권 진입이 불러온 딜레마그런데 현장의 의료진은 오히려 우려를 표합니다. 제도에 편입되는 순간 이 활동이 생산성 지표와 수익성의 잣대로 평가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환자 한 사람을 찾아내 이동을 돕고 상처를 소독하는 데 한 시간 넘게 쓰는 방식은, 분 단위로 회전율을 계산하는 병원 회계 기준에서는 비효율로 기록될 수밖에 없습니다.한 의료 책임자는 비용 절감이 이 일의 부산물일 수는 있어도 목적이 될 수는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비용만 따진다면 가장 값싼 선택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경고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한국 시니어 정책에 주는 시사점우리 사회에도 방문진료 시범사업, 재택의료센터, 장기요양 재가급여 등 찾아가는 서비스가 이미 존재합니다. 문제는 규모와 지속성입니다.첫째, 이동 지원의 실효성입니다. 미국 사례에서 환자는 교통 지원 자격이 있어도 사전 예약을 하지 못해 이용에 실패했습니다. 우리의 이동지원 서비스 역시 예약 절차와 대기 방식이 시니어의 실제 생활 조건에 맞는지 점검이 필요합니다.둘째, 처방의 현실 적합성입니다. 화장실 이용이 어려운 환자에게 이뇨제를 처방하면 복약이 중단됩니다. 주거 환경과 보호자 유무를 고려하지 않은 처방은 서류상으로만 정확할 뿐입니다.셋째, 수가 체계의 설계입니다. 찾아가는 진료의 가치를 진료 건수가 아닌 응급실 이용 감소, 재입원 억제, 재가 생활 유지 기간으로 측정하는 기준이 마련되어야 합니다.온정이 아니라 기준의 문제입니다찾아가는 진료는 동정심의 표현이 아닙니다. 위더스 박사의 표현처럼 소방서와 같은 사회 기반 시설로 이해되어야 할 공공 서비스입니다. 불이 나면 소방차가 출동하듯, 스스로 나올 수 없는 시니어에게는 의료가 찾아가는 것이 원칙이어야 합니다.다만 저는 무제한의 확대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재원은 유한하고, 세대 간 부담의 형평도 지켜져야 합니다. 필요한 것은 대상의 명확한 기준, 성과의 객관적 측정, 그리고 재정의 지속 가능성입니다. 지원(Fördern)과 요구(Fordern)는 함께 가야 합니다.시니어는 돌봄의 수혜자이기 이전에 이 사회의 안전망을 지켜온 세대입니다. 그 세대가 병원 문 앞에서 발길을 돌리지 않도록 하는 일은 시혜가 아니라 사회가 스스로에게 하는 약속의 이행입니다.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출처: The New York Times, Opinion 지면(A18~A19) 게재 칼럼. 미국 '거리 의학' 현장 취재 기사. 본 칼럼은 원문의 직접 인용 없이 사실관계를 요약·재구성하고, 시니어 정책 관점으로 논지를 재설정한 것입니다.※ 본문의 수치(응급실 방문 80퍼센트 감소, 입원 기간 2.5일 단축, 재입원율 3분의 2 감소, C형 간염 완치율 80퍼센트 이상, 메디케이드 수가 인정 시점)는 모두 원 기사에 근거한 것으로, 별도의 독립 검증은 거치지 않았습니다. 

  30. 453

    [아침마다 지혜 #449] 유가 급등이 만든 뜻밖의 전환, 파키스탄 전기 오토바이 열풍

    라호르의 한 거리에서 벌어진 일파키스탄 제2의 도시 라호르의 마울라나 샤우카트 알리 로드는 제과점과 정육점, 샌드위치 가게가 늘어선 평범한 중산층 상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거리에 똑같은 물건을 파는 쇼룸이 여섯 곳이나 들어섰습니다. 파는 물건은 전기 오토바이입니다. 수요를 감당하지 못해 올해 일곱 번째 매장이 문을 열었고, 곧 여덟 번째가 뒤따랐습니다. 모퉁이를 돌면 또 두 곳이 영업 중입니다.불과 3년 전만 해도 파키스탄에 전기 오토바이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블렉트라(Vlektra), 졸타(Jolta) 같은 신생 브랜드가 매주 등장하며 그 수가 84개 기업을 넘어섰습니다. 자금이 부족한 영세 업체, 벤처 투자를 받은 스타트업, 시장성을 보고 뛰어든 기존 대기업이 뒤섞여 있습니다. 매시 퍼거슨 트랙터를 만들던 제조사마저 전기 오토바이 생산을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전쟁이 앞당긴 에너지 전환이 열풍의 직접적인 방아쇠는 이란 전쟁입니다. 국제 유가가 고공행진을 이어가면서, 개발도상국 서민들이 얼마나 빠르게 화석 연료에서 이탈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 펼쳐진 것입니다.원래 전기 이륜차는 휘발유 모델보다 구매 가격이 비쌉니다. 그러나 연료비 격차가 이 부담을 뒤집었습니다. 연료 탱크를 채우는 것보다 배터리를 충전하는 편이 훨씬 저렴하기 때문입니다. 시장조사기관 모터사이클 데이터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파키스탄의 전기 이륜차 판매는 173퍼센트 증가했습니다. 현지 최대 판매업체 이비(Evee)의 영업 이사는 4월부터 6월까지 석 달간 9만 대가 팔렸다고 밝혔는데, 이는 지난해 연간 판매량 11만 2천 대에 육박하는 수치입니다. 파키스탄의 연간 전체 오토바이 판매량이 약 190만 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변화의 속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같은 흐름은 베트남과 아프리카에서도 확인됩니다. 케냐에서는 신규 오토바이 판매의 4분의 1에서 3분의 1가량이 전기 모델이라고 현지 업계 관계자는 전합니다. 한 창업자는 이번 에너지 충격이 모든 흐름을 두 배로 증폭시켰다고 표현했습니다.중국산 조립 키트와 1퍼센트 관세주목할 대목은 이 산업이 만들어진 방식입니다. 일부 파키스탄 기업은 국산 차체와 타이어를 쓰되 배터리와 모터는 중국산에 의존합니다. 그러나 상당수는 거의 전적으로 중국에 기댑니다. 조립하기 쉽게 포장된 완제품 키트를 수입해 로고만 붙이면 되는 방식입니다. 중국 우시 지역에는 이런 맞춤형 키트를 공급하는 업체가 즐비하고, 라호르 무역 박람회에서는 중국 업체 담당자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회사를 창업할 생각이 있느냐고 물으며 85종의 디자인 브로셔를 건넸다고 합니다.대기 질 개선이 절박한 파키스탄 정부는 이러한 수입품에 관세를 단 1퍼센트만 부과하고 있습니다. 라호르 연구에 따르면 교통 부문이 전체 대기 오염의 83퍼센트를 차지하고, 스모그로 시민 기대 수명이 평균 6년 단축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석유 제품이 전체 수입의 약 30퍼센트를 차지해 유가가 오르면 외환 보유고가 마르고 물가가 뛰는 구조적 취약성도 배경에 있습니다.친숙함을 설계한 창업자뉴욕 헤지펀드에서 일하던 시에드 라자 모신 씨는 테슬라 판매 실적을 보며 4만 달러(약 5,600만 원)가 넘는 차량을 전제로 한 전기차 전환에서 조국이 소외되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귀국해 약 1,000달러(약 140만 원)짜리 전기 이륜차 개발에 나섰습니다.그가 겨냥한 기준점은 40년간 외형이 거의 변하지 않은 국민 오토바이 혼다 CD 70이었습니다. 연료 게이지조차 없지만 몬순 홍수와 거친 시골길을 견디고 중고 가격이 잘 유지되는 모델입니다. 그래서 그가 내놓은 전기 모델에는 휘발유 탱크가 없는데도 순전히 장식용인 연료 캡이 달려 있습니다. 친숙함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다만 부품 국산화는 여전히 과제로, 마감 품질이 일정하지 않고 올봄에는 석 달에 이르는 배송 지연으로 혹평을 받았습니다.우리가 읽어야 할 대목이 사례가 시사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첫째, 에너지 전환은 이념이나 구호가 아니라 생활비 계산에서 시작된다는 점입니다. 월급의 8퍼센트를 연료비로 쓰던 사람이 전기로 옮겨간 이유는 환경 신념이 아니라 산술이었습니다. 10년간 자신의 혼다를 최고의 미녀라 부르던 애호가조차 몇 루피를 아낄 수 있다면 기꺼이 바꾸겠다고 말했습니다.둘째, 산업 정책의 방향입니다. 파키스탄은 관세를 낮춰 전환 속도를 얻었지만 제조 역량은 중국에 넘겨주었습니다. 속도와 자립 사이의 선택은 결코 공짜가 아닙니다. 우리 사회도 전기 이륜차와 배달 차량, 시니어 이동 수단을 논할 때 이 균형을 냉정하게 따져야 합니다.셋째, 시니어 세대의 시선입니다. 우리는 석유 파동과 급격한 산업 전환을 몸으로 겪은 세대입니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값싼 수입에 기대다 기반을 잃었던 경험도, 반대로 과감한 전환으로 활로를 찾았던 경험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그 경험이야말로 유행에 휩쓸리지 않으면서도 변화를 외면하지 않는 판단의 근거입니다.전환은 막을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전환이 안전 기준과 품질, 그리고 우리 산업의 뿌리를 함께 지키며 이루어지도록 요구하는 일은 우리의 몫입니다. 새것을 무조건 반기지도, 옛것에 무작정 매달리지도 않는 균형이 지금 필요합니다.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31. 452

    [아침마다 지혜 #448] 딸과 손녀의 심장을 지키는 일

    젊은 여성의 심장은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닙니다우리는 오랫동안 심장병을 중년 이후 남성의 병으로 여겨 왔습니다. 담배를 많이 피우고 술자리가 잦으며 배가 나온 사십 대 남성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최근 미국 의료계에서 나오는 경고는 이 오래된 상식을 정면으로 흔들고 있습니다. 이십 대에서 사십 대에 이르는 젊은 여성층에서 심장질환의 발병과 사망이 뚜렷하게 늘고 있다는 것입니다.숫자가 말해 주는 변화미국 뉴욕타임스가 최근 소개한 연구 결과는 다소 충격적입니다. 20세에서 24세 사이 여성 가운데 심장질환을 지니게 되는 비율이 현재 약 4명 중 1명 수준인데, 2050년에는 3명 중 1명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는 내용입니다. 더 눈길을 끄는 대목은 55세 미만 연령대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할 확률이 여성 쪽이 남성보다 높다는 지적입니다.미국 매사추세츠 종합병원 계열 여성심장건강 프로그램을 이끄는 에밀리 라우 박사는 심장질환이 사실상 여성의 질환이라고 단언했습니다. 다만 그는 위험을 낮추는 일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점도 함께 강조했습니다. 병의 실체를 정확히 아는 것이 예방의 출발점이라는 뜻으로 읽힙니다.같은 위험 요인, 다른 무게젊은 여성의 심장질환이 늘어난 첫 번째 이유는 단순합니다. 비만과 고혈압, 당뇨병이 젊은 나이에 흔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위험 요인들이 남녀에게 똑같은 무게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습니다.연구에 따르면 당뇨병을 지닌 여성은 남성보다 당뇨병으로 인한 심장질환에 걸릴 위험이 더 높습니다. 흡연이 심장에 미치는 해악도 여성 쪽이 더 큽니다. 고혈압은 더 미묘합니다. 로스앤젤레스 시더스사이나이 병원의 노엘 베어리 메르츠 박사는 여성의 경우 남성보다 낮은 혈압 수치에서부터 이미 위험이 시작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남성 기준으로 만든 잣대를 여성에게 그대로 대면 위험 신호를 놓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의료진이 권하는 관리 목표는 명확합니다. 혈압은 120-80 미만, 나쁜 콜레스테롤로 불리는 저밀도 지단백 콜레스테롤은 데시리터당 100 밀리그램 미만, 체질량지수는 25 미만, 평균 혈당을 보여 주는 당화혈색소는 5.6 이하입니다. 노스웨스턴 메디신의 프리야 프리니 박사는 자신의 건강 수치를 아는 것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무기이며, 시작이 이르다고 나무랄 나이는 없다고 했습니다.반가운 소식도 있습니다. 운동의 효과에서는 성별 차이가 여성에게 유리하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여성은 남성이 하는 운동량의 절반만으로도 심혈관 질환 위험과 사망률에서 같은 수준의 감소 효과를 얻는다는 연구 결과가 보고되었습니다.여성만이 지나는 길목여기에 여성에게만 해당하는 위험 요인들이 더해집니다. 사십 세 이전에 찾아오는 조기 폐경, 다낭성 난소증후군, 임신성 당뇨병과 자간전증 같은 임신 합병증, 그리고 루푸스나 류마티스 관절염처럼 여성에게 유독 많이 나타나는 염증성 자가면역질환이 그것입니다.다만 해석에는 신중함이 필요합니다. 시더스사이나이의 마사 굴라티 박사는 이런 질환들이 심혈관 위험을 높이는 것은 분명하지만, 반드시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밝혔습니다. 임신 중 고혈압이 심장병을 부르는 것인지, 아니면 원래 있던 혈관의 이상이 임신을 계기로 드러난 것인지 아직 명확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과학은 이렇게 조심스럽게 말할 때 오히려 신뢰할 만합니다.문턱을 낮추는 일정작 가장 현실적인 장벽은 의학이 아니라 생활에 있습니다. 조사에 따르면 이십 대에서 사십 대 여성은 고령층 여성보다 단골 주치의를 두는 비율이 낮고, 비용 부담 때문에 진료를 미루거나 건너뛰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산부인과 진료만으로 일차 진료를 대신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의료진이 권하는 검사는 어렵지 않습니다. 스무 살이 넘으면 기본 지질 검사를 받고, 필요할 경우 심장 컴퓨터단층촬영으로 관상동맥 석회화 점수를 확인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혈관에 콜레스테롤 침착물이 쌓이는 과정은 매우 느리고 조용히 진행되기 때문에, 증상이 나타나기 전에 미리 들여다보는 일이 의미를 갖습니다. 염증 지표인 시반응성 단백질 검사도 거론되지만, 아직 모든 사람에게 권할 만큼 근거가 충분하지는 않다는 신중론이 함께 붙습니다.시니어 세대가 할 수 있는 일이 대목에서 우리 시니어 독자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이 기사는 젊은 여성의 이야기이지만, 정작 그 젊은 여성들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부모 세대입니다. 딸과 며느리, 손녀에게 병원비를 아끼지 말라고 말해 줄 수 있는 사람, 출산 때 겪었던 고혈압이나 임신성 당뇨를 그냥 지나간 일로 묻어 두지 말라고 일러 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우리입니다.우리 세대는 아파도 참는 것을 미덕으로 배웠습니다. 그 인내가 가정을 지탱한 힘이었음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내와 방치는 다릅니다. 우리가 몸으로 겪어 알게 된 그 차이를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는 것이 경험을 가진 세대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혈압계 하나를 사서 자녀 집에 놓아 주는 일, 명절에 안부를 물으며 건강검진 결과를 확인하는 일이 거창한 정책보다 앞설 때가 있습니다.가족의 건강을 지키는 일은 결국 오래된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관심을 가지고, 챙기고, 잔소리를 마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만 그 잔소리가 근거를 갖출 때 비로소 설득이 됩니다. 오늘 소개한 수치들이 여러분의 잔소리에 힘을 실어 주기를 바랍니다.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본 칼럼은 뉴욕타임스 인터내셔널판에 보도된 젊은 여성층 심장질환 관련 기사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하였으며, 원문을 직접 인용하지 않고 사실관계를 정리하여 서술하였습니다.※ 본문에 인용된 발병률 전망치와 성별 비교 수치는 원 보도가 소개한 해외 연구 결과이며, 국내 상황에 그대로 적용되지는 않습니다. 국내 여성 심혈관 질환 통계는 통계청 사망원인통계 및 국민건강보험공단 자료를 통한 별도 확인이 필요합니다.※검사 항목별 권고 수치는 미국 의료계 기준이므로, 국내 진료 지침과의 차이 여부를 게재 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32. 451

