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DCAST · religion
가스펠인(人) 말씀묵상
by Jubilee Christian Life Coach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처음부터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처음 "그리스도인"이라 불린 배경에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핍박이 있었습니다. 종교인들은 스데반이라는 사람을 신의 이름으로 죽였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제자들은 어쩔 수 없이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열악한 상황에도 그들은 예수의 복음, 즉 왕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찌 보면 오히려 핍박 때문에 복음은 더 빨리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었습니다. 그 결과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기록합니다(사도행전 11장).그런데 요즘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가 예수 그리스도와 무관한 단어가 된 것 같습니다. 그 이유로는 '교회'의 타락이 있습니다. 최근 발표된 여론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75.4%가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결과에 놀라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어찌하여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되었을까요? 저는 가장 큰 원인으로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즉 '왕의 복음'이 왜곡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왕의 복음'이 왜곡되면서 '복음'은 천당행 티켓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울러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 아니라 천당행 티켓을 판매하는 자들, 즉 기득권이 되고 말았습니다.'그리스도인'이란 단어가 오염되었듯, 솔직히 '교회'라는 단어도 더 이상 복음 공동체를 뜻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교회"는 건물이나 재정 혹은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가스펠인(人) 사역은 역사상 처음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된 본질을 회복하고자 성경 말씀을 함께 찾아보는 흩어진 나그네, 즉 필그림을 위한 사역입니다. 요즘 이단들이 기승을 부림으로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란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제자들만을 뜻하지 않아 하나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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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첫 주 말씀 묵상 (골로새서 1장 15-17절 말씀)
Send us Fan Mail한 청소년이 있습니다. 그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하나님과 자녀들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저는 그 청소년의 부모가 얼마나 그를 바른 길로 인도하려고 얼마나 마음 졸이며 애쓰고 노력해 왔는지 압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는 그 아이는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예배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다 동화 같은 이야기”라고 말하며 부모가 원하는 신앙생활을 시간 낭비라고 그렇게라도 말해 주니 오히려 저는 그 아이가 그나마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여전히 부모와 대화하고 있다는 사실에 격려를 받습니다. 이것은 절대 작은 일이 아닙니다. 그의 부모는 그를 위해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이 골로새 성도들을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 말입니다."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1:9).혹시 여러분의 삶에도 이 청소년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이 있을까요?어쩌면 여러분의 배우자일 수 있습니다. 부모님이나 자녀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바로 여러분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고, 기독교가 정말 진리인지 확신이 서지 않을 때 여러분도 이 기도를 매일 드리시길 바랍니다."주님, 우리의 눈을 열어 주셔서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보게 하옵소서.”지난 몇천 년 동안 성도들은 어떻게 기독교가 참된 진리인지 알 수 있었을까요? 세상에 수많은 종교와 철학이 있는데, 우리는 어떻게 기독교만이 참된 진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예수님은 자신이 여러 스승 중 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진리를 가르치는 분이라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예수님은 진리를 가르치는 교사가 아니라 진리 그 자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길을 보여 주는 분이 아니라 길 그 자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잘 따라가면 언젠가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영생이라고 말씀하십니다.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이 참으로 자신이 말씀하신 그분이심을 알 수 있을까요?"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15-17)요즘 여러분의 삶은 얼마나 “함께 서” 있습니까? 혹시 집중이 어렵고, 수많은 생각으로 마음이 흩어지고, 감정은 출렁이는 파도처럼 불안하고, 해야 하는 일은 버겁게 느껴지고, 친구나 가족과의 관계는 언젠가부터 조금씩 무너지는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나요? 그렇다면 여러분의 삶이 여러분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았습니다.그래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 때 비로소 마음에 평화가 깃들고, 삶에 균형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낮의 해와 밤의 달이 우주의 조화를 노래하듯 우리의 삶도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 때 비로소 조화로운 삶이 되어 가기 시작합니다.하지만 우리는 죄로 물든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무도 오랜 시간에 걸쳐 이 세상의 권세들로 말미암아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사회, 학교, 이웃, 친구, 그리고 끔찍하지만 하다못해 기독교 종교를 통해서도 섬김이 아닌 성공을, 그리고 성화가 아닌 성장이 마치 진리인양 강요당하고 있었습니다.앞서 말한 청소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균형과 조화가 무너진 삶을 다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오직 예수가 아닌 다른 것들이 없어서 불행하다고 스스로를 속이던 우리 마음을 찢어야 합니다.오직 예수만이 삶의 조화이자 균형입니다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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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니엘의 아침 | Biblical Narrative Praise Project 2026
Send us Fan Mail브니엘의 아침홀로 남은 이 밤끝나지 않는 씨름무너진 나의 힘자비를 간구 합니다나를 축복하소서주를 놓지 않으리나를 축복하소서주를 놓지 않으리이 밤이 지나가기 전에내 영혼 주의 이름 부르네내 모든 힘 아침안개 같아라나의 발걸음 이제 고르지 못하네그러나 주 얼굴 뵙는 이 순간새로운 피조물이라 내 이름 이스라엘!이제야 깨닫네하나님 축복을 내가 얻으려 하나예수님 그분이 이미 나의 축복임을!주여 내가 믿나이다!나를 도와주소서.나의 믿음 없음을 주께서 아시나이다.주여 내가 믿나이다!나를 도와주소서.나의 믿음 없음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나를 축복하소서주를 놓지 않으리나를 축복하소서주를 놓지 않으리이 밤이 지나가기 전에내 영혼 주의 이름 부르네브니엘의 아침이 밝아오네내 이름 이스라엘, 주의 영광 보았네나의 발걸음 고르지 못하나 이제는 알았네이제는 나 주와 함께영원히 나 주와 함께 걷네브니엘의 아침이 밝아오네내 이름 이스라엘, 주의 영광 보았네브니엘의 아침이 밝아오네브니엘의 아침이 밝아오네내 이름 이스라엘, 주의 영광 보았네브니엘의 아침이 밝아오네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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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2장 브니엘의 아침
Send us Fan Mail"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창 32:26)홀로 남겨진 얍복 강가에서, 야곱의 씨름은 처절한 고독과 절망 속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어두운 밤이 지나고 밝아온 브니엘의 아침은 이전과 전혀 다른 시작이었습니다.오늘 본문을 바탕으로 노래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신기하게도 전통 찬송가나 현대 찬양에 이미 만들어진 노래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본문을 묵상하면서 가사를 써 봤는데요. 야곱의 그 긴 밤의 상황을 마음에 그려보았습니다. 노래는 앞부분에서는 밤새 힘을 다 소멸한 야곱의 낮은 속삭임으로 시작하지만,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마주한 승리의 나팔 소리로 끝을 맺습니다. 브니엘의 아침은 부활의 아침이죠.우리 역시 야곱처럼 인생의 씨름 중에 우리의 "환도뼈"가 부서지는 아픔을 겪습니다. 신앙생활은 절룩거리며 걸어가는 것이 어쩌면 너무도 당연합니다. 이 망가진 세상에서 어떻게 제대로 걸을 수 있겠습니까? 신앙인의 발걸음은 고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씨름하면 우리의 자만이 부서지는 것이 너무도 당연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 쓴 왕관이 벗겨질 때 얻는 그 "상처"는 패배의 흔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면했다는 영광의 흔적입니다.오늘 이 찬양을 들으시며, 어두운 밤을 지나 우리를 위해 예비된 '브니엘의 아침'을 소망하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이름은 이제 '속이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이긴 자 '이스라엘'입니다. 할렐루야!브니엘의 아침홀로 남은 이 밤끝나지 않는 씨름무너진 나의 힘자비를 간구 합니다나를 축복하소서주를 놓지 않으리나를 축복하소서주를 놓지 않으리이 밤이 지나가기 전에내 영혼 주의 이름 부르네내 모든 힘 아침안개 같아라나의 발걸음 이제 고르지 못하네그러나 주 얼굴 뵙는 이 순간새로운 피조물이라 내 이름 이스라엘!(Gently building, but keeping it intimate)이제야 깨닫네 하나님 축복을 내가 얻으려 하나예수님 그분이 이미 나의 축복임을!주여 내가 믿나이다!나를 도와주소서.나의 믿음 없음을 주께서 아시나이다.주여 내가 믿나이다!나를 도와주소서.나의 믿음 없음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나를 축복하소서주를 놓지 않으리나를 축복하소서주를 놓지 않으리이 밤이 지나가기 전에내 영혼 주의 이름 부르네브니엘의 아침이 밝아오네내 이름 이스라엘, 주의 영광 보았네나의 발걸음 고르지 못하나 이제는 알았네이제는 나 주와 함께영원히 나 주와 함께 걷네브니엘의 아침이 밝아오네내 이름 이스라엘, 주의 영광 보았네브니엘의 아침이 밝아오네브니엘의 아침이 밝아오네내 이름 이스라엘, 주의 영광 보았네브니엘의 아침이 밝아오네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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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2장 1-21절
Send us Fan Mail야곱의 여정은 이제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섭니다. 라반의 집을 떠난 것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향한 언약의 걸음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두려움이 따릅니다. 31:36–55는 야곱의 성화된 모습을 기록합니다. 그는 더 이상 단순한 “속이는 자”로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그는 이제 자신의 삶을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해석하기 시작합니다.그래서 라반의 부당함을 마주하며, 지난 20년의 수고와 억울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라반과 언약을 맺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화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야곱의 과거, 즉 라반과의 삶을 정리하시는 장면입니다. 이제 하란의 삶은 끝났습니다. 뒤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앞으로 이끄십니다. 32장은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들을 만나는 장면을 기록합니다. 야곱은 그곳을 마하나임이라 부릅니다. 직역하면 “두 진영”입니다. 야곱은 그곳에서 하나님 나라와 지상의 나라가 공존하는 것을 서서히 깨닫습니다. 신앙생활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동시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야곱은 자신이 혼자가 아님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곧 장정 400명을 이끌고 온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본문은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모든 소유를 두 진으로 나눕니다. 현실적인 판단입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낯설지 않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보았지만, 여전히 두려움에 떱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과 상황이 주는 불안이 함께 존재합니다. 감사하게도 성경은 이것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불안 그 한가운데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참된 믿음은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기도합니다. "나는 주께서 내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10절). 성경이 기록하는 야곱은 이제 서서히 자신의 삶을 은혜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예전에는 붙잡고 쟁취해야 얻는다고 생각했던 축복이 이제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선물임을 더욱 깨달아 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란 자격 없는 자에게 주어진 은혜라는 사실을 깨달아 그는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매달립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철저히 준비합니다. 선물과 소유를 나누어 보냅니다. 이 모습은 믿음이 없는 모습이라기보다 은혜 안에서 자라가는 한 사람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다듬어진 믿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적인 믿음입니다.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를 정리하시고, 약속을 향해 나아가게 하시는 분입니다. 두려움이 사라진 후가 아니라, 바로 그 한가운데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야곱의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만, 당장 눈앞의 현실 앞에서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를 하지만 동시에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면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예수님을 믿지만 불안함이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은혜는 여기에서 더욱 빛납니다. 우리의 믿음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불안과 두려움을 이기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그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됩니다. 야곱은 두려움 속에서 약속을 붙들지만, 예수님은 완전한 순종으로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셨습니다. 우리의 불완전한 믿음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실하심 위에 세워집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에서”를 마주하고 있을까요? 기억하십시다. 하나님은 문제를 바로 없애 주시기보다, 우리를 더 깊은 의지로 이끄십니다. 우리는 지금 내 삶을 내가 만든 결과로 보고 있나요, 아니면 은혜로 보고 있을까요? 우리는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기다릴 수 있을까요? 우리가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앞서 가시기 때문에 오늘도 필그림으로서 신앙생활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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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1장 17-35절
Send us Fan Mail야곱은 이제 라반의 집을 떠나 본향으로 돌아갑니다.하나님께서 “네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라”(31:3)고 말씀하신 이후, 그는 아내들과 자녀들, 그리고 모든 소유를 이끌고 길을 나섭니다. 이것은 단순한 이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걸음입니다. 순례자로서 따라야 할 삶입니다.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라반의 집을 떠나는 야곱의 내적 상태를 보여줍니다. 야곱이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본향을 향해 가는 것은 분명히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런 순종하는 야곱의 마음 안에는 다분히 그리고 다양한 감정과 생각이 얽혀 있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야곱은 라반에게 알리지 않고, 그가 양털을 깎으러 간 사이를 틈타 도망치듯 떠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서도 여전히 사람이 두렵고 상황이 무서운 것은 어쩔 수 없는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성경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르는 우리도 여전히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우리도 야곱처럼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여 나아가지만, 여전히 사람을 의식하고 상황을 스스로 통제하려는 모습이 남아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 결단하고 움직이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불안하고, 마치 결과를 내가 책임져야 할 것처럼 조바심을 내고 있습니다.그리고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의 헛된 “신”들을 의지하려는 모습은 라반과 라헬의 삶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납니다. 라헬은 아버지의 드라빔, 곧 집안의 신상들을 훔칩니다. 라헬은 하나님께서 야곱과 함께하심을 보고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과거의 방식과 눈에 보이는 보호막을 떨치지 못합니다. 사실 이것은 라반과 라헬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도 돌이나 나무로 만든 우상은 아니더라도, 경제적 안정, 사회적 인정, 세상적 성공과 같은 것들을 의지하며 그것을 우리의 자랑이자 보호막으로 삼으려 합니다.이렇게 성경은 우리의 내면을 드러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가지만 여전히 두려움 속에 있고, 라헬은 떠나면서도 옛 의지의 대상을 붙들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따르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여전히 다른 것을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공존합니다.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에는 눈에 띄는 기적이 나타나지 않지만, 야곱의 여정은 막히지 않고, 라반은 원하는 것을 찾지 못하며, 하나님의 약속은 계속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 흐름은 결국 예수님께로 이어집니다. 이렇게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완벽한 순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우리의 의로움으로 여기시며 언약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것이 복음, 즉 기쁜 소식입니다.오늘도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합니다. 그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더욱 분명히 보게 됩니다. 우리는 두려움을 떨치지 못하고, 다분히 부분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예수를 믿습니다. 예수를 고백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도 함께 붙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불신이 섞인 온전하지 못한 순종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을 보십니다.야곱과 라헬, 그리고 우리 모두의 순종은 불안하고 흔들리기 쉽습니다. 부분적이며 상황에 따라 쉽게 무너지는 믿음을 가지고, 흠이 많은 순종이 우리의 최선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설 수 있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이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고, 동시에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입혀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다른 것을 붙들 필요가 없는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할렐루야!묵상 질문-분명히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고 있지만, 여전히 내가 통제하려는 삶의 영역은 어디입니까?-내가 의지하는 삶의 우상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더 의지하는 이 습관에서, 나는 어떻게 벗어나고 있습니까?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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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1장 1-16절
