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DCAST · religion
가스펠인(人) 말씀묵상
by Jubilee Christian Life Coach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처음부터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처음 "그리스도인"이라 불린 배경에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핍박이 있었습니다. 종교인들은 스데반이라는 사람을 신의 이름으로 죽였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제자들은 어쩔 수 없이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열악한 상황에도 그들은 예수의 복음, 즉 왕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찌 보면 오히려 핍박 때문에 복음은 더 빨리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었습니다. 그 결과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기록합니다(사도행전 11장).그런데 요즘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가 예수 그리스도와 무관한 단어가 된 것 같습니다. 그 이유로는 '교회'의 타락이 있습니다. 최근 발표된 여론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75.4%가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결과에 놀라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어찌하여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되었을까요? 저는 가장 큰 원인으로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즉 '왕의 복음'이 왜곡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왕의 복음'이 왜곡되면서 '복음'은 천당행 티켓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울러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 아니라 천당행 티켓을 판매하는 자들, 즉 기득권이 되고 말았습니다.'그리스도인'이란 단어가 오염되었듯, 솔직히 '교회'라는 단어도 더 이상 복음 공동체를 뜻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교회"는 건물이나 재정 혹은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가스펠인(人) 사역은 역사상 처음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된 본질을 회복하고자 성경 말씀을 함께 찾아보는 흩어진 나그네, 즉 필그림을 위한 사역입니다. 요즘 이단들이 기승을 부림으로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란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제자들만을 뜻하지 않아 하나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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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세계 사이에서 · Between Two Worlds
댓글 창두 세계 사이에서 · Between Two Worlds독일에서 태어나 한국의 유니폼을 입은 청년이 있습니다. 옌스 카스트로프(Jens Castrop, 보루시아 뮌헨글라트바흐). 그는 사회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더 어렵고 자신의 정체성에 더 부합한 결정을 하였습니다.A young man born in Germany chose to wear the jersey of Korea. Jens Castrop — 옌스 카스트로프 — plays as a midfielder for Borussia Mönchengladbach in the Bundesliga. Despite the pressure to stay, he made the harder choice — the one more true to who he is.카스트로프는 독일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뒤셀도르프에 태어났습니다. 유럽 최대 규모의 한인 공동체 중 하나가 뿌리내린 바로 그 도시에서. 그는 U-16부터 U-21까지 독일 유소년 대표팀을 모두 거쳤습니다. 더 쉬운 길은 독일에 남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2025년 8월, FIFA는 그의 국적 변경 신청을 승인했습니다. 그해 9월, 그는 미국을 상대로 한 A매치에서 한국 대표팀 데뷔전을 치렀습니다. 그리고 2026년 5월, 그는 한국 축구 역사상 최초의 외국 태생 혼혈 월드컵 대표팀 선수가 되었습니다.Castrop was born in Düsseldorf to a German father and a Korean mother — in a city that happens to be home to one of Europe's largest Korean communities. He represented Germany at every youth level from U-16 through U-21. The easier path was to stay. Instead, in August 2025, FIFA approved his switch of international allegiance to South Korea. In September 2025, he made his senior debut in a 2–0 win over the United States. In May 2026, he became the first foreign-born, mixed-heritage player ever selected for a South Korean World Cup squad.홍명보 감독은 그를 선발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눈빛에서 불꽃을 보았습니다." 통계가 아닙니다. 전술적 포지션이 아닙니다. 불꽃입니다.South Korea's coach Hong Myung-bo described what he saw when he called Castrop up: "They saw the fire in my eyes." Not statistics. Not tactical position. Fire.카스트로프 자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머니께서 어릴 때부터 한국의 문화와 전통, 그리고 가치관을 가까이 접할 수 있도록 가르쳐주셨다." 그리고 이제: "이제는 정말 온전한 한국인이 된 거 같다."Castrop himself says: "My mother taught me from a young age to stay close to Korean culture, traditions, and values." And now: "I feel like I've truly become a full Korean."성경은 옌스 카스트로프 같은 사람들을 위한 범주를 가지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증인들은 완벽히 정착한 사람들의 명단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이픈의 사람들 — 있었던 것과 약속된 것 사이에서 살아간 사람들의 전당입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났습니다. 룻은 이방의 땅으로 건너가 자기 것이 아닌 백성에게 충성을 선언했습니다.Scripture has a category for people like Jens Castrop. The great cloud of witnesses in Hebrews 11 is not a hall of the perfectly settled. It is a gallery of the in-between — people who lived with one foot in what was, and one foot stretched toward what was promised. Abraham left Ur. Ruth crossed the border into a foreign land and pledged allegiance to a people not her own."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 히브리서 11:13 (개역개정)"These all died in faith, not having received the things promised, but having seen them and greeted them from afar, and having acknowledged that they were strangers and exiles on the earth." — Hebrews 11:13 (ESV)한국계 미국인인 우리에게, 그리고 양문화 사이에서 자라는 우리 자녀들에게, 이것은 시적 은유가 아닙니다. 이것은 화요일 아침입니다. 학교 점심 식탁에서 "근데 넌 진짜 어디서 왔어?"라는 질문을 받는 그 순간입니다. 친척 모임에서 억양이 조금 이상하다는 눈빛을 받는 순간이고, 미국 직장에서 얼굴이 예상과 다르다는 침묵 속의 당혹감을 감지하는 순간입니다. 두 세계를 동시에 붙잡는 것 — 그것은 지치는 일이기도 하고, 아름다운 일이기도 합니다.For those of us who are Korean-American — and for our children who grow up as third-culture individuals — this is not a poetic metaphor. It is Tuesday morning. It is the question at the school lunch table: "But where are you really from?" It is the Korean family reunion where your accent is slightly off, and the American workplace where your face does not match the unspoken expectation. Holding two worlds at once is exhausting and beautiful.그러나 히브리서 11장은 나그네의 삶을 낭만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솔직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것을 말합니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 히브리서 11:16 (개역개정)But Hebrews 11 does not romanticize the exile's life. It is honest about the loss. And at the same time it says this: "But as it is, they desire a better country, that is, a heavenly one. Therefore God is not ashamed to be called their God, for he has prepared for them a city." — Hebrews 11:16 (ESV)최종적인 소속은 어떤 여권도 줄 수 없고, 어떤 FIFA 판결도 빼앗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중 언어의 마음, 이중 문화의 직관, 세계들을 번역하는 능력 — 이것들은 짐이 아닙니다. 이것들은 소명입니다.The final belonging is the one no passport can grant and no FIFA ruling can revoke. The bilingual mind, the bicultural intuition, the capacity to translate not just words but entire worlds — these are not burdens. They are callings.이번 에피소드의 묵상 질문 · Reflection Questions당신의 삶에서 두 세계 사이에 있다고 느끼는 영역은 어디입니까 — 문화적으로, 직업적으로, 신앙적으로? 그 '사이'를 당신은 주로 짐으로 경험합니까, 아니면 선물로 경험합니까? Where in your life do you feel caught between two worlds — culturally, professionally, spiritually? Do you mostly experience that "in-between" as a burden, or as a gift?카스트로프의 어머니는 이방 땅에서 아들에게 문화와 전통과 가치관을 심었습니다. 당신에게 그런 씨앗을 심어준 사람이 있습니까? 혹은 당신이 지금 누군가에게 심고 있는 씨앗은 무엇입니까? Castrop's mother planted culture, tradition, and values in her son in a foreign land. Is there someone who planted that kind of seed in you? Or what seed are you planting in someone else right now?히브리서 11장의 나그네들은 지상의 고향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늘의 본향을 사모했습니다. 당신의 삶에서 어떤 '지상의 소속'이 최종적인 소속의 자리를 차지하려 하고 있습니까? The exiles of Hebrews 11 were not looking for an earthly home — they were seeking a heavenly one. In your own life, what earthly belonging is quietly trying to take the place of final belonging?전체 글과 참고문헌은 쥬빌리 코치 홈페이지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The full article with all references is available at the Jubilee Coach homepage.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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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6장
댓글 창바울은 성도 간의 문제를 불의한 세상 법정에 가져가는 것을 강하게 책망합니다. 성도는 장차 세상과 천사를 심판할 존귀한 신분인데, 교회 내의 작은 일조차 판단하지 못하고 세상에 호소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바울은 형제끼리 고발하는 것 자체가 이미 패배한 것이며,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속는 것이 낫다고 강조합니다.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어찌 감히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6:1–2)교회 안 분쟁을 해결하는 원칙은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아는 자들끼리의 문제는 십자가로 해결해야 합니다. 사랑의 원리, 용서의 원리를 따라야 합니다. 원수까지 사랑하시고 축복하셨던 예수님을 본받아 해결해야 합니다. 잘잘못을 가리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거기에만 그친다면 세상 법정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손해를 보더라도 지체를 세워 주고, 부족함을 감수해 주는 것이 십자가 원리입니다. 신상필벌이 십자가 정의의 전부는 아닙니다. 십자가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정의입니다.불의한 일에 눈감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세상 법정에 의해 세워진 정의가 오히려 십자가의 관점에서는 불의가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부유한 교인들이 세상 법정에서 약한 형제들을 억압하고 이익을 취한다면, 그것은 정의가 아닙니다. 말씀을 떠난 정의, 사랑을 잃은 정의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용서 없는 정의는 은혜를 모르는 정의입니다.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6:11)“모든 것이 가하다!” 고린도의 일부 성도들이 내건 구호입니다. 신령한 자신들은 어떤 제한도 받지 않은 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자유롭게 결정하고 향유할 수 있는 존재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실은 방종한 자들에 불과했습니다. 진정한 성령의 사람들은 예수께 복종합니다. 성령께서 조명해 주신 말씀을 따라 삽니다. 자신의 자유만을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자유를 양도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이 진리가 주는 참 자유입니다."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6:12).“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다!” 영육이원론에 사로잡힌 고린도 교회 일부 성도들의 구호입니다. 음식이 식욕 해소를 위한 것이듯, 성욕도 해소해야 할 생리현상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잘못되었습니다. 배와 음식은 사라지지만 몸에 행한 음행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 몸은 내 것이기 전에 주님의 것이니, 주님의 뜻대로, 주님의 영광대로 써야 합니다. 부활의 몸이 되게 하실 것이니 이 몸은 일시적이지 않고 영원할 것입니다. 그러니 몸을 외면한 채 구원받기에 합당한 영혼이 있을 수 없습니다.그리스도의 지체와 창기의 지체는 공존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몸은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따라서 몸을 더럽히는 것은 성전을 더럽히는 것이요, 우리 몸은 피 값을 주고 사신 하나님의 소유이니, 몸을 더럽힌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것을 더럽히는 죄가 됩니다. 우리 몸은 우리의 영광, 우리의 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먼저 소유자이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분의 뜻을 따라 사용해야 합니다."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6:19-20)바울이 이 장에서 여섯 번이나 묻습니다.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무지를 꾸짖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알고 있는데 살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을 깨우치는 것입니다. 복음은 새로운 정보가 아닙니다. 복음은 이미 선언된 사실을 삶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씻겼습니다. 거룩해졌습니다.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이 선언으로부터 살아가십시오.쥬빌리 코칭 질문Coach Brian’s Questions나는 지금 어떤 분쟁이나 억울함을 붙들고 있습니까? 십자가의 원리 — 사랑으로 역사하는 정의 — 로 그 문제를 바라본다면 무엇이 달라질 수 있습니까? 그리고 내 몸이 성령의 전이라는 사실이, 오늘 내가 내려야 할 결정을 어떻게 바꿉니까?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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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5장
댓글 창교회가 세상보다 못할 때 고린도전서 5:1–13바울은 네 장에 걸쳐 고린도 교회의 분열을 이야기했습니다. 파벌, 교만, 서로 다른 충성심. 그런데 5장에서 그는 갑자기 방향을 틉니다.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이 생겼기 때문입니다.교회 안에 있는 한 남자가 자기 아버지의 아내와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두고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이 관계는 모세의 율법(레위기 18:8)뿐 아니라 로마법으로도 금지된 것이었습니다. 교회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습니다.바울이 더 놀란 것은 바로 그 침묵이었습니다.1. 문제 — 교만한 침묵"그러하거늘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고린도전서 5:2, 개역개정)"교만하여졌다"는 표현, 사실 이 편지에서 처음 나오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미 여러 번 같은 단어를 썼습니다. 신학적 파벌 다툼에서 드러났던 바로 그 교만이, 이번에는 도덕적 무관심의 얼굴로 나타난 것입니다.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의 침묵을 은혜라고 불렀을지 모릅니다. 혹은 관용, 아니면 판단하지 않는 성숙함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바울의 눈에는 달리 보였습니다.여기서 잠깐 멈춰볼 필요가 있습니다. 죄인을 향한 진정한 은혜와, 해로운 패턴 속에 있는 사람을 그냥 내버려 두는 침묵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 둘을 혼동할 때, 우리는 은혜의 이름으로 사람을 버리는 일을 하게 됩니다.2. 목적 — 회복을 위한 엄중함"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전서 5:5, 개역개정)"사탄에게 내주다"는 표현은 읽는 이를 멈칫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 뒤에 따라오는 목적절이 전부를 바꿉니다. "영은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바울은 이 사람을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를 되돌리려 하고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로부터의 분리 — 그 교제와 기도와 성례전적 삶으로부터의 단절 — 은 회복을 위한 위기였습니다. 이 경험의 무게가 그 사람을 무릎 꿇게 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이것이 끝이 아니었다는 것은 고린도후서 2:6–8에서 확인됩니다. 회개한 그 사람을 향해 바울은 교회에 이렇게 씁니다. "용서하고 위로하라. 그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라." 5장의 행동은 이야기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습니다.칼뱅은 교회 권징을 그리스도의 몸을 지탱하는 "힘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힘줄은 무기가 아닙니다. 연결하고 생명을 지탱하기 위해 존재합니다.그리고 바울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권징에 대한 실제적인 지침 한가운데서, 그는 갑자기 복음을 열어 보입니다."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고린도전서 5:7, 개역개정)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나고 있습니다.먼저 경고입니다. 누룩은 조용히 퍼집니다. 유월절을 앞두고 이스라엘 가정에서는 집 안의 모든 누룩을 찾아 제거했습니다. 바울이 이 이미지를 사용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묵인된 죄는 봉인된 죄가 아닙니다. 그것은 서서히 공동체의 감각을 바꾸어 놓습니다.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바울은 거룩함에 대한 부름 전체를 하나님께서 이미 행하신 일 위에 세웁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월절 양으로 희생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구원받은 것이 그들의 도덕적 노력 덕분이 아니라 어린 양의 피 덕분이었듯이, 우리의 자유도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모든 유월절 양이 가리키던 그분을 통해 옵니다.바울의 논리 순서를 놓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기 때문에, 그러므로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거룩함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이미 누룩 없는 자입니다. 이제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3. 경계 — 안과 밖"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를 가리킨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고린도전서 5:9–10, 개역개정)바울은 이전 편지에서 오해를 불러일으킨 말을 바로잡습니다. 그는 세상의 부도덕한 사람들을 피하라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교회의 부르심은 세상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세상 안에서의 신실한 존재입니다.바울이 말하는 것은 더 구체적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고백하면서도 그 의미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공동체의 침묵은 중립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메시지를 보냅니다. 그리스도 안의 삶과 그 밖의 삶이 다르지 않다는 메시지를.바울은 신명기의 언어로 마무리합니다.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 (13절). 이 행동은 결코 가볍게 이루어져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 논리는 목회적입니다. 공동체의 온전함 자체가 그 증거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이 장의 중심에는 하나의 고백이 있습니다. 우리의 유월절 양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습니다. 묵은 누룩을 내버릴 수 있는 것은, 이미 잔치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쥬빌리 코칭 질문01. 지금 당신의 삶에서 조용히 타협해 온 것이 있다면 — 습관이든, 관계든, 패턴이든 — 그것을 조금 더 솔직하게 바라본다면 어떨까요?02. 누군가 용기를 내어 당신에게 어려운 말을 해 주었던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것을 받아들이기 쉬웠던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혹은 어려웠던 이유는요? 그 경험이 당신이 다른 이들에게 진실을 전하는 방식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나요?03. 바울은 복음에서 윤리로 나아갑니다.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기 때문에, 그러므로 자유로운 백성으로 살라고 합니다. 거룩함이 내가 아직 해야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하신 일로부터 시작된다면, 당신의 일상은 어떻게 달라질까요?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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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4장