    [아침마다 지혜 #447] 유학생이 줄자 대학이 흔들립니다

    영국 고등교육의 여름, 그 명암지난 8월 14일 영국은 고등학교 졸업반 학생들의 A레벨 성적이 발표되는 날이었습니다. 성적은 예년보다 향상되었고, 잉글랜드 지역 18세 학생 19만 4,800명이 1지망 대학에 합격하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같은 날 영국 대학가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정반대였습니다. 여러 대학의 부총장들이 영국 고등교육 시스템에 재정적 난국이 닥칠 것이라고 잇달아 경고하고 나선 것입니다.경고의 근거는 영국 내무부가 공개한 통계였습니다. 7월 말까지 접수된 유학생 비자 신청 건수가 전년 같은 기간보다 11퍼센트 줄었습니다. 여름철 비자 신청은 가을 새 학기 등록으로 직결되는 선행 지표입니다. 이 추세가 이어지면 상당한 손실이 불가피하며, 일부 대학에서는 유학생 등록이 최대 30퍼센트까지 감소할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옵니다.킹스 칼리지 런던의 시티지 카푸르 부총장은 이번 감소가 이미 예상되었던 비관적 시나리오와 부합한다고 진단했습니다. 그가 제시한 계산은 단순하면서도 무겁습니다. 유학생 다섯 명이 줄면 대학 일자리 하나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는 학자금 대출 부담과 졸업 후 취업 불안에도 불구하고 대학 진학을 향한 자국 학생들의 의지는 그 어느 때보다 강하다는 점을 희망의 근거로 들었습니다.등록금 동결이 남긴 청구서문제의 뿌리는 오래된 정치적 선택에 있습니다. 영국의 역대 정부는 2017년부터 2025년까지 자국 학부생 등록금을 9,250파운드(약 1,665만 원)에 묶어 두었습니다. 명목 금액은 그대로였지만 물가가 오르면서 실질 가치는 3분의 1가량 떨어졌습니다. 대학은 그 격차를 유학생 등록금으로 메워 왔습니다.그런데 최근 도입된 유학생 등록금 부담금이 이 구조에 균열을 냈습니다. 대학은 유학생 한 명당 925파운드(약 166만 5천 원)를 정부에 납부해야 합니다. 이후 허용된 자국 학생 등록금 인상분은 이 부담금으로 대부분 상쇄될 전망입니다. 등록금 인상이 대학 재정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등록금 인상 제도를 설계했던 데이비드 윌리츠 전 대학부 장관은 대학들이 재정적 압박에 놓인 주된 이유가 8년에 걸친 등록금 동결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재정 위기로 대학이 파산할 위험도 분명히 있지만, 더 걱정스러운 것은 학생들이 받는 교육의 질이 전반적으로 깎여 나가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이미 현실이 된 감축경고는 예측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연구 중심 대학들의 모임인 러셀 그룹 소속인 엑서터 대학은 콘월 펜린 캠퍼스의 지리학 과정을 즉시 폐지한다고 발표했습니다. 대학 측은 지원자들에게 실망을, 관련 교직원들에게 어려움을 안기는 결정임을 인정했습니다. 학과 하나가 사라지는 일은 통계 한 줄이 아니라, 한 지역의 학문 기반과 일자리가 함께 사라지는 일입니다.러셀 그룹의 리비 해켓 최고경영자는 인기 없는 부담금을 비롯한 일련의 정책 결정이 그동안 쌓아 온 성공을 스스로 허무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최근 분석을 인용해 유학생 감소로 영국이 잃은 순경제적 이익이 30억 파운드(약 5조 4천억 원)에 이른다고도 밝혔습니다. 다만 이 수치는 특정 기관의 분석에 근거한 것으로, 별도의 검증이 필요한 대목입니다.대학 부총장 협의체인 유니버시티스 유케이의 비비안 스턴 최고경영자는 이번 비자 통계가 정책 당국에 경종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이민 문제를 둘러싼 정치적 압박을 이해한다면서도, 정부가 유학생 수를 조절하려 했다면 그 교정이 지나쳤다고 평가했습니다. 필요한 것은 안정과 국제 경쟁력 회복을 위한 최소한의 도움이라는 것입니다. 반면 기술부의 자키 스미스 장관은 대학 과정이 그만한 값어치를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향후 등록금 인상은 교육의 질과 연계될 것임을 시사했습니다.우리 사회에 던지는 질문이 논쟁은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대학 역시 오랜 기간 등록금이 사실상 동결된 상태에서 학령인구 감소를 맞았고, 그 빈자리를 외국인 유학생 유치로 채워 왔습니다. 구조가 닮았다면 위험도 닮습니다. 유학생 유입은 출입국 관리와 이민 정책의 영향을 곧바로 받습니다. 정치적 판단 하나가 대학 재정을 흔드는 구조라면, 그 대학이 감당하던 지역 경제와 교육의 질도 함께 흔들립니다.여기서 균형이 필요합니다. 국경 관리와 사회 질서를 지키는 일은 국가의 기본 책무입니다. 검증 없는 개방은 결국 사회적 신뢰를 갉아먹습니다. 그러나 재정 구조를 손보지 않은 채 유입만 조이는 방식은, 지키려던 것을 지키지 못하고 잃지 않아도 될 것까지 잃게 만듭니다. 곧 자격과 질에 대한 엄격한 기준을 세우되 그 기준을 통과한 인재에게는 안정적인 환경을 보장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시니어 세대에게 대학은 자녀를 보내던 곳만이 아닙니다. 평생교육과 재취업 훈련, 지역 문화의 거점으로서 여전히 우리 삶에 닿아 있습니다. 지방 대학 하나가 문을 닫으면 그 지역의 강좌와 도서관과 상권이 함께 줄어듭니다. 오랜 세월 사회의 부침을 지켜본 세대라면, 눈앞의 정치적 셈법보다 제도의 지속 가능성을 먼저 묻는 안목을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 영국 대학들이 지금 겪는 진통은 그 안목이 왜 필요한지를 보여 주는 교과서와 같습니다.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편집 참고 원자료는 영국의 더 가디언(The Guardian UK), 2026년 8월 14일자 보도. 본문은 원문을 인용하지 않고 사실관계를 재구성하여 서술하였습니다.환율 기준: 1파운드 약 1,800원으로 환산하였습니다. 확인 요망 사항: 순경제적 이익 30억 파운드 손실 수치는 러셀 그룹이 인용한 제3자 분석에 근거한 것으로, 독립적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유학생 등록 30퍼센트 감소 전망은 일부 대학의 우려를 전한 것으로 확정된 수치가 아닙니다. 한국 대학의 등록금 동결 기간과 유학생 유치 규모는 교육부 최신 자료를 참고하시기를 바랍니다. 

  33. 450

    [아침마다 지혜 #446] 일자리 광고에 속아 전선으로, 국경을 넘는 모병 사기의 그늘

    한 통의 취업 제안이 인생을 바꿉니다프랑스 일간지 르파리지앵이 지난 8월 13일 국제면에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사이버 보안 학위를 가진 33세의 브라질 청년은 2024년 1월 러시아 국영 방산기업의 채용 제안을 받고 현지로 향했습니다. 도착해 보니 기다리고 있던 것은 러시아어로 작성된 서류 뭉치였고, 통역인은 통상적인 입사 절차라고 안심시켰다고 합니다. 몇 차례 서명을 마친 그가 실제로 체결한 것은 1년짜리 군 입대 계약이었습니다. 그는 곧바로 전선에 배치되었고, 부상을 입은 뒤 2024년 6월 우크라이나군에 투항해 전쟁 포로가 되었습니다.이 사례는 우연한 불운이 아닙니다. 모병 실태를 추적하는 우크라이나 시민단체 관계자는 건설·경비·창고·운송 같은 고임금 민간 일자리를 미끼로 사람을 모은 뒤, 국방부 소속으로 일하게 된다는 정도만 알리고 실제 전투 투입 사실은 숨기는 구조라고 설명했습니다. 며칠이면 실상이 드러납니다. 민간 계약은 입대로 바뀌고 여권은 압수되며, 편도 항공권은 참호로 이어집니다.숫자가 말하는 규모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는 4년에 걸친 전쟁으로 러시아 측 군사적 손실을 사망과 부상을 합쳐 약 120만 명으로 추산합니다. 국제인권연맹이 발표한 조사에서는 2022년 2월 이후 130개국 이상에서 최소 2만 7천 명의 외국인이 모집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여기에 북한이 파병한 1만 4천 명 규모의 병력이 더해집니다. 아프리카 35개국 출신 신병 1,417명을 확인한 한 조사 단체는 그 가운데 300명 이상의 사망을 확인했다고 밝혔습니다. 조사에 참여한 연구자는 이들 대부분이 형식적인 훈련만 받은 뒤 투입되어 평균 6개월을 넘기지 못한다고 전했습니다. 다만 이 수치들은 전시 상황에서 수집된 것으로, 기관별 집계 기준이 달라 확정된 통계로 보기는 어렵습니다.제시되는 대가는 월 2,000달러에서 2,500달러(약 276만 원에서 약 345만 원)입니다. 스리랑카 평균 임금의 열 배에 이르는 금액이며, 여기에 러시아 여권 발급이 덧붙기도 합니다. 모집 공고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 퍼지고, 현지 알선 조직이 이를 중계합니다. 러시아 내에서 단속에 걸린 불법 체류자에게 구금이나 추방 대신 입대 계약을 제시하는 방식도 확인되었습니다.가난이 만든 통로프랑스 국제관계연구소의 한 연구원은 이 현상의 핵심 동기를 더 나은 삶에 대한 기대로 짚었습니다. 문제는 그 기대를 파고드는 구조입니다. 본국의 일자리 부족, 정보 격차, 계약서 언어를 확인할 방법이 없는 처지가 겹치면 개인의 판단력은 거의 작동하지 못합니다. 러시아 당국은 관여를 부인하고 있으나, 조사 단체는 정보기관의 승인 흔적이 담긴 외국인 전투원 명단을 확보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역시 70개국 약 1만 명의 외국인이 복무 중이라고 밝혔지만, 정식 절차를 거친 자원 의용군이라는 점에서 성격이 다릅니다.각국 사법 당국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페루 검찰은 지난 5월 인신매매 혐의 수사에 착수했고, 담당 변호인은 최소 800명의 자국민이 복무 중인 것으로 추정합니다. 볼리비아는 7월에 수사를 열었으며, 인도와 네팔, 스리랑카는 2024년부터 관련 절차를 진행해 왔습니다.우리 사회가 읽어야 할 대목이 문제를 먼 나라 이야기로 넘기기 어려운 이유가 있습니다. 고수익을 내건 해외 취업 알선의 구조는 최근 몇 해 동안 우리 사회가 겪은 동남아시아 취업 사기와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항공권과 숙소를 대신 마련해 주고, 현지 도착 직후 여권을 회수하며, 언어를 알 수 없는 서류에 서명을 요구하는 절차는 국경만 다를 뿐 동일한 수법입니다. 표적이 되는 대상도 취업 준비 세대에서 은퇴 후 재취업을 찾는 연령대로 넓어지고 있습니다.여기에서 시니어 세대의 역할이 있습니다. 오랜 사회생활을 통해 계약서의 무게와 조건이 지나치게 좋은 제안의 뒷면을 몸으로 익힌 세대입니다. 자녀와 손주 세대가 해외 일자리를 앞두고 있을 때 여권 보관과 계약서 원문 확인, 현지 공관 연락처 확보를 짚어줄 수 있는 사람은 결국 경험을 가진 어른입니다. 이는 간섭이 아니라 안전망의 한 축입니다.원칙이 사람을 지킵니다국가는 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고, 개인은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집니다. 이 두 원칙은 대립하지 않습니다. 다만 정보가 차단되고 서류를 읽을 수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진 서명은 선택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국제 사회가 이 문제를 인신매매의 관점에서 다루기 시작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시신도 사망 진단서도 없이 소식이 끊긴 가족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사연은 어느 나라 국민인지와 무관하게 같은 무게를 갖습니다. 우리 사회가 지켜야 할 질서는 국경을 지키는 일에서 끝나지 않고, 국경을 넘는 사람을 속이지 못하게 하는 데까지 이어져야 합니다. 지원해야 할 것은 지원하고 요구해야 할 것은 요구하는 균형, 그 원칙이 결국 사람을 지킵니다.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본 칼럼은 르파리지앵(Le Parisien) 2026년 8월 13일 자 국제면 보도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이며, 원문의 직접 인용 없이 사실관계를 정리하였습니다.러시아 측 군사적 손실 규모, 외국인 모집 인원, 아프리카 출신 사망자 수 등은 각 기관의 추정치로서 독립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수치입니다. 해외 취업 관련 피해 상담 및 재외국민 보호 관련 연락처는 게재 전 외교부 영사콜센터 안내 기준으로 확인 후 병기하시기 바랍니다.