Send us Fan Mail야곱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라반의 집에서 살았습니다. 에서를 피해 도망쳐 온 절박한 여정으로 시작된 삶은 이제 훨씬 풍요롭습니다. 아내들과 자녀들, 가축과 재산까지—겉으로 보기에 그는 무에서 유를 이루어낸 사람입니다. 누구나 이제 그 수고의 열매를 누려야 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을 향해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제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징조는 이미 곳곳에 나타나고 있었습니다.먼저 라반의 아들들의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야곱을 향한 시선에는 점점 적대감이 담깁니다. 라반의 얼굴 역시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습니다. 환대와 호의는 사라지고, 어딘가 냉랭한 기운만 남아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야곱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벧엘 이후 오랫동안 침묵하시던 하나님께서 드디어 말씀하십니다.3절,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야곱의 떠남은 단순한 현실 판단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분위기가 나빠졌고 기회도 줄어들었으니,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상황을 전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이 모든 상황은 우연한 현명한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상황에 반응하시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그 상황을 주권적으로 이끌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라반의 아들들과의 갈등, 라반의 얼굴 변화, 점점 깊어지는 이방인 같은 느낌—이 모든 것은 야곱을 붙잡고 있던 자리를 놓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었습니다. 그곳은 애초에 영원히 머물 곳이 아니었습니다.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한때는 분명 삶의 안정을 주던 것들(직장, 관계, 역할)이 어느 순간부터 불안정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불편함을 해결하고자 합니다. 어떻게든 관계를 회복하려 하고, 상황을 다시 예전처럼 만들려 애씁니다. 그러나 그 불편함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따라가야 할 방향이라면 어떨까요? 하나님은 종종 현재의 자리를 불편하게 만드셔서 우리를 새로운 길로 이끄십니다.이 본문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야곱이 떠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떠남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그의 방식입니다. 그는 라헬과 레아를 들로 불러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제 그는 자신의 삶을 전략이 아니라 신학으로 해석하기 시작합니다.7절, 너희 아버지가 내 품삯을 열 번이나 변경하였으나 하나님이 그를 막으사 나를 해치지 못하게 하셨으며9절, 하나님이 이같이 네 아버지의 가축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야곱은 더 이상 자신의 지혜나 수완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막으셨고, 하나님이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가축이 번성한 것도, 꿈 가운데 보여주신 것도, 모든 과정 뒤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이것은 다른 야곱입니다. 가나안을 떠날 때의 야곱은 자신의 계산과 감각을 신뢰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야곱은 자신의 생존과 번영, 그리고 지금까지의 모든 여정이 하나님의 신실하심 위에 세워졌음을 조금씩 깨닫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다르게 읽기 시작하고 있습니다.이 야곱의 여정은 더 큰 여정을 가리킵니다. 익숙한 곳을 떠나고, 불확실한 길을 지나며, 오래 회피해 왔던 현실을 마주하는 이 길은 완전한 "야곱"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줍니다. 참된 약속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한 가정을 떠난 것이 아니라 하늘을 떠나 이 땅에 오셨습니다. 야곱이 결과를 피하기 위해 떠났다면, 예수님은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야곱이 자신이 잘못한 형을 피해 도망쳤다면, 그리스도는 자신을 해칠 자들을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야곱이 불확실한 환대를 향해 돌아갔다면, 예수님은 자신의 피로 우리를 아버지의 식탁으로 확실히 맞아들이셨습니다.야곱이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이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면, 우리는 이미 그 길을 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의 본향 “집”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지체하지 마십시다. 라반의 집을 떠나 본향으로 돌아가십시다.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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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9-30장
Send us Fan Mail야곱은 자신의 쌍둥이 형으로부터 도망쳐 하란에 도착합니다. 그런 그에게 벧엘에서 하나님은 언약과 축복, 흔들리지 않을 미래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분명한 비전을 받았지만, 그의 앞에 펼쳐진 하란의 삶은 그 약속과 너무 멀게 느껴집니다.마치 야곱에게 하늘은 오히려 침묵하는 것 같습니다. 벧엘의 꿈 이후 자녀들이 태어나기까지 하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놀라운 벧엘의 경험과 달리, 그의 삶은 복잡한 가족 현실 속에 묻혀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 우리도 종종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 아니라 우리가 붙잡은 “현실” 속에서 살아갑니다.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어 하며,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시기하고 원망하기도 합니다.그런 우리에게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은 무엇을 말씀하실까요?성경은 우물가에서 라헬을 만난 야곱을 보여줍니다. 그는 첫눈에 반해, 칠 년의 세월이 며칠처럼 느껴질 만큼 그녀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반전으로 이어집니다. 삼촌 라반에게 속아 야곱은 라헬이 아니라 레아와 함께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당시 문화를 고려하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야곱은 자신이 원하는 것만 바라보며 그 현실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여기 아이러니가 있습니다.아버지를 속였던 야곱이 이제 속임을 당합니다. 다른 사람인 척했던 그가 이제 ‘다른 현실’ 속에 놓입니다. 야곱은 형에게서는 도망쳤지만, 자신에게서는 도망칠 수 없었습니다. 그의 삶의 방식이 그대로 그에게 돌아온 것입니다. 이것은 불운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야곱을 빚어 가시는 하나님의 선한 손길입니다.성경은 레아를 소개합니다. 그녀는 선택받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의 마음은 라헬에게 있었고, 레아는 원치 않는 결혼 속에 놓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다” (29:31)레아는 사람에게는 외면받았지만, 하나님께는 아닙니다. 그렇게 하늘의 축복으로 아들들을 낳던 중 넷째를 허락받고, 그 이름을 유다라 부릅니다.“이번에는 내가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 (29:35)먼 훗날 메시아가 바로 이 유다의 혈통에서 태어납니다.한편 라헬은 사랑받지만 임신하지 못합니다. 두 자매 사이에는 시기와 경쟁이 시작됩니다. 합환채가 거래되고, 여종이 대리모가 되며, 자녀는 점수판이 됩니다. 모두가 자신의 방법으로 축복을 만들려 합니다.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하나님이 라헬을 기억하시고… 그의 태를 여셨더라” (30:22)복잡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계획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현실 속에서 이루어 가십니다.우리 역시 비전과 현실, 약속과 현재 사이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사실 그 자리는 위험합니다. 우리는 마치 분주함이 신실함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종교로 신을 만족하게 하는 것과 관계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것의 본질적 차이를 모르면서 많은 사람들은 그저 자신들의 윤리와 도덕적 삶을 조금만 더 잘 정리하고 올바른 선택을 하면 하늘의 축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자격을 갖추면 되는 것처럼 살아갑니다.그러나 기억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종교의 삶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늘의 비전이 우리 현재 상황에서 하나님 나라로 비쳐져야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메시아는 장자 에서가 아닌 야곱을 통해 오셨습니다. 첫눈에 반할 만한 외모를 가진 라헬이 아니라 레아를 통해 오셨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했던 자를 통해, 하나님은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이 세상은 힘과 조건을 통해 꿈을 이룬다고 말하지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전혀 다른 길로 일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군사력도, 재물도 아니라 십자가의 어린양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은 오늘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묵상 질문-나는 지금 ‘합환채’처럼 붙잡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지금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정직하게 빚어 가고 계신 부분은 어디입니까?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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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6장 34-27장 14절
Send us Fan Mail에서의 이야기는 창세기 26장의 끝부분에서 마치 짧은 덧붙임처럼 보이지만, 이후에 펼쳐질 모든 일의 상황을 사실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에서가 헷 족속 여인 둘을 아내로 맞이한다고 간략하게 기록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다고 기록합니다(26:35). 이것은 단순한 다문화 가정의 갈등을 넘어선 문제입니다. 성경이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고자 하는 것은 여기 "에서"는 언약의 가정 안에 그리고 언약이라는 환경에 살아가고는 있지만, 그 언약으로 말미암아 형성된 그리고 성화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이 가까운 곳에 있으나, 그것들에 의해 성화되지 않는 삶입니다.이 배경을 알면 27장이 훨씬 더 뚜렷하게 이해됩니다. 함께 보십니다.이삭은 이제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지고, 자신의 삶의 끝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아들 에서를 불러 축복을 하려고 합니다(27:1–4). 그런데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말씀하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25: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삭은 그 약속보다는 자신의 애정과 익숙함, 그리고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방향을 따라 움직이는 모습입니다.리브가는 이 말을 듣고 곧바로 행동합니다. 그녀 역시 하나님의 약속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다리기보다 스스로 개입해 결과를 만들어내고자 합니다. 야곱이 아버지를 속여 축복을 받도록 계획을 세웁니다. 그 결단은 빠르고, 대담하며, 심지어 희생적인 모습까지 보입니다.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27:13)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행동의 뿌리는 신뢰가 아니라 조급함입니다.야곱도 망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속임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들킬까 두려워서입니다(27:11–12). 그의 관심은 정직이 아니라 결과입니다.이렇게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정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만 그분을 신뢰하지는 않는 가정을 보게 됩니다.겉으로 드러나는 반역은 없지만, 그 밑에는 미묘한 불신앙이 흐르고 있습니다.이삭은 자신의 선호를 따라 축복하려 합니다.리브가는 통제를 통해 약속을 이루려 합니다.야곱은 계산하며 그 흐름에 올라탑니다.그리고 이 모습은 낯설기보다 오히려 우리 자신의 모습처럼 느껴집니다.우리는 하나님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결과를 스스로 관리하려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거절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우리가 직접 움직여야 한다고 느낍니다. 기다리는 것이 불안하기에, 우리는 조정하고, 밀어붙이고, 상황을 만들어 갑니다.입으로는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모든 것이 나에게 달려 있는 것처럼 살아갑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본문의 중심은 인간의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있습니다.하나님의 약속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흔들릴 때에도, 그 약속은 계속 앞으로 나아갑니다. 우리가 옳게 행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끝까지 이루시기 때문입니다.이 사실은 우리의 행동을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불안정함 아래에 흔들리지 않는 한 가지를 보여줍니다.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우리가 신실하지 않을 때에도 여전히 신실하십니다.묵상 질문-우리 삶의 어떤 영역에서 우리는 기다리기보다 통제하고, 맡기기보다 관리하려 하고 있습니까?-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약속뿐만 아니라, 그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방식까지 신뢰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모습일까요?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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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6장 12-33절
Send us Fan Mail창세기 26:12–33은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이 이 죄로 물든, 그래서 망가진 세상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줍니다. 이삭은 씨를 뿌려 백 배의 수확을 거둡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고 해서 우리 삶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이삭의 삶은 늘 갈등이 따릅니다. 본문에서는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을 시기하여 아브라함의 우물들을 막아버립니다. 이삭이 다시 우물을 파면 또다시 다툼이 일어나고, 자리를 옮겨도 갈등은 계속 따라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 우물의 이름을 르호봇이라 부르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22절).많은 경우에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평안함 정도로 생각하지만, 이삭의 삶은 그렇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부르심을 받았고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이 세상에서 그리고 이 세상과의 갈등을 없애기보다 오히려 드러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려고 노력해도, 어쩌면 우리 주변에는 "블레셋" 사람들처럼 우리의 "우물"을 막으려 하고 우리를 시기하며 어렵게 하는 사람들은 계속 있을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며 어떻게 살 수 있을까요?이삭은 자신의 "우물"을 지키려 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내려놓고 다시 시작합니다. 이런 모습이 아마도 겉으로는 약해 보이지만, 한 가지 중요한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명을 지탱하는 것은 땅을 파서 만든 우물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생수, 즉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영생의 생수를 가진 사람들은 이 땅에서의 "우물"을 내어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우리가 판 우물에 고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땅끝까지 나누는 생수에 있습니다.이것이 신앙이자 믿음의 삶입니다. 축복을 누리니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알아 따르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주변에는 시기와 질투를 하는 종교인들이 블레셋 사람들처럼, 바리새인처럼 늘 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를 잘 믿어서 갈등이 없는 삶이 아니라 죄로 망가진 이 세상의 여러 가지 다양한 갈등 속에서도 하나님으로 만족하며 말씀으로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다시 나타나십니다. 문제 해결 이후가 아니라, 여전히 긴장 속에 있는 그 자리에서입니다.“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24절)이삭은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그 자리에 장막을 칩니다. 이 말씀은 그가 무엇보다 먼저 예배자로 서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호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과 동행을 하는 모습입니다. 수많은 갈등이 빚어낸 이삭의 정체성은 우물이 아니라 생수이신 하나님께 있습니다.오늘 우리도 삶의 “우물들”—안정, 성공, 인정—을 붙들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삭은 언약의 축복이 이 세상의 소유가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의 임재에 있음을 보여줍니다.이삭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입니다. 그가 예배자로 설 때, 아비멜렉이 찾아와 평화를 제안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삭에게는 우물과 평화가 깃듭니다. 그러나 우물과 평화를 고집해 예배를 망치게 되면 하나님도 생수도 놓칠 것입니다.묵상 질문:지금 나의 삶에서 하나님의 “복”이 오히려 갈등처럼 느껴지는 영역은 어디입니까?내가 너무 붙들고 놓지 못하고 있는 “우물”은 무엇입니까?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먼저, 하나님 앞에서 다시 예배자로 서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요?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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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프로젝트: 힙합
Send us Fan Mail내 주의 보혈은예수 앞에 나오면날 대속하신 예수께예수는 나의 힘이요내 맘이 낙심되며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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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6장 1-11절