댓글 창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것 같습니다. 아마도 에덴 동산의 범죄 후 노출된 우리의 모습이 부끄러운 것을 본능적으로 아는 것 같습니다.창세기 3장 7-8절 (새번역), "그러자 두 사람의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벗은 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엮어서, 몸을 가렸다. 그 남자와 그 아내는, 날이 저물고 바람이 서늘할 때에, 주 하나님이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들었다. 남자와 그 아내는 주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서,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고린도 교회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잎사귀가 아닌 다른 사람들로서 자신들의 허물을 감추려 했습니다. 그들은 바울, 아볼로, 게바 중 누가 더 대단한 지도자인지를 따졌고, 그 지도자들을 통해 자기들의 영적 수준까지 과시하려 했습니다. 골목대장을 따르는 사람들의 심리가 아닐까 싶습니다.그런 그들에게 바울은 말합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1절) 여러분, 아무리 능력이 있더라도 사역자는 교회의 주인이 아닙니다. 아무리 헌신과 수고를 했다고 해도 교인은 교회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다 그리스도께 속한 일꾼이며, 하나님이 맡기신 복음의 비밀을 관리하는 청지기입니다. 우리의 고백은 "무익한 종, 할 일을 다했습니다" 뿐입니다.청지기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신실함입니다. 화려한 말솜씨도, 많은 추종자도, 사람들의 박수도 아닙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2절)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의 평가가 자신에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도 스스로를 판단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최후의 판단자는 오직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4절)8절에서 바울의 어조는 날카로워집니다.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고린도 교인들은 마치 부활의 영광이 이미 완성된 것처럼 살고 있었습니다. 십자가는 지나간 일이고, 왕관은 이미 자기들의 것인 양 여겼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왕이신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다스리는 자신들을 위한 왕국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출애굽 당시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던 그 모습이 떠오릅니다.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출애굽기 32:1)그러나 바울은 전혀 다른 길을 보여 줍니다. 그는 사도들을 "사형 선고를 받은 자같이" 맨 끝에 세우셨다고 말합니다.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 맞고, 정처 없이 다니며,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은 취급을 받는다고 고백합니다(9–13절). 사도의 삶은 영광의 포장지가 아니라 십자가의 형상을 띠고 있었습니다. 진정한 성도가 찾아야 하는 것은 왕관이 아닙니다. 주님이 쓰신 가시 면류관을 우리가 마음에 품지 않고서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그러나 바울의 날카로운 말은 정죄가 아닙니다. 자녀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에서 나온 권면이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14절) 복음 안에서 낳은 자녀에게 아버지가 주는 경고는 수치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를 보내고, 결국 자신도 그들에게 가겠다고 말합니다.그리고 바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20절) 고린도 교회는 말이 많았습니다. 자랑도 많았습니다. 평가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말재주와 자기 과시에 있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따라가는 신실함, 복음이 실제로 사람을 낮추고 변화시키는 능력에 있습니다.오늘 나는 어떤 성도로, 어떤 청지기로 살고 있습니까?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에 끌려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맡은 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사역도, 은사도, 기회도, 사람도 모두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시는 날, 사람들의 박수가 아니라 주님의 판단 앞에 신실한 청지기로 서기를 원합니다.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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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3장
댓글 창문제 많은 고린도 교회를 사도는 보면서 안타까워했습니다. 무엇보다 한마디로 그들의 신앙이 너무 망나니 같았기 때문입니다.1-2절,"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영에 속한 사람에게 하듯이 말할 수 없고, 육에 속한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 같은 사람에게 말하듯이 하였습니다.나는 여러분에게 젖을 먹였을 뿐, 단단한 음식을 먹이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는 여러분이 단단한 음식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지금도 여러분은 그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예수를 처음 믿기 시작해서 어리숙한 것은 탓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육신에 속한 것, 즉 세상이 기준이 된 것이라 말씀합니다.3절, "여러분은 아직도 육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시기와 싸움이 있으니, 여러분은 육에 속한 사람이고, 인간의 방식대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무엇이 인간의 방식일까요?인간의 방식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중 몇 가지만 언급합니다.하나는 교회라는 집단에서 골목대장을 하는 것입니다. 학교나 회사, 그리고 특별히 교회에 보면 사람들을 몰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것은 리더십이 아닙니다. 골목대장십입니다. 외람되지만 우리의 대장은 오직 예수님이셔야만 합니다. 그런데 골목대장들 때문에 고린도 교회는 "나는 바울 편, 나는 아볼로 편"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육에 속한 사람들입니다.또 하나는 교회에서 명예를 운운하는 사람들입니다. 많은 경우에 교회는 그런 사람들 때문에 어지러워집니다. 교회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명예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 밖에는 없습니다. 성도로서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명예가 아니라 멍에입니다. 자신을 부인하고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가 가신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이 우리의 부르심이어야 합니다.교회를 친교를 위한 놀이터나 사조직으로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특징은 자신들의 편리를 위해 공간을 리모델링은 해도 고아와 과부를 위해 마음과 지갑을 열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던가요? 잎사귀만 풍성한 나무라고? 회칠한 무덤이라고도 하신 것 같습니다. 더 많습니다만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갑니다.10-11절,"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혜를 따라, 지혜로운 건축가와 같이 기초를 놓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그 위에다가 집을 짓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집을 지을지 각각 신중히 생각해야 합니다.아무도 이미 놓은 기초이신 예수 그리스도 밖에 또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습니다."육에 속한 사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예수 그리스도 말고 또 다른 기초를 놓으려 하는 사람들입니다.다른 기초는 자신의 믿음을 자랑하는 것, 자신의 희생을 자랑하는 것, 자신의 노력과 수고를 자랑하는 것, 자신의 헌신을 자랑하는 것 등등 많습니다. "내가 우리 교회를 위해서 그동안 얼마나 희생했는데!"라고 말하는 순간 외람되지만 예수가 아니라 다른 기초를 놓고 있습니다.21-23절, "그러므로 아무도 사람을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상이나, 삶이나, 죽음이나, 현재 것이나, 장래 것이나,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입니다."오늘 묵상은 흔히 말하는 "죄 있는 사람들"에게 회개를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오늘 묵상은 "교회"라고 하는 조직의 일원으로서 은연중에 예수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의지하고 자랑하는, 열심히 종교생활하시는 분들을 향한 불편한 말씀이 되겠습니다.육에 속하지 마십시오. 애통하며 자복하는 심령을 간구하십시오.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입니다.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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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2장
댓글 창우리는 말 잘하는 사람이 인정받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완벽하게 다듬어진 이미지, 흔들리지 않는 논리, 언제나 준비된 답변 — 이런 것들이 사람의 가치를 증명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2장에서 바울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섭니다. 두려움과 떨림 가운데 왔다고 고백하면서, 오직 성령의 능력에 전적으로 의지했다고 말합니다.사실 복음은 우리의 인간적인 기준을 뒤집어 놓습니다. 세상이 실패라고 부르는 것이 구원의 엔진이 됩니다. 세상이 약함이라고 부르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몸을 낮추신 자리입니다.약함 가운데 온 사도바울은 고린도에 오기 전, 아테네 아레오바고에서 연설을 했습니다. 철학적으로 정교한 설교였지만 청중 대부분은 돌아서 버렸습니다(행 17:32–34). 그 다음 행선지가 고린도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어떻게 만났었는지 기억합니다."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3절)그리고 그는 말합니다. 멋진 말, 유창한 웅변이 아니었다고 말합니다."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4–5절)만약 고린도 성도들이 바울의 언변 때문에 믿게 되었다면, 그 믿음은 바울의 능력 위에 세워진 것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은 더 뛰어난 웅변가가 나타나는 순간 무너져 버리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로 세워진 믿음, 선포된 십자가를 통해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만난 믿음은 어떤 논리도 흔들 수 없습니다."우리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니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성경이 말하는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하나님이 상황에 맞게 적응하신 차선책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이 창조되기 전, 이미 십자가의 약함을 통해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그 백성을 영광으로 이끄시기로 뜻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그런데 놀랍게도 그 시대의 권세자들은 이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바울이 말합니다.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8절) 빌라도, 헤롯, 가야바와 같이 쟁쟁한 당대 최고의 권력자들이 무엇을 하였습니까? 만왕의 왕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깨닫지 못하였으나 사실 그들은 그렇게 하나님의 영원한 뜻을 이루었습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패배가 아닙니다. 모든 승리가 흘러나오는 바로 그 승리입니다.그렇다면 왜 어떤 사람은 보고, 어떤 사람은 보지 못합니까?"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14절)신앙은 지능의 문제가 아닙니다. 윤리·도덕이나 노력의 문제도 아닙니다. 문제는 더 깊은 곳에 있습니다. 죽은 영혼입니다.즉 성령으로 중생하게 하시는 역사 없이는 인간은 하나님의 일들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성령의 조명 없이는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의 진리를 인식할 수 없습니다.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영적 지각 능력 자체가 죽어 있기 때문입니다.성령님은 단지 더 많은 정보를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볼 수 있는 영안을 회복시켜 주십니다.12절,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만약 오늘 우리가 십자가가 패배나 어리석음이 아니라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으로 보인다면, 그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탁월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노력이나 탁월함이 아니라, 오직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닫혀 있던 눈을 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잘해야 한다는 압박을 내려놓으십시오. 바울도 떨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그 떨림 속에서 일하셨습니다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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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장
댓글 창하나님이 세상을 뒤집으실 때고린도전서 1:1–31 묵상(성서유니온 매일성경 — 6월 1일–3일)여러분의 존재 가치는 어디서 나올까요?우리는 저마다 그 답을 쌓아 올립니다. 학벌과 경력, 다른 사람들의 인정, 사회적 지위, 혹은 신앙 안에서의 업적으로 그 답을 찾기 위해 많은 수고를 합니다. 1세기 고린도 역시 그런 도시였습니다. 마치 지금의 뉴욕과 같았습니다. 고린도는 로마 제국의 번화한 항구 도시, 지식과 웅변이 곧 권력이었던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바로 그 도시에 편지를 씁니다. 왜냐하면 재력과 실력을 모두 겸비한 고린도 교회는 아주 많은 문제를 떠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편지 앞부분에서 바울은 책망의 말을 한마디도 꺼내기 전에, 먼저 고린도 성도들이 누구인지를 선언합니다. 정체성이 행동보다 늘 먼저 다뤄져야 합니다.성도는 이미 하나님의 귀한 자녀입니다 — 그리스도 안에서 (1:1–9)"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고린도전서 1:2, 개역개정)바울은 편지를 다음과 같이 시작하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분파를 일으키고 소송을 걸고 음행을 용납하는 여러분에게." 물론 바울은 문제를 다룰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는 그들의 정체성을 다루고자 합니다.그들의 존재와 정체성은 하나님의 귀한 자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거룩함은 자신들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문제 많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문제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정체성을 봅니다. 문제를 코칭하지 않고 사람을 코칭하라는 말과 같은 맥락입니다. 바울이 문제 많은 성도들을 보면서 그들의 가능성을 더 잘 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입니다."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1:9)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고린도 교회는 엉망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교회의 상태에 따라 변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마음으로 깨닫는 순간, 우리 삶에는 진정한 변화가 시작됩니다. "더 열심히 해야 하나님이 나를 붙잡아 주실 거야"가 아니라, "하나님이 신실하시니, 이제 내 삶을 함께 들여다보자"는 것입니다.크리스천 라이프 코치로서 제가 여러분께 가장 먼저 드리고 싶은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오래 지속되는 변화는 결코 수치심이나 두려움을 조장해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진정한 변화는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정체성이 행동에 앞섭니다. 복음은 우리가 들어오는 문일 뿐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방입니다.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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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개요
댓글 창십자가의 그리스도께서 혼란한 교회를 다시 세우신다고린도전서는 문제가 가득했던 교회를 향한 바울의 편지입니다. 그러나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너진 교회를 어떻게 다시 세워가는지를 보여주는 소망의 메시지입니다.우리는 흔히 고린도전서를 읽으며 “이 교회는 왜 이렇게 문제가 많을까?”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솔직해지면 곧 이런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고린도 교회의 모습이 사실 오늘날 우리의 이야기 아닐까?” 즉 분열과 자랑, 성적 타락, 자유의 오용, 예배의 혼란, 성찬의 왜곡, 은사 경쟁, 그리고 부활 신앙의 약화까지—이 모든 것은 단지 고대 교회의 흘러간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 교회 안에도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아픔들입니다.그렇다면 바울은 무엇으로 이 교회를 치료하려 합니까? 더 강력한 제도나 세련된 리더십, 혹은 엄격한 도덕주의일까요? 아닙니다. 바울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한 분,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교회를 다시 세워 갑니다.고린도전서를 시작하며 우리는 타인의 문제를 해부하듯 고린도 교회를 분석하기보다, 거울을 보듯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우리 교회 안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파벌과 끼리끼리 문화가 존재하진 않습니까?우리는 복음의 능력보다 사람의 배경이나 리더십을 더 자랑하진 않습니까?머리로는 지식이 넘쳐나는데, 정작 삶에서는 사랑이 메말라 있진 않습니까?나의 '지유'와 '권리'를 주장하느라 믿음이 약한 지체들을 실족하게 하진 않습니까?매주 예배를 드리면서도, 참으로 내 곁의 지체들을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분별하고 있습니까?부활의 산 소망이 나의 오늘 하루의 삶을 실제로 지탱해 주고 있습니까?고린도전서는 교회의 부끄러움을 까발려 수치스럽게 하려는 편지가 아닙니다. 길을 잃은 교회를 멱살 잡아 다시 그리스도 앞으로 데려다 놓는 사랑의 편지입니다. 그러므로 이 서신을 마주할 때, 우리는 단순히 문제 목록만 정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짙은 어둠을 뚫고 찬란하게 비추어 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묵상을 위한 질문내 안에는 고린도 도시의 문화와 닮은 '자랑, 비교, 성공 욕구, 자기중심적 자유’가 어디에 숨어 있나요?나는 교회의 연약함이나 문제를 비판적으로 먼저 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 교회를 얼마나 영광스럽게 부르셨는지를 먼저 기억합니까?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지혜와 의로움,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신다는 사실은 오늘 내가 내려놓아야 할 '자기 의'와 '세상 자랑'을 어떻게 부수어 가나요?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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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學院)인가 학원(虐怨)인가
댓글 창배움의 공간인가, 학대와 원망의 굴레인가최근 공개된 JTBC 밀착카메라 보도를 보셨나요? 매일 밤이 되면 대한민국의 유명 학원가 주변은 그야말로 '교통 전쟁터'로 변합니다. 5차선 도로 중 무려 3개 차선을 학원 버스와 학부모들의 차량이 완전히 점령해 버린 비정상적인 풍경,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대한민국 교육의 씁쓸한 현주소입니다.지자체의 암묵적인 방조와 무법천지가 된 도로 위에서 아이들은 위험하게 차선 사이를 위태롭게 건너며 셔틀버스에 몸을 싣습니다. "돈은 학원이 벌고, 피해와 위험은 고스란히 아이들과 지역 주민들이 떠안는" 이 모순적인 상황은 단순한 교통 문제를 넘어, 우리 사회의 깊은 병폐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배움의 집, 학원(學院)이 아닌, 虐怨(학대할 학, 원망할 원)이 되어버린 현실원래 학원이라는 공간은 지식을 배우고 인격적으로 성장하는 學院(배울 학, 집 원)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과열된 입시 제도와 무한 경쟁, 그리고 물질만능주의 속에서 이 단어는 전혀 다른 서글픈 의미로 다가옵니다. 바로 虐怨(학원)입니다.학대할 학(虐): 청소년기의 자유와 수면, 당연히 누려야 할 행복을 모두 저당 잡힌 채 밤늦은 시간까지 좁은 강의실과 도로 위의 셔틀버스에 가두어 두는 현실. 어른들의 조급함이 만든 '합법적 학대'가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원망할 원(怨): 배움을 통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밟고 올라서야 하는 무한 경쟁 속에서 사회와 어른들, 그리고 친구들을 향한 '원망'과 원한만 쌓여가는 비극을 뜻합니다.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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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50장: 요셉 이야기
댓글 창창세기 50장 묵상 (팀 켈러의 2003년 '화해' 설교에 기초하여)야곱이 죽자, 요셉의 형제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이제 요셉이 우리에게 복수하겠지." 수십 년 전 그들은 요셉을 구덩이에 던지고 노예로 팔았습니다. 그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용서를 받았음에도, 그들은 여전히 요셉을 믿지 못했습니다.이에 대한 요셉의 대답은 세 문장으로 이루어집니다. 구약학자 데렉 키드너는 이 세 문장을 가리켜 "신구약 신앙의 정점"이라 불렀습니다. 어째서인지 살펴보시겠습니다."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창 50:19)요셉은 형들의 죄를 축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질문하며 최후의 심판자 자리에 앉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다. 누군가에게 원한을 품는다는 것은 곧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로마서 12장에서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말씀일까요? 쉽게 말하자면 "내 보좌에서 내려와!" 하시는 것입니다.용서하지 않을 때, 우리는 서서히 우리가 미워하는 바로 그 악을 닮아갑니다. 심판의 보좌는 오직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좌에서 내려오십시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요셉은 "나중에 하나님이 수습하셨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영원 전부터 선을 의도하셨습니다. '바꾸사'라는 표현은 사후 수습이 아니라, 인간의 악의 한가운데서 이미 작동하고 계셨던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를 가리킵니다. 형들의 악의도 사실이었고, 하나님의 섭리도 사실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는 동시에 사실입니다. 야곱의 삶이 그 증거입니다. 야곱의 실패와 죄는 분명히 악한 것이나 그 결과 야곱은 라헬을 만났고 요셉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길이 결국 메시아의 계보로 이어졌습니다.사람들은 우리에게 악을 행하려 하나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도리어 그들의 악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영광으로 부활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인간의 어떤 악의나 심지어 우리 자신의 실패조차도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그 높으신 뜻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아무리 힘이 들고 마땅히 화가 날지라도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십시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승리하십시오."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창 50:21)요셉은 단순히 적대감을 거두는 것에 그치지 않고, 먼저 형들을 향해 다가갔습니다.히브리어 원문은 이를 "그들의 마음에 위로의 말을 건넸다"는 표현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요셉은 두 가지, 즉 깊은 겸손과 담대한 확신을 가졌습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으로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여기 요셉의 겸손은 '나 역시 오직 은혜로만 서 있음'을 아는 것이고, 확신은 '하나님의 사랑이 내 행위에 달려 있지 않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 둘이 함께할 때, 비로소 나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죄를 축소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복음: 더 크신 요셉요셉은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지만 하늘 영광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심판의 보좌에 앉으실 정당한 권리가 있으셨지만, 친히 그 자리에서 내려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악이 자행된 사건인 동시에, 가장 위대한 신적 사랑이 확증된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창세기 50장 20절의 말씀을 몸소 살아내셨습니다.십자가는 우리에게 요셉보다 더 깊은 겸손을 줍니다.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요구할 만큼 무거웠음을 깨닫게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더 큰 확신을 줍니다. 하나뿐인 아들을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셨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 겸손과 확신이 우리를 요셉보다 더 위대한 삶으로 인도합니다. 오직 은혜로 말입니다.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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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을 아는 성도