  34. 449

    [아침마다 지혜 #445] 인공지능이 삼킨 뉴스, 그 대가는 누가 치르고 있습니까

    지난 7월 22일 구글이 프랑스에서 검색 결과 맨 위에 요약문을 띄워 주는 'AI 개요(AI Overviews)' 서비스를 시작했습니다. 이용자가 무역 전쟁을 검색하면 관세와 보복 조치가 오가는 경제적 충돌이라는 정의와 함께 최근 정세까지 한 문단으로 정리된 답이 나옵니다. 물론 그 아래에는 정보를 끌어온 언론사로 이동하는 링크가 붙습니다. 문제는 그 링크를 누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데 있습니다. 미국 퓨 리서치 센터의 조사에 따르면 AI 요약이 먼저 제시된 경우 원문으로 이동하는 이용자는 여덟 명 중 한 명에도 미치지 못하는 8퍼센트 수준이었습니다.클릭이 사라진 자리분석업체 차트비트가 2,500개 뉴스 사이트를 살펴본 결과, 2024년 11월부터 2025년 11월까지 1년 사이 검색 엔진을 통해 들어온 방문자가 33퍼센트 급감했습니다. 국경없는기자회(RSF)의 기술·저널리즘 부문 책임자 뱅상 베르티에는 AI 요약 서비스가 전 세계적으로 트래픽 감소를 앞당겼다고 진단하며 언론사들의 공동 대응을 촉구했습니다.기반은 이미 얇아져 있었습니다. 프랑스 부수산정협회 자료로 종이 신문 유통 부수는 2016년 37억 부에서 2025년 26억 부로 줄었고, 잡지는 13억 6,000만 부에서 8억 9,900만 부로 내려앉았습니다. 종이 매체 광고 시장은 2026년 상반기에만 11.8퍼센트가 추가로 빠졌습니다. 로이터 저널리즘 연구소가 48개 시장을 조사한 결과 이용자의 54퍼센트가 언론사 사이트나 앱이 아니라 플랫폼과 알고리즘을 통해 주 1회 이상 뉴스를 접하고 있으며, 뉴스를 얻는 데 챗봇을 쓴다는 응답은 1년 만에 3퍼센트포인트 올라 평균 10퍼센트가 되었습니다. 프랑스 시청각·디지털커뮤니케이션규제청(Arcom)의 마르탱 아즈다리 청장은 아직 비중은 완만해 보여도 그 확산 속도가 두려울 만큼 빠르다고 지적했습니다.편집국의 감원, 그리고 쏠림여파는 곧바로 일자리로 옮겨붙었습니다. 프랑스 언론 노조들의 집계로 올해 1월 이후 사라졌거나 폐지 절차를 밟는 자리가 1,331개에 이릅니다. 한 주간지는 교열 인력을 줄이는 대신 소수의 AI 감독 인력을 두었고, 한 전문매체 그룹은 편집기자 19명을 감원하면서 AI의 지원을 받는 편집 임원 5명만 채용하겠다고 밝혔습니다.더 눈여겨볼 대목은 쏠림입니다. 소르본대학의 올리비에 코흐 강사가 동료 연구자와 함께 프랑스 국립시청각연구소(INA) 매체에 발표한 분석에 따르면, 챗봇이 언론사로 보내 주는 트래픽 가운데 단 9개 매체가 절반을, 57개 매체가 80퍼센트를 차지했습니다. 대형 그룹만이 알고리즘의 요구에 맞춰 생산 체계를 갖출 수 있기에, 지역지와 중소 매체는 먼저 말라 죽는 구조입니다. 정보의 다양성이 줄어드는 일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닙니다.신뢰라는 자산이 깎여 나갑니다가짜 뉴스와 여론 조작이 새로운 현상은 아닙니다. 다만 AI는 그 규모를 키우고 탐지는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진짜처럼 보이는 딥페이크 영상, 자동 생성된 가짜 뉴스 사이트가 쏟아집니다. AI 도구는 정보를 어떤 기준으로 골라 배열했는지 밝히지 않으며, 언론 보도와 기업 보도자료, 이해관계 단체의 주장, 출처가 수상한 글을 한 답변 안에 뒤섞어 놓습니다. 확인된 사실과 해석, 그리고 그럴듯하게 지어낸 환각(hallucination) 정보가 같은 문체, 같은 확신으로 제시됩니다. 아즈다리 청장은 생성형 AI가 이용자가 이미 믿고 있는 바를 강화해 주는 아첨형 응답에 기반한다고 짚었습니다. 듣기 좋은 답만 돌려받는 도구는 확증 편향을 굳히고 공통의 사실 기반을 조각냅니다.각자도생을 넘어2024년 이후 뉴욕타임스, 르몽드, AP통신, 로이터, AFP통신 등이 애플, 오픈AI, 메타 등과 개별 계약을 맺었습니다. 당장의 수익은 되지만 협상력 있는 대형사와 취약한 매체 간 격차를 벌리는 부작용도 큽니다. 그래서 공통 기준을 세우려는 국제 연합체 SPUR가 만들어졌고, 프랑스 일반뉴스언론연합은 300개 매체를 대표해 협상에 나서며 경쟁당국 제소까지 검토하고 있습니다. 오픈AI와 소송 중인 뉴욕타임스의 아서 그레그 설즈버거 발행인은 지난 6월 세계신문협회 총회에서 이를 전례 없는 규모의 지식재산권 침해라고 규정했습니다.한국의 시니어 독자께 드리는 말씀우리 사정도 다르지 않습니다. 포털과 검색, 그리고 이제는 대화형 AI가 뉴스를 만나는 첫 관문이 되었습니다. 저는 두 가지를 함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먼저 요구할 것은 요구해야 합니다. 남의 노동으로 만든 저작물을 값없이 학습해 쓰는 관행은 정당한 거래가 아닙니다. 창작물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원칙은 낡은 정서가 아니라 시장 질서의 기본입니다. 동시에 언론 역시 스스로에게 요구해야 합니다. 요약 한 문단으로 대체되는 기사만 쏟아 낸다면 AI를 탓할 자격이 옅어집니다. 현장 취재와 검증, 맥락을 짚는 해설처럼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일에 값이 매겨져야 합니다.다음으로 독자의 몫이 있습니다. 시니어 세대는 활자와 방송, 인터넷, 그리고 이제 인공지능까지 네 번의 매체 전환을 몸으로 겪은 유일한 세대입니다. 새로운 도구를 두려워할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요약문 아래 출처를 한 번 눌러 보는 습관, 중요한 사안은 두 곳 이상에서 확인하는 절제, 지나치게 내 생각과 꼭 맞는 답변일수록 의심해 보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오래 살아온 이가 지닌 분별의 문제입니다.정보에 값을 치르지 않는 사회는 결국 값싼 정보만 갖게 됩니다. 편리함의 대가로 무엇을 내주고 있는지, 지금이 물어야 할 때입니다.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수정삭제 주소복사▲ 본 이미지는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생성형 인공지능으로 제작된 것입니다.

  35. 448

    [아침마다 지혜 #444] 전동킥보드, 작은 바퀴가 만든 큰 부상

    영국 외상 데이터가 보여준 경고… 시니어의 보행 안전과 손주 세대의 교육을 함께 생각할 때입니다작은 바퀴가 머리를 향합니다영국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국가 주요 외상 등록 자료를 분석한 연구가 최근 국제 학술지 사이언티픽 리포트(Scientific Reports)에 게재되었습니다. 런던 첼시 앤 웨스트민스터 병원의 정형외과 전문의 데이비드 보단스키(David Bodansky) 박사 연구진이 2020년부터 2022년까지 18개 도시에서 발생한 전동킥보드, 오토바이, 자전거 충돌 사고를 비교한 결과입니다.결론은 분명했습니다. 전동킥보드 이용자는 오토바이 운전자에 비해 외상성 뇌 손상이나 혈관 손상을 입을 확률이 3배 이상 높았고, 장기 손상 확률도 1.5배 높았습니다. 성인 부상 사례 가운데 3분의 1 이상이 뇌 손상이었습니다. 다만 골절 위험은 오히려 자전거나 오토바이보다 낮았습니다. 뼈는 덜 부러지는 대신 머리와 장기가 다친다는 뜻이니, 결코 안심할 대목이 아닙니다.보단스키 박사는 그 원인으로 기기 설계를 지목했습니다. 바퀴가 작아 도로 파임, 이른바 포트홀에 쉽게 걸리고, 바퀴가 끼는 순간 운전자는 앞으로 튕겨 나가 머리부터 지면에 닿는다는 설명입니다. 헬멧을 착용했다고 답한 이용자는 6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여성과 청소년에게 더 가혹한 구조이번 분석에서 눈에 띄는 것은 뚜렷한 성별 차이입니다. 여성은 남성보다 충돌 사고 관여 비율이 약 3분의 1 더 높았고, 심각한 부상을 보고한 비율은 2배가 넘었습니다. 연구진은 핸들바 높이가 통상 남성 체형을 기준으로 설계되어 여성 이용자의 흉부 부상이 늘어난다고 보았습니다. 18세 미만 청소년도 전체 부상자의 16퍼센트를 차지했습니다.노팅엄 트렌트 대학교의 교통심리학 수석강사 페티야 벤치슬라보바(Petya Ventsislavova) 박사는 2024년 연구에서 이용자의 절반 이상이 인도를 주행하고 2인 동승도 흔하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는 동력 차량임에도 자동차나 오토바이와 달리 정식 교육 이수 요건 없이 도입된 점을 문제의 뿌리로 지목하며, 포괄적 입법과 의무 안전교육을 촉구했습니다.영국에는 개인 소유 전동킥보드가 약 100만 대 있는 것으로 추정되나, 공공 도로와 인도, 자전거 도로에서 합법적으로 운행할 수 없습니다. 경찰이 기기를 압수하는 한편 정부는 대여 시범사업을 지원하는, 다소 모순된 상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영국 교통부는 연구 결과가 우려스럽다면서도, 법 개정에 앞서 통제된 환경에서 시범사업을 진행하는 중이라고 밝혔습니다.우리 사회가 읽어야 할 대목이 연구는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2021년 도로교통법 개정으로 개인형 이동장치에 원동기장치자전거 면허 이상, 헬멧 착용, 인도 주행 금지, 2인 탑승 금지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제도는 영국보다 앞서 정비된 셈입니다. 그러나 규정이 있다는 것과 지켜진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무면허 청소년의 주행, 헬멧 없는 질주, 인도 위 곡예 운행은 지금 이 순간에도 목격됩니다.특히 시니어 독자께 이 사안은 두 겹으로 다가옵니다. 첫째, 우리는 대체로 이용자가 아니라 보행자입니다. 인도를 걷다 뒤에서 소리 없이 다가오는 기기에 부딪히면, 회피 반응이 늦고 골밀도가 낮은 신체는 회복이 더딥니다. 둘째, 우리 손주가 그 기기 위에 서 있습니다. 헬멧 없이, 교육 없이, 면허 없이 말입니다.지원과 요구의 균형새로운 이동수단을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시대에 맞지 않습니다. 저렴하고 편리한 근거리 이동수단은 그 나름의 효용이 있습니다. 다만 이용의 자유를 지원(Fördern)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요구(Fordern)해야 합니다.요구할 것은 명확합니다. 판매·대여 단계에서의 면허 확인 실효화, 헬멧 제공 의무, 학교와 지방자치단체를 통한 의무 안전교육, 그리고 인도 주행과 방치 주차에 대한 실질적 단속입니다. 여기에 여성과 청소년 체형을 고려한 기기 설계 기준도 논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안전은 개인의 조심성에 맡길 사안이 아니라, 제도가 먼저 설계해야 할 공공재입니다.바퀴가 작을수록 사람은 크게 다칩니다. 편리함의 속도가 안전의 속도를 앞지를 때, 그 대가는 언제나 가장 약한 사람이 치릅니다. 질서를 지키자는 말이 낡은 잔소리로 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36. 447

    [아침마다 지혜 #443] 말 없는 마차가 된 소프트웨어, 그리고 우리가 배울 것

    인공지능이 삼킨 구독 소프트웨어 시장의 붕괴가 주는 교훈한 시대를 대표하던 산업이 무너지는 광경지난 8월 8일과 9일 자 월스트리트저널 주말판 1면과 A10면에는 케이트 클라크 기자가 쓴 기사가 실렸습니다. 제목은 인공지능의 종말적 충격 앞에서 소프트웨어 기업들이 스스로를 다시 만들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리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낯선 실리콘밸리의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그 안에 담긴 이치는 우리 시니어 세대가 지난 삶에서 여러 차례 목격했던 그것과 다르지 않습니다.기사에 등장하는 사힐 아가르왈이라는 창업자는 2021년 영업 담당자의 행정 업무를 자동화하는 소프트웨어 회사를 세웠습니다. 투자자들로부터 약 3,000만 달러(약 420억 원)를 모았고, 이듬해 기업 가치는 1억 달러(약 1,400억 원)를 넘겼습니다. 그러나 곧 생성형 인공지능이 등장해 그가 팔던 기능을 손쉽게 대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기존 제품에 인공지능을 덧붙이려던 시도를 두고, 마차에 엔진을 매다는 일 같았다고 회고했습니다. 결국 그는 70명이던 직원을 15명으로 줄이고, 제품을 처음부터 다시 만들었습니다.숫자가 말하는 지각변동구독형 소프트웨어, 이른바 사스(SaaS·Software-as-a-Service) 산업은 2010년대의 총아였습니다. 그러나 워크데이, 세일즈포스, 어도비 같은 상장 대표주자들의 주가는 최근 1년 사이 고점 대비 30퍼센트 이상 내렸습니다. 아이비엠(IBM)은 고객의 지출이 소프트웨어에서 인공지능 하드웨어로 옮겨간다는 실적 경고를 낸 뒤 하루 만에 시가총액 690억 달러(약 96조 6,000억 원)가 사라졌습니다. 업무흐름 관리 기업 에어테이블은 비상장 시절 평가액 110억 달러(약 15조 4,000억 원)에 한참 못 미치는 13억 달러(약 1조 8,200억 원)에 인수 합의가 이뤄졌습니다.반면 방향을 일찍 튼 기업은 살아남았습니다. 고객서비스 소프트웨어 기업 인터콤이 만든 인공지능 상담 대행 제품은 연간 반복 매출 4억 달러(약 5,600억 원)를 달성했고, 세일즈포스가 36억 달러(약 5조 400억 원)에 인수하기로 했습니다. 영업 소프트웨어 기업 공(Gong)은 전 직원을 재교육한 끝에 연간 반복 매출 5억 달러(약 7,000억 원)를 넘겼습니다. 아가르왈의 회사도 이름을 바꾸고 다시 시작해 최근 연간 반복 매출 100만 달러(약 14억 원)를 기록했습니다.문제는 도구가 아니라 일의 주체입니다이 격변의 본질은 기술의 성능이 아닙니다. 시장의 수요가 사람의 일을 거들어 주는 도구에서, 사람을 대신해 일을 끝내는 주체로 옮겨갔다는 데 있습니다. 도구는 사람의 숙련을 전제로 하지만, 대행자는 사람의 자리를 전제로 합니다. 그래서 기존 기업들이 인공지능을 제품에 덧붙이는 방식으로는 버틸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한 창업자의 표현대로, 두 사람의 기술자가 몇 주 만에 똑같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사업이라면 그 사업은 이미 존립 근거를 잃은 셈입니다.여기서 짚어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이 변화의 속도는 시장의 판단력을 앞질렀습니다. 불과 몇 해 전 수조 원의 가치를 인정받던 기업들이 지금은 청산을 상담하고 있습니다. 스타트업 폐업 절차를 돕는 한 회사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의뢰 고객의 51퍼센트가 소프트웨어 또는 정보기술 서비스 기업이었으며, 1년 전 44퍼센트보다 늘었다고 합니다. 열광이 판단을 대신할 때 어떤 대가가 따르는지를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우리 사회가 새겨야 할 것첫째, 자산의 문제입니다. 인공지능 관련 투자 열기는 지금 우리 주변에도 밀려와 있습니다. 그러나 위 사례는 같은 기술 물결 안에서도 승자와 패자가 극명하게 갈린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평생 모은 자산을 유행하는 이름 하나에 맡기는 일은 삼가야 합니다. 시니어의 자산은 회복할 시간이 짧다는 점에서 젊은 세대의 그것과 성격이 다릅니다.둘째, 일자리의 문제입니다. 이번에 무너진 것은 육체노동이 아니라 문서 정리, 자료 조사, 반복 사무 같은 이른바 사무직 업무였습니다. 정년 이후 재취업 시장에서 시니어가 주로 향하던 영역과 상당 부분 겹칩니다. 정부와 기업이 시니어 일자리를 설계할 때, 인공지능이 쉽게 대체하는 업무에 예산을 몰아넣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야 합니다.셋째, 태도의 문제입니다. 살아남은 기업들의 공통점은 기술을 쫓아간 것이 아니라 전 직원을 다시 가르쳤다는 데 있습니다. 사회는 시니어에게 배울 기회를 충분히 제공해야 하고, 시니어 또한 배우기를 그만두지 않아야 합니다. 저는 이것이 시혜가 아니라 상호 존중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변화의 속도는 우리가 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지킬 것인지는 우리가 정할 수 있습니다. 오래 축적한 판단력과 신중함은 인공지능이 복제하기 가장 어려운 자산입니다. 유행에 휩쓸리지 않되, 배우기를 멈추지 않는 것. 이 오래된 원칙이 지금처럼 유효했던 때도 드뭅니다.용어: 사스(SaaS)는 소프트웨어를 설치하지 않고 인터넷으로 빌려 쓰는 구독 방식을 뜻하며, 연간 반복 매출(ARR)은 구독 계약에서 매년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매출 규모를 가리킵니다.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37. 446

    [아침마다 지혜 #442] 낯선 이에게 건네는 가벼운 대화가 만드는 일상의 기적

    일상에서 만나는 모르는 이나 가깝지 않은 이들과 나누는 가벼운 대화는 결코 허비되는 시간이 아닙니다. 월스트리트저널(The Wall Street Journal)의 2026년 8월 6일 자 보도에 따르면, 일상적인 스몰 토크(Small Talk)가 개인의 소속감을 높이고 심리적 안정감을 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신뢰를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이러한 소통은 서로에게 긍정적인 에너지와 위로를 전달하는 훌륭한 계기가 됩니다.스몰 토크는 공동체에 속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본능적인 욕구심리학 분야에서는 자주 마주치지만 깊은 관계는 아닌 이들을 느슨한 유대(Weak Ties)라고 표현합니다. 서식스 대학교(University of Sussex)의 친절 심리학 부교수인 길리언 샌드스트롬(Gillian Sandstrom) 박사는 인간에게는 공동체에 속하고자 하는 본능적인 욕구가 존재하며, 스몰 토크(Small Talk)가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설명합니다. 타인과의 가벼운 교류는 스스로가 가치 있는 존재임을 느끼게 하고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제공합니다. 또한 자신과 다른 시각을 접하게 되어 견문을 넓히고 마음의 짐을 다스리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그러나 최근 사회적 변화로 인해 이러한 대화의 기회는 점차 줄어들고 있습니다. 연구진이 추적을 시작한 2005년 이래로 사람들의 하루 평균 발화량은 약 338단어 감소했으며, 이는 1년에 약 12만 단어가 사라진 셈입니다. 무인 주문기 활용 증가와 재택근무 확산 등 비대면 환경이 익숙해지면서 느슨한 유대(Weak Ties) 관계에서 나눌 수 있었던 소소한 대화가 크게 줄었습니다. 가벼운 접점이 줄어들면 관계가 더욱 깊은 우정이나 인연으로 발전할 기회도 함께 감소한다는 것이 전문가의 설명입니다.스몰 토크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공통점을 찾는 것대화를 시작할 때 거절당하거나 어색해질까 봐 느끼는 두려움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대화 주제가 다소 지루하더라도 사람들은 실제로 대화를 나눌 때 예상보다 훨씬 큰 즐거움을 느낍니다. 핵심은 주제의 화려함이 아니라 대화를 주고받는 과정 자체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샌드스트롬 박사는 퀵(QUICK) 전략을 제안합니다. 첫째, 호기심을 담아 가벼운 질문(Question)을 건네는 것입니다. 둘째, 날씨나 기다림처럼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공통점(In Common)을 찾는 것입니다. 셋째, 따뜻한 칭찬이나 진심 어린 친절(Kindness)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설령 대화가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더라도 이는 상대방의 개인적인 상황 때문일 가능성이 크므로, 부담을 내려놓고 다양한 이들과 계속해서 시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이러한 가벼운 소통 문화는 청년과 시니어 모두의 일상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청년 세대의 경우 디지털 기기에서 잠시 눈을 떼고 카페 점원이나 이웃에게 오늘 메뉴를 추천해 달라는 식의 가벼운 질문을 건네며 실전 대화 감각과 사회적 연결감을 넓혀볼 수 있습니다. 한편 시니어 독자분들께서는 산책길이나 동네 마트에서 만나는 이들에게 날씨나 계절의 변화에 대한 따뜻한 덕담을 먼저 건네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시니어분들의 풍부한 삶의 경험에서 나오는 친절한 한마디는 청년들에게 큰 위로가 되며, 대화를 나누는 스스로에게도 건강한 사회적 교류와 삶의 기쁨을 선사하는 훌륭한 계기가 될 것입니다.