Send us Fan Mail오늘 본문에는 성도가 이 세상의 두려움 속에서도 결국 끝까지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삶을 산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아브라함이 하나님 품에 안긴 후 창세기의 내러티브는 언약의 아들 이삭에게 향합니다. 상황은 흔히 있었던 기근이 그 땅을 덮칩니다. 낯선 장면이 아닙니다. 이삭의 삶은 아브라함의 여정과도 많이 닮았습니다. 먹고사는 문제, 앞이 보이지 않는 불확실함, 그래서 조금이라도 안전해 보이는 곳으로 옮기고 싶은 마음, 그런 감정이 자연스럽게 치밀어 오릅니다. 이삭은 애굽으로 내려가려 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엔 눈에 보이는 경제적 안정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삭에게 말씀하십니다.“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이 땅에 머무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2–3절)우리 인생의 방향만 알려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믿음 자체를 건드리는 시험입니다. 눈앞의 계산을 따라 움직일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기초 삼아 그 위에 살 것인가. 다행히도 이삭은 그 땅에 남습니다. 다만, 몸이 거기에 있는 것과 마음이 하나님께 기대어 있는 것은 별개의 일입니다. 그 지역 사람들의 시선이 리브가에게 쏠리자 이삭 안에서 두려움이 확 올라옵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행동합니다.“그는 내 누이라.”왠지 낯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그런데도 이삭은 자기 자신을 지키는 방식으로 반응합니다. 물론 이삭의 이 선택은 노골적으로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모습은 아닙니다. 다만 위험을 자기 방식대로 관리하는 조용하고 계산적인 선택입니다. 우리도 비슷하지 않나요? 우리도 물론 하나님이 부르심을 거부하고 행동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습니다. 겉으론 믿음의 순종인 것 같은데 사실은 상황을 주관하는 정도입니다.더 깊이 들어가면, 이삭의 반응은 단순한 두려움이 아닙니다. 익숙한 습관, 굳어진 생각입니다. 아브라함도 같은 상황에서 같은 선택을 했습니다(창세기 12장, 20장). 이삭은 무의식에서 물려받은 방식대로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부모의 불신은 이렇게 반복됩니다. 생각해 보셨나요? 오늘 우리의 반응은 그냥 그때그때 튀어나온 게 아니라는 사실을요. 내가 보고 배웠던 것, 예전에 나를 “살려줬다”고 느꼈던 방법들, 그런 것들이 지금의 선택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내면의 패턴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드러나고 새로워지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자기 방어로 살아가게 됩니다. 본문의 초점은 이삭의 실수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기쁜 소식은 이런 상황 한복판에서도 하나님이 물러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취소하지 않으십니다. 이삭의 부족함 때문에 그를 내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전히 지키십니다. 아비멜렉이 뜻밖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통로가 됩니다. 절대로 이삭이 잘해서가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이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결국 우리 삶은 우리 믿음이 얼마나 강하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 얼마나 신실하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흔들리는 자리에서 예수님은 흔들리지 않으십니다. 이삭이 살려고 속였다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기꺼이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구세주 그리스도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두려움을 이겨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익숙하지 않은 상황, 그리고 불확실한 상황을 매니지하려 하지 말고 “내가 너와 함께 있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돌아가라는 초청입니다.지금 내 삶에서 스스로 ‘지혜롭다’ 혹은 세상이 ‘현실적이다’라고 생각한 선택은 무엇일까요? 혹시라도 믿음이 아니라, 사실은 관행과 익숙한 습관으로 길들여진 '애굽'으로의 길을 택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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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5장 1-34절
Send us Fan Mail창세기 25장은 아브라함의 마지막 생애의 여러 장면들을 정리하면서, 이제 시선을 다음 세대로 옮깁니다. 아브라함의 삶은 끝을 맺으면서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줍니다. 모든 축복이 동일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자녀는 아브라함의 재산을 받았지만, 언약을 받은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언약은 공로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전혀 받을 자격이 없는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나 자연적인 질서를 따라 흐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따라 이루어집니다.아브라함이 죽은 후에는 이삭과 이스마엘이 함께 그를 장사합니다. 그리고 구속에 대한 내러티브는 이삭에게로 좁혀집니다. 그런데 이삭의 아내 리브가는 임신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언약은 확실하지만 그 과정에는 언제나 긴장이 따릅니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의 임신은 평안하지 않았습니다. 태중에서부터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갈등을 통해 더 깊은 진리를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기대를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말씀은 단순한 질서의 전복이 아니라 언약적 선언입니다. 첫 번째 아담이 마지막 아담을 섬기고, 옛 언약이 새 언약을 향해 나아가는 흐름과도 연결됩니다.이렇게 태어난 쌍둥이, 에서와 야곱을 통해 성경은 새 언약을 미리 보여줍니다. 먼저 태어난 에서는 들에서 돌아와 몹시 피곤한 상태에서 한 그릇의 죽과 장자의 명분을 바꾸게 됩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 사건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본문이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과정이 우리에게는 너무 느리고 더디게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에서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인간의 조급한 모습입니다. 그의 선택은 그 순간만 놓고 보면 이해가 됩니다. 그는 몹시 피곤했고, 배가 고팠습니다. 그 상태에서 장자의 명분, 곧 언약적 유산은 너무 멀고 추상적으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반면에 죽 한 그릇은 눈앞에 있는, 당장 손에 잡히는 현실이었습니다.이 모습은 오늘 우리에게 낯설지 않습니다. 3분 레인지에 돌리면 뚝딱 음식이 조리되는 것에 길들여진 우리는 “지금, 여기”의 필요와 욕구에 훨씬 더 쉽게 끌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되도록 쉽게, 그리고 짧게 설명해 주는 설교를 선호하기 일쑤입니다. 성경을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서론이나 설명을 듣는 것을 버거워합니다. 지금 당장과 빨리빨리가 너무도 당연한 듯, 영생에 소망을 두었다는 크리스천들도 당장 눈앞의 편안함, 지금 이 순간의 인정, 쉽게 얻어지는 안도감 등등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보다 더 크게 보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그래서 슬픈 현실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에서는 결국 영원을 현재와 바꾸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의 행동보다 그의 마음을 더 정확하게 짚어 줍니다. 그는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여기서 “가볍게 여겼다”는 것은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가치 판단입니다. 에서는 자신의 유산을 미워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순간에는 그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을 뿐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놓고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우선순위에서 밀어낸 것입니다.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하나님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부인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삶의 크고 작은 선택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당장 눈앞의 이익보다 덜 중요하게 여기며 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편안함이 손에 잡힐 때, 인정이 절실할 때, 혹은 지금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우리는 "지금 당장"이라는 선택을 하지는 않습니까? 만일 우리가 "지금 당장" 배부르고자 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순간적 만족이 영원함보다 더 중요하다”는 가치 선언이자 신앙 고백입니다.지금 내 삶에서 ‘한 그릇의 죽’처럼 보이는 것은 무엇입니까?그것이 나의 영원한 목적과 하나님의 약속보다 더 중요하게 느껴지고 있지는 않습니까?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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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3장 1-20절
Send us Fan Mail오늘 본문에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이제 가나안에서 처음으로 약속의 땅 일부를 소유하게 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배경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127세의 나이로 죽자, 아브라함이 그녀의 무덤, 즉 매장지를 구매한 것입니다. 그는 헤브론 주민들의 족속 대표들을 만나, 헤브론의 소유인 막벨라 굴을 매입하려는 의향을 밝힙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장래에 만일 있을 수 있는 소유권 분쟁을 확실히 막기 위해 과한 금액을 다 주고 그곳을 자신의 법적 소유로 공식화합니다.2절,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여기에는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에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라가 죽을 당시에는 아브라함과 사라는 아직 언약의 땅을 소유한 것이 없었습니다. 가나안에 거주는 하였으나 소유는 하지 못한 채 사라는 눈을 감습니다. 사라는 아브라함과 함께 언약을 직접 들은 동역자였습니다.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은 그 땅에서 대대로 번성하라는 약속과 연결되는데, 땅을 한 뼘도 얻지 못한 상태에서 언약의 당사자가 죽음을 맞이한 것은 인간적으로 볼 때 '약속이 이루어지기 전에 끝났다'는 허무함을 줄 수 있습니다. 짧은 구절이지만, 어쩌면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지 못한 것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하나님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셨지만, 현실은 아내의 시신을 둘 곳이 없어 이방인에게 땅을 구입해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과 눈앞의 현실 사이의 극심한 괴리를 보여줍니다. 아직 순례자인 아브라함은 아내를 잃은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듯합니다. 오히려 사라의 죽음은 이제 가나안에 땅을 소유하는 전환점이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닥칠 때, 어쩌면 그것은 순례자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언약이 더욱 뚜렷이 성취되는 계기가 되는 것을 볼 수 있는 영안과 깨달을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하시길 하나님께 간구해봅니다.막벨라 굴과 밭은 공식적으로 하나님의 사람 아브라함의 소유가 됩니다. 아내 사라의 죽음이 언약의 땅에서 소유한 영원한 첫 유업이 됩니다. 사라가 처음 이 땅에 묻히고, 이후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이 묻힙니다. 아브라함은 단순히 묘지를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고 그 땅에 '소유권'의 깃발을 꽂은 것입니다.순례자인 아브라함이 매장지를 구입하는 것에서 우리는 이 세상에는 속하지 않았으나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부분적으로 배웁니다. 죽은 사람을 매장하는 것은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묘지에 대한 분쟁이 있을 것을 미리 대비해 확실하게 해 두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가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과 우리 자신을 의지하는 것을 혼동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준비나 대책 없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순례자로서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으나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계속 살기 위해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는 우리에게 어떤 책임감을 요구하고 있을까요?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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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2장 1-24절
Send us Fan Mail요한복음 묵상을 어제로 마치고 오늘부터는 다시 창세기로 돌아갑니다.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의 아들 이삭을 번제, 즉 죽여서 태우는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기록합니다. 이 내러티브는 많은 질문을 일으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살생을 명할 수 있나? 그것도 아비에게 아들을 죽이라고?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하실 거면 왜 태어나게 하셨나? 처음부터 없는 것보다 있다가 빼앗기면 그 상처가 이루 말할 수 없는데 하나님이 이렇게 잔인하실 수 있나? 원래 제사는 양이나 염소와 같은 대체 동물로 해야지 사람을 태워서 바치라고 하는 것은 이해하기도 또 받아들일 수도 어렵지 않나?저는 이런 질문들을 안 하는 것이 "좋은 믿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질문들과 씨름하면서 과연 우리가 믿고 섬기는 창조주 하나님은 정말 선하신 분이신지, 사랑과 긍휼의 하나님이신지, 공의와 정의의 주님이신지 확실하게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창세기 22:1–24은 성경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사랑하는 아들, 약속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하십니다. 이 명령은 우리를 멈추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정말 선하신 분이신가? 전지하신 하나님이 굳이 이런 시험을 하셔야 하는가? 왜 아브라함은 이것을 불의하다고 따지지 않고 순종했는가? 이 본문은 그런 질문을 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질문을 가지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더 깊이 보게 합니다.묵상먼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모르셔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라고 말합니다. 전지하신 하나님은 이미 아브라함의 마음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이 시험은 하나님이 정보를 얻기 위한 시험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드러내고 연단하시는 시험입니다. 하나님은 종종 우리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를 드러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 안정감, 미래, 자녀, 계획을 더 붙들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삭보다 하나님 자신을 더 신뢰하는지를 드러내십니다.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왜 항변하지 않았을까요?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은 소돔을 두고 하나님의 공의를 붙들며 질문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 창세기 22장의 순종은 생각 없는 맹종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오래 배워 왔습니다. 하나님은 거짓말하지 않으시고, 약속을 깨뜨리지 않으시며, 죽은 것 같은 사라의 몸에서도 생명을 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해할 수 없는 명령 앞에서도 “하나님이 불의하시다”라고 결론 내리기보다, 내가 다 알 수 없어도 하나님은 자기 약속을 깨뜨리지 않으신다고 믿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신학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신실하시고, 죽음 너머에서도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믿음입니다.그리고 본문의 중심은 결국 이삭의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준비하신 숫양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요구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준비하시는 분으로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인간 제사를 기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삭 대신 숫양을 마련하심으로 대속의 길을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이 본문은 마침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실 것을 미리 비추어 줍니다. 아브라함의 손은 멈추었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죄를 위한 참된 제물로 내어주셨습니다.그러므로 창세기 22장은 잔인한 하나님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순간에도 여전히 선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배우는 이야기입니다. 믿음이란 모든 것이 납득되어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알기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우리는 늘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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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1장 15-25절
Send us Fan Mail요약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당신을 사랑하는지 세 번 물으시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세 번 사랑한다고 대답합니다. 아마도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이제 베드로가 하나님의 성도들을 위한 사역을 하기 위하여 먼저 치유를 경험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가장 좋은 치유자는 아무래도 '상처받은 치유자'인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실패를 경험하였고 실패를 뛰어넘는 은혜도 경험하였기 때문에 다른 성도들에게도 이제 유익한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종종 다른 제자들을 대변하였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만이 아니라 모두 예수를 부인하고 비겁하게 도망쳤기 때문에 베드로의 회복은 바로 제자들의 회복이자 성도의 회복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의 "실패"와 "아픔"을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시고 계실까요?묵상숯불 앞에서 베드로에게 세 번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숯불 앞에서 세 번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던 베드로에게 회개와 회복의 기회를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베드로에게 이제 내 양을 돌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예수님이 양들, 즉 성도를 돌보시던 일을 이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품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서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나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단순히 애틋한 감정만은 아닐 텐데, 어떻게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선한 목자의 삶을 우리의 삶에서 구현하고 있나요?오늘 말씀에서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베드로가 가야 할 길과 요한이 가야 할 길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둘 다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이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내지만 그 둘의 삶은 같지 않습니다. 둘 다 복된 길이고 생명의 길을 걷겠지만 다른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의 삶과 우리의 삶을 비교하거나 견줄 필요 없이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더욱 예수님과 동행하기를 힘쓰게 될까요?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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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1장 1-14절