댓글 창"이사갈 자손 중에서 시세를 알고 이스라엘이 마땅히 행할 것을 아는 우두머리가 이백 명이니" (역대상 12:32)사울의 시대가 저물고 다윗이 왕위에 오르던 거대한 대전환의 순간, 온 이스라엘이 헤브론에 모였습니다. 다른 지파들이 수만 명의 무장한 군사들을 이끌고 나올 때, 이사갈 지파는 단 200명의 우두머리만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적은 수가 온 형제를 통솔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들에게는 군사력보다 강한 '시세를 알고 마땅히 행할 바를 아는 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격변하는 흐름 속에서 지금이 바로 다윗을 따를 하나님의 때임을 분별했습니다.재미있는 것은 히브리어로 '이사갈(יִשָּׂשכָר)'이라는 이름의 뜻이 '대가가 있다', '보상이 있다'라는 의미라는 점입니다. 창세기에서 이사갈은 본래 땅의 현실을 깊이 이해하고 땀 흘려 일하는 성실한 노동의 지파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시대가 흘러 역대기에 이르렀을 때, 그들이 받은 가장 위대한 '보상'은 물질적 풍요가 아닌, 위기의 때에 하나님의 타이밍을 읽어내는 '영적 분별력'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지금 바로 그 전환점에 서 있습니다.변화하는 세상세계 금융 질서가 근본적으로 재편되고 있습니다. 미국 정부는 비트코인을 전략적 국가 자산으로 비축하는 행정명령을 실행하고 있고, 달러 연동 디지털 화폐(스테이블코인)에 관한 연방 규제 법안이 조만간 상원을 통과할 것이라고 예상됩니다. 블랙록과 JP모건 같은 글로벌 금융기관들도 블록체인 위에서 실물 자산을 토큰화하는 데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기술적 유행이 아닙니다. 돈의 본질 자체가 바뀌고 있는 것입니다.세상 속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삶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5)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피해 은둔하는 삶이 아니라, 세상 한가운데서 신실한 증인으로 살아내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잠언 22장 3절은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는 나가다가 해를 받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영적인 신실함과 시대를 읽는 안목은 대립하지 않습니다. 장 칼뱅이 말했듯이, 하나님의 일반 은총으로 주어진 지혜를 외면하는 것은 경건이 아니라 태만입니다.참여하되 얽매이지 않기우리가 경계해야 할 위험은 양방향으로 존재합니다. 하나는 무지(無知), 즉 금융의 거대한 변화 흐름을 분별하지 못해 휩쓸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흡수(吸收), 즉 돈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해 버리는 것입니다. 팀 켈러의 말처럼, 돈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안전과 의미, 그리고 자유를 약속하기에 가장 강력한 우상이 되기 쉽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암호화폐 전문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시대를 충분히 이해하여 마땅히 행할 바를 알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안에 깊이 뿌리내리는 것입니다.목회적 권면블록체인 기술을 완벽히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웃과 성도들이 살아가는 치열한 현실 세계에는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정보에 밝다는 것이 결코 삶의 불안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 3:20). 우리는 하늘의 시민권을 가졌지만, 바로 지금 이 경제적 현실 속에서, 그리고 취약한 이웃들의 곁에서 그 시민권을 살아냅니다.이사갈 자손은 시대를 이해했습니다. 이름의 뜻처럼 세상의 자산이 아닌 '하나님의 분별함'을 최고의 보상으로 여겼던 이사갈 자손처럼, 우리 역시 우리가 발 디딘 시대를 깊이 이해하십시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만 지혜를 구하는 자들로서 이 분별함을 우리의 회중과 가정, 그리고 소명의 자리로 가져가기를 소망합니다.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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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 이야기
댓글 창본문: 창 41:46–57; 45:5–8; 50:20경제 불안, 전쟁, 디지털 화폐와 암호화폐, 흔들리는 세계 질서는 우리 마음 깊은 곳의 불안을 건드립니다. 주님은 이미 죄와 죽음을 이기셨지만, 우리는 여전히 두려움과 결핍과 불확실성의 세상 속에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이미 죄와 사망 권세를 이기셨으나 아직 주님의 재림의 날이 남아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요셉을 통해 깨닫는 복음은 오늘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합니다.요셉의 내러티브는 창세기 37장에서 50장까지 나옵니다. 37장에서 요셉은 꿈을 꾸는 자로 소개되어 형들의 시기와 애굽으로 노예로 팔려가는 것에서 시작하여 보디발 집에서의 시련과 감옥 생활 그리고 관원들의 꿈 해석이 39-40장에 기록됩니다. 41장은 애굽의 바로의 꿈을 해석하여 총리가 되고 42-45장은 온 세상에 기근이 들어 양식을 구하러 온 형들과의 재회와 화해를 기록하고 46-50장은 요셉의 가족이 애굽에 살게 되며 야곱과 요셉의 죽음을 기록합니다.요셉의 이야기는 단순한 위기 관리 지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악, 불의한 제도, 감옥의 시간, 세계적 기근까지도 당신의 선하신 뜻 안에서 다스리신다는 복음의 증언입니다.요셉은 형제들에게 버림받고, 종으로 팔려가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이 말씀은 인간의 죄를 축소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죄의 삯이 사망임을 분명히 합니다. 그러나 악과 죄가 하나님의 뜻과 은혜보다 크지는 않습니다. 죄로 인해 세상만사가 뒤틀릴지라도 하나님의 뜻은 무너지지 않고, 은혜는 소멸되지 않습니다.하나님은 형들에게 버림받고 억울한 누명을 쓴 요셉을 세우셔서 극심한 기근으로 죽음을 맛봐야 하는 이 세상을 먹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무엇보다 이 세상 가운데 언약 백성을 보존하여 장차 오실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보입니다.요셉은 형제들에게 버림받았지만, 결국 높임을 받아 굶주린 자들에게 양식을 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에게 버림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부활과 영광으로 높임을 받아 우리에게 생명의 떡이 되셨습니다. 요셉은 임시 창고를 열었지만, 예수님은 구속의 무한한 은혜를 여십니다. 요셉은 바로 아래에서 섬겼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왕과 제국과 경제와 전쟁과 우리의 내면의 폭풍 위에 다스리시는 왕의 왕이십니다.요셉의 그리스도가 우리의 왕이십니다. 그 말씀은 우리도 이 "애굽"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어제와 오늘 변함없이 우리 하나님이 주권자이시기에 우리는 어떤 불확실성 앞에서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요셉의 형들처럼 악한 마음을 품고 있는 어떤 이들이 우리를 힘들게 해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십니다.우리 안에는 미래를 통제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돈, 정보, 투자, 계획으로 안전을 확보하려는 마음도 있습니다. 때로는 너무 지쳐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려는 마음도 있습니다. 그 다양한 마음들을 인정하되, 그들이 '주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그 마음들을 솔직하게 가져가야 합니다.우리는 혼란스러운 이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은 우리의 주인은 아닙니다. 돈을 사용하지만 돈은 피난처가 아닙니다. 많은 이들이 전문가로서 조언을 주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이 아닙니다. 다양한 기술이 발전해 편의를 제공하지만, 기술이 우리 영혼의 주인이 아닙니다.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참된 왕이십니다. 그분이 다시 오실 때 모든 기근은 끝나고, 모든 거짓 왕국은 무너지며, 모든 무릎은 왕의 왕 앞에 꿇게 될 것입니다.이번 주, 두려움이 아닌 믿음으로 할 수 있는 작은 순종은 무엇일까요?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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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Z 세대의 갈급함에서 배우는 것들
댓글 창최근 KBS 다큐멘터리에서 다룬 기사는 수십만 명의 MZ세대가 불교 엑스포에 몰려들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물질만능 시대에 태어나 자란 MZ세대가 불교의 무상(無常)을 몸으로 배운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스님은 EDM을 틀고, 젊은이들은 새벽 예불 종소리에 맞춰 절을 한다고 합니다. 과연 이것은 MZ세대의 유행일까요?한국리서치 조사(2025년 12월)에 따르면 18~29세의 불교 호감도는 56.2점으로 1년 사이 5.3점 상승했습니다. 반면 같은 세대의 개신교 호감도는 30점대에 머물고 있습니다. 어째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저는 MZ세대가 지난 몇십 년간 개신교가 지향해 온 가벼운 신앙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성 어거스틴의 고백을 기억합니다. "주님은 주님을 위해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 안에서 안식을 얻기까지 쉬지 못합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도 같은 진리를 선언합니다. 인간의 최고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전도서는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두셨다고 말한다(전 3:11). MZ세대의 갈망은 이 목적을 벗어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탈한 교회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다큐멘터리에서 한 청년이 말합니다. "불교는 내 마음을 이해하고, 강요하지 않아요."취업난, 주거 불안, 극심한 외로움 속에서 살아가는 이 세대는 웃는 낯으로 박수 치며 "다 잘될 거야"를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진리를 원합니다. 한국 정부가 '고독부'를 신설했다는 사실은 단순한 정책 뉴스가 아닙니다. 나름 세상이 할 수 있는 영적 진단입니다. 이 세대는 침묵을 허락하는 공간을 원하지, "주여 삼창"을 강요받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고통 가운데 하나님과 씨름할 수 있는 존엄한 자유를 원합니다. 만일 MZ 세대가 교회를 등진다면 신앙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가벼움을 떠나는 것입니다.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경쾌한 찬양으로 십자가의 무게를 털어냈습니다. 그러나 사실 성경은 수천 년의 탄식을 품고 있습니다. 시편의 과반수는 탄식입니다. 시대를 벗어나 교회는 선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고통 속에서, 십자가 안에서 만나진다고. 신앙의 선배들은 침묵을 수련했고, 개혁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씨름을 신앙의 본질로 가르쳤습니다. 이 세대가 사찰에서 찾는 고요함은 원래 교회가 말씀을 묵상하고, 주의 만찬에 참여하며, 함께 드리는 기도 안에서 이미 가졌던 유산입니다.MZ세대가 사찰에서 찾는 것들 (무게, 침묵, 절제, 신비, 의미)교회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연합된 가족이어야 합니다. 고독의 시대에 복음만이 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입양된 자녀의 정체성과 영원한 소속감입니다. 불교는 자아를 소멸시키라고 하지만 십자가는 자아를 구속합니다. 불교의 침묵이 마음을 비우는 것이라면, 복음은 창조주 앞에 잠잠하라고 합니다. 복음은 인간의 고통 속으로 직접 들어오신 구원자가 인간이 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라고 선포합니다. "잠잠하여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10)이 세대는 교회가 세속 문화를 흉내 내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교회가 담대하게, 오래되고, 신비롭고 거룩한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영적 대각성은 늘 성경을 일반 성도의 언어로 열어 말씀의 능력이 역사할 때 일어났습니다. 인간의 전략이 아니라 말씀의 선포가, 트렌드의 모방이 아니라 부패된 세상을 향한 정직함이 모든 세대가 원하는 것입니다.MZ세대는 개신교의 가벼움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인생이 얼마나 무거운지 잘 압니다. 개신교가 제시하는 노래와 깊이 없는 설교가 답이 아니라는 것을 정말 잘 압니다. 이들이 거부하는 것은 진정한 십자가 복음이 아니라 세속화된, 그래서 세상과 다르지 않은, 그러다 보니 오히려 세상보다 못한 구호화된 싸구려 종교를 거부하는 것입니다."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 이사야 40:8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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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인가 제자인가?
댓글 창오늘날 우리는 무엇이든 내 입맛대로 고르고 주문하는 '소비자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참여하는 주님의 만찬(성찬)도 혹시 쇼핑몰의 서비스처럼 대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됩니다.1. 소비자주의가 망가뜨린 성찬의 의미현대인들은 예배와 성찬에 나아오며 무의식적으로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오늘 예배에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건 뭐지?""성찬 예식 때문에 예배가 너무 길어지지는 않을까?"이런 태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험료 납부'나 '자기계발' 같은 대상화된 소비로 전락시킵니다. 성찬은 내가 소비하는 '물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사건'입니다.2. '당신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으로마르틴 루터는 기독교인의 삶을 '비타 파시바(vita passiva, 수동적인 삶)'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게으른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능동적인 주체가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일하심을 받아들이는 '수납하는 삶'을 뜻합니다.성찬은 내가 만들어 내거나 쟁취하는 경험이 아닙니다. 복음이 선포되는 예배를 통해, 떡과 잔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과 표징을 전달하시는 것입니다. 성찬을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저 감사함으로 받는 자들입니다."우리가 성찬에 나아가는 것은 거기서 큰 보물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찬이 나의 것이 되고, 내 모든 악에 대항하는 확실한 보증이 되도록 먹고 마시라고 명하십니다." (루터, 대교리문답)3. 소비를 넘어 소망으로성찬은 단순히 과거를 기억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미래에 열릴 '어린 양의 혼인 잔치'를 미리 맛보는 소망의 잔치입니다.하나님은 성찬을 통해 우리의 거짓된 자아상을 부수시고, 그분의 몸과 피를 나누어 주심으로써 우리가 자신과 타인을 하나님의 눈으로 보게 하십니다.지나치게 능동적인 시대, 잠시 멈추어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도록 자리를 내어 드립시다. 성찬은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의 안식으로 인도하는 가장 확실한 선물 중 하나입니다.원문: 다니엘 에골드, 『성찬을 소비하다』 중https://www.modernreformation.org/resources/articles/consuming-communion신학적 한 걸음 더이 글의 저자 다니엘 에골드는 루터교 전통에 서 있습니다. 루터교는 성찬에서 우리가 무언가를 행하기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수동적 수납'을 강조합니다.비록 성찬에 대한 세부적인 신학(루터교의 공재설 vs 개혁주의의 영적 임재설)은 교파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성찬은 나의 만족을 위한 소비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베푸시는 은혜의 선물"이라는 에골드의 통찰은 오늘날 우리 모두가 회복해야 할 제자도의 핵심입니다.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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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1장
댓글 창요셉의 삶은 참 드라마틱합니다. 그는 아버지 야곱에게 특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창세기 37:3). 그러나 형들에게 미움을 받았고, 결국 노예로 팔렸습니다(창세기 37:4, 28). 애굽에서는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고(창세기 39:12–20) 그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사람이 된 것 같았습니다. 창세기 41장은 바로가 이상한 꿈을 꾸는 장면으로 시작해 요셉을 소개합니다.성경은 “만 이 년 후에”라고 아주 담담하게 기록합니다. 그러나 그 두 해가 요셉에게 얼마나 길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는지는 시편 105편이 더 생생하게 보여줍니다."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시편 105:17–19)요셉은 그의 도움을 받은 관원장이 자신을 기억해 주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이제는 억울함이 풀리고 감옥에서 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생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잊혔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결국 두 해가 흘렀습니다.고난 속에서 시간은 참 이상하게 흐릅니다. 기쁠 때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지만, 아플 때의 시간은 멈춘 것처럼 느껴집니다. 요셉에게 그 두 해는 아마 이십 년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릅니다.우리는 종종 지연을 하나님의 부재로 해석합니다. 기다림이 길어지면 하나님이 나를 잊으신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침묵이 길어지면 하나님이 일하지 않으신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창세기 41장은 우리에게 다른 시각을 줍니다. 하나님은 요셉의 감옥 속에서도 부재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서두르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늦지 않으십니다.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결코 선택하지 않았을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에게는 감옥처럼 느껴지는 고난의 자리에서,비로소 우리가 스스로는 결코 깨닫지 못했을 은혜와 축복을 알게 하십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이런 방식이 참 어렵습니다. 가능하다면 고난 없이 성숙하고 싶습니다. 기다림 없이 열매를 맺고 싶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를 빚으신다고 말합니다.조니 에릭슨 타다라고 아실까요? 1967년, 열일곱 살이었던 그녀는 다이빙 사고로 사지마비가 되었습니다. 활발하게 운동하던 소녀가 평생 휠체어에 앉아 살아야 하는 삶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그녀의 간증은 놀랍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두 발로 서 있는 것보다, 휠체어에 앉아 하나님을 아는 것이 낫다고 고백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마비를 단순히 인생을 멈추게 한 비극으로만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혹독한 자비”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참 어렵지만 진리입니다. 우리가 가장 갇혀 있다고 느끼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때로 가장 넓고 깊은 일을 하고 계십니다.요셉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축복이 되는 이유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 주는 그림자와 같습니다. 요셉은 사랑받는 아들로서 형제들에게 거절당합니다. 그는 겉옷을 빼앗기고, 은에 팔려 구덩이에 던져집니다. 그러나 그는 감옥이라는 무덤 같은 자리에서 결국 건져 올려져 왕의 오른편에 서게 됩니다.혹시 기도가 응답되지 않고 있나요? 오랜 시간이 지나서 그 지연이 거절처럼 느껴지고, 침묵이 하나님의 부재처럼 느껴지는 시간을 지나고 있는 분들이 계시다면 요셉의 삶을 묵상하시길 초대합니다. 힘이 들고 많이 지칠지라도 잊지 마십시다. 우리의 기다림은 시간 낭비가 아닙니다. 인생이 잊혀지는 애굽의 감옥에서 요셉을 기억하신 하나님은 봉인된 무덤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일으키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어둠의 고요한 밤에도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비록 오늘은 우리가 그 음성이 들리지 않더라도 믿음의 귀가 열리기를 소원합니다. 반드시 주님의 얼굴을 뵙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날은 분명히 듣게 될 것입니다. "힘들었지. 고생했다. 잘하였고 수고했다. 나의 사랑, 나의 백성아."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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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화폐란 무엇인가요?
댓글 창암호화폐란 무엇인가?판단하기 전에 먼저 디지털 자산을 이해하기암호화폐란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들에게 암호화폐란 비트코인 정도로 이해합니다. 그렇다고 비트코인을 잘 이해하는 건 아닌데, 그래서 이더리움과 XRP는 더더욱 알고 싶어하지도 않습니다. 비트코인과 비슷한 종류의 암호화폐일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기도 바쁘고 가족 일로 마음이 분주하니 뭐 그런 것까지 굳이 알아야 하나라는 생각을 합니다. 평생 주식을 해오지도 않았고 주변에 주식이나 투자 혹은 비트코인으로 손해본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서 크리스천은 필연적으로 몰라야 하는 것이 암호화폐라고 생각하며 모르는 것이 약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합니다.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평생 신학만 공부한 사람이 무슨 바람이 들어서 성경 말씀 묵상하던 것을 잠시 멈추고 이 주제를 다루는지 의아해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암호화폐는 단일한 것이 아닙니다. 암호화폐는 블록체인 기술 위에 구축된 다양한 디지털 자산을 포괄하는 넓은 범주입니다. 어떤 것은 돈처럼 기능하도록 설계되었고, 어떤 것은 탈중앙화 애플리케이션을 작동시키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어떤 것은 결제를 위해, 또 어떤 것은 현실 세계의 자산과 연결되도록 만들어졌습니다.크리스천은 주식에 투자를 해도 괜찮을까요? 더 나아가 “암호화폐에 투자해도 되나요?”라고 묻기 전에, 블록체인 경제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해하는 것과 신앙생활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크리스천은 이 세상에 속하지는 않았으나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들로서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에게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전파하는 사람들입니다. 크리스천은 절대로 신앙을 핑계로 이 세상을 도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관점에서 블록체인 경제와 아울러 암호화폐에서 크리스천의 삶은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 가장 실질적이고 현명하고 지혜로운 선택이 암호가 아닌 '비밀'이었던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에 '투자'하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이번 시리즈를 나누고 있습니다.블록체인: 모든 사람이 알아야 할 기본 개념블록체인에 대한 아주 간단한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블록체인은 “여러 사람이 함께 확인할 수 있지만, 어느 한 사람이 마음대로 지울 수 없는 공유된 디지털 장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우리는 이제 국가들이 비트코인을 “무시하던” 시대에서 이제는 전략적 자산으로 “쌓아두는” 시대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2026년 초 현재, 미국은 BTC를 가장 많이 보유한 국가입니다(328,000개 이상 보유). 중국과 엘살바도르, 그리고 하다못해 부탄과 같은 작은 국가들도 그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미국의 전략적 비트코인 준비, 사이버 어택, 군사적 사용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강대국들은 블록체인 테크놀로지를 사이버전쟁과 환율전쟁에 사용함은 물론 인류를 통제하기 위한 가장 뛰어난 기술로 사용하는 준비를 마쳐가고 있는 듯 합니다.세 가지 주요 암호화폐 자산 — 그러나 전혀 다른 세 가지비트코인(BTC): “디지털 금고”정부가 임의로 더 많이 만들거나 동결할 수 없는 가치로서의 역할을 합니다. 희귀성에 있어서 금과 같습니다.비유: 미국 달러가 종이라면, 비트코인은 금괴와 비슷합니다. 우리는 보통 금괴로 커피와 같은 일상용품을 사지 않습니다. 금은 발굴하는 데 많은 에너지와 자본이 필요하고 또 금의 희소성이 있기 때문에 그 가치가 보전됩니다.핵심: 비트코인은 영원히 2,100만 개만 존재합니다. 이런 점이 금과 아주 비슷합니다. 디지털 금이라고 하는 이유입니다.이더리움(ETH): “글로벌 인프라”2015년 즈음에 세상에 소개된 이더리움은 중개자 없이 사람들이 애플리케이션과 계약을 만들 수 있는 프로그래밍 가능한 네트워크가 되는 것입니다.비유: 비트코인이 금이라면, 이더리움은 석유나 전기와 같습니다. 이더리움은 탈중앙화 애플리케이션이라는 거대한 공장을 움직이는 연료와 같습니다.핵심: 이더리움은 “스마트 계약”을 사용해 이제 보험, 소유권 이전, 그리고 여러 형태의 합의를 변호사나 은행 없이 안전하게 실행할 수 있게 합니다.XRP: “고속 제트기”거액의 돈을 국경을 넘어 거의 즉시, 그리고 매우 낮은 비용으로 이동시키는 것입니다.비유: XRP는 고속 제트기와 같습니다. 비트코인이 거래 정산에 10분에서 60분 정도 걸릴 수 있다면, XRP는 보통 3초에서 5초 안에 정산됩니다. 전통적인 은행 시스템은 적어도 몇 일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XRP는 우리가 이메일로 정보를 빠르게 주고받듯이, 거래를 아주 빠르게 완수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이자 기술입니다.핵심: XRP는 은행을 “대체”하려 하기보다는 송금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해 거래망과 시장을 넓히는 데 있습니다. 은행 시스템이나 잘 구축되지 않은 개발도상국가에도 사람들이 스마트폰은 다 이제 갖고 있는 시대가 되었는데 XRP는 스마트폰만 있으면 지구상 모든 사람들이 서로 물건을 사고팔 수 있는 세상을 엽니다.비트코인에 투자한다는 것은 디지털 희소성을 기반으로 화폐에 대한 불신을 해결하는 '금'에 투자하는 것과 비슷합니다.이더리움에 투자한다는 것은 탈중앙화 경제를 기대하며, 앞으로 이더리움의 가치도 함께 상승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입니다.XRP에 투자한다는 것은 글로벌 결제 시스템이 현재 전통 은행 방식을 뛰어넘는 새로운 시스템이 합법화 되고 국가의 통제를 받을 것으로 예상하여 그 역시 XRP의 가치도 함께 부상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입니다.요약하면, 비트코인, 이더리움, 그리고 XRP는 서로 다릅니다. 각각 특정한 목적을 가진 디지털 도구인데요, 그 도구가 더 희소해지거나 더 유용해지거나 더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해질 때 그 가치는 올라갈 수 있습니다.(전체 내용은 홈페이지에 있습니다. https://www.jubileecoach.com/post/암호화폐란-무엇인가-1)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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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 비트코인이란 무엇인가?