  38. 445

    [아침마다 지혜 #441] 통장 잔고가 바닥날 때까지 손가락을 멈출 수 없는 쇼핑

    45초 카운트다운과 스와이프 한 번, 라이브 경매 앱이 만든 새로운 중독 미국의 한 회계사가 어린 시절의 야구 카드 수집 취미를 되살리려 라이브 쇼핑 앱을 내려받았습니다. 마흔다섯의 그가 넉 달 동안 쓴 돈은 약 136만 2,687달러(약 18억 5,000만 원)였습니다. 예금을 헐고, 개인 대출을 받고, 친구에게 손을 벌린 끝에 회사 법인카드 번호까지 결제창에 입력했습니다. 아내가 내역을 발견한 뒤 혼인 관계는 파탄에 이르렀고, 그는 직장을 그만두었으며, 빚을 갚기 위해 퇴직금 계좌를 깨고 집과 자동차, 그동안 모은 카드까지 모두 처분했습니다. 그러고도 올해 다시 3만 7,000달러(약 5,030만 원)를 더 썼다고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에 털어놓았습니다.그가 지목한 원인은 자신의 의지박약만이 아니었습니다. 화면 아래 노란 막대를 오른쪽으로 밀기만 하면 확인 절차도, 결제 확인 화면도 없이 입찰이 끝난다는 것, 그래서 자신이 몇 번을 눌렀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습니다. 본지는 이 사례를 한 개인의 불운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는 설계된 결과에 가깝습니다.24시간 열려 있는 경매장의 구조문제의 플랫폼은 2019년 미국에서 출범한 라이브 커머스(live commerce) 업체 왓낫(Whatnot)입니다. 수집용 카드부터 장난감, 디자이너 의류, 동전, 심지어 생화까지 하루 스물네 시간 실시간 방송으로 경매가 진행됩니다. 회사 발표에 따르면 2025년 한 해에만 신규 계정 2,000만 개가 늘었고, 같은 해 거래액은 약 80억 달러(약 10조 8,800억 원)로 전년의 두 배를 넘었습니다. 올해 매출은 10억 달러(약 1조 3,600억 원)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되며, 기업 가치는 115억 달러(약 15조 6,400억 원)로 평가받고 있습니다.핵심은 속도와 감정입니다. 45초 카운트다운이 돌아가는 동안 진행자는 소리를 지르고, 채팅창은 경쟁 심리로 달아오릅니다. 최근 한 포켓몬 카드 경매에서는 1달러에서 시작한 입찰가가 종료 직전 170달러(약 23만 원)까지 뛰었습니다. 같은 상태의 카드가 인터넷에서 통상 80달러(약 11만 원) 미만에 거래된다는 사실을 확인할 시간은 아무에게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더 뜨거운 것은 이른바 브레이크(break) 방송입니다. 개봉되지 않은 카드 상자의 지분을 미리 사두고, 진행자가 생방송에서 포장을 뜯는 순간에야 자신이 무엇을 얻었는지 알게 되는 방식입니다. 1달러짜리가 나올 수도, 수천 달러짜리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2022년에는 한 방송에서 유명 농구 선수의 유니폼 조각이 박힌 희귀 카드가 나왔고, 그 카드는 그해 240만 달러(약 32억 6,400만 원)에 팔렸습니다. 한 시청자는 카지노에서 옆 사람이 대박을 터뜨리는 장면을 지켜보는 기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다음은 내 차례일지 모른다는 기대, 그것이 바로 사행성의 심리적 원리입니다.동의는 어떻게 무너지는가네덜란드 레이던대학교에서 디지털 법을 가르친 기만적 디자인(deceptive design) 전문가 마크 라이저 씨는 경매의 혼란과 속도 때문에 이용자가 의미 있는 판단을 내릴 순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이 누적된 결과를 동의의 훼손(degradation of consent)이라 불렀습니다. 계약은 형식상 성립하지만, 판단할 시간이 제거된 계약은 온전한 동의라 부르기 어렵다는 뜻입니다.여기에 재판매 차익을 노린 진입이 손실을 키웁니다. 한 이용자는 저평가된 은화를 사들여 감정을 받은 뒤 되팔 계획이었으나, 다섯 달 만에 퇴직연금 계좌를 모두 소진하고 신용카드 열세 장의 한도를 채웠습니다. 감정 결과 동전들의 가치는 지불액에 크게 못 미쳤습니다. 반면 3년간 약 12만 달러(약 1억 6,300만 원)를 쓰면서도 월 3,000달러(약 408만 원)어치를 되팔아 지출을 상쇄한다는 이용자도 있습니다. 애증의 관계라는 그의 표현처럼, 같은 구조가 누군가에게는 부업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파산이 됩니다.법적 다툼도 진행 중입니다. 올해 한 소비자 보호 전문 변호사가 70여 명을 대리해 중재를 신청하면서, 무작위 카드 개봉 방식이 사실상 무허가 복권이며 회사가 규제받는 도박에 필요한 안전장치 없이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회사 측은 이를 전면 부인합니다. 대변인은 도박은 아무것도 얻지 못할 위험을 전제하지만 이 플랫폼에서는 구매자가 언제나 카드를 손에 쥐고 나간다는 점이 결정적 차이라고 반박했습니다. 공동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는 이용자에게 해를 끼치는 서비스를 만들 뜻이 없으며, 앱스토어 평점과 내외부 데이터에서 중독이나 과소비가 심각한 문제로 확인되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회사는 지난해 지출 한도와 시청 시간 제한 기능을 도입했고, 최근 지출을 즉시 중단시키는 도구를 배포하기 시작했으며, 결제 전 비밀번호 입력 절차도 시험할 예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신뢰·안전 담당 인력은 전체 직원 약 1,200명의 3분의 1 수준으로 늘렸다고 합니다. 판단은 규제 당국과 법원의 몫이겠습니다만, 양쪽 주장을 나란히 놓고 보아야 할 사안입니다.우리 곁의 이야기입니다이 일이 태평양 건너의 낯선 소동이라고만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사회 역시 짧은 영상과 실시간 방송 판매에 이미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은퇴 이후 시간이 넉넉해진 시니어에게 하루 종일 켜둘 수 있는 방송, 낯선 이들과 나누는 채팅의 온기, 좋은 물건을 싸게 샀다는 성취감은 결코 가볍지 않은 유혹입니다. 노후 자금은 다시 벌어 채우기 어렵다는 점에서, 젊은 세대보다 시니어의 손실이 회복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도 냉정히 짚어야 합니다.주목할 대목은 연령 확인 문제입니다. 해당 플랫폼에서 판매자는 성인 인증을 거치지만, 구매자에게는 신분증 제시 의무가 없습니다. 손주에게 물려준 낡은 기기와 간편결제가 결합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조부모 세대가 먼저 살펴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절제는 낡은 미덕이 아닙니다본지는 기술 자체를 탓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상거래에는 오래 지켜온 최소한의 예의가 있었습니다. 값을 알아보고, 하룻밤 생각해 보고,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지불하는 것입니다. 45초 카운트다운은 바로 그 예의를 제거하기 위해 설계된 장치입니다. 기업에는 이익을 추구할 자유가 있으나, 판단할 시간을 의도적으로 빼앗는 설계까지 자유의 이름으로 옹호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지원과 요구(Fördern und Fordern), 즉 이용자에게 자기 관리 수단을 충분히 제공하되 사업자에게도 응분의 책임을 요구하는 균형이 필요합니다.동시에 개인의 몫도 분명히 있습니다. 손실을 만회하려 한 번 더 거는 순간이 곧 무너지는 지점이라는 사실은, 시장에서 오래 일해 본 이라면 누구나 압니다. 잃은 돈은 잃은 자리에서 되찾아지지 않습니다. 결제 수단을 늘 열어두지 않는 것, 심야에는 앱을 켜지 않는 것, 지출 한도를 미리 걸어두는 것. 이 소박한 규율이야말로 시니어가 살아온 세월에서 길어 올린 지혜입니다. 절제는 낡은 미덕이 아니라, 가장 앞선 방어 수단입니다.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39. 444

    [아침마다 지혜 #440] 교실의 질서가 무너질 때 무엇이 남는가

    말썽을 부린 학생을 벌하지 않고 대화로 풀어내자는 교육 철학이 미국 공교육 현장에서 시험대에 올랐습니다. 월스트리트 저널(The Wall Street Journal) 2026년 8월 5일 자 오피니언 지면에 실린 한 통의 독자 편지는, 그 철학이 실제 교실에서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현직 경험자의 목소리로 전하고 있습니다. 편지를 보낸 이는 2021년부터 2025년까지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의 학업 성취도가 낮은 공립 중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교사 미셸 디지아코모 씨입니다.주목할 대목은 그가 스스로를 평생 민주당을 지지해 온 사람이라고 밝힌 점입니다. 진보 진영이 오랫동안 옹호해 온 정책을, 그 진영에 속한 교사가 현장 경험을 근거로 비판하고 나선 것입니다. 그는 같은 신문 7월 30일 자에 실린 토니 우드리프 씨의 기고에 강하게 공감한다는 뜻을 밝혔습니다.복원적 정의란 무엇이었나복원적 정의(Restorative Justice)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격리하거나 처벌하기보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대화를 통해 관계를 회복하도록 돕자는 사법·교육 이념입니다. 학교에 적용될 때는 정학이나 퇴학 같은 징계 대신 상담과 면담을 중심에 놓습니다. 소수 인종 학생에게 징계가 편중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제도로, 취지 자체는 충분히 이해할 만합니다. 디지아코모 씨 역시 석사 과정에서 이 제도를 처음 접했을 때는 가능성을 보았다고 술회했습니다.교실에서 벌어진 일그러나 편지가 전하는 현장의 실상은 취지와 상당한 거리가 있었습니다. 그가 설명한 절차는 대략 이러합니다. 한 학생이 수업 중 고성을 지르거나 다른 학생에게 물건을 던집니다. 교사는 먼저 경고를 주고, 자리를 옮기라고 지시합니다. 학생은 대개 이를 따르지 않습니다. 다음 단계로 보호자와 통화하기 위해 절차를 밟지만, 보호자와 연락이 닿지 않거나 닿더라도 문제 해결에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마지막으로 학생을 교실 밖으로 내보내려면 복원적 정의 담당자와의 면담이 반드시 뒤따랐습니다. 교사에게는 점심시간이나 하루 한 번뿐인 수업 준비 시간을 내놓아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게다가 면담을 주도하는 담당자들은 관련 연수를 이수했을 뿐 학력은 고등학교 졸업이 전부였다고 그는 전했습니다. 면담 자리에서 담당자들은 수업을 방해한 학생에게 교사의 통제가 왜 억울하게 느껴졌는지를 말해 보라고 권하곤 했다는 것입니다.결과는 어땠을까요. 징계는 내려지지 않았고, 학생은 아무런 불이익 없이 어른의 관심과 시간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학습했습니다. 방해 행위는 오히려 더 대담해졌습니다. 정학은 매우 드물었지만 교실은 안전하지 않았고, 폭력과 괴롭힘이 잦았으며, 학업 기대치는 바닥이었습니다. 시험지에 이름만 적어 내도 절반의 점수가 주어졌다는 대목에 이르면, 성실한 학생이 치른 대가가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제도가 아니라 설계가 문제였습니다이 사례에서 읽어야 할 것은 대화와 회복이라는 이념 자체의 실패가 아닙니다. 문제는 설계에 있었습니다. 첫째, 책임을 묻는 절차가 사라졌습니다. 회복은 잘못을 인정한 다음에 오는 단계인데, 인정 없이 회복만 남으면 그것은 면죄부가 됩니다. 둘째, 비용이 엉뚱한 곳에 전가되었습니다. 질서를 어긴 학생이 아니라 이를 제지한 교사가 자기 시간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셋째, 제도를 운영할 전문 역량이 뒷받침되지 않았습니다. 회복적 대화는 고도의 상담 기술을 요구하는데, 짧은 연수만으로 그 자리를 채운 것입니다.우리 사회에 던지는 물음우리 교육 현장도 남의 일이 아닙니다. 2011년 학생인권조례가 도입된 이래 체벌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를 채울 합리적 생활지도 수단이 충분히 마련되었는지는 여전히 논쟁 중입니다. 2023년 서울 서이초등학교 교사의 안타까운 죽음 이후 교권보호 관련 법률이 정비되었으나, 현장의 무력감이 해소되었다는 이야기는 아직 들리지 않습니다.시니어 세대는 과거의 교실을 기억합니다. 그 시절의 권위주의적 훈육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 세대가 몸으로 겪어 아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규칙이 예외 없이 적용될 때 비로소 약자가 보호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질서란 강자의 편의가 아니라 다수의 안전을 위한 장치입니다.필요한 것은 관용이냐 처벌이냐의 양자택일이 아니라, 지원(Fördern)과 요구(Fordern)를 함께 세우는 일입니다. 어려운 처지의 학생에게는 상담과 복지를 두텁게 제공하되, 타인의 배울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에는 예측 가능하고 일관된 결과가 따라야 합니다. 그 균형이 무너지면 가장 먼저 피해를 보는 쪽은 언제나 성실하게 제 자리를 지키는 아이들입니다. 교실의 질서를 지키는 일은 결국 그 아이들의 미래를 지키는 일입니다.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수정삭제 주소복사▲ 본 이미지는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생성형 인공지능으로 제작된 것입니다.