Send us Fan Mail요약오늘 본문은 제자들이 갈릴리 디데랴 호수에서 부활의 주님을 다시 만나는 장면을 기록합니다. 제자들은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님을 기다리며 자신들에게 익숙한 호수에 그물을 내립니다. 어부들로서 살아온 그들이었지만 웬일인지 그날 밤은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합니다. 그리고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시 물가로 나오려던 그 이른 새벽에 주님의 말씀이 그들을 찾아옵니다. 그런데 그들은 아직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4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릅니다.6절,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누가복음 5장은 비슷한 장면을 기록합니다."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누가복음 5장은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실 때에 제자들을 부르시던 장면인 점을 고려할 때, 요한복음 21장의 기록 역시 제자들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기록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잡은 물고기 숫자가 153마리라는 점입니다. 이렇게 21장은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으로서 예수를 배반했던 베드로의 회복과 아울러 교회의 역할을 강조합니다.묵상제자들은 부활을 경험했지만 사명으로 나아가지 않고 갈릴리 어부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혼란스러운 상황에 익숙한 환경이 주는 안도감이라고 할까요. 하지만 더 이상 그들은 단순한 어부로서 살아갈 수 없는 듯합니다. 밤새 수고하였으나 얻은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을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제자들을 모르지만 예수님은 호숫가에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배가 텅 빈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날이 밝아오매 더 이상 물고기를 잡을 여건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그물을 배의 오른편에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의 말씀에 순종한 제자들은 그물을 들 수 없을 만큼 많은 물고기를 건집니다. 가나 혼인 잔치의 기적처럼, 죽은 나사로의 부활처럼, 38년 된 병자가 고침을 받는 것 처럼, 태어날 때 부터 소경이었던 자가 눈을 뜨게된 것 처럼,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의 실체가 보여집니다.뭍으로 나온 제자들을 기다리는 것은 예수님의 책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밤새 수고한 제자들을 위하여 숯불에 생선과 떡을 준비하셨습니다. 숯불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던 밤 그 앞에서 타오르던 숯불을 떠올리게 합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실패와 헛된 수고를 먼저 생각하겠지만 주님은 와서 "조반을 먹으라" (14절) 말씀하십니다.참고로 흥미로운 것은 물고기 153마리입니다. 어떤 이들은 153은 시므온을 헬라어로 숫자화한 것이라 합니다. 또 다른 이들은 1에서 17까지의 정수를 더한 숫자가 153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17은 온전함을 상징하는 10과 완전함과 은혜를 상징하는 7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 다른 이들은 153이 온 인류를 암시하는 숫자라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위에 내용들은 저보다 훨씬 성경을 더 많이 공부한 분들이 말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확실한 것은 오늘 본문은 제자들이 이전 익숙한 삶으로 돌아간 현장에서 그들은 수고하였으나 열매가 없었고 그런 그들을 찾아오신 예수님은 베드로를 회복하시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신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허물을 떠올렸을 테지만 주님은 그들을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주님이 오늘 우리를 부르십니다. 제자들은 이제 더 이상 이전으로 돌아갈 수도, 아니, 돌아가서도 안 됩니다. 그들에게는 이제 험난한 길이 예비되었지만 그 길은 주님이 예비하신 길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동행하실 길입니다. 우리 쓸 것을 미리 아시는 주님이 오늘 우리를 부르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찾아라고. 할렐루야!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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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9장 28-30절
Send us Fan Mail요약요한복음 19:28–30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마지막 순간을 기록합니다.28-30절,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이 말씀은 의미 없이 희생당한 사람의 마지막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계신지 분명히 아셨습니다. “내가 목마르다”라는 말씀조차 성경을 이루기 위한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시며, 자신이 오신 목적을 끝까지 이루십니다.이 장면을 십자가 위의 일곱 말씀과 함께 읽으면 그 의미가 더 선명해집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시고, 회개하는 강도에게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하십니다. 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시고, 마침내 “다 이루었다”라고 선언하십니다. 이 말씀들은 십자가가 죄인에게 용서를 주고, 자격 없는 자에게 낙원을 열며, 우리의 죄값을 대신 담당하신 사건임을 보여 줍니다. 우리의 빚이 갚아졌고, 구속이 이루어졌습니다.묵상예수님은 분명한 목적 가운데 죽으십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예수님의 사역을 가로막은 비극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바로 그 목적 자체였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의 죄를 담당하시고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시며 자기 백성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그래서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구원이 이제 가능해졌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남은 것을 믿음이나 행위로 채워 넣어야 한다고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죄의 값이 지불되었습니다. 죄의 빚이 완전히 갚아졌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졌습니다.십자가에서의 말씀들은 그 완성된 구원을 보여 줍니다.“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는 십자가가 용서의 자리임을 보여 줍니다.“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아무 공로 없는 죄인도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는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심판을 받으셨음을 보여 줍니다.“내가 목마르다”는 예수님의 고난이 참된 고난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주님은 멀리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친히 들어오셨습니다.사실 저도 복음을 믿는다고 하면서 여전히 무언가가 남아 있는 것처럼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물론 죄를 지으면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리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순종이나 회개로 내 의를 세우고 하나님에게 구원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되려고 종교에 힘을 쓰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죄뿐 아니라 자신의 공로도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로움은 완전한 의로움입니다. 그리고 완전한 의로움은 죄인의 노력으로 성취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만이 완전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에게는 자신의 의로움을 주십니다. 십자가는 단순히 용서의 자리만이 아니라 죄인이 의로움을 받는 구원의 자리입니다.그러므로 갈보리의 십자가는 우리 자신을 보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만이 빚을 갚으셨고, 예수님만이 구원을 이루셨으며, 예수님만이 용서와 구속과 화평을 주십니다. 십자가는 죄인이 구원받을 가능성을 보여 준 사건이 아니라, 실제로 죄인을 구원한 사건입니다.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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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9장 17-27절
Send us Fan Mail요약본문은 예수님께서 골고다로 나아가시는 장면을 기록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그 숙명의 시간을 향하여 한 걸음씩 나아가십니다. 곧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버림을 당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흔들리지 않으십니다. 히브리서 12장은 예수님이 흔들리지 않는 이유는 바로 우리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서 12장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요한은 또 빌라도가 붙인 패를 기록합니다.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그 패는 히브리어로, 로마어와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공개적이었고 누구나 볼 수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조롱의 뜻으로 썼겠지만, 자기도 모르게 더 큰 진실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맞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실 뿐 아니라 온 인류의 참된 왕이십니다.주권자 하나님은 인간의 악한 행동까지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정죄하지만, 십자가는 오히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선포합니다. 이렇게 악인들의 선택도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는 것을 본다면 감사한 일입니다.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의 옷을 나누기 위해 제비를 뽑습니다. 사형수를 조롱하는 행위였고, 동시에 탐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말씀의 성취입니다.“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시편 22:18말씀이 바로 그들의 눈앞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 가운데서도 예수님은 자기 어머니 마리아와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짊어지고 계시는 순간에도 자기 사람들을 돌보기를 멈추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그 제자에게 맡기시고, 십자가 아래 새로운 언약의 가족을 세우십니다.묵상세상 왕들은 위협으로부터 보호받고, 백성과 거리를 두며, 화려함으로 자신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위험에 노출되시고, 백성을 위하여 서시며, 수치 가운데 가시면류관을 쓰십니다. 그의 곁에는 충성된 신하들이 아니라 냉소적인 군인들과 적대적인 지도자들, 그리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이 서 있습니다.군인들은 무엇을 빼앗을 수 있을지에 마음을 둡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끝까지 무엇을 주기 위해 오셨는지를 잊지 않으십니다. 역사의 가장 어두운 순간 앞에서도 죄인들은 여전히 자기중심적이며 영적으로 눈이 멀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성경에 나오는 그들만의 문제일까요?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영광을 소유물과 숫자와 프로그램으로 축소시키지는 않나요? 혹시 우리는 눈앞의 것들을 붙들다가 하나님의 아들을 놓치고 있지는 않나요? 야고보서 1:27은 말씀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예수님은 마리아와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십니다. 그 힘든 상황에서도 슬픔 가운데 있는 자를 돌보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한 영혼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세상에서는 우리의 이름도 수고도 모르는 무명인으로 우리는 살아갑니다. 그러나 만유의 주재이신 주님의 시선이 우리를 향하고 있다면 우리는 결코 하찮은 존재가 아닙니다.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새로운 언약의 가족을 만드십니다. “보라 네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하나님의 교회는 건물이나 예산으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예수의 피값으로 주고 사신 성도들, 즉 갈보리 십자가로 묶인 성도들로 세워집니다. 교회는 친분이나 익숙함으로 만들어지는 공동체가 아니라, 거절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워지는 성도의 공동체입니다.본문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누구와 함께 서 있기를 원합니까?군인들처럼 당장 눈앞의 것에 더 마음을 두고 있습니까?종교 지도자들처럼 예수님의 왕 되심이 불편하십니까?아니면 십자가 곁에 서서 그저 두려움에 떨고 있지는 않습니까?오늘 우리에게 부활절의 의미는 무엇입니까?우리는 진리와 긍휼과 정의와 의의 편에 서고자 하는 어떤 선택을 하고 있습니까?죽어야 삽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요 죽는 것도 유익입니다.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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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8장 39절-19장 16절
Send us Fan Mail요한복음 18:39–19:16은 복음서에서 가장 어둡고도 가장 많은 것을 드러내는 장면 가운데 하나를 기록합니다.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 서 계십니다. 아무 죄도 없으신데 마치 죄인처럼 취급을 받으십니다. 빌라도조차 예수님께서 죽으실 만한 죄를 지으시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끝내 옳은 일을 하지 않습니다.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 주려 하지만, 그들은 바라바를 달라고 외칩니다. 요한은 짧지만 무거운 한마디를 덧붙입니다. “바라바는 강도였더라” (18:40). 빌라도는 군중의 광기에 굴복합니다. 죄 있는 자는 놓임을 받고, 죄 없으신 분은 정죄를 받으십니다. 그 뒤 빌라도는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합니다. 그는 예수님이 무죄하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왜 이 벌을 내렸을까요? 자기 결정을 스스로 합리화하고, 자기 양심을 달래려 했던 것일까요? 이제 군인들까지 예수님을 희롱합니다. 자색 옷을 입히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씌우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19:3) 하고 조롱합니다. 그들은 비웃는 뜻으로 말했지만, 요한은 그 말 속에 담긴 아이러니를 보게 합니다. 로마 병정들은 자신들이 하는 말의 의미를 몰랐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도 예수님이 왕이심을 선포하십니다.빌라도는 예수님을 데리고 나와 “보라 이 사람이로다” (19:5) 하고 말합니다. 아이러니입니다. 여기 참 사람이 서 계십니다. 의로우신 사람, 인간이 본래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시는 분이 서 계십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그들을 따르는 어리석은 무리는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19:6) 하고 외칩니다.이어 유대 지도자들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으니” (19:7)라고 말합니다. 빌라도는 더욱 불안해집니다. 다시 예수님께 묻고, 마치 자신이 권세를 쥐고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19:11)라고 대답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로 가시는 길은 우연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마치 악이 승리하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주권 가운데 계십니다. 예수님은 통제력을 잃으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주신 길을 기꺼이 걸어가고 계십니다.결국 빌라도는 무너집니다. 언젠가는 이 세상 모든 권력은 무너집니다. 빌라도는 정의보다 자기 보전을 택합니다. “보라 너희 왕이로다” (19:14) 하고 말하자, 대제사장들은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19:15) 하고 답합니다. 이것은 이 본문에서 가장 비극적인 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솔로몬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 신앙인 줄 착각한 어리석은 종교인들이 스스로 참된 왕을 거절하고 거짓 왕을 택합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넘겨 줍니다. 그러나 요한은 단순한 불의만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복음을 보여 줍니다. 죄 없으신 분이 정죄를 받으심으로 죄 있는 자가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우리의 왕은 누구입니까? 유대 지도자들은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리석은 유대 종교인들은 가이사가 그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준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어리석은 무리는 그들이 유월절 명절을 즐기는 데 방해가 되는 예수를 처리하고 가이사 통치하에 유월절 명절을 지키는 데 급급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도 그렇게 말하지는 않아도, 그렇게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불확실한 미래로 나아가느니 불의한 상황에도 그냥 눌러앉습니다. 불안이 우리를 다스리고, 익숙한 환경에 노예가 되고, 세상의 기준이 우리를 규정하고, 그리스도 아닌 다른 무엇을 붙들 때마다 우리는 다른 왕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것입니다.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보라 이 사람이로다. 보라 너희 왕이로다. 거절당하신 예수님이 참된 왕이십니다. 조롱당하신 왕이 구원하시는 왕이십니다. 정죄받으신 왕이 죄인들을 자유하게 하시는 왕이십니다.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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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8장 28-38절
Send us Fan Mail요약요한복음 18:28–38은 예수님이 유대 지도자들로 말미암아 빌라도에게로 끌려가시는 장면을 기록합니다. 때는 이른 아침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는 뼈아픈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유대 종교 리더들은 유월절을 앞두고 부정하게 되지 않으려고 이방인 빌라도의 관정에는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한 유월절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부당하게 죽음으로 넘기고 있습니다. 종교적 규칙은 지키려 하면서도, 오히려 그들이 경배한다고 말하는 하나님은 거절하고 있습니다. 기록된 유대 전통을 따르면, 사형을 선고하는 재판을 그것도 야밤에 하루 만에 내리는 경우는 없습니다. 불의와 불법의 조화를 자행하면서도 유월절은 지키려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오늘날 부활절을 언급하지만, 불의를 일삼지는 않는지 우리 모두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빌라도가 도대체 예수가 뭘 잘못해서 사형에 처해야 하는지 묻자 그들은 뚜렷한 답을 피합니다. 이에 빌라도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고 하자, 그들은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그들의 목적이 진실 규명이 아니라 예수님을 제거하는 데 있음을 드러냅니다. 어둠의 본심이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혼란과 불의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악이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빌라도는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묻습니다. 대답은 “그렇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빌라도가 생각하는 방식의 왕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이 왕이신 하나님 나라는 이미 임했습니다만 빌라도가 상상하는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 권력이나 힘으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교회'의 일도 권력이나 무력으로 밀어붙인다고 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끝으로 예수님은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증언을 듣고도 빌라도는 냉소적으로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질문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진리 자체가 바로 우리 앞에 서 계셔도 진리를 못 알아보는 것이 영적으로 눈먼 이 세상입니다.묵상겉으로는 신실하고 올바르게 보이려 하면서도, 우리 속마음을 드러내는 진리는 피하고 싶을 때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종교적 열심으로 우리 안의 어두움을 덮는 것이 너무도 익숙한 우리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빌라도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는 진리를 찾는 듯 보입니다. 예수에 대한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진리를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질문은 하지만 순종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빌라도"가 있습니다. 죄를 회개하기보다 관리하려 하고, 불의를 바로잡기보다는 빌라도처럼 “내 손은 깨끗하다”라고 말하며 "중립"을 지켜서 불의에 동조합니다.예수님은 이 모든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당황하지 않으시고, 자신이 누구신지 분명히 아십니다. 십자가는 구원을 이루실 그리스도의 실패가 아니라 사명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우리가 익숙한(그래서 의지하는) 권력으로 세워지지 않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정말 진리를 원하는가? 아니면 나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 진리만 원하는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진리는 토론이나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새겨 듣고 따라야 할 인격체이십니다.우리의 소망은 왕이신 예수님께서 애통하고 자복하는 심령을 버리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처럼 마음이 갈라지기 쉽고 두려움이 많은 사람을 위해 십자가로 가셨습니다. 종교적 열심이나 이 세상의 권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와 긍휼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 가진 소망의 근원입니다. 종교는 유월절 명절을 지키는 것이 목적입니다. 하지만 제자도는 유월절 어린양을 따르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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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8장 1-27절