댓글 창비트코인이란 무엇인가: 디지털 희소성, 불신, 그리고 건전한 돈을 향한 갈망블록체인, 제한된 공급량, 탈중앙화, 채굴, 자기 보관, 변동성 — 그리고 그 너머의 신학적 질문1. 비트코인의 배경: 투자 상품이 아닌 불신의 결과비트코인은 처음부터 단순한 투자 상품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시대 사람들이 화폐, 정부, 은행, 인플레이션, 그리고 통제에 대해 품고 있던 깊은 불신과 문제의식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었습니다.비트코인은 사토시 나카모토라는 익명의 인물 또는 집단에 의해 세상에 소개되었습니다. 그 배경에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커진 제도권 금융에 대한 불신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물었습니다.“왜 우리는 돈을 맡기고, 보내고, 보관하기 위해 반드시 은행과 정부를 신뢰해야 하는가?”이 질문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그래서 비트코인을 이해하려면 가격이나 투자가치보다 먼저 이 질문부터 이해해야 합니다. 비트코인은 단지 돈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신뢰의 위기를 겪는 현대인의 마음을 보여 주는 현상입니다.2. 비트코인의 기본 구조비트코인의 핵심 기술은 블록체인입니다. 블록체인은 거래 기록이 담긴 “블록”들이 시간 순서대로 “체인”처럼 연결된 분산 장부입니다. 은행이나 중앙 서버가 장부를 독점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의 수많은 컴퓨터가 함께 보관하고 검증합니다.전통적인 금융 시스템에서는 신뢰가 기관에 맡겨집니다. 은행이 장부를 관리하고 거래를 승인합니다. 그러나 비트코인은 신뢰를 사람이나 기관보다 공개된 규칙과 네트워크의 검증에 두려고 합니다. 그래서 비트코인 세계에서는 “신뢰하지 말고 검증하라”는 말이 자주 쓰입니다.또 하나의 핵심은 제한된 공급량입니다. 비트코인은 총 발행량이 2,100만 개로 제한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비트코인은 채굴이라는 과정을 통해 새로 발행됩니다. 채굴자들은 강력한 컴퓨터 연산을 통해 거래를 검증하고 블록체인에 새 블록을 추가합니다. 그래서 비트코인은 디지털 자산이지만, 그 발행에는 물리적 비용이 들어갑니다.비트코인은 또한 탈중앙화를 지향합니다. 마지막으로 비트코인은 개인의 자산으로 직접 보관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대신 책임져 주지 않는다는 점은 자유이면서 동시에 위험입니다.그리고 비트코인의 현실적인 상황은 변동성입니다. 비트코인은 새로운 가치 저장 수단을 향한 가능성을 보여 주지만, 동시에 여전히 성장통을 겪고 있는 자산이기도 합니다.3. 비트코인이 드러내는 현대인의 불안비트코인의 부상은 단순한 기술 혁신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불신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사람들은 인플레이션을 두려워합니다. 정부가 화폐를 너무 쉽게 찍어낸다고 생각합니다. 은행과 금융기관이 자신들을 보호하기보다 자신들을 이용한다고 느낍니다. 자신이 평생 일해서 번 돈의 구매력이 조용히 줄어드는 것을 걱정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더 희소한 돈, 더 검증 가능한 돈, 더 통제받지 않는 돈을 찾습니다.크리스천은 이 불안을 가볍게 비웃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불의한 경제 구조에 무관심하지 않습니다.“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잠언 11:1)하나님은 정직한 저울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건전한 돈, 정직한 거래, 책임 있는 금융 제도, 권력 남용에 대한 경계는 성경적으로 중요한 주제입니다. 인플레이션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큰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사실도 크리스천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그러나 크리스천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비트코인이 드러내는 불안이 정당한 부분도 있다 해도, 그 불안의 최종 목적지가 어디인지 물어야 합니다.나는 무엇을 신뢰하는가?나는 무엇을 통해 안전해지려 하는가?나는 하나님보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시스템을 더 붙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비트코인은 부패한 정부와 금융 시스템에 대한 인간의 대안처럼 보입니다. 사람을 신뢰하지 않고도 거래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려는 시도입니다. 그 시도는 인간이 서로의 부패성과 한계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하지만 비트코인은 문제를 보여 줄 수는 있어도, 인간의 죄성을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블록체인이 탐욕을 제거하지는 못합니다. 제한된 공급량이 절대적 안식을 주지는 못합니다. 자기 보관이 하나님 없는 자기 의존을 거룩하게 만들지는 못합니다.성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기까지 참된 안식을 얻지 못합니다. 비트코인이 드러내는 통제와 안전에 대한 갈망은 결국 인간이 얼마나 깊이 불안한 존재인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 불안을 구원할 수 있는 분은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4. 크리스천은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크리스천은 비트코인을 무조건 악한 것으로 볼 필요도 없고, 구원의 도구처럼 여길 필요도 없습니다. 배워야 합니다. 분별해야 합니다. 질문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 시리즈를 나누는 이유입니다.비트코인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돈이란 무엇인가? 신뢰란 무엇인가? 정부와 금융기관의 권한은 어디까지인가?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적 책임은 어떻게 함께 가야 하는가?그러나 이 질문들의 마지막 답은 비트코인 안에 있지 않습니다. 마지막 답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디모데전서 6:17)성경은 재물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비트코인이든 달러든 부동산이든 주식이든, 모든 재물에는 정함이 없습니다. 변동성이 큰 자산만이 불안정한 것이 아닙니다. 겉으로 안정되어 보이는 자산도 영원하지 않습니다.그러므로 비트코인에 투자할 것인지 말 것인지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돈을 통해 무엇을 얻고 싶은가? 수익인가, 안전인가, 자유인가, 통제감인가? 그리고 그 마음은 나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데려가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 없이도 안전할 수 있다는 착각으로 이끌고 있는가?비트코인이 새로운 경제와 금융 시스템의 일부로 자리 잡는다 해도, 참된 생명과 의와 평안은 인간이 만든 시장에서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주어집니다. 비트코인은 건전한 돈을 향한 갈망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인간의 더 깊은 문제, 곧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스스로 안전을 구축하려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합니다.그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기술이 아니라 복음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스스로 멸망의 길을 선택한 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죄인을 새롭게 하시고, 우리의 궁극적 안전이 하나님 안에 있음을 다시 깨닫게 하십니다.인류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부패하지 않는 돈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패한 마음을 새롭게 하시는 구세주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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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돈이란 무엇이며 신뢰는 왜 중요한가?
댓글 창돈이란 무엇인가: 가치와 신뢰를 다시 묻다블록체인 경제 시대에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우리가 비트코인, 암호화폐, 스테이블코인, 토큰화, CBDC, ETF 같은 단어를 이해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돈이란 무엇입니까?이 질문은 단순히 경제학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신앙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돈은 단순한 숫자나 종이, 혹은 은행 계좌 안의 기록이 아니라 우리의 신뢰와 두려움과 욕망, 그리고 미래에 대한 우리 속 사람의 실체를 잘 드러내기 때문입니다.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마태복음 6:21).예수님은 “네 마음이 있는 곳에 네 보물도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 네 마음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귀하게 여기는지를 보면, 우리의 속마음이 어디에 거하고 있는지 안다는 말씀입니다. 이번 시리즈에서는 돈, 재물, 물질, 그리고 보물을 모두 "돈"이라고 표현합니다.자. "돈이란 무엇일까요?" 돈은 아주 단순히 말하자면 "도구"죠. 물물교환할 때 필요한 도구입니다. 내가 귀중하게 여기는 보물을 얻기 위해 지불하는 또 다른 재물입니다. 이렇게 돈은 한편으로는 우리가 사용하는 외적 도구이지만, 결코 우리 속마음과 분리된 것은 아닙니다. 외적 도구로 사용되는 돈은 우리 속사람이 마음으로 무엇을 안전하다고 느끼는지 보여줍니다. 즉, 돈은 우리가 무엇과 어떤 상황을 가장 두려워하는지 드러냅니다. 더 나아가 돈은 우리가 어떤 미래를 상상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즉, 돈이란 우리가 어떤 것들이 가치(worth)가 있다고 믿는지를 드러냅니다. 우리의 중간신념이 될 수 있고 더 심각하게는 우리의 절대신념이 될 수도 있습니다.경제적으로 말하면 돈은 보통 세 가지 기능을 합니다(안갑성, 2026). 첫째, 돈은 교환의 수단입니다. 우리는 물물교환을 하지 않고 돈을 통해 물건과 서비스를 사고파는 것입니다. 둘째, 돈은 가치의 저장 수단입니다. 오늘 일해서 얻은 가치를 내일 사용할 수 있도록 보관합니다. 셋째, 돈은 계산의 단위입니다. 우리는 돈을 기준으로 물건의 가격과 노동의 대가를 비교합니다.그러나 돈은 그보다 더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돈은 신뢰의 체계입니다.우리가 종이돈을 사용하는 이유는 그 종이 자체에 가치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은행 계좌의 숫자를 신뢰하는 이유도 숫자 자체가 밥을 먹여 주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돈을 다른 사람도 받아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그 돈을 발행하고 관리하는 제도와 국가와 금융 시스템이 어느 정도 안정적이라고 믿습니다.이런 의미에서 돈은 언제나 “신뢰”와 연결되어 있습니다.블록체인 경제가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비트코인과 같은 디지털 자산은 “우리가 누구를 신뢰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던집니다. 은행을 신뢰할 것인가? 정부를 신뢰할 것인가? 중앙기관을 신뢰할 것인가? 코드와 네트워크를 신뢰할 것인가? 시장 참여자들의 합의를 신뢰할 것인가?그러나 크리스천은 여기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그것은 "우리의 궁극적 신뢰"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미래에도 크리스천이라면 꼭 대답해야 할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언 3:5–6).성경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며 지혜란 하나님의 성품 중 하나라고 말씀하여 지혜를 중요하게 언급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명철, 우리의 판단, 우리의 투자 감각, 우리의 재정 계획이 궁극적 의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도 말합니다. 지식과 지혜의 차이도 다루면 좋겠지만 우선 여기서는 이 정도만 다룹니다. 제가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지혜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의 근원인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다. 즉, 지혜로운 사람은 절대로 자신이 지혜롭다고 말하지 않고 또 지혜를 소유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 어리석다고 고백하며 온전한 지혜 그 자체를 따르려는 겸허한 사람이다는 것입니다.조금 더 풀어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크리스천은 금융 변화에 무지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금융 변화를 구세주인양 붙들어서도 안 됩니다. 무지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리고 일확천금을 꿈꾸는 망상은 비전이 아닙니다. 방법이나 기술을 터득하는 것은 지혜와는 아주 거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돈과 가치는 분명히 다릅니다.크리스천은 돈과 가치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지면의 한계상 글은 여기까지. 전문은 홈페이지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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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록체인 경제시대의 크리스천 (서론)
댓글 창이 시리즈는 투자 조언이 아닙니다. 이 시리즈는 암호화폐나 가상화폐를 장려하기 위해 쓰는 글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새로운 상황을 무조건 거부하는 것을 전제로 쓰는 글도 아닙니다. 저는 칼빈주의 신학을 가진 그리스도인으로서, 목회자로서, 그리고 삶을 함께 고민하는 라이프 코치로서 우리 삶에서 이제는 피할 수 없는 새로운 경제 환경을 성경적으로, 정직하게, 그리고 신중하게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화폐와 금융의 변화를 기점으로 이 시리즈를 시작하게 되었지만 결국 저에게 선명한 것은 제도와 무관하게 "나는 하나님 나라 청지기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고 생각합니다.서론: 왜 그리스도인은 디지털 금융에 대해 성경적으로 생각해야 하는가은행, 화폐, 암호화폐, 토큰화, 스테이블코인, 거래소, ETF, 그리고 세계 금융 질서의 변화라는 큰 흐름을 소개합니다. 그러나 핵심 관심은 수익이 아니라 제자도입니다. 즉 돈과 금융의 세계가 급속히 바뀌고 있는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이자 하나님 나라의 청지기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 여러분과 함께 고민하고자 이 시리즈를 구상하게 되었습니다.우리는 지금 돈, 은행, 화폐, 거래, 소유, 신뢰에 대한 생각이 크게 바뀌는 시대를 지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당면한 시대는 블록체인 경제 시대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까지의 금융과 경제 시스템의 큰 변화가 이미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만간 우리 일상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이미 저는 요즘 운전면허증을 포함해 신용카드와 지갑을 가지고 다니지 않습니다. 하다못해 현대 소나타 하이브리드 자동차 열쇠도 제 핸드폰으로 작동하니 그저 핸드폰 하나면 운전에서 결제까지 웬만한 경우에 다 해결됩니다. 수표를 받아도 은행에 갈 필요는 없습니다. 핸드폰으로 찍으면 입금이 됩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일어난 일들입니다.오랫동안 우리에게 돈이란 현금, 은행 계좌, 신용카드, 수표, 대출, 주택담보대출, 은퇴 계좌, 주식시장과 같은 나름 익숙해진 세계 안에 있었습니다. 그 모든 시스템을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우리에게는 어느 정도 익숙했습니다. 은행이 돈을 보관했고, 정부가 화폐를 발행했고, 증권시장이 투자를 관리했고, 카드 회사가 결제를 처리했습니다. 이런 제도를 우리는 거의 의식하지 못한 채 그 세계 안에서 살아왔습니다.그런데 이제 전혀 새로운 단어들이 일상에 들어오고 있습니다. 비트코인, 암호화폐, 블록체인, 이더리움, XRP, 스테이블코인, 디지털 지갑, 탈중앙화 금융, 토큰화, 거래소, ETF 같은 말들이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거의 새로운 세상의 문이 열린 것처럼 흥분하며 말합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투기, 사기, 혹은 금융적 광기로 단정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저도 그중 한 사람입니다. 재정과 요리, 이 두 가지는 제 큰 약점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이 시리즈에 감히 도전하는 것은 당연히 그 분야의 전문가로서가 아니라 신학적이고 기독교 세계관적 생각을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먼저 혼란스러운 것들을 몇 가지 언급하겠습니다.블록체인은 무엇이고 비트코인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디지털 금입니까? 투자 자산입니까? 중앙은행 체제에 대한 반항입니까? 이더리움은 비트코인과 어떻게 다릅니까? 사람들은 왜 스마트 계약을 말합니까? XRP는 무엇이며, 왜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국제 결제 시스템과 관련이 있다고 말합니까? 암호화폐 거래소란 무엇입니까? 디지털 자산을 “소유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것들에 관심을 가져도 되는 것입니까? 이 시리즈를 마칠 때쯤에는 적어도 이것들에 대한 명확한 이해도를 기대해도 좋겠습니다.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시리즈는 절대로 투자 조언이 아닙니다. 이 시리즈는 암호화폐나 가상화폐를 장려하기 위해 쓰는 글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새로운 상황을 무조건 거부하는 것을 전제로 쓰는 글도 아닙니다. 도박이 아닌 투자에 대하여 성경적 윤리 도덕적인 부분을 조금 다루지만 전반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칼빈주의 그리스도인으로서, 목회자로서, 그리고 삶을 함께 고민하는 라이프 코치로서 이 변화하는 경제 환경에 대한 질문을 정직하게 하며 크리스천 신학과 세계관을 가지고 데이터와 정보를 이해하는 작업을 해보려고 합니다.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마태복음 10:16, 개역개정)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어떤 어려움을 예상해야 하는지에 대한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중요한 출발점을 줍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순진하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단지 낯설다는 이유만으로 눈을 감는 건 안 됩니다. 동시에 당연히 우리는 세속적이거나 탐욕스럽거나 불안에 사로잡히거나 무모해서도 안 됩니다. 지혜가 순결함을 잃으면 조작과 계산이 됩니다. 순결함이 지혜를 잃으면 순진함과 무지가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둘 다로 부르십니다. 지혜롭되 순결하게, 깨어 있되 거룩하게, 세상을 이해하되 세상에 속하지 않게 부르십니다.그러므로 우리는 현재 상황이 무엇을 뜻하는지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질문해야 합니다. 새로운 기술과 금융 시스템이 어떤 도구인지, 어떤 가능성을 지니는지, 어떤 위험을 품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유혹을 불러일으키는지 분별해야 합니다. 무엇이 실제인지, 무엇이 과장되었는지, 무엇이 유익한지, 무엇이 위험한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돈이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깊은 영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성경은 부, 청지기 정신, 빚, 위험, 정의, 자족, 탐욕, 관대함, 신뢰에 대해 많이 말합니다. 재물은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는지 드러냅니다. 투자는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드러낼 수 있습니다. 새로운 기술은 실제적인 기회를 제공할 수 있지만, 동시에 오래된 우상을 새로운 형태로 깨울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늘 하나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안전과 안식을 찾으려는 유혹을 받아 왔습니다. 그것이 땅이든, 금이든, 은행 계좌든, 주식이든, 부동산이든, 디지털 자산이든, 영적인 질문은 여전히 같습니다.나는 어디에 나의 신뢰를 두고 있는가?"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시편 121:1-2)그래서 이 시리즈는 두 가지 일을 함께하려고 합니다.첫째, 블록체인 경제와 관련된 기본 용어와 작동 방식을 일반 독자도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려고 합니다. 비트코인, 암호화폐, 이더리움, XRP, 거래소, 지갑, 스테이블코인, ETF 같은 개념들을 차근차근 살펴볼 것입니다.둘째, 더 중요하게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이러한 변화 앞에서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묻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투자해도 됩니까? 투자한다면 어떤 태도로 해야 합니까? 지혜로운 청지기 정신과 탐욕은 어떻게 구별됩니까? “나만 기회를 놓치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은 어떻게 다루면 좋을까요? 금융적 불확실성과 투기적 열풍 속에서도 어떻게 자족과 관대함을 지킬 수 있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지식을 사용하되, 그 지식과 돈의 가능성에 지배당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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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엘로 돌아가는 길 (창세기 35장)
댓글 창창세기 35장은 돌아옴과 정결함, 예배와 슬픔이 함께 담긴 장입니다.창세기 34장의 어둠과 혼란 이후, 하나님께서 먼저 그에게 찾아오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외롭고 두려운 도망자였을 때 처음 만나 주셨던 그 자리로 그를 다시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다시 야곱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창 35:1).벧엘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에서를 피해 도망치던 야곱이 돌베개를 베고 누웠던 곳,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던 그 자리에서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된 곳이었습니다. 이제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야곱은 재산도 얻었고, 결혼도 했고, 자녀들도 얻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갈등과 타협, 두려움과 깊은 가정의 깨어짐도 경험했습니다. 그런 야곱을 하나님은 다시 벧엘로 부르십니다.그런데 야곱은 벧엘로 올라가기 전에 자기 집안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창 35:2).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우상은 집 밖에 있지 않았습니다. 야곱의 가정 안에 있었습니다. 사실 그 우상들은 그들과 함께 길을 걸어왔습니다. 어느새 그 우상들은 가족의 짐처럼 함께 따라다니고 있었습니다우상숭배는 종종 이렇게 작동합니다. 언제나 극적이거나 종교적인 모습으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우리의 일상 속에 조용히 따라옵니다. 우상은 무엇이 되었든지 나에게 삶의 목적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상은 나에게 힘을 주고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오래된 습관, 숨겨진 두려움, 잘못된 의지, 가족 안에 반복되는 패턴,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지 못한 타협들. 우리가 완전히 내려놓지 못한 것들이 믿음의 여정 속에서도 계속 우리와 함께할 수 있습니다.야곱은 그 이방 신상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습니다(창 35:4). 조용하지만 매우 강력한 행동입니다. 그는 그것들과 협상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을 설명하거나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그냥 묻습니다. 벧엘로 돌아가는 길에는, 새롭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는, 함께 가져갈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야곱은 벧엘에 도착해 제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이라고 부릅니다. 곧 “벧엘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창 35:7). 그때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을 다시 확인해 주셨습니다.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창 35:10). 하나님은 이미 브니엘에서 야곱에게 이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여기서 다시 그 이름을 확인해 주십니다. 야곱은 자신이 누구인지 다시 돌아봐야 했습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정체성을 계속해서 깨닫고 받아들여야 합니다창세기 35장에서는 드보라와 라헬의 죽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삭도 죽습니다. 르우벤은 심각한 죄를 범합니다. 한 장 안에서 야곱은 예배와 언약의 갱신, 출산과 배신, 슬픔과 장례를 모두 겪습니다. 성경은 영적 회복에 대한 기록을 아주 정직하게 말씀합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간다고 해서 인생이 고통 없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벧엘의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것은 우리의 슬픔이 하나님이라는 현실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라헬은 죽지만 베냐민은 태어납니다. 이삭은 장사되지만 언약은 살아 있습니다. 르우벤은 죄를 범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야곱의 가정은 여전히 깊이 깨어져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창세기 35장은 언약 백성의 갖은 실패 이후에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다시 자신에게로 부르십니다. 우리가 너무 오래 지내 온 우상들을 드러내십니다. 우상이란 우리 삶에서 “이것만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여기는 모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예수님보다 더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은 없습니다. 예수가 아닌 다른 것들은 과감히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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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첫 주 말씀 묵상 (골로새서 1장 15-17절 말씀)
댓글 창한 청소년이 있습니다. 그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하나님과 자녀들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저는 그 청소년의 부모가 얼마나 그를 바른 길로 인도하려고 얼마나 마음 졸이며 애쓰고 노력해 왔는지 압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는 그 아이는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예배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다 동화 같은 이야기”라고 말하며 부모가 원하는 신앙생활을 시간 낭비라고 그렇게라도 말해 주니 오히려 저는 그 아이가 그나마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여전히 부모와 대화하고 있다는 사실에 격려를 받습니다. 이것은 절대 작은 일이 아닙니다. 그의 부모는 그를 위해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이 골로새 성도들을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 말입니다."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1:9).혹시 여러분의 삶에도 이 청소년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이 있을까요?어쩌면 여러분의 배우자일 수 있습니다. 부모님이나 자녀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바로 여러분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고, 기독교가 정말 진리인지 확신이 서지 않을 때 여러분도 이 기도를 매일 드리시길 바랍니다."주님, 우리의 눈을 열어 주셔서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보게 하옵소서.”지난 몇천 년 동안 성도들은 어떻게 기독교가 참된 진리인지 알 수 있었을까요? 세상에 수많은 종교와 철학이 있는데, 우리는 어떻게 기독교만이 참된 진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예수님은 자신이 여러 스승 중 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진리를 가르치는 분이라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예수님은 진리를 가르치는 교사가 아니라 진리 그 자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길을 보여 주는 분이 아니라 길 그 자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잘 따라가면 언젠가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영생이라고 말씀하십니다.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이 참으로 자신이 말씀하신 그분이심을 알 수 있을까요?"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15-17)요즘 여러분의 삶은 얼마나 “함께 서” 있습니까? 혹시 집중이 어렵고, 수많은 생각으로 마음이 흩어지고, 감정은 출렁이는 파도처럼 불안하고, 해야 하는 일은 버겁게 느껴지고, 친구나 가족과의 관계는 언젠가부터 조금씩 무너지는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나요? 그렇다면 여러분의 삶이 여러분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았습니다.그래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 때 비로소 마음에 평화가 깃들고, 삶에 균형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낮의 해와 밤의 달이 우주의 조화를 노래하듯 우리의 삶도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 때 비로소 조화로운 삶이 되어 가기 시작합니다.하지만 우리는 죄로 물든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무도 오랜 시간에 걸쳐 이 세상의 권세들로 말미암아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사회, 학교, 이웃, 친구, 그리고 끔찍하지만 하다못해 기독교 종교를 통해서도 섬김이 아닌 성공을, 그리고 성화가 아닌 성장이 마치 진리인양 강요당하고 있었습니다.앞서 말한 청소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균형과 조화가 무너진 삶을 다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오직 예수가 아닌 다른 것들이 없어서 불행하다고 스스로를 속이던 우리 마음을 찢어야 합니다.오직 예수만이 삶의 조화이자 균형입니다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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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니엘의 아침 | Biblical Narrative Praise Project 2026