  40. 443

    [아침마다 지혜 #439] 다른 아이들의 연필과 지우개

    입학식 날의 필통 하나한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식 날 처음으로 자신이 남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교실 바닥에 펼쳐진 친구들의 연필과 지우개가 유난히 튼튼하고 오래 쓸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독일 일간지 디 벨트(Die Welt)가 2026년 8월 3일자 지면에 소개한 작가 미리암 다부드반디(Miriam Davoudvandi)의 자전적 에세이는 이 장면에서 출발합니다. 당시 그 가정은 아버지의 얼마 되지 않는 병가 수당으로 생계를 잇고 있었다고 합니다.같은 지면은 미국의 유명 방송인이 우유 한 팩 값을 모른다고 말해 여론의 눈총을 받은 일화를 대비시킵니다. 누군가에게는 평생 입에 올릴 일이 없는 말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문장이라는 것입니다. 자녀에게 형편이 안 된다고 말해야 하는 부모의 심정, 그리고 그 말을 듣고 자란 아이의 마음자리를 이 책은 정면으로 다룹니다.독일 사회가 마주한 숫자기사가 인용한 자료에 따르면 독일에서는 빈곤 계층이 중산층으로 올라서기까지 평균 여섯 세대, 약 150년이 걸리는 것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연구에서 지적된 바 있습니다. 또한 독일 국민의 16퍼센트, 1,300만 명 이상이 빈곤층으로 분류된다고 전합니다. 학업 성취도는 부모의 학력보다 소득에 더 크게 좌우된다는 대목도 눈에 띕니다.저자의 가족사는 독일식 빈곤의 전형을 압축합니다. 정치적 이유로 고국을 떠난 아버지, 이주 과정에서 만난 어머니, 그리고 본국에서 간호사로 일했으나 학력과 자격을 인정받지 못해 청소 일에 종사하게 된 어머니의 사연입니다. 이주와 불안정 고용, 질병, 한부모 가정이라는 요소가 겹치며 계층 하락이 굳어졌다는 분석입니다. 해당 저서는 BTB 출판사에서 256쪽 분량, 18유로(약 2만 9천 원)에 출간되었습니다.빈곤이 남기는 마음의 습관이 글이 주목하는 것은 통장 잔고가 아니라 마음의 구조입니다. 기사는 이를 빈곤 마인드셋(Poverty Mindset)이라는 표현으로 정리합니다. 예상치 못한 지출 한 번이 남은 저축을 무너뜨릴지 모른다는 불안이 목덜미에 늘 얹혀 있어, 사실상 평생을 생존 모드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저자는 이 마음의 습관이 인간관계까지 규정한다고 고백합니다. 받은 만큼 되돌려주지 못할 것이라는 감각 때문에 오히려 처음부터 과하게 베풀게 된다는 것입니다. 친구의 부모가 풍기던 여유로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삶의 태도가 미세한 질투심을 남겼다는 서술도 이어집니다. 정원이 있는 집, 정기 구독하는 잡지 같은 사소한 표지들이 계층의 경계선을 그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상황에 따라 말투와 처신을 바꾸는 이른바 코드 스위칭(Code-switching)을 일찍 익혔고, 성적을 자신이 사는 동네 바깥으로 나가는 입장권으로 여겼다고 회고합니다.주목할 점은 저자가 자신의 인생을 성공담으로 포장하기를 거부한다는 대목입니다. 가난을 다루는 사회적 시선이 극단적인 빈곤 현장을 구경거리로 소비하거나, 반대로 소수의 신분 상승 사례만 부각하는 두 갈래로 흐른다고 비판합니다. 이 비판은 자신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상황에도 그대로 겨눠집니다.우리 사회가 새겨야 할 대목이 이야기가 남의 나라 사정만은 아닙니다. 우리 사회의 시니어 빈곤 문제는 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심각한 수준으로 거듭 지적되어 왔습니다. 평생을 아껴 자녀를 가르치고 집 한 채를 마련한 세대가, 정작 자신의 노후에는 병원비와 관리비 앞에서 계산기를 두드리는 현실입니다. 문제는 금액만이 아닙니다. 자녀에게 부담이 될까 아픈 것을 숨기고, 모임 자리를 슬그머니 피하고, 필요한 치료를 미루는 마음의 습관이야말로 우리 세대가 겪는 빈곤 마인드셋의 얼굴입니다.한 가지 더 짚어야 합니다. 소득이 학업 성취를 좌우한다는 지적은 우리에게 더 무겁게 다가옵니다. 사교육 격차가 사실상 세대 간 계층 이동의 문턱을 결정하는 구조에서, 손자녀 교육비를 대신 감당하는 시니어 가정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대를 건너 빈곤이 이어지는 통로를 끊는 일은 개인의 근면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지원과 요구, 그 균형에 대하여그렇다고 모든 책임을 사회에 돌리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절약과 성실, 자립의 가치는 우리 세대가 몸으로 증명해 온 미덕이며 앞으로도 흔들려서는 안 될 기준입니다. 다만 개인의 노력만으로 넘을 수 없는 벽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 또한 냉정하게 인정해야 합니다.필요한 것은 시혜적 온정도, 무조건적 자기 책임론도 아닙니다. 최소한의 안전망은 국가가 흔들림 없이 지켜 주되, 근로 의욕과 자립 노력에 정당한 보상이 돌아가도록 설계하는 일, 즉 지원과 요구의 균형입니다. 기초연금과 노인일자리 사업의 확충 못지않게, 그 재원이 누구에게 어떤 기준으로 쓰이는지 투명하게 검증하는 절차가 함께 가야 합니다.연필 한 자루의 차이를 기억하는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그 기억을 지고 살아갑니다. 우리 사회가 지켜야 할 것은 결국 사람의 품위입니다. 형편이 안 된다는 말을 꺼내야 하는 부모의 수치심과, 아플 때 자식 눈치부터 살피는 시니어의 망설임을 줄여 가는 일, 그것이 오래 살아 본 세대가 다음 세대에 요구할 수 있는 가장 정당한 요구일 것입니다.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수정삭제 주소복사▲ 본 이미지는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생성형 인공지능으로 제작된 것입니다.

  41. 442

    [아침마다 지혜 #438] 44년 된 백화점이 문을 닫던 날, 700명이 줄을 섰습니다

    일본 교토시 니시쿄구에 있던 다카시마야 라쿠사이점(高島屋洛西店)이 지난 8월 3일 영업을 마쳤습니다. 1982년 4월 문을 연 뒤 44년 만입니다. 니혼게이자이신문 보도에 따르면 마지막 영업일 아침, 개점 전부터 약 700명이 줄을 섰습니다. 오전 10시 문이 열리자 매장 측은 선착순 1,000명에게 장미 한 송이씩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점장이 직접 손님에게 꽃을 건네는 모습이 사진에 담겼습니다.줄을 선 이들의 사연은 이 백화점이 지역에서 어떤 자리였는지를 그대로 말해 줍니다. 교토부 무코시에서 온 70대 여성은 20여 년 전부터 한 달에 두세 번씩 다녔다고 했습니다. 각종 행사를 기다리는 재미로 왔는데, 산 위에 있어 접근이 불편했으니 폐점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서운함은 감추지 못했습니다. 이곳이 고향이지만 지금은 요코하마에 사는 40대 여성은 다섯 살 아이의 손을 잡고 마지막을 보러 왔습니다. 어릴 적부터 당연히 그 자리에 있던 시설이었고, 밸런타인데이에 초콜릿을 사던 기억이 떠오른다고 했습니다. 개업 초기부터 이용해 온 50대 주민은 설마 문을 닫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며, 자신은 쉬는 날마다 들렀고 어머니는 거의 매일같이 오셨다고 회고했습니다. 오방떡 가게 앞에는 개점과 동시에 줄이 생겨 오전 10시 30분에는 대기 시간이 한 시간에 이르렀습니다.숫자로 설명되지 않는 것들폐점의 사유는 명료합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교토 도심까지 나가지 않아도 고급품을 살 수 있다는 점으로 지역민의 사랑을 받아 왔으나 채산성이 나빠졌고, 운영사가 지난해 10월 폐점을 발표했다고 전했습니다. 기업이 적자 점포를 정리하는 것은 경영의 상식입니다. 그 판단 자체를 탓할 일은 아닙니다.다만 저희가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따로 있습니다. 라쿠사이 뉴타운은 1976년에 입주가 시작된 계획도시입니다. 올해로 꼭 50년입니다. 그때 삼사십 대였던 입주 1세대는 지금 팔십 줄에 들어섰습니다. 백화점이 문을 닫는 동안 도시도 함께 나이를 먹은 것입니다. 산 위에 조성되어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그 조건은, 젊은 시절에는 감수할 만한 불편이었지만 다리가 무거워진 뒤에는 생활의 벽이 됩니다. 일본에서 이런 처지에 놓인 이들을 쇼핑 약자(買い物弱者)라고 부릅니다. 상권이 빠져나간 자리에 남는 것은 결국 가장 늦게까지 그곳을 지킨 시니어 주민입니다.작게라도 간판을 남긴다는 것폐점 이후의 조치에는 눈여겨볼 지점이 있습니다. 인접 상업시설의 한 구획에 위성 점포 형태로 다카시마야 로즈숍 라쿠사이가 9월 1일 문을 엽니다. 매장 면적은 40제곱미터, 약 12평에 불과하고 취급 품목도 화과자와 양과자, 주류 정도입니다. 점장은 남겨 달라는 고객의 목소리가 많아 작게나마 간판을 남길 수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수요가 높은 품목을 골랐고, 인근 교토점 관할로 두어 긴밀히 연계하겠다는 설명입니다.12평짜리 매장이 백화점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익숙한 이름과 익숙한 물건이 걸어갈 만한 거리에 남는다는 것은, 매출로 환산되지 않는 생활의 안전망입니다. 상권 철수를 절대적 전부가 아니라 정도의 문제로 다룬 이 선택은 기록해 둘 만합니다. 아울러 백화점 부지는 시니어 대상 분양 주택을 짓는 사업자에게 매각되어 2027년 가을 착공, 2029년 가을 입주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상업시설이 물러난 자리에 시니어 주거가 들어서는 셈이니, 그 지역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이보다 분명히 보여 주는 그림도 없을 것입니다.우리 신도시의 시간표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1기 신도시들도 입주 30여 년을 넘겼고, 함께 늙어 가고 있습니다. 지역 백화점과 대형마트의 철수 소식은 이미 낯설지 않습니다. 재건축과 재개발 논의는 활발하지만, 그 사이 일상의 장보기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상대적으로 조용합니다.시장의 판단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적자 점포를 무한정 붙들라는 요구는 결국 누구도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기업이 물러난 자리를 방치하는 것과, 축소된 형태로라도 접점을 남기고 공공이 이동 수단을 보완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지원과 요구는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지역이 상권 유지를 위해 실제로 이용하는 노력을 보이고, 기업은 완전 철수가 아닌 대안을 검토하며, 행정은 이동권을 뒷받침하는 것, 이 세 가지가 맞물릴 때에야 생활 기반은 지켜집니다.44년을 지켜 준 가게에 마지막으로 줄을 선 700명의 마음을 저는 감상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한 세대가 자신의 생활 질서에 보내는 예의였습니다. 그 질서를 지키는 일은 향수가 아니라, 지금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안전에 관한 문제입니다.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수정삭제 주소복사▲ 본 이미지는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생성형 인공지능으로 제작된 것입니다.

  42. 441

    [아침마다 지혜 #437] 초가공식품 기업의 소송전, 시니어의 식탁을 위협하다

    세계 각국 정부가 국민의 건강한 식습관을 위해 마련한 정책이 정작 법정에서 발목을 잡히고 있습니다. 영국 가디언(The Guardian)이 2026년 8월 3일 자 지면에서 보도한 국제 공동 조사 결과는 시니어 독자 여러분께서 눈여겨보실 만합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초가공식품(ultra-processed food, UPF) 기업들이 더 건강한 식단을 장려하려는 정부를 상대로 잇달아 소송을 제기하면서, 비만 위기 대응 노력이 지연되고 있다는 내용입니다.세계보건기구(WHO) 테드로스 아드하놈 게브레예수스 사무총장은 글로벌 식품 기업들이 필수적인 공중보건 조치의 도입을 가로막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각국이 수십억 달러(1달러당 약 1,400원 기준, 약 수조 원)에 이르는 의료비와 법적 비용을 떠안게 되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해악과 이익이 같은 제품에 얽혀 있을 때 산업계가 의구심을 퍼뜨리고 규제를 방해하는 익숙한 패턴이 반복된다는 취지로 설명했습니다.235건의 소송, 누적 600년의 지연이번 조사는 가디언이 비영리 탐사보도 매체 라이트하우스 리포트(Lighthouse Reports), 그리고 로버트 앤드 에델 케네디 인권센터, 시드니대학교, 상파울루대학교, 칼다스대학교 연구진과 함께 4개 대륙 언론 파트너 연합을 구성해 진행한 것으로, 이런 방식의 다국적 분석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합니다.확인된 사실은 이렇습니다. 2010년부터 2025년까지 멕시코, 콜롬비아, 브라질, 미국, 영국에서 초가공식품을 겨냥한 보건 정책에 대해 모두 235건의 소송이 제기되었습니다. 전체 소송의 4분의 3은 초가공식품 기업 또는 이들을 대변하는 무역 단체가 낸 것이었습니다. 원고가 확인된 기업 주도 소송 가운데 38퍼센트는 코카콜라, 펩시코, 몬델리즈, 켈로그, 다농, 페레로, 지그눅스, 하트랜드 푸드 프로덕츠 그룹 등 여덟 개 모기업이 제기했습니다.주목할 대목은 승패의 결과입니다. 결론이 난 소송 가운데 4분의 3은 식품 기업 측이 패소했습니다. 그럼에도 이들 소송은 사건당 평균 2.5년, 누적으로 약 600년에 달하는 법적 공방을 만들어냈고, 그동안 공중보건 조치의 시행은 미뤄졌습니다. 정부와 보건 당국은 복잡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소송에 묶여 있어야 했습니다.이기지 않아도 되는 싸움여기서 우리는 구조적 문제를 읽어야 합니다. 소송의 목적이 반드시 승소에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법안의 시행 속도를 늦추고, 다른 나라와 규제 당국이 유사한 정책을 도입하려는 의지를 꺾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효과를 거둡니다. 대기업에게 소송 비용은 감당 가능한 사업 경비이지만, 국가의 보건 예산에는 실질적 손실입니다. 자원의 비대칭이 만들어내는 전형적인 지연 전술이라 하겠습니다.공개적으로 이들 기업은 소비자가 정보에 입각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고 해결책의 일부가 되겠다고 밝혀왔습니다. 표방하는 태도와 법정에서의 행동 사이에 상당한 간극이 있다는 점을 이번 조사는 보여줍니다.우리 식탁의 문제이기도 합니다전 세계적으로 약 10억 명이 비만과 함께 살아가고 있으며, 건강하지 못한 식습관은 심장질환, 제2형 당뇨병, 암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됩니다. 초가공식품 소비는 급증해 영국, 미국, 호주 등에서는 이미 평균 식단의 절반을 차지합니다.한국도 예외가 아닙니다. 특히 시니어 세대에게 이 문제는 더 절실합니다. 간편식과 가공식품에 대한 의존도는 조리의 부담, 1인 가구의 증가와 맞물려 높아지고 있습니다. 만성질환을 이미 관리하고 계신 분들께는 나트륨과 당류, 포화지방의 과잉 섭취가 곧바로 건강 악화로 이어집니다. 포장 전면 경고 라벨, 광고 제한, 건강부담금 같은 정책 논의가 우리 사회에서도 제기될 때, 그 논의가 어떤 힘에 의해 지연되는지 시민이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질서와 균형의 원칙저는 시장의 자유와 기업의 정당한 권리 행사를 존중합니다. 법률적 이의 제기 자체를 봉쇄하자는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규제는 과학적 근거 위에 서야 하고, 절차적 정당성을 갖추어야 하며, 산업계에는 반론의 기회가 보장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법치의 기본입니다.다만 권리의 행사와 권리의 남용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이길 생각 없이 시간을 벌기 위해 제기하는 소송은 사법 제도의 본래 목적을 훼손합니다. 국민의 건강이라는 공공재를 사적 이익의 계산 아래 두는 일은 어떤 시장 원리로도 정당화되기 어렵습니다.시니어 세대는 결핍의 시대를 지나 풍요의 시대를 함께 통과해 온 세대입니다. 무엇이 몸에 이롭고 무엇이 해로운지를 삶으로 겪어 아시는 분들입니다. 그 경험과 분별이야말로 지금 우리 사회가 지켜야 할 안전망의 기준점입니다. 규제는 절제된 근거 위에서, 기업은 정직한 책임 위에서 각자의 자리를 지킬 때 우리의 식탁도 비로소 안전해질 것입니다.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수정삭제 주소복사법정으로 간 식탁▲ 본 이미지는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생성형 인공지능으로 제작된 것입니다.