Send us Fan Mail요약요한복음 18:1–27은 예수님께서 붙잡히시는 장면을 기록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어떤 사건에 떠밀려 가는 연약한 피해자로 소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앞으로 닥칠 일을 다 아시면서도 친히 앞으로 나아가십니다. 구약의 다윗 왕은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에게 배신을 당하고, 다윗을 따라야 마땅한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고 배반의 슬픔 가운데 기드론을 건넜었습니다, 이제 구약의 다윗보다 더 진정한 "다윗"이신 예수님도 사랑하는 제자에게 배반을 당하고,백성에게 버림을 받기위해 기드론을 건너십니다.가룟 유다가 군인들을 데리고 왔을 때에도 예수님은 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먼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들이 “나사렛 예수”라고 하자, 예수님은 “내가 그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5절). 그러자 그들은 뒤로 물러가 땅에 엎드러집니다. 참 놀랍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의 권능이 있으시지만, 그 능력으로 자신을 지키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을 내어주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성도를 보호하기 위함입니다.8-9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반면 베드로는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의 오른쪽 귀를 벱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11절).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힘으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구원은 베드로의 열심이 아니라 아들의 순종으로 이루어집니다.묵상저는 오늘 본문에서 큰 위로를 받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데 있어서 결코 수동적인 분이 아니십니다. 적극적으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도” 앞으로 나아가십니다(4절).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 그렇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우연한 비극이 아닙니다. 자기 백성을 위해 (마지못해 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기 생명을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순종입니다. 가장 어두운 시간에도 예수님은 흔들리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 삶이 요동쳐도, 우리는 여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숨과 쉼을 누릴 수 있습니다.말씀은 우리의 모습을 베드로를 통해 보여 줍니다. 우리 안에도 다 “베드로”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한순간에는 용감하지만, 다음 순간에는 너무 약합니다. 칼을 휘두를 준비는 되어 있지만, 어린 여종의 질문 하나는 견디지 못합니다. 우리는 종종 강한 감정을 진리 혹은 신실함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열심과 헌신은 종교성이 강하고 우리 자신의 의를 세우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결과 환난이나 어려움이 오면 쉽게 타협합니다. 그리고 무너집니다. 사람을 두려워하거나 상황을 힘들어하여 결국 베드로와 같은 비겁한 선택을 합니다.예수님은 제자들이 실패할 것을 아시면서도 그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로 가신 것은 우리가 신실함을 보셔서가 아니라, 우리가 신실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우리가 주님을 붙드는 데 있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신실하심으로 우리를 붙드신다는 데 있습니다. 베드로는 넘어지지만 예수님은 넘어지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사람은 어떤 실패에서도 다시 일으켜 세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기도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붙잡히시는 그 시간에도 완전한 순종으로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마셨다는 사실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자주 베드로처럼 쉽게 흔들립니다. 우리 자신을 의지한 죄를 용서해 주시고,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실하심 안에서 쉬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주님 가까이 두시고, 예수님을 더 담대히 시인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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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프로젝트: 2026년 고난주간
Send us Fan Mail전통적인 찬송가를 현대 음악으로 재해석한 노래 모음 (2집)어서 돌아오오나 주를 멀리 떠났다내 주의 보혈은나 같은 죄인 살리신내 영혼이 은총입어내 맘의 주여 소망 되소서(c) Jubilee Coach, 2026, made with Suno.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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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7장 1-16절
Send us Fan Mail요약본문에는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기도하시는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함께 보시겠습니다.예수님은 1절에서 “때가 이르렀사오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십자가가 갑작스러운 비극이나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지시는 갈보리 십자가는 죄인들을 위해서 창조주 하나님의 경륜과 계획 아래 준비된 구원입니다.그리고 3절은 영생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 줍니다."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즉, 영생은 그저 오래오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삶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연합하여 영원하신 그분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6절에서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셨다고 하시고, 11절에서는 “그들을 보전하사,” 15절에서는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기도하십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기도는 제자들이 이 세상에서는 온갖 환난을 당할 것이나 그들을 이 세상 밖으로 데려가 달라고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세상 한가운데서 지켜 달라고 기도하십니다.묵상저는 이 본문에서 주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끝까지 지키시는지가 마음에 와 닿습니다.예수님은 제자들이 곧 흔들릴 것을 아십니다. 이미 베드로의 부인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베드로와 제자들의 흔들림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그들을 끊어내지 못합니다. 12절,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는 그때 제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흔들릴 것을 미리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우리를 지키십니다.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맡기십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심판주가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시는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잊지 마십시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 수 있는 것은 결코 우리의 결심이나 노력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우리는 너무도 쉽게 흔들리고 베드로처럼 예수를 마음과 행동으로 부인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연약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본질이 진토임을 기억하시며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우리를 끝까지 붙드시는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현대 사회의 우리는 "빨리빨리"의 삶을 삽니다. 날마다 바쁘고 분주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은 쉽게 흩어지고 믿음은 자주 흔들립니다. 사실 베드로만이 예수님을 부인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날마다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주님을 부인합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할 때, 주님의 영광보다 나의 자존심이 더 중요할 때, 우리는 조용히 그리스도를 부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놀랍게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오래 참고 기다리시며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지금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힘든 이 세상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어렵고 힘들지라도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14절과 16절에서 자기 백성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그러니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해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성도의 소망은 삶이 편해지고 쉽게 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진정한 성도의 소망은 아무리 힘든 상황일지라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붙드시는 것을 기억해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습니다.기도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소망이 우리에게 있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우리를 아버지의 이름으로 지켜 주시고 악한 자에게서 보호해 주옵소서. 오늘 우리는 이 세상 가운데 살아가지만 이 세상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로 살게 하시고, 모든 상황에서도 주님께 붙들린 자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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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돌아오오 (음악)
Send us Fan Mail전통 찬송가를 현대화 한 곡입니다. 새찬송가 527장(통 317장) '어서 돌아오오'는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담아 회개를 촉구하는 한국 찬송가입니다. 전영택 작사, 박재훈 작곡으로 1960년대부터 불린 이 곡은 어둔 세상과 우리 자신 중심의 신앙에서 떠나 주님 품으로 돌아오라는 애절한 권면을 담고 있습니다.[Verse 1]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지은 죄가 아무리 무겁고 크기로주 어찌 못 담당하고 못 받으시리오우리 주의 넓은 가슴은 하늘보다 넓고 넓어.[Verse 2]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우리 주는 날마다 기다리신다오밤마다 문 열어 놓고 마음 졸이시며나간 자식 돌아오기만 밤새 기다리신다오[Verse 3]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채찍 맞아 아파도 주님의 손으로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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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6장 25-33절
Send us Fan Mail요약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지금까지는 비유로 말씀하셨지만, 이제는 아버지에 대하여 더 밝히 드러내어 말씀하시는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자들의 모든 문제가 갑자기 쉽게 풀린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어둠 속에 한 줄기 빛이 비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께로부터 오셔서 세상에 들어오셨고, 이제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가신다는 사실을 제자들이 분명히 알기를 원하십니다.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은 제자들에게는 힘든 일들이겠지만 그것들은 우연이나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자신감 있는 반응을 보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밝히 말씀하시니, 이제는 알겠고 이제는 믿는다고 말합니다.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유로도 하지 아니하시니이다 …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29–30절). 그들의 말은 진심이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보다 훨씬 연약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조용하지만 무게 있는 질문을 던지십니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31절). 실제로 그들은 이 고백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흩어지게 될 것입니다. 각자 자기 자리로 물러나고, 예수님은 홀로 남겨지실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 순간에도 자신이 참으로 혼자인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가장 위로가 되는 약속 가운데 하나를 주십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33절). 묵상 이 본문에서 인상 깊은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얼마나 정직하게 말씀하시는가 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포장하거나 그들이 실제보다 더 강한 사람들인 것처럼 대해 주시지도 않으십니다. 제자들은 비로소 분명히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두려움이 곧 그들 안에 남아 있는 연약함을 드러낼 것을 아십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는 종종 어떤 진리를 잠시 깨달은 것을 깊은 성숙으로 착각합니다. 이제는 준비되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압박의 시간이 오면 우리의 용기가 얼마나 빨리 무너지는지를 그제야 보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심으로 제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을 붙들어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자신을 버리고 흩어질 것을 아시면서도, 이미 그들을 위해 평안의 말씀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도 참 위로가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에 놀라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쉽게 두려워하는지, 얼마나 빨리 흩어지는지, 얼마나 자주 자기 안으로 숨으려 하는지를 이미 아십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여전히 우리를 붙드시며, 계속해서 우리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돌리십니다. 제자들은 곧 크게 실패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미래의 실패가 아버지의 사랑을 지워 버리지는 못합니다. 그들의 연약함이 예수님께서 열어 주신 관계를 무효로 만들지도 못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평안은 우리가 얼마나 잘 버티고 있는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평안은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이 이미 이루신 십자가 구원에 있습니다.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 안에서가 아닙니다. 환경 속에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흔들리지 않는 믿음 안에서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 안입니다. 평안은 거기에서만 옵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trouble-free life를 약속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그리고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스스로 강하다고 여기는 자기확신의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승리 안에서 쉬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떨 수 있습니다. 여전히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여전히 세상의 압박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아직 모든 답을 다 얻지 못했어도, 이미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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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6장 1-24절
Send us Fan Mail요약요한복음 16:1–24에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제자들에게 앞으로 그들에게 임할 일들을 미리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그들에게 익숙하고 정들었던 회당에서 쫓겨나고, 더 나아가 어떤 사람들은 제자들을 해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길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제자들에게 미리 하시는 이유는 제자들에게 두렵움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일들이 일어날 때 넘어지지 않도록 준비시키기 위함입니다.예수님은 제자들이 이해하기 더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7절).이 말씀은 제자들로서는 받아들이기 정말 어려운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떠나가셔야 보혜사 성령께서 오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고, 제자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요즘 흔히 "성령운동"이라고 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는 생각이 스쳐 갑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모든 사역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거함으로써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있습니다.예수님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여전히 혼란스러웠습니다. 예수님께서 “조금 있으면”이라고 말씀하셨지만 그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거듭 말씀하십니다.“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20절).임산부에게 해산의 고통이 결국 출생이라는 기쁨으로 이어지듯이, 제자들의 슬픔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며 기쁨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담대히 기도하는 삶으로 이어질 것입니다.묵상이 말씀에서 위로가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삶을 절대로 쉽게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시는 것은 편한 삶을 주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를 잘 따르는 자들에게 슬픔도 끊기지 않고, 저항도 많고, 혼란도 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다. 그 모든 것은 절대로 예수님의 돌보심과 계획 밖에 있지는 않다는 것을!삶이 힘들고 또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이해되지 않을 때 우리가 무엇인가 잘못했나라고 자문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깊은 슬픔조차 하나님의 선하신 뜻 가운데 있을 수 있음을 보여 주십니다. 우리가 당황하는 것은 상황의 통제권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마는 사실은 우리 삶의 "통제권"은 아예 우리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그리고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어쩌면 환난과 핍박을 통해 우리가 절실히 깨닫는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떠나가시지만 자기 백성을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삼위일체 하나님의 성령께서 오셔서 그리스도를 더 분명히 알게 하시고, 더 귀하게 보게 하시며, 더 중심되게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단지 슬픔 뒤에 기쁨이 온다고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놀랍게도 슬픔 자체가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복음의 방식입니다. 십자가가 부활로 이어졌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슬픔은 마지막 말이 아닙니다.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임한 슬픔을 부끄러워하거나 부인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아가면 됩니다. 혼란과 슬픔을 가지고 주님 발 앞에 내려놓으면 됩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을 우리가 전부 이해하지 못해도 주님은 우리의 눈물과 슬픔을 주 안에서의 기쁨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할렐루야!기도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마음이 흔들리고 아버지의 뜻이 잘 보이지 않을 때에도 주 예수님을 신뢰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시고 성령을 보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슬픔이 무겁게 느껴질 때, 그리스도 안에서 그것이 마지막이 아님을 기억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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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5장 18-27절