댓글 창브니엘의 아침홀로 남은 이 밤끝나지 않는 씨름무너진 나의 힘자비를 간구 합니다나를 축복하소서주를 놓지 않으리나를 축복하소서주를 놓지 않으리이 밤이 지나가기 전에내 영혼 주의 이름 부르네내 모든 힘 아침안개 같아라나의 발걸음 이제 고르지 못하네그러나 주 얼굴 뵙는 이 순간새로운 피조물이라 내 이름 이스라엘!이제야 깨닫네하나님 축복을 내가 얻으려 하나예수님 그분이 이미 나의 축복임을!주여 내가 믿나이다!나를 도와주소서.나의 믿음 없음을 주께서 아시나이다.주여 내가 믿나이다!나를 도와주소서.나의 믿음 없음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나를 축복하소서주를 놓지 않으리나를 축복하소서주를 놓지 않으리이 밤이 지나가기 전에내 영혼 주의 이름 부르네브니엘의 아침이 밝아오네내 이름 이스라엘, 주의 영광 보았네나의 발걸음 고르지 못하나 이제는 알았네이제는 나 주와 함께영원히 나 주와 함께 걷네브니엘의 아침이 밝아오네내 이름 이스라엘, 주의 영광 보았네브니엘의 아침이 밝아오네브니엘의 아침이 밝아오네내 이름 이스라엘, 주의 영광 보았네브니엘의 아침이 밝아오네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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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2장 브니엘의 아침
댓글 창"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창 32:26)홀로 남겨진 얍복 강가에서, 야곱의 씨름은 처절한 고독과 절망 속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어두운 밤이 지나고 밝아온 브니엘의 아침은 이전과 전혀 다른 시작이었습니다.오늘 본문을 바탕으로 노래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신기하게도 전통 찬송가나 현대 찬양에 이미 만들어진 노래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본문을 묵상하면서 가사를 써 봤는데요. 야곱의 그 긴 밤의 상황을 마음에 그려보았습니다. 노래는 앞부분에서는 밤새 힘을 다 소멸한 야곱의 낮은 속삭임으로 시작하지만,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마주한 승리의 나팔 소리로 끝을 맺습니다. 브니엘의 아침은 부활의 아침이죠.우리 역시 야곱처럼 인생의 씨름 중에 우리의 "환도뼈"가 부서지는 아픔을 겪습니다. 신앙생활은 절룩거리며 걸어가는 것이 어쩌면 너무도 당연합니다. 이 망가진 세상에서 어떻게 제대로 걸을 수 있겠습니까? 신앙인의 발걸음은 고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씨름하면 우리의 자만이 부서지는 것이 너무도 당연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 쓴 왕관이 벗겨질 때 얻는 그 "상처"는 패배의 흔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면했다는 영광의 흔적입니다.오늘 이 찬양을 들으시며, 어두운 밤을 지나 우리를 위해 예비된 '브니엘의 아침'을 소망하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이름은 이제 '속이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이긴 자 '이스라엘'입니다. 할렐루야!브니엘의 아침홀로 남은 이 밤끝나지 않는 씨름무너진 나의 힘자비를 간구 합니다나를 축복하소서주를 놓지 않으리나를 축복하소서주를 놓지 않으리이 밤이 지나가기 전에내 영혼 주의 이름 부르네내 모든 힘 아침안개 같아라나의 발걸음 이제 고르지 못하네그러나 주 얼굴 뵙는 이 순간새로운 피조물이라 내 이름 이스라엘!(Gently building, but keeping it intimate)이제야 깨닫네 하나님 축복을 내가 얻으려 하나예수님 그분이 이미 나의 축복임을!주여 내가 믿나이다!나를 도와주소서.나의 믿음 없음을 주께서 아시나이다.주여 내가 믿나이다!나를 도와주소서.나의 믿음 없음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나를 축복하소서주를 놓지 않으리나를 축복하소서주를 놓지 않으리이 밤이 지나가기 전에내 영혼 주의 이름 부르네브니엘의 아침이 밝아오네내 이름 이스라엘, 주의 영광 보았네나의 발걸음 고르지 못하나 이제는 알았네이제는 나 주와 함께영원히 나 주와 함께 걷네브니엘의 아침이 밝아오네내 이름 이스라엘, 주의 영광 보았네브니엘의 아침이 밝아오네브니엘의 아침이 밝아오네내 이름 이스라엘, 주의 영광 보았네브니엘의 아침이 밝아오네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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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2장 1-21절
댓글 창야곱의 여정은 이제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섭니다. 라반의 집을 떠난 것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향한 언약의 걸음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두려움이 따릅니다. 31:36–55는 야곱의 성화된 모습을 기록합니다. 그는 더 이상 단순한 “속이는 자”로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그는 이제 자신의 삶을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해석하기 시작합니다.그래서 라반의 부당함을 마주하며, 지난 20년의 수고와 억울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라반과 언약을 맺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화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야곱의 과거, 즉 라반과의 삶을 정리하시는 장면입니다. 이제 하란의 삶은 끝났습니다. 뒤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앞으로 이끄십니다. 32장은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들을 만나는 장면을 기록합니다. 야곱은 그곳을 마하나임이라 부릅니다. 직역하면 “두 진영”입니다. 야곱은 그곳에서 하나님 나라와 지상의 나라가 공존하는 것을 서서히 깨닫습니다. 신앙생활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동시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야곱은 자신이 혼자가 아님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곧 장정 400명을 이끌고 온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본문은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모든 소유를 두 진으로 나눕니다. 현실적인 판단입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낯설지 않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보았지만, 여전히 두려움에 떱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과 상황이 주는 불안이 함께 존재합니다. 감사하게도 성경은 이것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불안 그 한가운데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참된 믿음은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기도합니다. "나는 주께서 내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10절). 성경이 기록하는 야곱은 이제 서서히 자신의 삶을 은혜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예전에는 붙잡고 쟁취해야 얻는다고 생각했던 축복이 이제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선물임을 더욱 깨달아 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란 자격 없는 자에게 주어진 은혜라는 사실을 깨달아 그는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매달립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철저히 준비합니다. 선물과 소유를 나누어 보냅니다. 이 모습은 믿음이 없는 모습이라기보다 은혜 안에서 자라가는 한 사람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다듬어진 믿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적인 믿음입니다.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를 정리하시고, 약속을 향해 나아가게 하시는 분입니다. 두려움이 사라진 후가 아니라, 바로 그 한가운데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야곱의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만, 당장 눈앞의 현실 앞에서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를 하지만 동시에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면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예수님을 믿지만 불안함이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은혜는 여기에서 더욱 빛납니다. 우리의 믿음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불안과 두려움을 이기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그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됩니다. 야곱은 두려움 속에서 약속을 붙들지만, 예수님은 완전한 순종으로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셨습니다. 우리의 불완전한 믿음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실하심 위에 세워집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에서”를 마주하고 있을까요? 기억하십시다. 하나님은 문제를 바로 없애 주시기보다, 우리를 더 깊은 의지로 이끄십니다. 우리는 지금 내 삶을 내가 만든 결과로 보고 있나요, 아니면 은혜로 보고 있을까요? 우리는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기다릴 수 있을까요? 우리가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앞서 가시기 때문에 오늘도 필그림으로서 신앙생활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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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1장 17-35절
댓글 창야곱은 이제 라반의 집을 떠나 본향으로 돌아갑니다.하나님께서 “네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라”(31:3)고 말씀하신 이후, 그는 아내들과 자녀들, 그리고 모든 소유를 이끌고 길을 나섭니다. 이것은 단순한 이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걸음입니다. 순례자로서 따라야 할 삶입니다.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라반의 집을 떠나는 야곱의 내적 상태를 보여줍니다. 야곱이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본향을 향해 가는 것은 분명히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런 순종하는 야곱의 마음 안에는 다분히 그리고 다양한 감정과 생각이 얽혀 있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야곱은 라반에게 알리지 않고, 그가 양털을 깎으러 간 사이를 틈타 도망치듯 떠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서도 여전히 사람이 두렵고 상황이 무서운 것은 어쩔 수 없는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성경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르는 우리도 여전히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우리도 야곱처럼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여 나아가지만, 여전히 사람을 의식하고 상황을 스스로 통제하려는 모습이 남아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 결단하고 움직이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불안하고, 마치 결과를 내가 책임져야 할 것처럼 조바심을 내고 있습니다.그리고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의 헛된 “신”들을 의지하려는 모습은 라반과 라헬의 삶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납니다. 라헬은 아버지의 드라빔, 곧 집안의 신상들을 훔칩니다. 라헬은 하나님께서 야곱과 함께하심을 보고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과거의 방식과 눈에 보이는 보호막을 떨치지 못합니다. 사실 이것은 라반과 라헬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도 돌이나 나무로 만든 우상은 아니더라도, 경제적 안정, 사회적 인정, 세상적 성공과 같은 것들을 의지하며 그것을 우리의 자랑이자 보호막으로 삼으려 합니다.이렇게 성경은 우리의 내면을 드러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가지만 여전히 두려움 속에 있고, 라헬은 떠나면서도 옛 의지의 대상을 붙들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따르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여전히 다른 것을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공존합니다.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에는 눈에 띄는 기적이 나타나지 않지만, 야곱의 여정은 막히지 않고, 라반은 원하는 것을 찾지 못하며, 하나님의 약속은 계속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 흐름은 결국 예수님께로 이어집니다. 이렇게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완벽한 순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우리의 의로움으로 여기시며 언약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것이 복음, 즉 기쁜 소식입니다.오늘도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합니다. 그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더욱 분명히 보게 됩니다. 우리는 두려움을 떨치지 못하고, 다분히 부분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예수를 믿습니다. 예수를 고백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도 함께 붙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불신이 섞인 온전하지 못한 순종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을 보십니다.야곱과 라헬, 그리고 우리 모두의 순종은 불안하고 흔들리기 쉽습니다. 부분적이며 상황에 따라 쉽게 무너지는 믿음을 가지고, 흠이 많은 순종이 우리의 최선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설 수 있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이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고, 동시에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입혀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다른 것을 붙들 필요가 없는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할렐루야!묵상 질문-분명히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고 있지만, 여전히 내가 통제하려는 삶의 영역은 어디입니까?-내가 의지하는 삶의 우상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더 의지하는 이 습관에서, 나는 어떻게 벗어나고 있습니까?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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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1장 1-16절
댓글 창야곱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라반의 집에서 살았습니다. 에서를 피해 도망쳐 온 절박한 여정으로 시작된 삶은 이제 훨씬 풍요롭습니다. 아내들과 자녀들, 가축과 재산까지—겉으로 보기에 그는 무에서 유를 이루어낸 사람입니다. 누구나 이제 그 수고의 열매를 누려야 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을 향해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제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징조는 이미 곳곳에 나타나고 있었습니다.먼저 라반의 아들들의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야곱을 향한 시선에는 점점 적대감이 담깁니다. 라반의 얼굴 역시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습니다. 환대와 호의는 사라지고, 어딘가 냉랭한 기운만 남아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야곱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벧엘 이후 오랫동안 침묵하시던 하나님께서 드디어 말씀하십니다.3절,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야곱의 떠남은 단순한 현실 판단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분위기가 나빠졌고 기회도 줄어들었으니,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상황을 전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이 모든 상황은 우연한 현명한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상황에 반응하시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그 상황을 주권적으로 이끌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라반의 아들들과의 갈등, 라반의 얼굴 변화, 점점 깊어지는 이방인 같은 느낌—이 모든 것은 야곱을 붙잡고 있던 자리를 놓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었습니다. 그곳은 애초에 영원히 머물 곳이 아니었습니다.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한때는 분명 삶의 안정을 주던 것들(직장, 관계, 역할)이 어느 순간부터 불안정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불편함을 해결하고자 합니다. 어떻게든 관계를 회복하려 하고, 상황을 다시 예전처럼 만들려 애씁니다. 그러나 그 불편함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따라가야 할 방향이라면 어떨까요? 하나님은 종종 현재의 자리를 불편하게 만드셔서 우리를 새로운 길로 이끄십니다.이 본문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야곱이 떠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떠남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그의 방식입니다. 그는 라헬과 레아를 들로 불러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제 그는 자신의 삶을 전략이 아니라 신학으로 해석하기 시작합니다.7절, 너희 아버지가 내 품삯을 열 번이나 변경하였으나 하나님이 그를 막으사 나를 해치지 못하게 하셨으며9절, 하나님이 이같이 네 아버지의 가축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야곱은 더 이상 자신의 지혜나 수완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막으셨고, 하나님이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가축이 번성한 것도, 꿈 가운데 보여주신 것도, 모든 과정 뒤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이것은 다른 야곱입니다. 가나안을 떠날 때의 야곱은 자신의 계산과 감각을 신뢰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야곱은 자신의 생존과 번영, 그리고 지금까지의 모든 여정이 하나님의 신실하심 위에 세워졌음을 조금씩 깨닫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다르게 읽기 시작하고 있습니다.이 야곱의 여정은 더 큰 여정을 가리킵니다. 익숙한 곳을 떠나고, 불확실한 길을 지나며, 오래 회피해 왔던 현실을 마주하는 이 길은 완전한 "야곱"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줍니다. 참된 약속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한 가정을 떠난 것이 아니라 하늘을 떠나 이 땅에 오셨습니다. 야곱이 결과를 피하기 위해 떠났다면, 예수님은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야곱이 자신이 잘못한 형을 피해 도망쳤다면, 그리스도는 자신을 해칠 자들을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야곱이 불확실한 환대를 향해 돌아갔다면, 예수님은 자신의 피로 우리를 아버지의 식탁으로 확실히 맞아들이셨습니다.야곱이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이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면, 우리는 이미 그 길을 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의 본향 “집”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지체하지 마십시다. 라반의 집을 떠나 본향으로 돌아가십시다.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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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9-30장
댓글 창야곱은 자신의 쌍둥이 형으로부터 도망쳐 하란에 도착합니다. 그런 그에게 벧엘에서 하나님은 언약과 축복, 흔들리지 않을 미래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분명한 비전을 받았지만, 그의 앞에 펼쳐진 하란의 삶은 그 약속과 너무 멀게 느껴집니다.마치 야곱에게 하늘은 오히려 침묵하는 것 같습니다. 벧엘의 꿈 이후 자녀들이 태어나기까지 하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놀라운 벧엘의 경험과 달리, 그의 삶은 복잡한 가족 현실 속에 묻혀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 우리도 종종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 아니라 우리가 붙잡은 “현실” 속에서 살아갑니다.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어 하며,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시기하고 원망하기도 합니다.그런 우리에게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은 무엇을 말씀하실까요?성경은 우물가에서 라헬을 만난 야곱을 보여줍니다. 그는 첫눈에 반해, 칠 년의 세월이 며칠처럼 느껴질 만큼 그녀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반전으로 이어집니다. 삼촌 라반에게 속아 야곱은 라헬이 아니라 레아와 함께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당시 문화를 고려하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야곱은 자신이 원하는 것만 바라보며 그 현실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여기 아이러니가 있습니다.아버지를 속였던 야곱이 이제 속임을 당합니다. 다른 사람인 척했던 그가 이제 ‘다른 현실’ 속에 놓입니다. 야곱은 형에게서는 도망쳤지만, 자신에게서는 도망칠 수 없었습니다. 그의 삶의 방식이 그대로 그에게 돌아온 것입니다. 이것은 불운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야곱을 빚어 가시는 하나님의 선한 손길입니다.성경은 레아를 소개합니다. 그녀는 선택받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의 마음은 라헬에게 있었고, 레아는 원치 않는 결혼 속에 놓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다” (29:31)레아는 사람에게는 외면받았지만, 하나님께는 아닙니다. 그렇게 하늘의 축복으로 아들들을 낳던 중 넷째를 허락받고, 그 이름을 유다라 부릅니다.“이번에는 내가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 (29:35)먼 훗날 메시아가 바로 이 유다의 혈통에서 태어납니다.한편 라헬은 사랑받지만 임신하지 못합니다. 두 자매 사이에는 시기와 경쟁이 시작됩니다. 합환채가 거래되고, 여종이 대리모가 되며, 자녀는 점수판이 됩니다. 모두가 자신의 방법으로 축복을 만들려 합니다.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하나님이 라헬을 기억하시고… 그의 태를 여셨더라” (30:22)복잡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계획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현실 속에서 이루어 가십니다.우리 역시 비전과 현실, 약속과 현재 사이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사실 그 자리는 위험합니다. 우리는 마치 분주함이 신실함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종교로 신을 만족하게 하는 것과 관계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것의 본질적 차이를 모르면서 많은 사람들은 그저 자신들의 윤리와 도덕적 삶을 조금만 더 잘 정리하고 올바른 선택을 하면 하늘의 축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자격을 갖추면 되는 것처럼 살아갑니다.그러나 기억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종교의 삶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늘의 비전이 우리 현재 상황에서 하나님 나라로 비쳐져야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메시아는 장자 에서가 아닌 야곱을 통해 오셨습니다. 첫눈에 반할 만한 외모를 가진 라헬이 아니라 레아를 통해 오셨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했던 자를 통해, 하나님은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이 세상은 힘과 조건을 통해 꿈을 이룬다고 말하지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전혀 다른 길로 일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군사력도, 재물도 아니라 십자가의 어린양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은 오늘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묵상 질문-나는 지금 ‘합환채’처럼 붙잡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지금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정직하게 빚어 가고 계신 부분은 어디입니까?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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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6장 34-27장 14절
댓글 창에서의 이야기는 창세기 26장의 끝부분에서 마치 짧은 덧붙임처럼 보이지만, 이후에 펼쳐질 모든 일의 상황을 사실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에서가 헷 족속 여인 둘을 아내로 맞이한다고 간략하게 기록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다고 기록합니다(26:35). 이것은 단순한 다문화 가정의 갈등을 넘어선 문제입니다. 성경이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고자 하는 것은 여기 "에서"는 언약의 가정 안에 그리고 언약이라는 환경에 살아가고는 있지만, 그 언약으로 말미암아 형성된 그리고 성화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이 가까운 곳에 있으나, 그것들에 의해 성화되지 않는 삶입니다.이 배경을 알면 27장이 훨씬 더 뚜렷하게 이해됩니다. 함께 보십니다.이삭은 이제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지고, 자신의 삶의 끝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아들 에서를 불러 축복을 하려고 합니다(27:1–4). 그런데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말씀하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25: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삭은 그 약속보다는 자신의 애정과 익숙함, 그리고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방향을 따라 움직이는 모습입니다.리브가는 이 말을 듣고 곧바로 행동합니다. 그녀 역시 하나님의 약속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다리기보다 스스로 개입해 결과를 만들어내고자 합니다. 야곱이 아버지를 속여 축복을 받도록 계획을 세웁니다. 그 결단은 빠르고, 대담하며, 심지어 희생적인 모습까지 보입니다.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27:13)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행동의 뿌리는 신뢰가 아니라 조급함입니다.야곱도 망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속임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들킬까 두려워서입니다(27:11–12). 그의 관심은 정직이 아니라 결과입니다.이렇게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정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만 그분을 신뢰하지는 않는 가정을 보게 됩니다.겉으로 드러나는 반역은 없지만, 그 밑에는 미묘한 불신앙이 흐르고 있습니다.이삭은 자신의 선호를 따라 축복하려 합니다.리브가는 통제를 통해 약속을 이루려 합니다.야곱은 계산하며 그 흐름에 올라탑니다.그리고 이 모습은 낯설기보다 오히려 우리 자신의 모습처럼 느껴집니다.우리는 하나님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결과를 스스로 관리하려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거절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우리가 직접 움직여야 한다고 느낍니다. 기다리는 것이 불안하기에, 우리는 조정하고, 밀어붙이고, 상황을 만들어 갑니다.입으로는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모든 것이 나에게 달려 있는 것처럼 살아갑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본문의 중심은 인간의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있습니다.하나님의 약속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흔들릴 때에도, 그 약속은 계속 앞으로 나아갑니다. 우리가 옳게 행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끝까지 이루시기 때문입니다.이 사실은 우리의 행동을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불안정함 아래에 흔들리지 않는 한 가지를 보여줍니다.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우리가 신실하지 않을 때에도 여전히 신실하십니다.묵상 질문-우리 삶의 어떤 영역에서 우리는 기다리기보다 통제하고, 맡기기보다 관리하려 하고 있습니까?-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약속뿐만 아니라, 그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방식까지 신뢰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모습일까요?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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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창세기 26장 12-33절