  43. 440

    [아침마다 지혜 #436] 누구나 지켜야 할 두 가지 식습관 수칙

    잘 씹는 일이 사라진 식탁요즘 우리 식탁의 풍경은 빠르고 간편합니다. 혼자 드시는 시니어일수록 국에 밥을 말아 후루룩 넘기고, 텔레비전 앞에서 저녁을 늦게 시작하는 일이 잦습니다. 건강 정보라 하면 대개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에만 집중합니다. 단백질은 얼마나, 나트륨은 얼마나, 어떤 영양제를 챙겨야 하는가 하는 식입니다. 그러나 정작 어떻게 먹고 언제 먹느냐는 좀처럼 화제가 되지 않습니다. 최근 유럽 언론에 실린 한 편의 글은 바로 이 지점을 정면으로 짚었습니다.독일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이 2026년 7월 31일 자 12면에 실은 기고문에서 필자 안드레아스 미할젠(Andreas Michalsen)은 접시 위에 무엇이 놓여 있느냐와 무관하게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두 가지 수칙을 제시했습니다. 첫째는 음식을 충분히 씹는 것이고, 둘째는 잠자리에 들기 세 시간 전부터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 것입니다.소화는 위장이 아니라 머리에서 시작됩니다기고문의 설명에 따르면 소화의 출발점은 위가 아닙니다. 음식의 모양과 냄새를 감지하는 순간 뇌가 먼저 반응하는 이른바 뇌상(kephale Phase)이 시작되고, 그 신호가 미주신경(Vagusnerv)을 통해 소화기관으로 전달됩니다. 그때 위산이 분비되고 췌장의 소화 효소가 자극을 받으며 입안에 침이 고입니다. 침에 들어 있는 아밀라아제(Amylase)는 탄수화물과 전분을 분해합니다. 딱딱한 빵을 오래 씹으면 부드러워질 뿐 아니라 단맛이 도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침샘에서 나오는 리파아제(Lipase)는 지방 소화의 첫 단추를 끼웁니다.결국 치아가 음식을 잘게 부수는 시간 자체가 이 사전 소화 과정에 필요한 여유를 벌어 준다는 것입니다. 잘 씹은 음식은 위장에 도달했을 때 이미 절반쯤 준비된 상태이며, 영양소 흡수 효율도 그만큼 높아집니다.체중과의 관련성도 보고되었습니다. 기고문은 2014년 일본 연구자 하마다 유카와 하야시 나오유키의 실험을 소개합니다. 참가자들에게 300킬로칼로리 분량의 가벼운 식사를 제공한 뒤, 한쪽은 최대한 빨리 삼키게 하고 다른 한쪽은 죽처럼 될 때까지 오래 씹게 했습니다. 그 결과 천천히 씹은 쪽에서 복부 혈류량이 늘고 약 10킬로칼로리가 추가로 소비되었습니다. 영국 코번트리(Coventry)의 비만 진료소 환자 10명을 대상으로 한 후속 연구에서는 표준 점심을 10분 안에 먹은 경우와 40분 이상에 걸쳐 먹은 경우를 비교했는데, 후자에서 약 50킬로칼로리의 추가 에너지 소비가 확인되었습니다.밤에는 몸의 소화 능력도 잠들 준비를 합니다두 번째 수칙의 근거는 우리 몸의 하루 주기 리듬입니다. 기고문이 인용한 2012년 미국 메이요 클리닉(Mayo Clinic)의 연구에서는 피험자 20명에게 사흘간 아침, 점심, 저녁에 완전히 동일한 구성의 식사를 제공했습니다. 그 결과 식후 혈당 상승 폭은 아침에 가장 낮고 저녁에 가장 높았습니다. 아침에는 세포의 인슐린 감수성이 높은 반면, 저녁에는 췌장의 인슐린 분비가 줄고 근육의 반응도 둔해지기 때문입니다.여기에 멜라토닌(Melatonin)이 관여합니다. 몸은 평소 취침 시간보다 약 세 시간 앞서 이 호르몬을 분비하며 야간 단식 상태로 전환할 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췌장의 인슐린 생성 세포에는 멜라토닌 수용체가 있어, 멜라토닌이 결합하면 인슐린 분비가 억제되고 식후 혈당은 더 가파르게 오릅니다. 침 분비와 위·췌장의 효소, 간의 기능 역시 밤에는 하향 조정됩니다. 늦은 저녁의 푸짐한 상차림이 뒤척이는 잠과 더부룩함, 야간 발한으로 돌아오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샌디에이고 솔크 연구소(Salk Institute)의 시간생물학자 사친 판다(Satchin Panda)가 취침 세 시간 전 금식을 권고한 근거도 여기에 있습니다.절제와 규칙, 오래된 지혜의 재확인이 두 수칙이 우리에게 각별한 까닭이 있습니다. 시니어가 되면 치아 상태가 예전 같지 않고 침 분비도 줄어듭니다. 잘 씹기가 더 어려워지는 조건에서, 오히려 더 의식적으로 씹어야 하는 셈입니다. 홀로 드시는 분이 늘면서 식사 시간이 짧아지고 불규칙해지는 것도 걱정스러운 대목입니다.주목할 점은 이 결론이 새로운 발견이라기보다 오래된 생활 규범의 재확인이라는 사실입니다. 밥상머리에서 서두르지 말라던 가르침, 해가 지면 상을 물리던 옛 습관은 과학 이전에 축적된 경험의 결정체였습니다. 우리 세대가 몸으로 익힌 절제와 규칙성이 오늘의 연구에서 근거를 얻은 것입니다.다만 균형은 필요합니다. 세 시간이라는 기준은 절대적 수치가 아니라 지침이며, 기고자 스스로도 두 시간 반과 세 시간 반 사이의 우열을 가릴 과학적 데이터는 없다고 밝혔습니다. 당뇨병이나 위장 질환으로 약을 복용하시는 분, 저녁 투약 일정이 정해진 분이라면 반드시 주치의와 상의한 뒤 조정하셔야 합니다. 원칙은 지키되 자신의 몸에 맞게 적용하는 분별, 그것이 시니어의 연륜이 발휘될 자리입니다.돈이 들지 않고, 장비도 필요 없으며, 오늘 저녁 한 끼부터 곧바로 실천할 수 있는 수칙입니다. 천천히 씹고, 늦은 밤에는 상을 물리는 일. 건강은 결국 대단한 결심이 아니라 매일의 작은 질서에서 지켜집니다.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수정삭제 주소복사무엇을 먹느냐만큼 중요한 것은 어떻게, 언제 먹느냐입니다▲ 본 이미지는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생성형 인공지능으로 제작된 것입니다.

  44. 439

    [아침마다 지혜 #435] 최고의 선크림은 비싼 제품이 아니라 제대로 바른 제품입니다

    진열대 앞에서 길을 잃는 계절프랑스 일간지 르 파리지앵 디망슈(Le Parisien Dimanche)는 2026년 8월 2일자 지면에서 여름 휴가철 자외선 차단제 선택을 주제로 두 편의 기사를 실었습니다. 기사에 따르면 파리 동부의 한 대형 매장에는 100종이 넘는 자외선 차단제가 진열되어 있다고 합니다. 보습, 미백, 방수, 어린이용, 민감성 피부용, 해양 생태계 보호용까지 표시 문구는 화려하지만, 정작 무엇을 기준으로 골라야 하는지는 알기 어렵다는 것이 취재진의 문제 제기였습니다. 이는 파리만의 풍경이 아닙니다. 우리 대형마트와 약국의 진열대 사정도 다르지 않습니다.가격과 브랜드가 성분을 보증하지는 않습니다성분 분석 애플리케이션 유카(Yuka)의 독성학자 조에 케를로(Zoé Kerlo)는 유명 브랜드이거나 약국에서 판매된다는 사실만으로 논란이 되는 성분이 없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결국 제품을 뒤집어 성분표를 직접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프랑스에서 판매되는 제품의 약 3분의 1이 논란 성분 없이 만들어지며, 그 제품들이 특정 가격대에 몰려 있지 않다고 설명했습니다. 그 사례로 언급된 것이 2.50유로(약 4,000원, 1유로 1,600원 환산 기준)짜리 저가 유통업체 제품이었습니다. 값이 곧 안전을 보증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며, 동시에 저렴한 제품이라고 무조건 열등하지도 않다는 뜻입니다.유기농 표기가 곧 무해함은 아닙니다기사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이른바 유기농 제품에 쓰이는 무기 자외선 차단 성분에 대한 평가였습니다. 산화아연(zinc oxide)과 이산화티타늄(titanium dioxide)이 그것입니다. 케를로는 산화아연이 해양 생물에 유독하고 햇빛에 노출되면 인체에 유해한 화합물로 분해될 수 있으며, 이산화티타늄은 발암 가능 물질로 분류되어 있다는 점을 들어 권장하지 않는다는 견해를 밝혔습니다. 오히려 내분비계 교란 물질을 배제한 유기 자외선 차단 성분, 이른바 화학적 필터 쪽이 나은 선택일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다만 이 대목은 신중히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무기 필터의 안전성에 대해서는 국제적으로 견해가 갈리며, 피부 자극이 적다는 이유로 민감성 피부에 권장하는 전문가도 적지 않습니다. 기사에 소개된 내용은 한 전문가와 한 분석 기관의 판단이라는 점을 감안하시는 것이 옳습니다. 중요한 것은 유기농이라는 표기가 자동으로 무해함을 뜻하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입니다.SPF 30은 30분이 아닙니다두 번째 기사는 SPF 숫자에 관한 오해를 정면으로 다루었습니다. 피부과 전문의 크리스토프 베단(Christophe Bédane) 교수의 설명을 빌리면, SPF는 일광 화상을 일으키는 자외선 B(UVB)를 얼마나 걸러내는지를 나타내는 지수이며, 차단 지속 시간을 뜻하지 않습니다. SPF 30이 30분, SPF 50이 50분을 보호한다는 통념은 잘못된 것입니다. 보호제 없이 5분 만에 피부가 붉어지는 사람이라면 이론적으로 그 시간이 30배, 50배로 늘어난다는 의미이지만, 이는 피부 유형과 햇빛 강도, 바르는 양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계산상의 수치일 뿐입니다.수치상 SPF 30은 UVB의 약 96퍼센트를, SPF 50은 약 98퍼센트를 차단합니다. 2퍼센트포인트 차이가 사소해 보이지만, 암 연구 기관인 귀스타브 루시 연구소(Institut Gustave-Roussy)는 반복적이거나 장시간 노출되는 경우 이 차이가 결코 작지 않다고 강조했습니다. 반면 100퍼센트 차단 제품은 존재하지 않으며, SPF 100의 추가 이점은 매우 제한적이라는 것이 베단 교수의 지적입니다.또 하나 놓치기 쉬운 점은 SPF가 자외선 B만을 측정한다는 사실입니다. 피부 노화와 피부암에 관여하는 자외선 A(UVA)까지 막으려면 제품에 넓은 스펙트럼 표기나 원 안에 UVA가 적힌 표시가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숫자보다 중요한 것은 양과 횟수입니다실험실에서 SPF를 측정할 때 기준이 되는 도포량은 피부 1제곱센티미터당 2밀리그램입니다. 그러나 일상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그 절반에도 못 미치게 바릅니다. 베단 교수는 권장량의 절반만 바르면 효과가 절반이 되는 것이 아니라 10퍼센트 수준으로 급락한다고 경고했습니다. 얼굴이라면 검지 손가락 한 마디 길이로 두 줄 정도의 양이 권장되며, 수영이나 땀을 닦은 뒤, 장시간 노출 시에는 두 시간마다 다시 발라야 합니다. 소비자 단체 크 슈아지르(Que Choisir)의 가엘 랑드리(Gaëlle Landry)는 표기된 차단 수치와 실제 성능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며, 독립 연구소의 시험 결과를 참고하라고 권했습니다. 표기를 온전히 믿기 어려울 때의 현실적인 대비책이 바로 SPF 50+ 제품을 골라 두 시간마다 덧바르는 습관입니다.시니어에게 더 절실한 이유이 논의는 시니어 독자께 특히 중요합니다. 자외선 손상은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수십 년에 걸쳐 축적되며, 그 청구서가 도착하는 시기가 바로 인생 후반입니다. 등산과 텃밭 가꾸기, 파크골프와 걷기 모임처럼 시니어의 건강을 지탱하는 활동 대부분이 한낮의 야외에서 이루어진다는 점도 고려해야 합니다. 야외 활동을 줄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활동은 유지하되 보호를 정교하게 하자는 것입니다.우리나라는 자외선 차단 제품을 기능성화장품으로 관리하며 자외선차단지수와 자외선 A 차단등급을 함께 표시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사례가 보여주듯 제도가 있다고 해서 모든 표기가 완벽하게 이행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감독 기관의 사후 검증을 꾸준히 요구하되, 소비자 역시 성분표를 읽는 최소한의 수고를 감당해야 합니다.두려움이 아니라 기준이 필요합니다화학물질이라는 단어만 나오면 무조건 배격하는 태도도, 유기농이라는 표기만 보고 안심하는 태도도 모두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필요한 것은 검증된 기준과 성실한 습관입니다. 자외선 차단제는 방패일 뿐 종일 햇볕 아래 머물러도 좋다는 허가증이 아니라는 베단 교수의 당부는 그래서 무겁습니다. 자외선 차단 의류와 챙 넓은 모자, 그리고 그늘을 찾는 오래된 지혜가 여전히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새로운 상품과 화려한 광고 문구가 넘칠수록, 기본을 지키는 사람이 결국 건강을 지킵니다. 충분한 양을 바르고, 두 시간마다 다시 바르고, 한낮의 뙤약볕은 피하는 일. 시니어 세대가 오랜 세월 몸으로 익혀온 절제와 성실이야말로 어떤 첨단 성분보다 믿을 만한 차단제입니다.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수정삭제 주소복사프랑스 언론이 짚은 자외선 차단제 선택법과 SPF 숫자의 진실▲ 본 이미지는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생성형 인공지능으로 제작된 것입니다.