Send us Fan Mail요약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하신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보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유도 함께 알려 주십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18절). 다시 말해 제자들이 미움을 받는 것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예수님께 속해 있다는 증거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19절).예수님은 이 미움이 단지 사람 사이의 갈등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영적인 문제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이 세상은 그리스도께 복종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하심은 죄를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진리는 인간의 교만을 흔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권위는 우리가 내 삶의 주인으로 살고 싶어 하는 중심을 건드립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아무리 선을 행하고 진실을 말해도 예수를 거부하는 이 세상으로부터는 미움밖에 받을 수 없습니다.그러나 예수님은 단순히 경고만 주지 않으십니다. 당연히 약속도 주십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다름이 아닌 진리의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을 증언하실 것이고, 아울러 이제 제자들도 그 증언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26–27절). 그러므로 이 본문은 단지 미움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을 받고 확신과 인내로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증거해야 함을 깨닫게 합니다.묵상왜 세상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선을 행하고 진실을 말할 때에도 그들을 미워할까요?세상은 우리의 중심을 바치지 않고 외적 행위와 열심만 내도 인정받는 종교는 미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장려합니다. 그리고 세상은 어느 정도 적당한 도덕은 기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야기하는 우리 하늘 아버지가 거룩하심같이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성경이 제시하는 예수님은 우리가 원하는 위로만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섬겨야 마땅한 왕, 즉 주님으로 오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시는 일 중 하나가 하나님에 대한 진실, 우리 자신에 대한 진실, 우리의 죄에 대한 것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그분을 불편해합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어둠으로 잘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둠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리고 어둠이 빛으로 말미암아 노출되는 것을 싫어하듯, 이 세상이 예수를 미워하듯, 그리스도를 닮은 선은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권위를 담은 진리의 말씀은 거절당하기 일쑤입니다.물론 우리는 조심해야 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나 옳은 이유로 반대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의 교만과 편견 때문에 세상과 이웃으로부터 거절당하기도 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마땅히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점을 인정한 뒤에도 예수님의 말씀은 여전히 분명합니다. 믿는 자들은 예수님께 속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미움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들의 삶이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고, 그리스도께서 왕이시라고 증언하기 때문입니다.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 말씀을 미리 주십니다. 제자들이 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당할 때, 제자들이 무너지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 자신이 먼저 그 길을 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까닭 없이 미움을 받으셨고, 거절당하셨으며, 결국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미움은 하나님의 은혜를 막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십자가의 은혜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우리는 인정받고 싶고 또 공동체에 속하고 싶기 때문에 미움을 받거나 거절을 받는 것을 견디기 어려워합니다. 그런 우리를 예수님은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우리와 늘 함께하시는 진리의 성령을 보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힘으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주와 동행하며 성령의 도우심으로 증인됩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미워할 수 있어도 침묵하게 하지 못합니다. 할렐루야!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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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5장 1-17절
Send us Fan Mail요약요한복음 15:1–17에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제자들에게 자신이 떠난 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치십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포도나무로 불렸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온전히 맺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로 오셔서 하나님의 백성이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포도나무가 아니라 가지입니다. 가지는 스스로 살지 못하고, 포도나무에 붙어 있을 때만 삽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열매는 바쁨이나 종교 활동에서 나오지 않고, 그리스도와의 살아 있는 연합에서 나옵니다.묵상그러면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단순히 종교 단체 안에 남아 있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교회" 가까이에 있다고 해서 자동으로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홀로 서는 신앙을 뜻하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 공동체는 중요하지만 그 자체가 포도나무는 아닙니다. 포도나무는 오직 그리스도이시고, 진정한 교회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살아가는 성도들의 모임이어야 합니다.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왕이신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주권 아래 사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머물게 하며, 주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고, 주님의 사랑 안에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것은 매우 실제적이었습니다. 가이사가 아니라 예수님이 주님이시라고 고백하고, 우상을 버리고,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핍박 속에서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는 삶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생각과 원함과 관계와 선택의 주인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위로는 원하지만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은 원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열매는 원하지만 실제로 그리스도를 의존하는 것은 두려워합니다. 잊지 마십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예수님은 메마른 가지에게 스스로 살아나 보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또한 아버지의 가지치기는 버리심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가지치기는 때로 아픕니다. 누렇게 바랜 잎사귀들이 다 떨어져 나가면 마치 벗은 듯 느껴지기도 합니다. 마치 잃어버리는 것 같고, 우리의 삶의 한 부분이 깎여 나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15장 2절,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그렇다면 이렇게 맺는 열매는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야고보서 1장 27절,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예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힘으로 거하라고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기꺼이 자기 목숨을 내어주심으로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할 수 있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은 우리 힘이나 능력이나 숫자나 재물로 무엇을 증명하는 삶이 아니라, 이미 우리를 붙드신 주님의 은혜 안에서 신실히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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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나는 포도나무: 내 안에 거하라 (요한복음 15장)
Send us Fan Mail[Verse 1]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오늘 주를 위해 귀한 열매 맺으라사랑 안에 거하라 나의 평안 주리니주의 말씀 안에 살며 주를 따르라[Chorus]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신실하고 진실하게 주를 섬기라무엇이든 구하라 응답하여 주리니그 큰 사랑 안에서 우리 거하리[Verse 2]내가 일러준 말로 너희 깨끗해졌으니내 안에 거할 때 많은 열매 맺으리라변함없는 약속 내 안에 거하라하늘의 그 영광을 함께 나누리[Bridge / Ending]이제 내 안에 거하라 나는 네 하나님이니환난의 폭풍 중에도 너를 지키는 자라두려워 마라 내가 널 도와주리니놀라지 마라 네 손 놓지 않으리라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내 것이라, 오직 나의 사랑하는 자라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노라너를 영원히 사랑하는 네 여호와라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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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고난주간 찬송가 모음
Send us Fan Mail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아 하나님의 은혜로갈보리산 위에주 달려 죽은 십자가만왕의 왕 내 주께서오 거룩하신 주님거기 너 있었는가(c) Jubilee Coach 2026, Made using Suno.ai technology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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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장 15-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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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장 1-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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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계신 주 (힙합 버전)
Send us Fan Mail[Intro]Yeah, look. He’s alive. Not just a story, but a living hope. Check it.[Verse 1]하늘 보좌 내려놓고 이 땅 위에 Descent 날 위해 걸어가신 고통의 그 Pavement 독생자 예수, 죄의 사슬을 다 끊었네 사망 권세 이기고 무덤 문을 열었네 My Savior, My King, 죽음에서 일어난 Life 내 모든 죄의 빚을 갚아주신 거룩한 Sacrifice[Refrain]살아계신 주, 내 영혼의 유일한 Hope 그분 안에 있기에 절망은 No Nope 걱정 근심 다 던져, He’s leading the way 기쁨이 넘쳐나, 내 삶은 매일이 Bright day[Verse 2]Born again, 새로운 호흡, 이젠 달라진 Vibe 주의 사랑 안에서 난 비로소 Alive 세상은 흔들려도 난 흔들리지 않아 주님의 손 잡고 확신 속에 살아 도우시는 그 은혜, 매일 느껴지는 Touch 주님을 향한 내 믿음, I love You so much[Verse 3]영광의 그날까지 멈추지 않는 Fight 어둠 속에서도 난 비추지 그 Light 멀고 험한 승리의 길, 땀방울이 맺혀도 주님 내 앞길 지키시니 결코 안 지쳐 Last breath까지 주를 위해 난 Run 이미 이긴 싸움, 승리는 오직 The Son[Refrain]살아계신 주, 내 영혼의 유일한 Hope 그분 안에 있기에 절망은 No Nope 걱정 근심 다 던져, He’s leading the way 기쁨이 넘쳐나, 내 삶은 매일이 Bright day(c) JubileeeCoach with Suno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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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과 찬양
Send us Fan Mail오직 예수뿐이네,내 맘과 정성을 다하여서내 기도하는 그 시간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하나님의 은혜 (내게 족하네)선한 목자 예수 나를 위하여주 달려 죽은 십자가빛나고 높은 보좌와회개의 노래여호와께 돌아가자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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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46편
Send us Fan Mail시편 146편은 '여호와를 찬양하자'라는 뜻을 가진 '할렐루야'로 시작하고 할렐루야로 끝맺는 시편입니다. 시편 150편의 마지막 5편의 첫번째 시입니다. 이 시편들에서 '할렐루야'는 모두 10회 반복이 됩니다. 성경에서 숫자 10은 완전함을 뜻합니다.1-2절,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시인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 즉 여호와만이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구원하시는 왕이라 노래합니다. 우리가 이제 2025년을 마무리 지으면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신뢰하고 살고 있는지 자문해 보는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3-5절,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찌니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인은 아무리 크게 보여도 이 세상 통치자들을 신뢰하지 말라는 권고로 부터 야곱 즉 언약의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자의 진정한 행복을 노래하며 끝으로 이 세상에서 소외되기 쉽고 약자라서 흔히 천대를 받는 자들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노래합니다.시인은 마치 자신이 다른 사람인 듯 자신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명령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눈에 보이는 유력한 것들을 의지하지 않고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으나 실존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찬양하겠다는 의지를 실천으로 옮기겠다는 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 자신들에게 스스로 질문하길 원합니다. 과연 우리는 찬양할 이유를 오직 하나님 그 분에게서만 찾으려고 마음을 먹고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길 원합니다.6-10절,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압박 당하는 자를 위하여 공의로 판단하시며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시는 자시로다 여호와께서 갇힌 자를 해방하시며여호와께서 소경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을 사랑하시며여호와께서 객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시온아 여호와 네 하나님은 영원히 대대에 통치하시리로다 할렐루야"시인의 하나님은 약한 자의 고통에 함께하시면서 그들의 아픔을 해결하기 원하시는 분입니다. 인애와 공의와 정의가 무너진 이 세상의 어그러진 재판을 바로잡고, 굶주린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으로 만족을 주시고, 억울한 자들에게 자유를, 장애인과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십니다.시인의 믿음에는 결국 강하게 보여도 악인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갈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를 신뢰하는 백성들을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믿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공의가 뒤틀어진 상황에 냉소하는 정도로 부분적 우월감을 느끼지는 않습니까? 비난하는 것이 마치 연약한 사람들을 실제로 돕는 듯 착각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어떻게 하면 '고아와 과부'를 그들의 환난 중에 조금이라도 보살필 수 있는 라이프 스타일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될 수 있을까요?파란만장한 지난 한 해 동안 파동치는 물가로 말미암아 우리의 지갑은 더욱 얇아지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마음도 메말라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오늘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더욱 뚜렷이 보여줄 수 있을까요? 헐벗고 굶주린 모든 사람들을 우리가 다 도울 수는 없겠지만 우리 모두는 한 사람의 '이웃'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복음의 진정성을 우리 삶으로 증명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아무쪼록 하나님 나라의 인애와 공의와 정의를 세워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주 안에서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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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서 1장