댓글 창창세기 26:12–33은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이 이 죄로 물든, 그래서 망가진 세상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줍니다. 이삭은 씨를 뿌려 백 배의 수확을 거둡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고 해서 우리 삶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이삭의 삶은 늘 갈등이 따릅니다. 본문에서는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을 시기하여 아브라함의 우물들을 막아버립니다. 이삭이 다시 우물을 파면 또다시 다툼이 일어나고, 자리를 옮겨도 갈등은 계속 따라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 우물의 이름을 르호봇이라 부르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22절).많은 경우에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평안함 정도로 생각하지만, 이삭의 삶은 그렇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부르심을 받았고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이 세상에서 그리고 이 세상과의 갈등을 없애기보다 오히려 드러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려고 노력해도, 어쩌면 우리 주변에는 "블레셋" 사람들처럼 우리의 "우물"을 막으려 하고 우리를 시기하며 어렵게 하는 사람들은 계속 있을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며 어떻게 살 수 있을까요?이삭은 자신의 "우물"을 지키려 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내려놓고 다시 시작합니다. 이런 모습이 아마도 겉으로는 약해 보이지만, 한 가지 중요한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명을 지탱하는 것은 땅을 파서 만든 우물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생수, 즉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영생의 생수를 가진 사람들은 이 땅에서의 "우물"을 내어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우리가 판 우물에 고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땅끝까지 나누는 생수에 있습니다.이것이 신앙이자 믿음의 삶입니다. 축복을 누리니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알아 따르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주변에는 시기와 질투를 하는 종교인들이 블레셋 사람들처럼, 바리새인처럼 늘 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를 잘 믿어서 갈등이 없는 삶이 아니라 죄로 망가진 이 세상의 여러 가지 다양한 갈등 속에서도 하나님으로 만족하며 말씀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다시 나타나십니다. 문제 해결 이후가 아니라, 여전히 긴장 속에 있는 그 자리에서입니다.“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24절)이삭은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그 자리에 장막을 칩니다. 이 말씀은 그가 무엇보다 먼저 예배자로 서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호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과 동행을 하는 모습입니다. 수많은 갈등이 빚어낸 이삭의 정체성은 우물이 아니라 생수이신 하나님께 있습니다.오늘 우리도 삶의 “우물들”—안정, 성공, 인정—을 붙들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삭은 언약의 축복이 이 세상의 소유가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의 임재에 있음을 보여줍니다.이삭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입니다. 그가 예배자로 설 때, 아비멜렉이 찾아와 평화를 제안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삭에게는 우물과 평화가 깃듭니다. 그러나 우물과 평화를 고집해 예배를 망치게 되면 하나님도 생수도 놓칠 것입니다.묵상 질문:지금 나의 삶에서 하나님의 “복”이 오히려 갈등처럼 느껴지는 영역은 어디입니까?내가 너무 붙들고 놓지 못하고 있는 “우물”은 무엇입니까?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먼저, 하나님 앞에서 다시 예배자로 서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요?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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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찬송가 프로젝트: 힙합
댓글 창내 주의 보혈은예수 앞에 나오면날 대속하신 예수께예수는 나의 힘이요내 맘이 낙심되며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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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창세기 26장 1-11절
댓글 창오늘 본문에는 성도가 이 세상의 두려움 속에서도 결국 끝까지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삶을 산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아브라함이 하나님 품에 안긴 후 창세기의 내러티브는 언약의 아들 이삭에게 향합니다. 상황은 흔히 있었던 기근이 그 땅을 덮칩니다. 낯선 장면이 아닙니다. 이삭의 삶은 아브라함의 여정과도 많이 닮았습니다. 먹고사는 문제, 앞이 보이지 않는 불확실함, 그래서 조금이라도 안전해 보이는 곳으로 옮기고 싶은 마음, 그런 감정이 자연스럽게 치밀어 오릅니다. 이삭은 애굽으로 내려가려 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엔 눈에 보이는 경제적 안정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삭에게 말씀하십니다.“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이 땅에 머무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2–3절)우리 인생의 방향만 알려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믿음 자체를 건드리는 시험입니다. 눈앞의 계산을 따라 움직일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기초 삼아 그 위에 살 것인가. 다행히도 이삭은 그 땅에 남습니다. 다만, 몸이 거기에 있는 것과 마음이 하나님께 기대어 있는 것은 별개의 일입니다. 그 지역 사람들의 시선이 리브가에게 쏠리자 이삭 안에서 두려움이 확 올라옵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행동합니다.“그는 내 누이라.”왠지 낯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그런데도 이삭은 자기 자신을 지키는 방식으로 반응합니다. 물론 이삭의 이 선택은 노골적으로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모습은 아닙니다. 다만 위험을 자기 방식대로 관리하는 조용하고 계산적인 선택입니다. 우리도 비슷하지 않나요? 우리도 물론 하나님이 부르심을 거부하고 행동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습니다. 겉으론 믿음의 순종인 것 같은데 사실은 상황을 주관하는 정도입니다.더 깊이 들어가면, 이삭의 반응은 단순한 두려움이 아닙니다. 익숙한 습관, 굳어진 생각입니다. 아브라함도 같은 상황에서 같은 선택을 했습니다(창세기 12장, 20장). 이삭은 무의식에서 물려받은 방식대로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부모의 불신은 이렇게 반복됩니다. 생각해 보셨나요? 오늘 우리의 반응은 그냥 그때그때 튀어나온 게 아니라는 사실을요. 내가 보고 배웠던 것, 예전에 나를 “살려줬다”고 느꼈던 방법들, 그런 것들이 지금의 선택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내면의 패턴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드러나고 새로워지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자기 방어로 살아가게 됩니다. 본문의 초점은 이삭의 실수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기쁜 소식은 이런 상황 한복판에서도 하나님이 물러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취소하지 않으십니다. 이삭의 부족함 때문에 그를 내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전히 지키십니다. 아비멜렉이 뜻밖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통로가 됩니다. 절대로 이삭이 잘해서가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이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결국 우리 삶은 우리 믿음이 얼마나 강하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 얼마나 신실하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흔들리는 자리에서 예수님은 흔들리지 않으십니다. 이삭이 살려고 속였다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기꺼이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구세주 그리스도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두려움을 이겨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익숙하지 않은 상황, 그리고 불확실한 상황을 매니지하려 하지 말고 “내가 너와 함께 있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돌아가라는 초청입니다.지금 내 삶에서 스스로 ‘지혜롭다’ 혹은 세상이 ‘현실적이다’라고 생각한 선택은 무엇일까요? 혹시라도 믿음이 아니라, 사실은 관행과 익숙한 습관으로 길들여진 '애굽'으로의 길을 택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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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창세기 25장 1-34절
댓글 창창세기 25장은 아브라함의 마지막 생애의 여러 장면들을 정리하면서, 이제 시선을 다음 세대로 옮깁니다. 아브라함의 삶은 끝을 맺으면서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줍니다. 모든 축복이 동일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자녀는 아브라함의 재산을 받았지만, 언약을 받은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언약은 공로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전혀 받을 자격이 없는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나 자연적인 질서를 따라 흐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따라 이루어집니다.아브라함이 죽은 후에는 이삭과 이스마엘이 함께 그를 장사합니다. 그리고 구속에 대한 내러티브는 이삭에게로 좁혀집니다. 그런데 이삭의 아내 리브가는 임신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언약은 확실하지만 그 과정에는 언제나 긴장이 따릅니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의 임신은 평안하지 않았습니다. 태중에서부터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갈등을 통해 더 깊은 진리를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기대를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말씀은 단순한 질서의 전복이 아니라 언약적 선언입니다. 첫 번째 아담이 마지막 아담을 섬기고, 옛 언약이 새 언약을 향해 나아가는 흐름과도 연결됩니다.이렇게 태어난 쌍둥이, 에서와 야곱을 통해 성경은 새 언약을 미리 보여줍니다. 먼저 태어난 에서는 들에서 돌아와 몹시 피곤한 상태에서 한 그릇의 죽과 장자의 명분을 바꾸게 됩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 사건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본문이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과정이 우리에게는 너무 느리고 더디게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에서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인간의 조급한 모습입니다. 그의 선택은 그 순간만 놓고 보면 이해가 됩니다. 그는 몹시 피곤했고, 배가 고팠습니다. 그 상태에서 장자의 명분, 곧 언약적 유산은 너무 멀고 추상적으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반면에 죽 한 그릇은 눈앞에 있는, 당장 손에 잡히는 현실이었습니다.이 모습은 오늘 우리에게 낯설지 않습니다. 3분 레인지에 돌리면 뚝딱 음식이 조리되는 것에 길들여진 우리는 “지금, 여기”의 필요와 욕구에 훨씬 더 쉽게 끌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되도록 쉽게, 그리고 짧게 설명해 주는 설교를 선호하기 일쑤입니다. 성경을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서론이나 설명을 듣는 것을 버거워합니다. 지금 당장과 빨리빨리가 너무도 당연한 듯, 영생에 소망을 두었다는 크리스천들도 당장 눈앞의 편안함, 지금 이 순간의 인정, 쉽게 얻어지는 안도감 등등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보다 더 크게 보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그래서 슬픈 현실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에서는 결국 영원을 현재와 바꾸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의 행동보다 그의 마음을 더 정확하게 짚어 줍니다. 그는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여기서 “가볍게 여겼다”는 것은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가치 판단입니다. 에서는 자신의 유산을 미워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순간에는 그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을 뿐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놓고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우선순위에서 밀어낸 것입니다.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하나님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부인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삶의 크고 작은 선택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당장 눈앞의 이익보다 덜 중요하게 여기며 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편안함이 손에 잡힐 때, 인정이 절실할 때, 혹은 지금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우리는 "지금 당장"이라는 선택을 하지는 않습니까? 만일 우리가 "지금 당장" 배부르고자 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순간적 만족이 영원함보다 더 중요하다”는 가치 선언이자 신앙 고백입니다.지금 내 삶에서 ‘한 그릇의 죽’처럼 보이는 것은 무엇입니까?그것이 나의 영원한 목적과 하나님의 약속보다 더 중요하게 느껴지고 있지는 않습니까?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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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창세기 23장 1-20절
댓글 창오늘 본문에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이제 가나안에서 처음으로 약속의 땅 일부를 소유하게 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배경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127세의 나이로 죽자, 아브라함이 그녀의 무덤, 즉 매장지를 구매한 것입니다. 그는 헤브론 주민들의 족속 대표들을 만나, 헤브론의 소유인 막벨라 굴을 매입하려는 의향을 밝힙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장래에 만일 있을 수 있는 소유권 분쟁을 확실히 막기 위해 과한 금액을 다 주고 그곳을 자신의 법적 소유로 공식화합니다.2절,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여기에는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에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라가 죽을 당시에는 아브라함과 사라는 아직 언약의 땅을 소유한 것이 없었습니다. 가나안에 거주는 하였으나 소유는 하지 못한 채 사라는 눈을 감습니다. 사라는 아브라함과 함께 언약을 직접 들은 동역자였습니다.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은 그 땅에서 대대로 번성하라는 약속과 연결되는데, 땅을 한 뼘도 얻지 못한 상태에서 언약의 당사자가 죽음을 맞이한 것은 인간적으로 볼 때 '약속이 이루어지기 전에 끝났다'는 허무함을 줄 수 있습니다. 짧은 구절이지만, 어쩌면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지 못한 것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하나님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셨지만, 현실은 아내의 시신을 둘 곳이 없어 이방인에게 땅을 구입해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과 눈앞의 현실 사이의 극심한 괴리를 보여줍니다. 아직 순례자인 아브라함은 아내를 잃은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듯합니다. 오히려 사라의 죽음은 이제 가나안에 땅을 소유하는 전환점이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닥칠 때, 어쩌면 그것은 순례자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언약이 더욱 뚜렷이 성취되는 계기가 되는 것을 볼 수 있는 영안과 깨달을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하시길 하나님께 간구해봅니다.막벨라 굴과 밭은 공식적으로 하나님의 사람 아브라함의 소유가 됩니다. 아내 사라의 죽음이 언약의 땅에서 소유한 영원한 첫 유업이 됩니다. 사라가 처음 이 땅에 묻히고, 이후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이 묻힙니다. 아브라함은 단순히 묘지를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고 그 땅에 '소유권'의 깃발을 꽂은 것입니다.순례자인 아브라함이 매장지를 구입하는 것에서 우리는 이 세상에는 속하지 않았으나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부분적으로 배웁니다. 죽은 사람을 매장하는 것은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묘지에 대한 분쟁이 있을 것을 미리 대비해 확실하게 해 두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가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과 우리 자신을 의지하는 것을 혼동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준비나 대책 없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순례자로서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으나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계속 살기 위해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는 우리에게 어떤 책임감을 요구하고 있을까요?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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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창세기 22장 1-24절
댓글 창요한복음 묵상을 어제로 마치고 오늘부터는 다시 창세기로 돌아갑니다.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의 아들 이삭을 번제, 즉 죽여서 태우는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기록합니다. 이 내러티브는 많은 질문을 일으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살생을 명할 수 있나? 그것도 아비에게 아들을 죽이라고?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하실 거면 왜 태어나게 하셨나? 처음부터 없는 것보다 있다가 빼앗기면 그 상처가 이루 말할 수 없는데 하나님이 이렇게 잔인하실 수 있나? 원래 제사는 양이나 염소와 같은 대체 동물로 해야지 사람을 태워서 바치라고 하는 것은 이해하기도 또 받아들일 수도 어렵지 않나?저는 이런 질문들을 안 하는 것이 "좋은 믿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질문들과 씨름하면서 과연 우리가 믿고 섬기는 창조주 하나님은 정말 선하신 분이신지, 사랑과 긍휼의 하나님이신지, 공의와 정의의 주님이신지 확실하게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창세기 22:1–24은 성경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사랑하는 아들, 약속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하십니다. 이 명령은 우리를 멈추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정말 선하신 분이신가? 전지하신 하나님이 굳이 이런 시험을 하셔야 하는가? 왜 아브라함은 이것을 불의하다고 따지지 않고 순종했는가? 이 본문은 그런 질문을 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질문을 가지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더 깊이 보게 합니다.묵상먼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모르셔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라고 말합니다. 전지하신 하나님은 이미 아브라함의 마음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이 시험은 하나님이 정보를 얻기 위한 시험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드러내고 연단하시는 시험입니다. 하나님은 종종 우리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를 드러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 안정감, 미래, 자녀, 계획을 더 붙들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삭보다 하나님 자신을 더 신뢰하는지를 드러내십니다.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왜 항변하지 않았을까요?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은 소돔을 두고 하나님의 공의를 붙들며 질문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 창세기 22장의 순종은 생각 없는 맹종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오래 배워 왔습니다. 하나님은 거짓말하지 않으시고, 약속을 깨뜨리지 않으시며, 죽은 것 같은 사라의 몸에서도 생명을 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해할 수 없는 명령 앞에서도 “하나님이 불의하시다”라고 결론 내리기보다, 내가 다 알 수 없어도 하나님은 자기 약속을 깨뜨리지 않으신다고 믿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신학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신실하시고, 죽음 너머에서도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믿음입니다.그리고 본문의 중심은 결국 이삭의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준비하신 숫양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요구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준비하시는 분으로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인간 제사를 기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삭 대신 숫양을 마련하심으로 대속의 길을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이 본문은 마침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실 것을 미리 비추어 줍니다. 아브라함의 손은 멈추었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죄를 위한 참된 제물로 내어주셨습니다.그러므로 창세기 22장은 잔인한 하나님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순간에도 여전히 선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배우는 이야기입니다. 믿음이란 모든 것이 납득되어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알기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우리는 늘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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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요한복음 21장 15-25절
댓글 창요약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당신을 사랑하는지 세 번 물으시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세 번 사랑한다고 대답합니다. 아마도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이제 베드로가 하나님의 성도들을 위한 사역을 하기 위하여 먼저 치유를 경험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가장 좋은 치유자는 아무래도 '상처받은 치유자'인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실패를 경험하였고 실패를 뛰어넘는 은혜도 경험하였기 때문에 다른 성도들에게도 이제 유익한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종종 다른 제자들을 대변하였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만이 아니라 모두 예수를 부인하고 비겁하게 도망쳤기 때문에 베드로의 회복은 바로 제자들의 회복이자 성도의 회복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의 "실패"와 "아픔"을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시고 계실까요?묵상숯불 앞에서 베드로에게 세 번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숯불 앞에서 세 번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던 베드로에게 회개와 회복의 기회를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베드로에게 이제 내 양을 돌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예수님이 양들, 즉 성도를 돌보시던 일을 이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품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서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나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단순히 애틋한 감정만은 아닐 텐데, 어떻게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선한 목자의 삶을 우리의 삶에서 구현하고 있나요?오늘 말씀에서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베드로가 가야 할 길과 요한이 가야 할 길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둘 다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이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내지만 그 둘의 삶은 같지 않습니다. 둘 다 복된 길이고 생명의 길을 걷겠지만 다른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의 삶과 우리의 삶을 비교하거나 견줄 필요 없이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더욱 예수님과 동행하기를 힘쓰게 될까요?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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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요한복음 21장 1-14절