  45. 438

    [아침마다 지혜 #434] 책으로 모이는 런던의 청년들, 우리가 다시 배울 것

    무례한 통념부터 걷어내야 합니다요즘 청년 세대를 두고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책은 읽지 않고, 사람은 만나지 않으며, 화면 속에서만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통념은 언제나 게으른 판단의 다른 이름입니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Financial Times)가 2026년 7월 31일자 지면의 여행·도시문화 섹션인 FT 글로브트로터(FT Globetrotter)에 실은 발레리아 베르긴츠(Valeria Berghinz) 기자의 현장 기록은, 런던의 20대들이 정반대의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나이트클럽에서 열리는 출판기념회런던의 청년들은 서점 한켠에서 미지근한 와인을 나누던 종래의 출판기념회를 그대로 물려받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 형식을 해체했습니다. 출판사의 후원 없이 청년 기획자들이 직접 행사를 꾸리고, 장소는 나이트클럽과 바, 갤러리로 옮겼습니다. 홍보는 인스타그램으로 이루어지며 표는 순식간에 동이 납니다. 신간 소개든 시 낭송이든 강연이든, 행사가 끝나면 자연스럽게 뒤풀이로 이어집니다.대표적인 사례가 소호 리딩 시리즈(Soho Reading Series)입니다. 설립자 톰 윌리스(Tom Willis)는 표를 사면 책 한 권을 함께 주는 방식을 택했고, 이 모델로 올해에만 약 8,000권의 책이 독자에게 건네질 것으로 추산합니다. 참가비는 15파운드에서 35파운드(약 2만 8천 원에서 6만 5천 원) 수준이며 책값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 다른 모임인 로스트 프로퍼티(Lost Property)는 10분짜리 강연 네 편을 이어 붙이는 형식입니다. 원고를 읽는 것은 금지되고 즉흥적인 말하기가 권장되며, 자기 홍보는 엄격히 배제됩니다. 참가비는 10파운드에서 12파운드(약 1만 9천 원에서 2만 2천 원)입니다. 설립자 레티 콜(Letty Cole)은 사회생활은 부족하지 않았으나 대화의 깊이가 아쉬웠다는 것이 출발점이었다고 밝혔습니다.왜 하필 지금, 왜 하필 책인가이 현상의 뿌리는 결핍입니다. 청년들은 온라인에서 무한한 정보를 소비하지만, 소비는 관계를 만들지 못합니다. 짧은 영상은 요약을 주되 사유를 주지 않고, 알고리즘은 취향은 맞춰주되 사람은 붙여주지 못합니다. 10분이라는 강연 길이는 짧은 영상 문법에 대한 의도적인 반작용이며, 원고 낭독을 금지한 규칙은 편집된 언어가 아닌 사람의 말을 되찾으려는 시도입니다.또 하나 주목할 대목은 이들이 즐거움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윌리스는 화려함은 덤일 뿐 본질은 문학이라는 취지로 선을 그었습니다. 대의를 앞세워 재미를 억누르지도 않았고, 재미에 취해 알맹이를 버리지도 않았습니다. 형식은 유연하되 중심은 단단한 것, 이것이 이 흐름이 유행에 그치지 않는 이유일 것입니다.우리 사회에 던지는 물음한국의 독서 인구 감소와 관계 단절은 청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시니어 세대에게 더 절실한 과제입니다. 우리 주변의 독서 모임과 문화 강좌를 떠올려 보십시오. 형식은 정중하나 활기가 부족하고, 참석자는 앉아서 듣기만 하다 흩어지기 일쑤입니다. 런던의 청년들이 증명한 것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 사람을 부른다는 사실입니다.시니어 세대에게는 청년들이 갖지 못한 자산이 있습니다. 살아온 시간과 읽어온 책, 그리고 겪어낸 판단입니다. 다만 그 자산이 강단 위 훈화의 형태로만 전달된다면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 서로가 말하고 듣는 자리로 형식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지역 도서관과 복지관, 교회와 동창 모임이 그 실험의 무대가 될 수 있습니다.오래된 것이 가장 새로운 것입니다이 소식이 반가운 진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런던의 청년들이 새로 발명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고, 얼굴을 마주하고, 함께 웃고, 좋은 사람을 만나 인연을 맺는 일. 우리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으되 편리함에 밀려 소홀히 했던 그 방식으로 청년들이 되돌아온 것입니다. 새로운 것은 형식뿐이고, 지켜야 할 본질은 그대로였습니다.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대면과 독서, 공동체라는 오래된 질서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지켜내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것을 담아내는 그릇을 시대에 맞게 바꾸는 유연함을 갖추는 것입니다. 원칙에는 완고하되 방법에는 열려 있는 태도, 이것이야말로 시니어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가장 값진 유산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런던의 청년들이 멋져 보이는 까닭도, 결국 그들이 우리가 옳다고 여겨온 것을 자기 방식으로 다시 증명해 주었기 때문일 것입니다.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46. 437

    [아침마다 지혜 #433] 매일이 일요일인 사람에게 휴가란 무엇인가

    은퇴한 시니어에게도 휴가가 필요합니다은퇴하신 분들께 여름 휴가 계획을 여쭈면 열에 여덟은 비슷한 대답을 하십니다. "매일이 일요일인데 무슨 휴가입니까." 일견 타당한 말씀입니다. 출근할 직장이 없으니 벗어날 일상도 없다는 뜻이겠지요. 그러나 저는 이 대답 속에 우리 사회가 오래 방치해 온 오해가 하나 숨어 있다고 봅니다. 휴가는 노동의 대가로 주어지는 보상이 아니라, 생활의 리듬을 다시 조율하는 장치라는 점입니다. 일하지 않는다고 리듬이 필요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출퇴근이라는 외부 규율이 사라진 뒤에는 스스로 매듭을 지어 주지 않으면 하루하루가 형체 없이 흘러가기 쉽습니다.유럽의 여름 지도가 바뀌고 있습니다마침 흥미로운 보도가 있었습니다. 파이낸셜 타임스(Financial Times)는 지난 7월 31일자 지면에서, 유럽 여행객들이 폭염과 산불을 피해 남유럽 대신 북유럽으로 목적지를 옮기고 있다는 항공업계의 관측을 전했습니다. 에어프랑스-KLM(Air France-KLM)의 벤 스미스(Ben Smith) 최고경영자는 최근 몇 주 사이 회사가 확인한 가장 큰 소비자 행동 변화로 이 현상을 꼽았습니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무더위 지역을 우회하는 유럽인이 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 미국발 관광객은 기존 일정을 대체로 유지하고 있다고 합니다.같은 발표에서 이 회사는 2분기 순이익이 1억 9,000만 유로(약 3,059억 원)로 전년 동기보다 70퍼센트 줄었다고 밝혔습니다. 매출은 80억 유로(약 12조 8,800억 원)로 10퍼센트 가까이 늘었으나, 중동 정세 불안에 따른 항공유 가격 급등이 수익을 잠식했습니다. 연간 연료비는 89억 달러(약 12조 3,710억 원)로 1년 전보다 약 20억 달러(약 2조 7,800억 원) 늘어날 전망입니다.편집 주석: 위 환산액은 1유로 약 1,610원, 1달러 약 1,390원을 적용한 개략치입니다. 게재 시점 환율로 재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기후는 이미 여행의 조건을 바꾸어 놓았습니다여기서 우리가 읽어야 할 것은 항공사의 실적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여름의 지도를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폭염은 더 이상 불쾌한 날씨가 아니라 건강을 위협하는 변수가 되었습니다. 체온 조절 능력과 심혈관 대응력이 젊은 시절 같지 않은 시니어에게는 특히 그렇습니다. 유럽인들이 스스로 목적지를 북쪽으로 옮긴 것은 낭만의 포기가 아니라 위험 관리의 결과입니다.우리 사정도 다르지 않습니다. 여름철 온열질환 응급실 감시 결과에서 고령층 비중이 꾸준히 높게 나타난다는 점은 매년 반복되는 경고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시니어들은 손주 방학에 맞춰, 자녀 휴가에 맞춰, 가장 덥고 가장 붐비는 시기에 움직입니다. 정작 시간을 가장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분들이 가장 불리한 조건에서 이동하고 계신 것입니다.시니어의 휴가는 계절을 고를 수 있습니다여기에 시니어 세대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성수기를 피할 자유입니다. 6월과 9월, 혹은 늦가을과 초봄에는 숙박비가 내려가고 인파가 줄며 기온이 순합니다. 굳이 멀리 가지 않아도 좋습니다. 사흘간 다른 도시에 머무르며 다른 시장을 걷고 다른 저녁을 맞이하는 것만으로도 생활의 매듭은 충분히 지어집니다.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해 두고자 합니다. 휴가가 필요하다는 말은 소비를 늘리라는 권유가 아닙니다. 은퇴 이후의 재정은 회복 탄력성이 약합니다. 분수를 넘어선 여행은 휴식이 아니라 다음 해의 근심을 앞당겨 사 오는 일입니다. 절제는 시니어 세대가 평생 지켜 온 미덕이며, 그 미덕은 지금도 유효합니다.지원과 요구는 함께 가야 합니다제 결론은 이렇습니다. 사회는 시니어의 여가를 시혜가 아닌 건강 투자로 인식하고, 비수기 이용 유인과 안전한 이동 여건을 넓혀야 합니다. 동시에 시니어 스스로도 계절과 예산을 계산하는 합리적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지원(Fördern)과 요구(Fordern)는 한 쌍입니다.쉼은 게으름이 아닙니다. 오래 일한 사람이 오래 쉴 줄도 알아야, 그 경험과 지혜가 다음 계절까지 온전히 이어집니다. 올여름, 무리하지 않으시되 반드시 하루쯤은 일상 밖으로 나가 보시기를 권합니다.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47. 436

    [아침마다 지혜 #432] 중1이 가장 무서운 나이라는 말, 방치의 핑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사회에는 "중학교 1학년이 제일 무서운 나이"라는 말이 오래도록 떠돌았습니다. 사춘기의 반항을 어른이 손댈 수 없는 자연현상처럼 여기며, 그저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리자는 체념이 그 말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발표된 해외 연구는 바로 그 나이가 방치의 시기가 아니라 개입의 시기임을 분명하게 일러줍니다.5년간의 추적이 밝혀낸 순서미국 캘리포니아대 샌프란시스코 캠퍼스(UCSF) 연구진은 미국 청소년 1만 1천여 명을 5년에 걸쳐 추적한 결과를 이번 달 의학 학술지 JAMA Network Open에 발표했습니다. 참가자들은 평균 12세에 첫 설문을 받았고, 평균 16세가 될 때까지 해마다 조사를 받았습니다.연구 결과의 핵심은 순서에 있습니다. 중독성 소셜 미디어 사용이 늘어난 뒤 1년이 지나면 주의력결핍 과다행동장애(ADHD) 증상이 함께 증가하는 경향이 확인되었고, 특히 14세와 15세 남학생에게서 이 흐름이 뚜렷했습니다. 반면 그 반대 방향, 즉 ADHD 증상이 먼저 나타난 뒤 소셜 미디어 중독이 심해지는 흐름은 일관되게 관찰되지 않았습니다.제1 저자인 소아과 부교수 제이슨 나가타(Jason Nagata)는 무작위 대조 시험이 아닌 만큼 인과관계를 단정할 수는 없으나, 연관성이 한쪽 방향으로 기우는 경향은 보여줄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연구진은 미국 내 최대 규모 장기 연구인 청소년 뇌 인지 발달 연구(ABCD)의 자료를 활용했으며, 인종과 소득이 고루 분포한 표본을 여러 해에 걸쳐 관찰했다는 점에서 단발성 조사와 구분됩니다.숫자가 보여주는 12세의 현실12세 응답자 가운데 약 23퍼센트가 소셜 미디어 사용을 생각하거나 다음 사용을 계획하는 데 많은 시간을 쓴다고 답했습니다. 약 18퍼센트는 자신의 고민을 잊기 위해 앱을 사용한다고 했고, 약 15퍼센트는 줄이려 노력했으나 실패했다고 응답했습니다. 우리 학제로 치면 중학교 1학년 무렵입니다. 참고로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 집계에 따르면 3세에서 17세 사이 미국 아동 약 700만 명이 ADHD 진단을 받았으며, 남아의 진단 비율은 여아의 약 두 배입니다.의지 부족이 아니라 설계된 유인나가타 부교수는 중독성 소셜 미디어 사용이 금단, 내성, 재발, 통제력 손상이라는 물질 중독의 특징을 공유한다고 설명합니다. 잦은 작업 전환을 유도하고 즉각적인 보상과 새로움을 끊임없이 공급하는 설계가 아직 자라는 중인 작업 기억력과 실행 통제력을 흔든다는 것입니다. 발달심리학자 주디 추(Judy Chu)는 성인조차 저항하기 어려운 유인을 어린 사람에게 스스로 내려놓으라고 요구하는 일이 얼마나 무리한 것인지 지적합니다. 이는 아이의 인성이나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입니다.시간이 아니라 방식을 보아야 합니다여기서 우리 가정이 새겨야 할 대목이 나옵니다. 대다수 부모는 하루 몇 시간을 썼는지에만 매달립니다. 그러나 연구가 가리키는 경고등은 시간이 아니라 방식에 있습니다. 원할 때 멈출 수 있는가, 학업을 침범하고 있는가, 친구와 가족 관계를 훼손하고 있는가, 끊으려 할 때 심한 불안이나 갈등이 따르는가. 이 네 가지 질문이 화면 사용 시간표보다 훨씬 정확한 진단표입니다.미국 소아과학회(AAP)는 가족이 함께 미디어 사용 계획을 세울 것을 권합니다. 침실에서 화면 기기를 치우고, 식탁에서는 전자기기를 두지 않는 방식이 도움이 된다고 확인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나가타 부교수는 부모의 사용 습관이 자녀의 사용을 예측하는 강력한 지표였다고 강조합니다. 규칙을 정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되며, 어른이 그 규칙 안에 함께 서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시니어 세대가 지켜온 질서의 값어치이 대목에서 시니어 세대의 자리가 분명해집니다. 온 가족이 한 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고, 잠자리에서는 딴짓을 하지 않으며, 어른이 먼저 절제하는 모습을 보이던 생활의 규율은 낡은 관습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아이의 주의력을 지켜주던 가장 오래되고 검증된 안전망이었습니다. 맞벌이로 지친 부모가 미처 손을 뻗지 못하는 자리를 조부모의 눈길이 대신 채워줄 수 있습니다.다만 균형은 필요합니다. 무조건 빼앗는 방식은 통하지 않으며, 오늘의 아이들에게 온라인은 학습과 관계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금지의 강도가 아니라 기준의 일관성이 관건입니다. 잠자리와 식탁이라는 두 공간만은 지킨다는 합리적 원칙을 온 가족이 함께 지키는 것, 그리고 손주에게 요구하기 전에 어른이 먼저 손전화를 내려놓는 것. 이 두 가지가 지원과 요구의 균형입니다.중1이 무서운 나이라는 말은 사실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무섭다는 이유로 물러설 나이는 결코 아닙니다. 손주가 화면 앞에서 보내는 시간을 헤아리기보다, 그 아이가 스스로 멈출 수 있는지를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그 물음을 건넬 수 있는 사람이 집안에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 가정은 아직 흔들리지 않습니다.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48. 435