Send us Fan Mail선지자 미가는 이사야와 호세아와 동시대 인물로, 대략 주전 735–690년경에 활동했습니다. 그의 설교는 구약의 열두 소선지서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두 소선지서를 하나의 두루마리로 읽을 때, 미가서는 이스라엘(사마리아-예루살렘)을 향한 지역적 심판(호세아·아모스)과 니느웨를 향한 열방의 심판(요나·나훔)을 잇는 중요한 연결 고리 역할을 합니다.1절, "여호와의 말씀이 모레셋 사람 미가에게 임하였으니"이 짧은 소개는 매우 중요합니다. 미가는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 가문 출신이 아닙니다. 그는 유다의 작은 시골 마을 모레셋, 블레셋 국경 인근에서 왔습니다. 말하자면 명문대가 아니라 지방대 출신입니다. 그래서 그는 종교 지도자들과 제도가 어떻게 평범한 "변두리" 사람들의 삶을 짓누르는지를 피부로 느끼며 살아온 선지자입니다. 그래서 그의 설교는 힘이 있습니다.미가는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시대에 사역했습니다. 그당시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는 계속되었고, 이스라엘은 종교에 익숙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대한 신실함은 점점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외부적으로는 앗수르가 급속히 강대해졌고, 그래서 북이스라엘의 멸망은 피할 수 없는 현실처럼 보였습니다. 이 시점에 미가는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말씀을 전하지 않습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의 멸망을 막는 것이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로 돌아오는 회개를 하도록 설교를 하였습니다.선지자의 설교는 법정을 상기시킵니다. 심판주이시자 재판장이신 하나님은 온 땅을 증인으로 부르십니다. 하나님도 이스라엘을 향해 증인이 되시는 분으로 분명히 개입하십니다. 오늘 교회에게 하나님은 미가서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계실까요? 하나님과 온 땅이 증인이 되어서 교회를 고발하는 내용은 무엇일까요?5절, "이 모든 일이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 족속의 죄 때문이라."여기서 ‘허물’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의도적인 반역을 뜻합니다.사마리아(북)와 예루살렘(남)은 권력과 예배와 정체성의 중심지로 부르심이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오히려 타락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일상에서 우상숭배는 더 이상 숨겨진 죄가 아니었습니다. 우상 숭배가 너무도 정상화되고, 경제화되고, 제도화되었습니다. 그 결과 사마리아는 폐허가 되고(6–7절), 유다의 상처는 예루살렘 성문까지 이르게 됩니다(9절).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어떤 것들이 우리에게 삶의 목적을, 행복을, 그리고 힘을 공급하고 있을까요? 그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대신 할 수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떤 것들을 의지하고 살고 있을까요?이후 본문은 유다의 여러 성읍을 지나가는 하나의 장례 행렬처럼 이어집니다. 마지막에 남는 현실은 포로됨입니다(16절). 아직은 복음처럼 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다만 회개를 가로막는 거짓된 안전을 더 이상 보호하지 않으십니다.하나님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그의 백성이 예배를 왜곡하고 값싼 은혜에 안주할 때 침묵하지 않으십니다. 오래 참으시지만 결코 방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내려오실 때 산이 흔들리고 땅이 갈라집니다(2–4절). 이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임재로 산이 진동했던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출 19:18). 하나님은 영화로우시며, 그 영광의 무게는 어떤 피조물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7장 18절,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미가서가 드러내는 죄는 지식의 무지가 아니라 적극적인 반역입니다. 죄를 종교로 구조화 하고, 기독교 게토 문화를 형성하여, 성도로 하여금 안일한 삶을 누리도록 하는 백성에게 미가서는 외칩니다."성전"이 있으니, 우리가 수고하고 희생도 하였으니 하나님은 우리를 인정하실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에서 돌이키라 말씀하십니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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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3장
Send us Fan Mail창세기 1–3장은 성경 전체의 시작이자, 인간의 삶을 해석하는 가장 근본적인 기초를 제공합니다.창조주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1장),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셔서 복과 사명을 주셨으며(1:26–28), 안식으로 창조의 목적을 “하나님 안에서의 기쁨과 질서”로 완성하셨습니다(2:1–3). 그러나 3장에서 죄가 들어오며, 인간은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스스로 기준이 되려 하고, 그 결과 관계의 파열(하나님-인간, 인간-인간), 수치와 두려움, 저주와 죽음이 현실이 됩니다(3:1–19). 그럼에도 하나님은 심판 가운데서도 은혜를 비추시며, 여자의 후손을 통한 구원의 약속을 주시고(3:15), 죄인을 찾아오셔서 입히시고(3:21), 에덴에서의 추방조차 영원한 멸망이 아니라 구속의 역사로 인도하시는 “거룩한 자비”로 나타내십니다.창세기 1–3장우리의 정체성: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하나님은 사람을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지으셨고,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뒤 복을 주시며 땅을 다스리는 사명을 맡기셨습니다(1:26–28). 여기서 형상이란 겉 모습이 아니고 더 나아가 단순한 지적 능력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삼위일체라는 신비로운 공동체적 하나님을 대표하여 그의 선하신 통치를 드러내는 언약적 소명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존엄은 성취나 업적이 아닌 창조주와의 관계에서 옵니다. 또한 남자와 여자는 동등한 존귀함 속에서 함께 사명을 맡는 동역자입니다(1:27–28).세상: 우연이 아니라 ‘말씀’으로 세워진 질서창세기 1장은 반복적으로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대로 되니라”를 통해, 세계가 혼돈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의해 질서 있게 세워졌음을 선포합니다(1:3, 1:6–7 등). 그리고 하나님은 창조를 보시고 “좋았더라” 선언하십니다(1:4, 1:10, 1:31). 즉, 물질 세계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닙니다. 물질 세계는 본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창조입니다. 우리의 일상(노동, 관계, 문화)도 본래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선한 것입니다.죄: ‘열매’ 이전에 ‘하나님 불신’에서 시작된 반역3장에서 뱀의 유혹은 단순히 “규칙을 어기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만들고(“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3:1), 하나님의 선하심을 왜곡하며(3:4–5), 인간을 자기중심의 판단자로 세웁니다(“선악을 알게 하는” 3:5–6). 죄의 본질은 관계적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주인이 되려는 마음이 죄의 뿌리입니다. 그 결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납니다. 수치(3:7), 두려움(3:10), 회피와 자기정당화(3:12–13), 그리고 저주와 죽음(3:16–19)이 인간의 삶에 스며듭니다.은혜: 심판 속에 심어진 약속과 ‘입히심’창세기 3장은 단지 타락의 기록이 아니라, 복음의 씨앗이 처음 심기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뱀에게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시며, 그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3:15). 이는 성경 전체의 구속사적 흐름 (결국 그리스도께서 사탄을 꺾으시는 승리)를 예고하는 첫 약속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시고(3:9), 그들의 수치를 스스로 해결하게 두지 않으시며, 가죽옷을 지어 입히십니다(3:21). 죄의 현실을 덮는 은혜, 죄인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언약적 자비가 여기서 이미 드러납니다.나가는 말창세기는 “세상은 왜 이런가?”라는 질문에 가장 깊은 답을 줍니다.세상은 원래 하나님이 “좋다”고 선언하신 선한 창조이며, 인간은 형상으로 지음 받아 존귀하고 사명을 받은 존재입니다(1:26–31). 그러나 죄는 하나님을 불신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어, 삶 전체를 깨뜨리고 관계를 뒤틀며 죽음을 가져옵니다(3:1–19). 그럼에도 하나님은 죄인이 숨은 곳까지 찾아오셔서 질문하시고(3:9), 약속하시고(3:15), 입히시며(3:21), 구속의 길을 여십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3장은 “나의 정체성, 죄의 실체, 은혜의 시작”을 동시에 보여 주는 복음의 기초입니다.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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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와 우리의 삶
Send us Fan Mail주 안에서 문안드립니다필립 얀시라는 기독교 저자가 있습니다. 그가 저술한 책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고 그의 인사이트는 신앙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올해 76세인 그가 그동안 수년 간의 불륜의 관계를 고백하며 모든 활동을 멈추었습니다. 그런 그의 고백에 많은 크리스천은 실망을 했습니다한국 교회에서는 올해 77세이신 박영선 목사님께서 이미 은퇴 하신지 꽤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개척을 언급하시며 40억이라는 교회 헌금을 너무도 당연하게 요구하는 상황에 대하여 역시 많은 크리스천은 안타까움과 실망을 경험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호불호가 갈리기는 했지만 박 목사님의 사역과 저술하신 책들은 나름 좋은 평판을 받았기에 더욱 실망은 컸습니다.저도 이분들의 책을 통하여 많은 깨달음이 있었기에 필립 얀시와 박영선 목사님의 상황은 정말 마음이 아프고 안타깝기만 합니다. 약간은 두렵기도 합니다이런 뉴스를 접하면 우리 크리스천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창세기 9장에 노아에 대한 기록이 떠오릅니다"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노아는 어떤 사람입니까?창세기 6장을 보시면 이 세상이 온통 죄악으로 뒤덮였을 당시 노아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의로운 사람으로 기록이 됩니다5-7절,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8-9절,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오해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노아가 의로운 사람이라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노아는 의롭다 칭함을 얻은 것입니다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또 오해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노아의 삶에 믿음의 열매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무려 100년이 넘도록 같은 방향으로 믿음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게 방주를 완성하였습니다성경은 노아를 동시에 죄인이자 의로운 사람으로 표현합니다. 노아가 자신의 삶의 열매에 만취하듯 필립 얀시도 그리고 박영선 목사님도 당신들이 지은 '농사'의 열매에 만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상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이들을 보는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먼저 절대로 자만해서는 안됩니다. 마치 우리는 절대로 그러지 않을 것 처럼 그들을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한나 아렌트는 유대인 출신의 독일 정치철학자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습니다. 그녀는 1961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하며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악은 시뻘건 뿔과 흉칙한 이빨을 들어내지 않습니다.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을 통해서 악은 계속 존재합니다. 그녀의 사상은 오늘날까지도 현대 사회의 관료주의 속에서 개인이 어떻게 도덕적 책임과 주체적인 사고를 유지해야 하는지에 대해 깊은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그렇다고 무조건 감싸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종들이니 우리는 모른 척 하자"는 너무도 게으른 선택입니다회개해야 합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백성들이 다시 이방 여인들과 통혼하며 영적으로 타락했다는 소식을 듣고 옷을 찢고 머리털을 뜯으며 땅에 주저앉아 통곡을 한 에스라처럼 우리가 회개해야 합니다. 교회와 교회의 지도자를 비방하는 정도로 끝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교회의 죄를 하나님 앞에 자복하며 처절하게 회개해야 합니다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지고 성문들이 불탄 것에 대하여 책임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였나다" 회개한 느헤미야 처럼 말입니다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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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장 47절-12장 11절
Send us Fan Mail오늘 본문은 종교인들, 즉 바리새인들이 나사로의 부활을 산헤드린 공회에 알리자 공회원들이 긴급히 모이는 내용이 기록됩니다. 그들은 예수를 어떻게든 관리하고 처리해야만 했습니다. 예수가 가르치는 하나님 나라와 왕의 복음은 종교 기득권을 위협하는 진리였기 때문입니다. 그해 대제사장 가야바를 중심으로 공회는 일사분란하게 움직입니다. 이 상황에서 예수님은 그들을 맞대어 싸우지 않으시고 베다니에서 에브라임으로 은밀하게 옮기십니다.나사로가 부활한 사건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잘 보여주는 것이 그것보다 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 기득권은 위기감을 느낍니다. 어째서일까요? 그들의 관심사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자신들이 군림하는 이 세상의 작지만 확실한 그들의 왕국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왕국을 지키려면 로마제국에게 위협을 하면 안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 어느 제국과 견줄 수 없기 때문에 종교인들은 하나님 나라가 아닌 자신들만의 왕국을 선택합니다.대제사장은 '민족 전체'와 예수 '한 사람'을 대조하며 어느 쪽을 선택하는 게 현실적인지 질문합니다. 그들은 옳고 그름을 묻지 않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과연 그들이 아끼고 자랑스러워하는 성전에서의 종교생활이 가능할 지, 아니면 예수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성전과 그들이 익숙한 종교생활이 흔들릴지에 대하여만 집중되었습니다.산헤드린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공모하자, 예수님은 그 자리를 우선 피해 빈들 가까운 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머무십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도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때를 구하기 위한 순종입니다.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한 바리새인들과 종교 기득권과 맞싸워 이기는 것만이 길이 아닙니다.12장 1-11절에서는 유월절을 배경으로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예수님을 기록합니다."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그때 마리아가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습니다. 값비싼 향유를 발을 씻는 데 사용하는 것도 놀랍지만 여인의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는 것은 더욱 충격적입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것을 예수님은 허락하십니다.유월절과 예수님은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즉 애굽을 떠나기 위해 흠없는 어린 양의 피를 흘려야만 했던 것과 죄와 사망권세가 군림하는 이 어두운 세상에서 참된 자유를 얻기 위해서 메시아가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하는 것을 요한은 분명히 보여주고자 합니다. 그런데 굳이 마리아의 행동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마리아는 단순히 예수님의 발을 닦는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을 듣기 위해 '주의 발아래'에 있었던 마리아가 이제 십자가 죽음을 앞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런 마리아의 헌신은 가롯 유다의 모습과는 사뭇 대조를 이룹니다.가롯 유다는 가난한 자를 운운했지만, 성경은 실제로는 유다는 권력과 재물에 눈이 어두운 자로 설명합니다. 사랑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도 사랑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기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과 긍휼을 베푸는 것은 다르지 않다고 성경은 말합니다.바리새인들과 종교 기득권은 예수만 없애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사로도 죽이려고 합니다. 자신들이 익숙한 전통과 자랑스러워하는 성전을 지키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을 성경은 기록합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없애려고 합니다. 자신들이 구축한 질서를 따르지 않는 자들은 누구든 억압하며 살인도 도모하는 끔직한 자들을 기록합니다.'이 성전을 헐라' 말씀하시는 주님을 따르기를 원하십니까?우리에게 허락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이 먼저 가신 그 길을 따르려면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요?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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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장 38-4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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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장 1-2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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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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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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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2장 12-19절
Send us Fan Mail오늘 본문은 예수님과 무리가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마중을 나옵니다. 이렇게 예루살렘 밖에서 예수님과 함께하는 무리와 안에서 예수님을 마중 나온 무리가 합쳐집니다.12-15절,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무리의 환호성은 점점 커졌고 그 소리는 예루살렘 밖 기드론 골짜기를 타고 세상으로 퍼집니다. 성경의 예언을 이루는 장면이 펼쳐집니다.이 상황에도 예수님의 입성을 환호하는 무리와 탄식하는 무리로 나뉩니다. 같은 상황이지만 두 가지 다른 반응입니다. 나사로를 죽음에서 부활로 부르신 예수에 대한 무리의 관심은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합니다. 백성의 환호는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자취를 감춥니다. 백성이 원했던 것은 전쟁을 이기는 왕이자 세상 권세를 억누르는 왕이었는데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아는 힘도 없고 보잘것없는 어린양이었습니다. 혹시 오늘 우리도 바리새인들이나 백성과 같은 과오를 범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기대했던 그리스도가 아니라서 성경 말씀에 기록된 예수가 아니라 우리 멋대로, 마음대로 "주님"을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마태복음 7장 21-23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그리스도는 어떤 '왕'이셔야만 하는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선지자 스가랴가 예언한 메시아는 "고난당하는 메시아"입니다. 언약 백성 이스라엘을 회복하기 위하여 그들의 죄를 덮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같은 종교인들은 물론 언약 백성의 죄도 노출되어야 했고 메시아는 그들의 죄를 먼저 감당해야 했습니다.이사야 53장,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하나님의 말씀은 바리새인들과 같은 종교인들의 방해로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백성의 죄를 모르는 척 넘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삯은 사망인 만큼 죄값을 치르지 않고는 구원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죄를 지는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에 가셔야만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인애와 공의와 정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이 작게 시작할지라도 이 세상의 어떤 권력도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 나라가 우리 삶을 인도한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일지라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이 주는 편안함과 안정감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 나라에 걸맞는 인생이 축복의 삶이자 은혜를 누리는 삶입니다.예수님과 3년을 함께했던 제자들도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 나라를 잘 이해하지 못해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홀로 외롭게 지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마태복음 16장 24-26절,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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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2장 20-3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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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3장 1-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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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3장 18-38절