댓글 창요약오늘 본문은 제자들이 갈릴리 디데랴 호수에서 부활의 주님을 다시 만나는 장면을 기록합니다. 제자들은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님을 기다리며 자신들에게 익숙한 호수에 그물을 내립니다. 어부들로서 살아온 그들이었지만 웬일인지 그날 밤은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합니다. 그리고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시 물가로 나오려던 그 이른 새벽에 주님의 말씀이 그들을 찾아옵니다. 그런데 그들은 아직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4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릅니다.6절,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누가복음 5장은 비슷한 장면을 기록합니다."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누가복음 5장은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실 때에 제자들을 부르시던 장면인 점을 고려할 때, 요한복음 21장의 기록 역시 제자들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기록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잡은 물고기 숫자가 153마리라는 점입니다. 이렇게 21장은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으로서 예수를 배반했던 베드로의 회복과 아울러 교회의 역할을 강조합니다.묵상제자들은 부활을 경험했지만 사명으로 나아가지 않고 갈릴리 어부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혼란스러운 상황에 익숙한 환경이 주는 안도감이라고 할까요. 하지만 더 이상 그들은 단순한 어부로서 살아갈 수 없는 듯합니다. 밤새 수고하였으나 얻은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을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제자들을 모르지만 예수님은 호숫가에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배가 텅 빈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날이 밝아오매 더 이상 물고기를 잡을 여건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그물을 배의 오른편에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의 말씀에 순종한 제자들은 그물을 들 수 없을 만큼 많은 물고기를 건집니다. 가나 혼인 잔치의 기적처럼, 죽은 나사로의 부활처럼, 38년 된 병자가 고침을 받는 것 처럼, 태어날 때 부터 소경이었던 자가 눈을 뜨게된 것 처럼,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의 실체가 보여집니다.뭍으로 나온 제자들을 기다리는 것은 예수님의 책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밤새 수고한 제자들을 위하여 숯불에 생선과 떡을 준비하셨습니다. 숯불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던 밤 그 앞에서 타오르던 숯불을 떠올리게 합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실패와 헛된 수고를 먼저 생각하겠지만 주님은 와서 "조반을 먹으라" (14절) 말씀하십니다.참고로 흥미로운 것은 물고기 153마리입니다. 어떤 이들은 153은 시므온을 헬라어로 숫자화한 것이라 합니다. 또 다른 이들은 1에서 17까지의 정수를 더한 숫자가 153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17은 온전함을 상징하는 10과 완전함과 은혜를 상징하는 7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 다른 이들은 153이 온 인류를 암시하는 숫자라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위에 내용들은 저보다 훨씬 성경을 더 많이 공부한 분들이 말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확실한 것은 오늘 본문은 제자들이 이전 익숙한 삶으로 돌아간 현장에서 그들은 수고하였으나 열매가 없었고 그런 그들을 찾아오신 예수님은 베드로를 회복하시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신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허물을 떠올렸을 테지만 주님은 그들을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주님이 오늘 우리를 부르십니다. 제자들은 이제 더 이상 이전으로 돌아갈 수도, 아니, 돌아가서도 안 됩니다. 그들에게는 이제 험난한 길이 예비되었지만 그 길은 주님이 예비하신 길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동행하실 길입니다. 우리 쓸 것을 미리 아시는 주님이 오늘 우리를 부르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찾아라고. 할렐루야!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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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요한복음 19장 28-30절
댓글 창요약요한복음 19:28–30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마지막 순간을 기록합니다.28-30절,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이 말씀은 의미 없이 희생당한 사람의 마지막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계신지 분명히 아셨습니다. “내가 목마르다”라는 말씀조차 성경을 이루기 위한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시며, 자신이 오신 목적을 끝까지 이루십니다.이 장면을 십자가 위의 일곱 말씀과 함께 읽으면 그 의미가 더 선명해집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시고, 회개하는 강도에게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하십니다. 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시고, 마침내 “다 이루었다”라고 선언하십니다. 이 말씀들은 십자가가 죄인에게 용서를 주고, 자격 없는 자에게 낙원을 열며, 우리의 죄값을 대신 담당하신 사건임을 보여 줍니다. 우리의 빚이 갚아졌고, 구속이 이루어졌습니다.묵상예수님은 분명한 목적 가운데 죽으십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예수님의 사역을 가로막은 비극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바로 그 목적 자체였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의 죄를 담당하시고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시며 자기 백성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그래서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구원이 이제 가능해졌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남은 것을 믿음이나 행위로 채워 넣어야 한다고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죄의 값이 지불되었습니다. 죄의 빚이 완전히 갚아졌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졌습니다.십자가에서의 말씀들은 그 완성된 구원을 보여 줍니다.“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는 십자가가 용서의 자리임을 보여 줍니다.“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아무 공로 없는 죄인도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는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심판을 받으셨음을 보여 줍니다.“내가 목마르다”는 예수님의 고난이 참된 고난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주님은 멀리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친히 들어오셨습니다.사실 저도 복음을 믿는다고 하면서 여전히 무언가가 남아 있는 것처럼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물론 죄를 지으면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리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순종이나 회개로 내 의를 세우고 하나님에게 구원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되려고 종교에 힘을 쓰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죄뿐 아니라 자신의 공로도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로움은 완전한 의로움입니다. 그리고 완전한 의로움은 죄인의 노력으로 성취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만이 완전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에게는 자신의 의로움을 주십니다. 십자가는 단순히 용서의 자리만이 아니라 죄인이 의로움을 받는 구원의 자리입니다.그러므로 갈보리의 십자가는 우리 자신을 보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만이 빚을 갚으셨고, 예수님만이 구원을 이루셨으며, 예수님만이 용서와 구속과 화평을 주십니다. 십자가는 죄인이 구원받을 가능성을 보여 준 사건이 아니라, 실제로 죄인을 구원한 사건입니다.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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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요한복음 19장 17-27절
댓글 창요약본문은 예수님께서 골고다로 나아가시는 장면을 기록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그 숙명의 시간을 향하여 한 걸음씩 나아가십니다. 곧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버림을 당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흔들리지 않으십니다. 히브리서 12장은 예수님이 흔들리지 않는 이유는 바로 우리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12장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요한은 또 빌라도가 붙인 패를 기록합니다.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그 패는 히브리어로, 로마어와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공개적이었고 누구나 볼 수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조롱의 뜻으로 썼겠지만, 자기도 모르게 더 큰 진실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맞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실 뿐 아니라 온 인류의 참된 왕이십니다.주권자 하나님은 인간의 악한 행동까지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정죄하지만, 십자가는 오히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선포합니다. 이렇게 악인들의 선택도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는 것을 본다면 감사한 일입니다.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의 옷을 나누기 위해 제비를 뽑습니다. 사형수를 조롱하는 행위였고, 동시에 탐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말씀의 성취입니다.“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시편 22:18말씀이 바로 그들의 눈앞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 가운데서도 예수님은 자기 어머니 마리아와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짊어지고 계시는 순간에도 자기 사람들을 돌보기를 멈추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그 제자에게 맡기시고, 십자가 아래 새로운 언약의 가족을 세우십니다.묵상세상 왕들은 위협으로부터 보호받고, 백성과 거리를 두며, 화려함으로 자신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위험에 노출되시고, 백성을 위하여 서시며, 수치 가운데 가시면류관을 쓰십니다. 그의 곁에는 충성된 신하들이 아니라 냉소적인 군인들과 적대적인 지도자들, 그리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이 서 있습니다.군인들은 무엇을 빼앗을 수 있을지에 마음을 둡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끝까지 무엇을 주기 위해 오셨는지를 잊지 않으십니다. 역사의 가장 어두운 순간 앞에서도 죄인들은 여전히 자기중심적이며 영적으로 눈이 멀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성경에 나오는 그들만의 문제일까요?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영광을 소유물과 숫자와 프로그램으로 축소시키지는 않나요? 혹시 우리는 눈앞의 것들을 붙들다가 하나님의 아들을 놓치고 있지는 않나요? 야고보서 1:27은 말씀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예수님은 마리아와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십니다. 그 힘든 상황에서도 슬픔 가운데 있는 자를 돌보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한 영혼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세상에서는 우리의 이름도 수고도 모르는 무명인으로 우리는 살아갑니다. 그러나 만유의 주재이신 주님의 시선이 우리를 향하고 있다면 우리는 결코 하찮은 존재가 아닙니다.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새로운 언약의 가족을 만드십니다. “보라 네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하나님의 교회는 건물이나 예산으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예수의 피값으로 주고 사신 성도들, 즉 갈보리 십자가로 묶인 성도들로 세워집니다. 교회는 친분이나 익숙함으로 만들어지는 공동체가 아니라, 거절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워지는 성도의 공동체입니다.본문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누구와 함께 서 있기를 원합니까?군인들처럼 당장 눈앞의 것에 더 마음을 두고 있습니까?종교 지도자들처럼 예수님의 왕 되심이 불편하십니까?아니면 십자가 곁에 서서 그저 두려움에 떨고 있지는 않습니까?오늘 우리에게 부활절의 의미는 무엇입니까?우리는 진리와 긍휼과 정의와 의의 편에 서고자 하는 어떤 선택을 하고 있습니까?죽어야 삽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요 죽는 것도 유익입니다.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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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요한복음 18장 39절-19장 16절
댓글 창요한복음 18:39–19:16은 복음서에서 가장 어둡고도 가장 많은 것을 드러내는 장면 가운데 하나를 기록합니다.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 서 계십니다. 아무 죄도 없으신데 마치 죄인처럼 취급을 받으십니다. 빌라도조차 예수님께서 죽으실 만한 죄를 지으시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끝내 옳은 일을 하지 않습니다.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 주려 하지만, 그들은 바라바를 달라고 외칩니다. 요한은 짧지만 무거운 한마디를 덧붙입니다. “바라바는 강도였더라” (18:40). 빌라도는 군중의 광기에 굴복합니다. 죄 있는 자는 놓임을 받고, 죄 없으신 분은 정죄를 받으십니다. 그 뒤 빌라도는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합니다. 그는 예수님이 무죄하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왜 이 벌을 내렸을까요? 자기 결정을 스스로 합리화하고, 자기 양심을 달래려 했던 것일까요? 이제 군인들까지 예수님을 희롱합니다. 자색 옷을 입히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씌우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19:3) 하고 조롱합니다. 그들은 비웃는 뜻으로 말했지만, 요한은 그 말 속에 담긴 아이러니를 보게 합니다. 로마 병정들은 자신들이 하는 말의 의미를 몰랐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도 예수님이 왕이심을 선포하십니다.빌라도는 예수님을 데리고 나와 “보라 이 사람이로다” (19:5) 하고 말합니다. 아이러니입니다. 여기 참 사람이 서 계십니다. 의로우신 사람, 인간이 본래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시는 분이 서 계십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그들을 따르는 어리석은 무리는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19:6) 하고 외칩니다.이어 유대 지도자들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으니” (19:7)라고 말합니다. 빌라도는 더욱 불안해집니다. 다시 예수님께 묻고, 마치 자신이 권세를 쥐고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19:11)라고 대답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로 가시는 길은 우연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마치 악이 승리하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주권 가운데 계십니다. 예수님은 통제력을 잃으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주신 길을 기꺼이 걸어가고 계십니다.결국 빌라도는 무너집니다. 언젠가는 이 세상 모든 권력은 무너집니다. 빌라도는 정의보다 자기 보전을 택합니다. “보라 너희 왕이로다” (19:14) 하고 말하자, 대제사장들은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19:15) 하고 답합니다. 이것은 이 본문에서 가장 비극적인 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솔로몬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 신앙인 줄 착각한 어리석은 종교인들이 스스로 참된 왕을 거절하고 거짓 왕을 택합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넘겨 줍니다. 그러나 요한은 단순한 불의만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복음을 보여 줍니다. 죄 없으신 분이 정죄를 받으심으로 죄 있는 자가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우리의 왕은 누구입니까? 유대 지도자들은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리석은 유대 종교인들은 가이사가 그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준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어리석은 무리는 그들이 유월절 명절을 즐기는 데 방해가 되는 예수를 처리하고 가이사 통치하에 유월절 명절을 지키는 데 급급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도 그렇게 말하지는 않아도, 그렇게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불확실한 미래로 나아가느니 불의한 상황에도 그냥 눌러앉습니다. 불안이 우리를 다스리고, 익숙한 환경에 노예가 되고, 세상의 기준이 우리를 규정하고, 그리스도 아닌 다른 무엇을 붙들 때마다 우리는 다른 왕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것입니다.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보라 이 사람이로다. 보라 너희 왕이로다. 거절당하신 예수님이 참된 왕이십니다. 조롱당하신 왕이 구원하시는 왕이십니다. 정죄받으신 왕이 죄인들을 자유하게 하시는 왕이십니다.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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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요한복음 18장 28-38절
댓글 창요약요한복음 18:28–38은 예수님이 유대 지도자들로 말미암아 빌라도에게로 끌려가시는 장면을 기록합니다. 때는 이른 아침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는 뼈아픈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유대 종교 리더들은 유월절을 앞두고 부정하게 되지 않으려고 이방인 빌라도의 관정에는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한 유월절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부당하게 죽음으로 넘기고 있습니다. 종교적 규칙은 지키려 하면서도, 오히려 그들이 경배한다고 말하는 하나님은 거절하고 있습니다. 기록된 유대 전통을 따르면, 사형을 선고하는 재판을 그것도 야밤에 하루 만에 내리는 경우는 없습니다. 불의와 불법의 조화를 자행하면서도 유월절은 지키려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오늘날 부활절을 언급하지만, 불의를 일삼지는 않는지 우리 모두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빌라도가 도대체 예수가 뭘 잘못해서 사형에 처해야 하는지 묻자 그들은 뚜렷한 답을 피합니다. 이에 빌라도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고 하자, 그들은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그들의 목적이 진실 규명이 아니라 예수님을 제거하는 데 있음을 드러냅니다. 어둠의 본심이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혼란과 불의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악이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빌라도는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묻습니다. 대답은 “그렇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빌라도가 생각하는 방식의 왕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이 왕이신 하나님 나라는 이미 임했습니다만 빌라도가 상상하는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 권력이나 힘으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교회'의 일도 권력이나 무력으로 밀어붙인다고 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끝으로 예수님은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증언을 듣고도 빌라도는 냉소적으로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질문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진리 자체가 바로 우리 앞에 서 계셔도 진리를 못 알아보는 것이 영적으로 눈먼 이 세상입니다.묵상겉으로는 신실하고 올바르게 보이려 하면서도, 우리 속마음을 드러내는 진리는 피하고 싶을 때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종교적 열심으로 우리 안의 어두움을 덮는 것이 너무도 익숙한 우리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빌라도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는 진리를 찾는 듯 보입니다. 예수에 대한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진리를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질문은 하지만 순종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빌라도"가 있습니다. 죄를 회개하기보다 관리하려 하고, 불의를 바로잡기보다는 빌라도처럼 “내 손은 깨끗하다”라고 말하며 "중립"을 지켜서 불의에 동조합니다.예수님은 이 모든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당황하지 않으시고, 자신이 누구신지 분명히 아십니다. 십자가는 구원을 이루실 그리스도의 실패가 아니라 사명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우리가 익숙한(그래서 의지하는) 권력으로 세워지지 않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정말 진리를 원하는가? 아니면 나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 진리만 원하는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진리는 토론이나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새겨 듣고 따라야 할 인격체이십니다.우리의 소망은 왕이신 예수님께서 애통하고 자복하는 심령을 버리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처럼 마음이 갈라지기 쉽고 두려움이 많은 사람을 위해 십자가로 가셨습니다. 종교적 열심이나 이 세상의 권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와 긍휼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 가진 소망의 근원입니다. 종교는 유월절 명절을 지키는 것이 목적입니다. 하지만 제자도는 유월절 어린양을 따르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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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8장 1-27절
댓글 창요약요한복음 18:1–27은 예수님께서 붙잡히시는 장면을 기록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어떤 사건에 떠밀려 가는 연약한 피해자로 소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앞으로 닥칠 일을 다 아시면서도 친히 앞으로 나아가십니다. 구약의 다윗 왕은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에게 배신을 당하고, 다윗을 따라야 마땅한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고 배반의 슬픔 가운데 기드론을 건넜었습니다, 이제 구약의 다윗보다 더 진정한 "다윗"이신 예수님도 사랑하는 제자에게 배반을 당하고,백성에게 버림을 받기위해 기드론을 건너십니다.가룟 유다가 군인들을 데리고 왔을 때에도 예수님은 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먼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들이 “나사렛 예수”라고 하자, 예수님은 “내가 그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5절). 그러자 그들은 뒤로 물러가 땅에 엎드러집니다. 참 놀랍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의 권능이 있으시지만, 그 능력으로 자신을 지키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을 내어주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성도를 보호하기 위함입니다.8-9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반면 베드로는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의 오른쪽 귀를 벱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11절).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힘으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구원은 베드로의 열심이 아니라 아들의 순종으로 이루어집니다.묵상저는 오늘 본문에서 큰 위로를 받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데 있어서 결코 수동적인 분이 아니십니다. 적극적으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도” 앞으로 나아가십니다(4절).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 그렇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우연한 비극이 아닙니다. 자기 백성을 위해 (마지못해 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기 생명을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순종입니다. 가장 어두운 시간에도 예수님은 흔들리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 삶이 요동쳐도, 우리는 여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숨과 쉼을 누릴 수 있습니다.말씀은 우리의 모습을 베드로를 통해 보여 줍니다. 우리 안에도 다 “베드로”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한순간에는 용감하지만, 다음 순간에는 너무 약합니다. 칼을 휘두를 준비는 되어 있지만, 어린 여종의 질문 하나는 견디지 못합니다. 우리는 종종 강한 감정을 진리 혹은 신실함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열심과 헌신은 종교성이 강하고 우리 자신의 의를 세우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결과 환난이나 어려움이 오면 쉽게 타협합니다. 그리고 무너집니다. 사람을 두려워하거나 상황을 힘들어하여 결국 베드로와 같은 비겁한 선택을 합니다.예수님은 제자들이 실패할 것을 아시면서도 그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로 가신 것은 우리가 신실함을 보셔서가 아니라, 우리가 신실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우리가 주님을 붙드는 데 있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신실하심으로 우리를 붙드신다는 데 있습니다. 베드로는 넘어지지만 예수님은 넘어지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사람은 어떤 실패에서도 다시 일으켜 세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기도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붙잡히시는 그 시간에도 완전한 순종으로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마셨다는 사실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자주 베드로처럼 쉽게 흔들립니다. 우리 자신을 의지한 죄를 용서해 주시고,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실하심 안에서 쉬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주님 가까이 두시고, 예수님을 더 담대히 시인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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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프로젝트: 2026년 고난주간
댓글 창전통적인 찬송가를 현대 음악으로 재해석한 노래 모음 (2집)어서 돌아오오나 주를 멀리 떠났다내 주의 보혈은나 같은 죄인 살리신내 영혼이 은총입어내 맘의 주여 소망 되소서(c) Jubilee Coach, 2026, made with Suno.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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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7장 1-16절