    [아침마다 지혜 #431] 밤늦은 한 끼가 기억을 흔듭니다

    무엇을 먹느냐가 건강을 좌우한다는 말은 오래된 상식입니다. 그런데 최근의 뇌과학과 영양학은 여기에 한 가지 물음을 더 얹고 있습니다. 언제 먹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는 2026년 7월 28일자 1면에서 심야 간식이 뇌에 미치는 영향을 비중 있게 다루었고, 같은 주 미국에서는 이 주제를 사람에게 직접 확인한 임상시험 결과가 공개되었습니다. 두 소식을 나란히 놓고 보면 밤늦게 냉장고 문을 여는 습관이 허리둘레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 제법 선명해집니다.몸속 시계가 서로 다른 시각을 가리킬 때핵심은 일주기 리듬(circadian rhythm)입니다. 우리 몸의 거의 모든 장기는 약 24시간을 한 바퀴로 삼는 자체 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시계들을 총지휘하는 기관은 뇌 시상하부의 시교차상핵(suprachiasmatic nucleus)으로, 눈에 들어오는 빛과 어둠을 신호로 시각을 맞춥니다. 반면 간과 장을 비롯한 말초 장기의 시계는 빛이 아니라 음식이 들어오는 시각에 반응합니다. 밤이 깊어 뇌는 잠으로 향하는데 위장에 음식이 들어오면, 말초 장기는 도리어 대사 활동을 시작합니다. 몸 안의 시계들이 서로 어긋나는 셈입니다.이 어긋남이 기억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준 대표적 연구가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로스앤젤레스 캠퍼스 연구진의 동물 실험입니다. 학술지 이라이프(eLife)에 보고된 이 실험에서 연구진은 야행성인 쥐에게 일부러 낮에만 먹이를 주었습니다. 쥐에게는 한밤중 야식과 같은 조건이었습니다. 결과는 분명했습니다. 총지휘자인 시교차상핵의 시계는 흔들리지 않았지만, 학습과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hippocampus)의 분자 시계는 먹이 시각을 따라 통째로 옮겨 갔습니다. 신경 연결 강도를 나타내는 장기 강화가 줄었고, 기억 형성에 관여하는 단백질도 감소했으며, 새로운 물체를 알아보는 검사 성적이 눈에 띄게 떨어졌습니다.또 하나의 통로는 수면입니다. 뇌는 일반적인 림프계 대신 글림프 시스템(glymphatic system)이라는 독자적 정화 체계를 운영합니다. 이 체계는 깊은 잠에 들어야 본격적으로 가동됩니다. 뇌세포의 부피가 줄면서 생긴 틈으로 뇌척수액이 흘러들어 낮 동안 쌓인 노폐물을 씻어내는데, 이때 배출되는 대표 물질이 치매와 관련이 깊은 베타 아밀로이드(beta amyloid)입니다. 늦은 밤 식사는 소화 기관을 깨워 깊은 잠으로 내려가는 길을 막습니다. 잠의 총량이 같아도 얕은 단계에 오래 머물면 뇌가 청소에 쓸 시간이 줄어듭니다.시니어 여성 47명을 여섯 달 추적한 결과동물 실험을 사람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지난 7월 25일부터 28일까지 미국 메릴랜드주에서 열린 미국영양학회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럿거스대학교 연구진의 임상시험은 눈여겨볼 만합니다. 연구진은 과체중 또는 비만에 해당하는 50세에서 79세 여성 47명에게 하루 500킬로칼로리를 덜 먹도록 지도했습니다. 이 중 26명에게는 하루 식사를 아홉 시간 이내에 마치고 잠들기 최소 네 시간 전부터는 아무것도 먹지 않도록 했습니다. 이른바 시간제한 식사(time restricted eating)입니다.여섯 달 뒤 두 집단의 체중 감소 폭은 비슷했습니다. 그러나 공간 계획과 문제 해결 능력을 측정하는 검사에서는 시간제한 식사 집단만 통계적으로 의미 있는 개선을 보였습니다. 식사 시간대를 많이 줄인 참가자일수록 향상 폭이 컸다는 점도 확인되었습니다. 연구 책임자는 체중 감량만으로도 인지 기능 저하를 어느 정도 늦출 수 있으나, 식사 시각을 앞당기면 추가적인 이득이 있을 가능성이 보인다고 설명했습니다.다만 확정된 결론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이릅니다. 참가자가 47명에 불과하고 대상이 과체중 여성에 한정되었으며, 짝지어 기억하기 검사에서는 두 집단 간 차이가 유의미한 수준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연구진 스스로도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고 밝혔습니다. 2018년에는 앞선 동물 실험의 재현 시도에서 일부 항목이 반복되지 않았고, 2024년 한 체계적 문헌 고찰에서도 검토된 여섯 편 중 다섯 편이 긍정적 관련성을 보고했을 뿐 반대 결과도 존재합니다.절제라는 오래된 지혜정리하면 현재까지의 근거는 이렇게 읽는 것이 정직합니다. 밤늦은 식사가 뇌에 좋을 이유는 딱히 없고, 식사 시각을 앞당기는 편이 유리할 가능성은 꾸준히 관찰된다는 것입니다. 한두 번의 야식으로 기억력이 무너진다는 해석은 근거가 없습니다. 문제는 습관으로 굳을 때입니다.실행은 서두르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저녁 식사를 한 주에 삼십 분씩 앞당겨 잠자리 서너 시간 전에 마지막 수저를 놓는 것을 목표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시니어의 야식은 식욕보다 무료함과 외로움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적지 않으니, 저녁 시간을 가벼운 산책이나 안부 전화로 채우는 것도 방법입니다. 참기 어려운 밤이라면 라면이나 튀김 대신 따뜻한 우유나 삶은 달걀처럼 소화 부담이 적은 쪽을 택하시는 것이 현실적입니다. 다만 당뇨병 약이나 인슐린을 사용하시는 분, 위식도 역류나 만성 신장질환이 있으신 분은 반드시 담당 의사와 먼저 상의하셔야 합니다. 임의로 식사 시간대를 줄이면 저혈당 위험이 커집니다.돌아보면 저녁을 일찍 들고 일찍 자리에 드는 것은 우리 선대가 오래 지켜온 생활의 규율이었습니다. 야식 배달과 심야 방송이 일상이 된 시대에 그 규율은 촌스러운 습관처럼 밀려났습니다. 그런데 최신 실험실이 내놓은 결론이 그 오래된 절제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새로운 근거를 냉정하게 검증하되, 검증된 옛 지혜를 가볍게 버리지 않는 균형이 필요한 대목입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49. 434

    [아침마다 지혜 #430] 낯선 차에 올라탄 87세, 우리에게 남긴 질문

    독일 소도시에서 벌어진 짧은 드라이브지난 7월 하순, 독일 라인란트팔츠(Rheinland-Pfalz)주의 작은 마을 랑엔론스하임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 벌어졌습니다. 87세 여성이 남의 승용차에 올라타 그대로 몰고 사라진 것입니다. 차주는 장을 본 물건을 내리는 동안 시동 열쇠를 꽂아 둔 채였고, 이 시니어 여성은 그 차를 자신의 차로 굳게 믿고 운전대를 잡았습니다.다행히 결말은 조용했습니다. 여성은 얼마 가지 않아 주유소에 차를 세웠고, 뒤를 쫓아온 차주가 매장 안에서 말을 붙이며 시간을 끄는 사이 경찰이 도착했습니다. 아들이 와서 어머니를 모셔갔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관할 경찰은 차량 무단 사용 혐의로 형사 절차를 개시했고, 이 사실을 운전면허 관청에 통보했습니다.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이 AFP 통신을 인용해 전한 내용입니다.누구도 다치지 않았고, 악의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절차는 절차대로 진행되었습니다. 저는 이 대목이 이번 사건의 핵심이라고 봅니다.사고가 아니라 경고입니다이 일을 두고 '해프닝'이라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열쇠가 꽂힌 차, 자신의 차라는 확신, 그리고 도로 위로 나선 짧은 주행. 이 세 가지가 조금만 다르게 겹쳤다면 결과는 전혀 달랐을 것입니다.의학적으로 인지 기능의 저하는 기억력 감퇴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익숙한 장소를 혼동하거나 자신의 소유물을 착각하는 지남력(指南力, Orientierung) 저하가 함께 나타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운전 능력 자체는 남아 있는데 상황 판단이 흐려지는 구간이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본인도, 가족도 알아차리기 가장 어려운 시기가 바로 이 구간입니다.독일과 한국, 제도의 온도차독일은 유럽에서도 시니어 운전자에 대한 규제가 느슨한 편에 속합니다. 일정 연령이 되면 의무적으로 적성검사를 받도록 하는 제도가 없고, 본인의 판단과 가족의 설득에 상당 부분을 맡겨 왔습니다. 이번 사건에서 경찰이 곧바로 면허 관청에 통보한 것은, 사후적으로라도 개별 심사를 거치게 하는 우회 장치가 작동한 결과로 보입니다.우리나라는 다릅니다. 도로교통법에 따라 만 75세 이상 운전자는 면허 갱신 주기가 3년으로 짧아지고, 갱신 시 고령운전자 교통안전교육을 반드시 이수해야 하며 여기에 인지능력 자가진단이 포함됩니다. 65세 이상 75세 미만은 갱신 주기가 5년입니다. 여기에 각 지방자치단체가 운전면허 자진반납 시 교통카드나 지역화폐를 지급하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제도의 뼈대는 이미 갖춰져 있는 셈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저는 시니어의 운전대를 나이만으로 빼앗는 방식에 반대합니다. 여든이 넘어서도 정확하게 운전하시는 분이 계시고, 예순에 이미 위험한 분도 계십니다. 나이는 기준이 될 수 없고, 기준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다만 반대로, 나이를 이유로 책임을 면제해 주는 것 역시 옳지 않습니다. 독일 경찰이 87세 여성에게도 절차를 그대로 적용한 것은 냉정해 보이지만, 실은 그분을 한 사람의 온전한 시민으로 대우한 것입니다. 형사 절차와 면허 심사를 거쳐야 재발을 막을 수 있고, 그것이 결국 본인의 안전을 지키는 길이기 때문입니다.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도로 위의 질서와 안전이라는 양보할 수 없는 가치이고, 다른 하나는 이동할 권리라는 시니어의 존엄입니다. 이 둘은 대립하지 않습니다. 능력 기반의 정밀한 심사와 충분한 이동 대안, 이 두 축이 함께 마련될 때 비로소 양립합니다.지원할 것은 넉넉히 지원하되, 요구할 것은 분명히 요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시니어 세대를 배려의 대상이 아니라 책임 있는 사회 구성원으로 존중하는 태도라고 저는 믿습니다.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50. 433

    [아침마다 지혜 #429] 다락방의 박물관을 손안으로 옮기는 법

    버리지 못하는 물건들 앞에서집 안 어딘가에 좀처럼 손대지 못하는 상자가 하나쯤 있으실 것입니다. 아이가 처음 신었던 신발, 빛바랜 사진첩, 이제는 몸에 맞지 않는 정장 한 벌. 쓸모로 따지면 진작에 정리했어야 할 물건들이지만, 그 안에 담긴 시간 때문에 손이 멈춥니다. 물건을 줄여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물건을 줄이는 일이 곧 기억을 줄이는 일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시니어 세대가 겪는 이 딜레마는 개인의 미련이 아니라, 한 세대가 축적한 삶의 기록을 어떻게 다음으로 넘길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미국 독자가 제안한 디지털 보관 캡슐지난 7월 26일 미국 일간지 워싱턴포스트(The Washington Post) 독자 기고란에 짧지만 눈길을 끄는 편지 한 통이 실렸습니다. 뉴욕주 이스트햄프턴에 거주하는 스티븐 A. 루드신(Steven A. Ludsin) 씨가 보낸 글입니다. 앞서 같은 지면에 실린 케이티 로이프(Katie Roiphe)의 칼럼, 부모가 남긴 물건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다룬 글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기고자는 자신 역시 소장품이 적지 않으며, 그 물건들이 짐이 되기도 하지만 좋은 동반자가 되기도 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면서 일부 장식품은 온라인 중고 거래 플랫폼인 이베이(eBay)를 통해 팔았고, 더 이상 맞지 않는 재킷은 빈티지 의류 매장을 통해 새 주인을 찾아주었다고 밝혔습니다.핵심은 그다음에 놓인 제안입니다. 물건과 헤어지기 어려워하는 같은 세대에게, 그는 디지털 보관 캡슐을 만들어 볼 것을 권했습니다. 처분하기 전에 스마트폰으로 물건을 촬영해 디지털 형태로 남겨두라는 것입니다. 그는 열 살 무렵에 쓴 일기, 1993년 아버지와 함께 라트비아를 방문했을 때 촬영한 영상 같은 개인의 기록을 인공지능(AI) 도구를 활용해 한 편의 기록물로 엮어 보기도 했다고 전했습니다. 다락방에 쌓아 둔 나만의 박물관이 물리적 공간을 전혀 차지하지 않는 디지털 타임캡슐로 옮겨 갈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습니다.왜 지금 이 문제가 불거지는가이 편지가 개인의 취미담으로만 읽히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주거 형태가 바뀌었습니다. 자녀를 떠나보낸 뒤 넓은 집을 유지할 이유가 줄면서, 시니어 세대의 주거는 축소되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옮겨 가는 집이 작아지면 물건은 반드시 줄여야 합니다. 둘째, 물려받을 사람이 줄었습니다. 자녀 세대는 부모의 가구와 그릇, 앨범을 반기지 않습니다. 취향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들 역시 좁은 집에 살기 때문입니다. 셋째, 기록의 형식이 바뀌었습니다. 사진과 문서가 종이로만 존재하던 시대는 끝났고, 이제 기록은 화면 안에서 유통됩니다.한국 사회에 주는 시사점우리 사정도 다르지 않습니다. 아파트 중심의 주거 구조에서 물건을 쌓아 둘 여유는 넉넉지 않습니다. 이사, 요양시설 입소, 그리고 사별 이후에 남겨진 물건을 정리하는 일은 이미 유품 정리 서비스라는 시장을 만들어 냈습니다. 남겨진 가족이 상자를 열어 보지도 못한 채 폐기 업체에 맡기는 일도 드물지 않습니다. 물건을 남기는 방식이 정리되지 않으면, 기억은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폐기됩니다.그렇다면 스스로 정리하는 편이 낫습니다. 처분할 물건을 골라 사진으로 남기고, 그 물건에 얽힌 사연을 짧게라도 함께 기록해 두는 것입니다. 사진 한 장에 설명 두 줄이면 충분합니다. 설명이 없는 사진은 몇 해만 지나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미지 파일이 되고 맙니다. 물건이 아니라 사연이 유산이라는 점을 기억하셔야 합니다.다만 냉정하게 보아야 할 대목디지털이 만능은 아닙니다. 저장 장치는 고장 나고, 파일 형식은 낡으며, 계정은 본인이 세상을 떠난 뒤 정지됩니다. 구독료를 내지 않으면 사라지는 클라우드 저장 공간에 평생의 기록을 통째로 맡기는 것은 위험한 선택입니다. 최소한 두 곳 이상에 나누어 보관하고, 가족 가운데 접근 방법을 아는 사람을 한 명은 정해 두시기 바랍니다. 세상을 떠난 뒤 온라인 계정과 자료를 어떻게 처리할지에 관한 이른바 디지털 유산의 정리도 함께 생각하셔야 합니다.그리고 모든 것을 디지털로 옮길 필요는 없습니다. 손으로 만질 수 있어야만 전해지는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아버지가 쓰시던 만년필, 혼례 때 받은 반상기 한 벌처럼 가족의 내력을 증언하는 물건은 실물로 남기는 편이 옳습니다. 선별의 기준을 세우는 일, 그것이 정리의 시작입니다.물건은 줄이고 내력은 남기는 일정리는 버리는 기술이 아니라 남길 것을 고르는 판단입니다. 무엇을 남길지 스스로 정해 두는 일은 남은 가족에 대한 배려이자, 한 사람이 살아온 질서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넘겨주는 방식입니다. 새로운 도구를 마다할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도구가 기억의 무게까지 대신해 주지는 못합니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놓을지는 끝내 우리 자신이 결정해야 할 몫입니다.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Type above to search every episode's transcript for a word or phrase. Matches are scoped to this podcast.

Searching…

We're indexing this podcast's transcripts for the first time — this can take a minute or two. We'll show results as soon as they're ready.

No matches for "" in this podcast's transcripts.

Showing of matches

No topics indexed yet for this podcast.

Loading reviews...

ABOUT THIS SHOW

인생의 굴곡을 겪으며 깨달은 교훈, 나이 들어 알게 된 진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마음의 힘까지—짧지만 깊이 있는 메시지로 하루의 방향을 잡아드립니다. 시니어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울림이 있는 아침 인사. 커피 한 잔과 함께 듣는 ‘아침마다 지혜’로 오늘도 마음을 단단히, 부드럽게 채워보세요. 37년간의 1막을 이겨내고 인터넷 신문사 편집장으로 2막을 펼쳐가고 있는 김형래 편집장이 매일 아침을 열어드립니다.

HOSTED BY

김형래

CATEGORIES

Frequently Asked Questions

How many episodes does 김형래 편집장의 '아침마다 지혜' have?

김형래 편집장의 '아침마다 지혜' currently has 50 episodes available on PodParley. New episodes are automatically indexed when they're published to the podcast feed.

What is 김형래 편집장의 '아침마다 지혜' about?

인생의 굴곡을 겪으며 깨달은 교훈, 나이 들어 알게 된 진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마음의 힘까지—짧지만 깊이 있는 메시지로 하루의 방향을 잡아드립니다. 시니어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울림이 있는 아침 인사. 커피 한 잔과 함께 듣는 ‘아침마다 지혜’로 오늘도 마음을 단단히, 부드럽게 채워보세요. 37년간의 1막을 이겨내고 인터넷 신문사 편집장으로 2막을 펼쳐가고 있는 김형래 편집장이 매일 아침을 열어드립니다.

How often does 김형래 편집장의 '아침마다 지혜' release new episodes?

김형래 편집장의 '아침마다 지혜' has 50 episodes. Check the episode list to see recent publication dates and frequency.

Where can I listen to 김형래 편집장의 '아침마다 지혜'?

You can listen to 김형래 편집장의 '아침마다 지혜' on PodParley by clicking any episode. We provide an embedded audio player for direct listening, and you can also subscribe via your preferred podcast app using the RSS feed.

Who hosts 김형래 편집장의 '아침마다 지혜'?

김형래 편집장의 '아침마다 지혜' is created and hosted by 김형래.
URL copied to clipboa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