Send us Fan Mail요한은 계속해서 창조주 하나님의 때를 완성해 가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합니다. 마음이 아픈 것은 성경이 예언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중 하나가 예수님을 배반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그 말씀은 오늘 우리도 "혹시 나인가"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예수를 배반한 자는 세리나 무신론자가 아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대놓고 예수를 죽이려 하였지만 예수를 마음속으로 버린 자는 예수에게 아주 가까운 제자였습니다. 예수님은 가롯 유다의 발도 씻으셨습니다. 그 말씀은 오늘 우리도 자신의 믿음을 믿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미 시편 41:9에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고 예언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면 제자들은 가롯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십자가를 지는 길을 가지만 그 길은 절망의 길이 아니라 온 세상을 구원하는 용서의 길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될 것입니다.예수님으로부터 떡 조각을 받아 든 유다는 이제 예수를 팔아넘기기로 결심합니다. 성경은 이를 두고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갔다"고 표현합니다. 유다는 빛 되신 예수를 떠나 그날 밤 짙은 어둠으로 나섭니다. 무엇이 예수의 제자로 3년을 함께한 유다를 어둠의 사람으로 만들었을까요? 메시아에 대한 실망이었을까요? 재물에 대한 욕심이었을까요?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한 것으로 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끝까지 신앙을 저버리지 않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강건해서라기보다 우리 믿음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가 신실해서이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믿음을 믿지 말고 예수를 믿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가롯 유다가 예수를 팔러 나가는 상황에도 예수님은 "지금 자신이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자신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다"고 선포하십니다. 배신과 어둠이 이기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가 낙심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어리석음이나 사탄의 어두움도 흔들지 못합니다.유다가 어둠으로 돌아간 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십니다.34-35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언약 백성으로서 서로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구약 레위기 19장에도 이미 나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고 더하십니다. 즉, 예수님이 원하시는 사랑은 단순히 율법을 지키는 정도가 아닙니다. 선생이 제자의 발을 주인이 종의 발을 씻기는 그런 새로운 계명입니다.본문에서 예수님은 이제 잠시 후면 제자들과 더 이상 함께하지 못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내가 가는 곳에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라며 위로하십니다. 이에 베드로는 자신이 죽기를 각오하고 따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 마음은 이해하나 네가 결국 닭 울기 전 나를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가롯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는 것과 시몬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는 것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물론 유다는 어둠으로 가서 악의 축이 되는 결정을 합니다. 반면에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떳떳이 말하지 못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유다의 배반은 베드로의 부인보다는 훨씬 더 나쁜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도 잘한 것은 없습니다. 즉, 베드로가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베드로가 유다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서가 아니라서입니다. 베드로가 유다보다 더 많이 가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비하신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베드로가 자랑할 것은 없습니다.우리도 예수님 재림하시는 그날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신실한 주의 백성으로 끝까지 있는다고 할지라도 우리 입술은 고백할 것입니다. 오직 예수였다고. 오직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루를 살아도 산 것이었고 오직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신앙을 지켰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할렐루야!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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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9장
Send us Fan Mail요약다섯째와 여섯째 나팔이 울려 퍼지자, 심판은 더욱 강도 높게 진행됩니다. 이제 더 이상 자연 재해가 아니라, 초자연적이고 악한 영적 존재들이 등장합니다.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하늘에서 떨어진 별 하나가 무저갱 열쇠를 받습니다(1절). 그가 그것을 열자 연기가 솟구쳐 나오고, 그 안에서 무시무시한 황충들이 나타나 하나님의 인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다섯 달 동안 괴롭힙니다(3–5절). 이 황충들은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 임하는 영적 고통과 미혹을 상징합니다.여섯째 나팔이 불리자(13절), 유브라데 강가에 결박되어 있던 네 천사가 풀려나 인류의 삼분의 일을 죽입니다(15절). 불과 연기와 유황을 내뿜는 기병대가 등장하고, 그들은 죽음의 군대처럼 묘사됩니다. 이는 출애굽기의 재앙을 떠올리게 하며,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를 보여줍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재앙들에 죽지 아니하고 남은 사람들은 그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20–21절). 이것이 이 장의 가장 무서운 결론입니다. 심판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는 완악함이 인류를 덮고 있습니다.하나님은?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뿐 아니라 사탄과 타락한 천사들까지도 주권적으로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악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한계 안에서만 움직입니다. 무저갱의 열쇠는 ‘주는’ 방식으로 전달되고(1절), 황충은 사람을 죽이지는 못하고 괴롭히는 데에만 제한됩니다(5절). 여섯째 나팔에 등장하는 네 천사도 정확한 “년, 월, 일, 시”에 맞춰 풀려납니다(15절). 악은 무제한적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통치하시며,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의 목적을 이루어 가십니다.하나님은 또한 거룩하시고 오래 참으시는 분이십니다. 이 모든 재앙이 단번에 끝장을 내는 심판이 아니라, 회개를 촉구하는 경고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죄를 가만히 두지 않지만, 그 심판 속에서도 구원의 기회를 남겨두십니다.우리의 죄는?우리의 죄는 영적 눈멀음과 회개하지 않는 마음에서 드러납니다. 이 장에서 황충에게 괴롭힘을 당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을 이마에 받지 못한 자들”(4절)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분리된 상태에 있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우상과 거짓 종교, 자기중심적 삶 속에 갇혀 영적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더욱 큰 죄는 경고가 주어졌음에도 회개하지 않는 완악함입니다(20–21절). 사람들은 여전히 우상을 숭배하며, 악령을 따르고, 살인과 마술(φαρμακεία—주술적 행위), 음행, 도둑질을 그치지 않습니다. 이 죄들은 단순한 윤리도덕적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여 망가진 사회의 모습입니다. 이 세상은 선과 악을 뒤섞었으며,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은혜는?은혜는 제한 속에서 드러납니다. 황충은 사람을 죽이지 못하고, 고통의 시간은 다섯 달로 제한됩니다. 불과 유황을 내뿜는 심판도 전체 인류를 향하지 않고 삼분의 일만을 향합니다. 이 모든 제한은 단지 징벌이 아니라 회개의 기회를 주려는 하나님의 자비입니다.은혜는 또한 회개의 초청에서 빛납니다. 본문이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아직 회개할 수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도 멸망하기를 원하지 않으시며(벧후 3:9), 가장 깊은 반역 속에 있는 자에게도 돌아오라고 부르십니다.무엇보다 은혜는 십자가에서 가장 분명히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무저갱의 어둠과 사망의 권세를 스스로 짊어지셨고, 십자가에서 그 모든 심판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이 심판이 두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우리가 무엇에서 구원받았는지를 일깨우고,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들을 향해 복음을 전하라는 부르심이 됩니다.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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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8장
Send us Fan Mail일곱째 인이 떼어지자 하늘이 반 시간쯤 고요해집니다(1절). 이 침묵은 중단이 아니라, 거룩한 기대와 경외 속의 적극적인 기다림입니다. 성경의 침묵은 종종 하나님의 행동 직전에 나타나며(하박국 2:20; 스바냐 1:7), 본문은 심판 앞의 거룩한 정적을 기록합니다.이후, 한 천사가 금 향로를 가지고 나아와 성도들의 기도와 향을 함께 제단에 드립니다(3절). 이 기도는 하나님 앞에 올라가고, 그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향로에 제단의 불을 담아 땅에 던지자, 우레와 번개와 지진이 일어납니다(5절).하늘은 성도의 기도에 침묵하지 않습니다. 놀랍게도 성도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역사를 움직이실 때 사용하십니다.그리고 나팔 재앙이 기록됩니다.첫째 나팔부터 넷째 나팔까지 자연 질서의 일부가 3분의 1씩 파괴되며, 창조세계 전체가 요동합니다(7–12절). 그러나 이 재앙들은 아직 전면적 심판이 아니라 부분적인 경고입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자비입니다. 이렇게 회개를 향한 초대가 여전히 열려 있는 것이 기록됩니다. 그러나 아직 닫히지 않은 것이지 무작정 열려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시나요?하나님은?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실 뿐 아니라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또한 오래 참으십니다. 그리고 성도들로 하여금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동참케 하십니다. 우리가 느끼는 하늘의 침묵은 절대로 하나님의 무관심이 아닙니다. 침묵도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거룩합니다. 그리고 심판을 앞둔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표현합니다.하나님은 공의로우십니다. 나팔 재앙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악을 그대로 두지 않으신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러나 8장에서 언급되는 심판은 우선은 제한적입니다. 창조세계의 일부만 영향을 받으며, 그 말씀은 아직은 여전히 회개의 기회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악을 영원히 용납하지 않으십니다.우리의 죄는?우리의 죄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가볍게 여기고, 기도의 가치를 과소평가하는 데서 드러납니다. 그렇지 않나요?우리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때로 "허락"으로 오해합니다. 하나님이 당장 심판하지 않으시면, 괜찮다는 착각에 빠집니다. 그리고 그분의 침묵은 무관심이 아닙니다. 부분적인 심판은 회개를 향한 하나님의 기다리심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기회가 있을 때에 우리는 돌이켜야 합니다. 애통하고 자복하는 심령을 간구해야 합니다.또한, 우리는 기도에 침묵합니다. 하늘은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지만, 우리는 정작 하늘을 향한 입을 다물고 살아갑니다. 게시록 8장은 기도가 하늘의 거룩한 침묵을 깨는 힘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은혜는?은혜는 침묵 속에서도 빛납니다. 하늘의 침묵은 심판 전의 마지막으로 우리가 회개할 수 있는 자비의 시간입니다.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하박국 3:2)는 고백처럼, 하나님은 끝까지 돌아올 길을 열어두십니다.은혜는 기도 속에서도 빛납니다. 성도들의 기도는 무시되지 않습니다. 향처럼 하나님 앞에 올라가며, 그리스도의 중보 속에서 들려집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하늘의 불과 함께 역사에 응답됩니다.심판의 불도 제단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그 제단은 어린양이 희생된 곳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더 이상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심판은 이미 그리스도 위에 내렸고, 우리는 그 은혜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오늘 말씀을 통해 무엇을 깨달으셨나요? 그 깨달음은 우리 삶에서 어떤 변화를 가능하게 할까요?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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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7장
Send us Fan Mail인침 받은 자들과 흰옷 입은 무리 —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의 완전함서론: 요한계시록의 해석과 144,000에 대한 개혁주의적 시각요한계시록은 단순한 예언서가 아니라, 상징과 이미지로 가득한 묵시문학으로서 복음을 선포합니다. 개혁주의 전통, 특히 무천년주의(amillennialism)는 요한계시록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기보다, 그 상징 속에 담긴 구속사적 메시지를 조명합니다. 이는 G.K. Beale, Anthony Hoekema, James Boice와 같은 학자들의 통찰을 따릅니다.7장에 나오는 144,000은 문자적인 숫자나 민족적 유대인, 즉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 공동체 전체—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상징합니다. 12는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를 상징하는 숫자이며(12지파, 12사도), 12×12×1000은 하나님의 백성이 온전하게 인치심을 받았다는 상징입니다. 즉, 144,000은 하나님께서 구속하시고 보호하시는 '온전한 교회'를 나타냅니다.요약요한계시록 7장은 여섯 번째 인이 열린 후, 일곱 번째 인이 열리기 전의 장면을 보여줍니다. 심판의 바람이 아직 불기 전에, 하나님은 종들에게 인을 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신다는 상징적 설명입니다. 이어서, 요한은 흰 옷을 입은 셀 수 없는 무리를 보게 됩니다. 이들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 가운데서 나온 자들이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입니다.묵상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인치시며 끝까지 보호하십니다 (1–8절)“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3절).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기 전, 주께서는 먼저 자신의 백성에게 ‘인의 표’를 주십니다. 이는 실제적으로 눈에 보이는 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로 구별되었다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고난과 심판의 시대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언약 백성을 잊지 않으시고 지키십니다.어린 양의 피로 씻김 받은 모든 족속의 무리는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를 나타냅니다 (9–14절)요한이 본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 가운데서 온 자들입니다. 이들은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로, 고난을 통과한 후 어린 양의 피로 옷을 씻어 희게 된 자들입니다. 교회는 단지 유대인이라는 민족의 회복이 아니라, 세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는 복음의 보편성과 구속사의 전개를 잘 드러냅니다.하나님의 장막 아래서 흰옷 입은 자들은 영원한 위로와 생명수를 누립니다 (15–17절)“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하나님이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15절). 고난 속에서 믿음을 지킨 이들은 이제 더 이상 굶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으며, 해와 고통에서 벗어나 영원한 안식 속으로 인도됩니다. “어린 양이… 그들을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니라” (17절). 하나님의 위로는 고난 이후가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임하며, 결국 완전한 회복으로 나아갑니다.적용하나님은 오늘도 자신의 백성을 인치시며 보호하십니다. 우리는 세상의 환난 속에서 흔들릴 수 있지만, 우리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졌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의 고난과 박해는 예외가 아니라 예정된 과정이며, 그 가운데 하나님은 우리를 더욱 순결하게 하시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수로 인도하십니다.Support the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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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처음부터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처음 "그리스도인"이라 불린 배경에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핍박이 있었습니다. 종교인들은 스데반이라는 사람을 신의 이름으로 죽였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제자들은 어쩔 수 없이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열악한 상황에도 그들은 예수의 복음, 즉 왕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찌 보면 오히려 핍박 때문에 복음은 더 빨리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었습니다. 그 결과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기록합니다(사도행전 11장).그런데 요즘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가 예수 그리스도와 무관한 단어가 된 것 같습니다. 그 이유로는 '교회'의 타락이 있습니다. 최근 발표된 여론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75.4%가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결과에 놀라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어찌하여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되었을까요? 저는 가장 큰 원인으로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즉 '왕의 복음'이 왜곡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왕의 복음'이 왜곡되면서 '복음'은 천당행 티켓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울러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 아니라 천당행 티켓을 판매하는 자들, 즉 기득권이 되고 말았습니다.'그리스도인'이란 단어가 오염되었듯, 솔직히 '교회'라는 단어도 더 이상 복음 공동체를 뜻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교회"는 건물이나 재정 혹은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가스펠인(人) 사역은 역사상 처음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된 본질을 회복하고자 성경 말씀을 함께 찾아보는 흩어진 나그네, 즉 필그림을 위한 사역입니다. 요즘 이단들이 기승을 부림으로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란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제자들만을 뜻하지 않아 하나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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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bilee Christian Life Coa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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