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지혜 #376] 익숙함을 지킬까 새것을 택할까 ― 반세기 만에 풀린 한 물리학자의 수식 episode artwork

EPISODE · Jun 4, 2026 · 15 MIN

[아침마다 지혜 #376] 익숙함을 지킬까 새것을 택할까 ― 반세기 만에 풀린 한 물리학자의 수식

from 김형래 편집장의 '아침마다 지혜' · host 김형래

주차할 자리를 고를 때도, 식당을 정할 때도, 심지어 평생을 함께할 사람을 결정할 때도 우리는 같은 질문 앞에서 머뭇거립니다. "혹시 저 모퉁이만 돌면 지금보다 더 나은 선택이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까." 익숙한 것을 지킬 것인가, 새로운 것으로 옮겨 갈 것인가. 누구나 한 번쯤 겪어 본 이 선택의 망설임을 두고, 최근 영국과 미국의 학자들이 흥미로운 답을 내놓았습니다.이야기의 출발점은 반세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88년 세상을 떠난 미국의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은 1970년대 어느 날 캘리포니아의 한 태국 음식점에서 친구와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늘 먹던 단골 메뉴를 그대로 시킬지, 처음 보는 음식을 시도할지 고민하던 친구를 위해 파인만은 그 자리에서 종이에 수식과 그래프를 적어 내려갔다고 합니다. 친구가 평생 간직해 온 이 낙서가 마침내 옥스퍼드대학교와 프린스턴대학교, 뉴욕시립대학교 연구진의 손을 거쳐 해독되었고, 그 결과가 권위 있는 학술지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 실렸습니다.연구진은 2,520명을 대상으로 낯선 도시에 7박, 14박, 28박 동안 머무는 상황을 가정한 모의실험을 진행했습니다. 참가자들은 매일 저녁 식당을 고를 때마다 그 식당의 품질을 알려 주는 점수를 화면으로 확인했습니다. 결과는 명료했습니다. 머무는 기간이 길수록 사람들은 초반에 새로운 곳을 더 많이 찾아 나섰고, 남은 시간이 줄어들수록 더 나은 곳을 찾으려는 기대를 차츰 낮추며 한곳에 정착했습니다. 이 단순한 방식만으로도 7박 여행자가 평균 이상의 좋은 식당에 안착할 확률은 98.4퍼센트, 28박 여행자는 사실상 백퍼센트에 가까웠습니다.이 발견의 핵심은 결국 시간이라는 변수에 있습니다. 남은 시간이 넉넉할 때는 새로운 시도가 그만한 값을 합니다. 얻은 정보를 두고두고 활용할 여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는 사정이 다릅니다. 새 정보의 쓸모가 줄어드는 만큼, 이미 검증된 최선의 선택에 마음을 정하는 편이 합리적입니다. 흥미롭게도 사람들은 복잡한 공식을 알지 못해도 본능적으로 이 이치를 따랐고, 그 직관은 정교한 수학 모델에 거의 뒤지지 않았습니다.이 연구는 시니어 독자에게 각별한 울림을 줍니다. 우리는 흔히 나이 든 세대가 익숙한 방식을 지키는 모습을 두고 완고하다거나 고집스럽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위 연구가 알려 주는 바는 사뭇 다릅니다. 살아갈 날이 유한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오랜 세월 쌓아 온, 이미 검증된 경험에 더 무게를 싣는 것은 고집이 아니라 가장 이치에 맞는 선택이라는 사실입니다. 수십 년에 걸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결정을 통과하며 시니어가 길러 온 안목은, 그 자체로 함부로 흉내 낼 수 없는 자산인 셈입니다.다만 이 수식이 새로움을 멀리하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파인만의 권고에서 먼저 강조된 것은 오히려 초반의 충분한 탐색이었습니다. 인생의 어느 길목에서든, 굳게 닫아거는 태도보다 적절히 열어 두는 태도가 더 나은 결과로 이어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검증된 것을 든든히 지키는 지혜와, 때때로 낯선 것에 손을 내미는 용기가 함께 갈 때 비로소 균형이 잡힙니다. 요리·여행 프로그램으로 잘 알려진 배우 스탠리 투치 역시 단골 식당으로 돌아갈 때의 편안함을 이야기하면서도, 새로운 요리를 용기 내어 맛보는 즐거움을 나란히 예찬했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어느 요리사이자 여행 작가는, 가끔의 실패한 식사를 감수하지 않으면 인생 최고의 한 끼를 만날 기회도 영영 오지 않는다는 취지의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검증된 경험의 가치는 짐이 아니라 안전판이며, 오랜 질서는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를 지켜 주는 무게중심입니다. 동시에 지혜로운 삶이란 언제 그 자리를 지키고 언제 한 걸음 내디딜지를 분별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 분별의 감각이야말로, 숱한 선택을 통과해 온 시니어가 이미 몸으로 익혀 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익숙함을 지키되 새로움에 닫히지 않는 균형, 그 오래된 지혜를 한 장의 낡은 메모가 새삼 일깨워 줍니다.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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