댓글 창요약본문에는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기도하시는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함께 보시겠습니다.예수님은 1절에서 “때가 이르렀사오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십자가가 갑작스러운 비극이나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지시는 갈보리 십자가는 죄인들을 위해서 창조주 하나님의 경륜과 계획 아래 준비된 구원입니다.그리고 3절은 영생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 줍니다."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즉, 영생은 그저 오래오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삶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연합하여 영원하신 그분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6절에서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셨다고 하시고, 11절에서는 “그들을 보전하사,” 15절에서는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기도하십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기도는 제자들이 이 세상에서는 온갖 환난을 당할 것이나 그들을 이 세상 밖으로 데려가 달라고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세상 한가운데서 지켜 달라고 기도하십니다.묵상저는 이 본문에서 주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끝까지 지키시는지가 마음에 와 닿습니다.예수님은 제자들이 곧 흔들릴 것을 아십니다. 이미 베드로의 부인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베드로와 제자들의 흔들림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그들을 끊어내지 못합니다. 12절,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는 그때 제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흔들릴 것을 미리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우리를 지키십니다.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맡기십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심판주가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시는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잊지 마십시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 수 있는 것은 결코 우리의 결심이나 노력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우리는 너무도 쉽게 흔들리고 베드로처럼 예수를 마음과 행동으로 부인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연약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본질이 진토임을 기억하시며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우리를 끝까지 붙드시는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현대 사회의 우리는 "빨리빨리"의 삶을 삽니다. 날마다 바쁘고 분주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은 쉽게 흩어지고 믿음은 자주 흔들립니다. 사실 베드로만이 예수님을 부인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날마다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주님을 부인합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할 때, 주님의 영광보다 나의 자존심이 더 중요할 때, 우리는 조용히 그리스도를 부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놀랍게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오래 참고 기다리시며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지금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힘든 이 세상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어렵고 힘들지라도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14절과 16절에서 자기 백성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그러니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해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성도의 소망은 삶이 편해지고 쉽게 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진정한 성도의 소망은 아무리 힘든 상황일지라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붙드시는 것을 기억해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습니다.기도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소망이 우리에게 있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우리를 아버지의 이름으로 지켜 주시고 악한 자에게서 보호해 주옵소서. 오늘 우리는 이 세상 가운데 살아가지만 이 세상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로 살게 하시고, 모든 상황에서도 주님께 붙들린 자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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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돌아오오 (음악)
댓글 창전통 찬송가를 현대화 한 곡입니다. 새찬송가 527장(통 317장) '어서 돌아오오'는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담아 회개를 촉구하는 한국 찬송가입니다. 전영택 작사, 박재훈 작곡으로 1960년대부터 불린 이 곡은 어둔 세상과 우리 자신 중심의 신앙에서 떠나 주님 품으로 돌아오라는 애절한 권면을 담고 있습니다.[Verse 1]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지은 죄가 아무리 무겁고 크기로주 어찌 못 담당하고 못 받으시리오우리 주의 넓은 가슴은 하늘보다 넓고 넓어.[Verse 2]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우리 주는 날마다 기다리신다오밤마다 문 열어 놓고 마음 졸이시며나간 자식 돌아오기만 밤새 기다리신다오[Verse 3]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채찍 맞아 아파도 주님의 손으로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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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6장 25-33절
댓글 창요약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지금까지는 비유로 말씀하셨지만, 이제는 아버지에 대하여 더 밝히 드러내어 말씀하시는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자들의 모든 문제가 갑자기 쉽게 풀린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어둠 속에 한 줄기 빛이 비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께로부터 오셔서 세상에 들어오셨고, 이제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가신다는 사실을 제자들이 분명히 알기를 원하십니다.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은 제자들에게는 힘든 일들이겠지만 그것들은 우연이나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자신감 있는 반응을 보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밝히 말씀하시니, 이제는 알겠고 이제는 믿는다고 말합니다.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유로도 하지 아니하시니이다 …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29–30절). 그들의 말은 진심이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보다 훨씬 연약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조용하지만 무게 있는 질문을 던지십니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31절). 실제로 그들은 이 고백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흩어지게 될 것입니다. 각자 자기 자리로 물러나고, 예수님은 홀로 남겨지실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 순간에도 자신이 참으로 혼자인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가장 위로가 되는 약속 가운데 하나를 주십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33절). 묵상 이 본문에서 인상 깊은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얼마나 정직하게 말씀하시는가 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포장하거나 그들이 실제보다 더 강한 사람들인 것처럼 대해 주시지도 않으십니다. 제자들은 비로소 분명히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두려움이 곧 그들 안에 남아 있는 연약함을 드러낼 것을 아십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는 종종 어떤 진리를 잠시 깨달은 것을 깊은 성숙으로 착각합니다. 이제는 준비되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압박의 시간이 오면 우리의 용기가 얼마나 빨리 무너지는지를 그제야 보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심으로 제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을 붙들어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자신을 버리고 흩어질 것을 아시면서도, 이미 그들을 위해 평안의 말씀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도 참 위로가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에 놀라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쉽게 두려워하는지, 얼마나 빨리 흩어지는지, 얼마나 자주 자기 안으로 숨으려 하는지를 이미 아십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여전히 우리를 붙드시며, 계속해서 우리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돌리십니다. 제자들은 곧 크게 실패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미래의 실패가 아버지의 사랑을 지워 버리지는 못합니다. 그들의 연약함이 예수님께서 열어 주신 관계를 무효로 만들지도 못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평안은 우리가 얼마나 잘 버티고 있는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평안은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이 이미 이루신 십자가 구원에 있습니다.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 안에서가 아닙니다. 환경 속에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흔들리지 않는 믿음 안에서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 안입니다. 평안은 거기에서만 옵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trouble-free life를 약속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그리고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스스로 강하다고 여기는 자기확신의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승리 안에서 쉬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떨 수 있습니다. 여전히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여전히 세상의 압박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아직 모든 답을 다 얻지 못했어도, 이미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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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6장 1-24절
댓글 창요약요한복음 16:1–24에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제자들에게 앞으로 그들에게 임할 일들을 미리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그들에게 익숙하고 정들었던 회당에서 쫓겨나고, 더 나아가 어떤 사람들은 제자들을 해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길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제자들에게 미리 하시는 이유는 제자들에게 두렵움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일들이 일어날 때 넘어지지 않도록 준비시키기 위함입니다.예수님은 제자들이 이해하기 더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7절).이 말씀은 제자들로서는 받아들이기 정말 어려운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떠나가셔야 보혜사 성령께서 오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고, 제자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요즘 흔히 "성령운동"이라고 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는 생각이 스쳐 갑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모든 사역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거함으로써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있습니다.예수님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여전히 혼란스러웠습니다. 예수님께서 “조금 있으면”이라고 말씀하셨지만 그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거듭 말씀하십니다.“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20절).임산부에게 해산의 고통이 결국 출생이라는 기쁨으로 이어지듯이, 제자들의 슬픔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며 기쁨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담대히 기도하는 삶으로 이어질 것입니다.묵상이 말씀에서 위로가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삶을 절대로 쉽게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시는 것은 편한 삶을 주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를 잘 따르는 자들에게 슬픔도 끊기지 않고, 저항도 많고, 혼란도 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다. 그 모든 것은 절대로 예수님의 돌보심과 계획 밖에 있지는 않다는 것을!삶이 힘들고 또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이해되지 않을 때 우리가 무엇인가 잘못했나라고 자문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깊은 슬픔조차 하나님의 선하신 뜻 가운데 있을 수 있음을 보여 주십니다. 우리가 당황하는 것은 상황의 통제권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마는 사실은 우리 삶의 "통제권"은 아예 우리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그리고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어쩌면 환난과 핍박을 통해 우리가 절실히 깨닫는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떠나가시지만 자기 백성을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삼위일체 하나님의 성령께서 오셔서 그리스도를 더 분명히 알게 하시고, 더 귀하게 보게 하시며, 더 중심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단지 슬픔 뒤에 기쁨이 온다고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놀랍게도 슬픔 자체가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복음의 방식입니다. 십자가가 부활로 이어졌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슬픔은 마지막 말이 아닙니다.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임한 슬픔을 부끄러워하거나 부인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아가면 됩니다. 혼란과 슬픔을 가지고 주님 발 앞에 내려놓으면 됩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을 우리가 전부 이해하지 못해도 주님은 우리의 눈물과 슬픔을 주 안에서의 기쁨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할렐루야!기도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마음이 흔들리고 아버지의 뜻이 잘 보이지 않을 때에도 주 예수님을 신뢰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시고 성령을 보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슬픔이 무겁게 느껴질 때, 그리스도 안에서 그것이 마지막이 아님을 기억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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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5장 18-27절
댓글 창요약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하신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보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유도 함께 알려 주십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18절). 다시 말해 제자들이 미움을 받는 것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예수님께 속해 있다는 증거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19절).예수님은 이 미움이 단지 사람 사이의 갈등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영적인 문제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이 세상은 그리스도께 복종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하심은 죄를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진리는 인간의 교만을 흔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권위는 우리가 내 삶의 주인으로 살고 싶어 하는 중심을 건드립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아무리 선을 행하고 진실을 말해도 예수를 거부하는 이 세상으로부터는 미움밖에 받을 수 없습니다.그러나 예수님은 단순히 경고만 주지 않으십니다. 당연히 약속도 주십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다름이 아닌 진리의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을 증언하실 것이고, 아울러 이제 제자들도 그 증언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26–27절). 그러므로 이 본문은 단지 미움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을 받고 확신과 인내로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증거해야 함을 깨닫게 합니다.묵상왜 세상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선을 행하고 진실을 말할 때에도 그들을 미워할까요?세상은 우리의 중심을 바치지 않고 외적 행위와 열심만 내도 인정받는 종교는 미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장려합니다. 그리고 세상은 어느 정도 적당한 도덕은 기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야기하는 우리 하늘 아버지가 거룩하심같이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성경이 제시하는 예수님은 우리가 원하는 위로만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섬겨야 마땅한 왕, 즉 주님으로 오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시는 일 중 하나가 하나님에 대한 진실, 우리 자신에 대한 진실, 우리의 죄에 대한 것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그분을 불편해합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어둠으로 잘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둠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리고 어둠이 빛으로 말미암아 노출되는 것을 싫어하듯, 이 세상이 예수를 미워하듯, 그리스도를 닮은 선은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권위를 담은 진리의 말씀은 거절당하기 일쑤입니다.물론 우리는 조심해야 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나 옳은 이유로 반대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의 교만과 편견 때문에 세상과 이웃으로부터 거절당하기도 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마땅히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점을 인정한 뒤에도 예수님의 말씀은 여전히 분명합니다. 믿는 자들은 예수님께 속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미움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들의 삶이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고, 그리스도께서 왕이시라고 증언하기 때문입니다.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 말씀을 미리 주십니다. 제자들이 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당할 때, 제자들이 무너지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 자신이 먼저 그 길을 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까닭 없이 미움을 받으셨고, 거절당하셨으며, 결국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미움은 하나님의 은혜를 막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십자가의 은혜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우리는 인정받고 싶고 또 공동체에 속하고 싶기 때문에 미움을 받거나 거절을 받는 것을 견디기 어려워합니다. 그런 우리를 예수님은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우리와 늘 함께하시는 진리의 성령을 보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힘으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주와 동행하며 성령의 도우심으로 증인됩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미워할 수 있어도 침묵하게 하지 못합니다. 할렐루야!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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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5장 1-17절
댓글 창요약요한복음 15:1–17에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제자들에게 자신이 떠난 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치십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포도나무로 불렸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온전히 맺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로 오셔서 하나님의 백성이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포도나무가 아니라 가지입니다. 가지는 스스로 살지 못하고, 포도나무에 붙어 있을 때만 삽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열매는 바쁨이나 종교 활동에서 나오지 않고, 그리스도와의 살아 있는 연합에서 나옵니다.묵상그러면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단순히 종교 단체 안에 남아 있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교회" 가까이에 있다고 해서 자동으로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홀로 서는 신앙을 뜻하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 공동체는 중요하지만 그 자체가 포도나무는 아닙니다. 포도나무는 오직 그리스도이시고, 진정한 교회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살아가는 성도들의 모임이어야 합니다.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왕이신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주권 아래 사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머물게 하며, 주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고, 주님의 사랑 안에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것은 매우 실제적이었습니다. 가이사가 아니라 예수님이 주님이시라고 고백하고, 우상을 버리고,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핍박 속에서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는 삶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생각과 원함과 관계와 선택의 주인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위로는 원하지만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은 원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열매는 원하지만 실제로 그리스도를 의존하는 것은 두려워합니다. 잊지 마십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예수님은 메마른 가지에게 스스로 살아나 보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또한 아버지의 가지치기는 버리심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가지치기는 때로 아픕니다. 누렇게 바랜 잎사귀들이 다 떨어져 나가면 마치 벗은 듯 느껴지기도 합니다. 마치 잃어버리는 것 같고, 우리의 삶의 한 부분이 깎여 나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15장 2절,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그렇다면 이렇게 맺는 열매는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야고보서 1장 27절,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예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힘으로 거하라고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기꺼이 자기 목숨을 내어주심으로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할 수 있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은 우리 힘이나 능력이나 숫자나 재물로 무엇을 증명하는 삶이 아니라, 이미 우리를 붙드신 주님의 은혜 안에서 신실히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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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나는 포도나무: 내 안에 거하라 (요한복음 15장)
댓글 창[Verse 1]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오늘 주를 위해 귀한 열매 맺으라사랑 안에 거하라 나의 평안 주리니주의 말씀 안에 살며 주를 따르라[Chorus]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신실하고 진실하게 주를 섬기라무엇이든 구하라 응답하여 주리니그 큰 사랑 안에서 우리 거하리[Verse 2]내가 일러준 말로 너희 깨끗해졌으니내 안에 거할 때 많은 열매 맺으리라변함없는 약속 내 안에 거하라하늘의 그 영광을 함께 나누리[Bridge / Ending]이제 내 안에 거하라 나는 네 하나님이니환난의 폭풍 중에도 너를 지키는 자라두려워 마라 내가 널 도와주리니놀라지 마라 네 손 놓지 않으리라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내 것이라, 오직 나의 사랑하는 자라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노라너를 영원히 사랑하는 네 여호와라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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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고난주간 찬송가 모음
댓글 창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아 하나님의 은혜로갈보리산 위에주 달려 죽은 십자가만왕의 왕 내 주께서오 거룩하신 주님거기 너 있었는가(c) Jubilee Coach 2026, Made using Suno.ai technology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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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THIS SHOW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처음부터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처음 "그리스도인"이라 불린 배경에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핍박이 있었습니다. 종교인들은 스데반이라는 사람을 신의 이름으로 죽였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제자들은 어쩔 수 없이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열악한 상황에도 그들은 예수의 복음, 즉 왕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찌 보면 오히려 핍박 때문에 복음은 더 빨리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었습니다. 그 결과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기록합니다(사도행전 11장).그런데 요즘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가 예수 그리스도와 무관한 단어가 된 것 같습니다. 그 이유로는 '교회'의 타락이 있습니다. 최근 발표된 여론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75.4%가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결과에 놀라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어찌하여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되었을까요? 저는 가장 큰 원인으로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즉 '왕의 복음'이 왜곡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왕의 복음'이 왜곡되면서 '복음'은 천당행 티켓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울러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 아니라 천당행 티켓을 판매하는 자들, 즉 기득권이 되고 말았습니다.'그리스도인'이란 단어가 오염되었듯, 솔직히 '교회'라는 단어도 더 이상 복음 공동체를 뜻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교회"는 건물이나 재정 혹은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가스펠인(人) 사역은 역사상 처음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된 본질을 회복하고자 성경 말씀을 함께 찾아보는 흩어진 나그네, 즉 필그림을 위한 사역입니다. 요즘 이단들이 기승을 부림으로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란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제자들만을 뜻하지 않아 하나님 나라
HOSTED BY
Jubilee Christian Life Coa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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