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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묵상] [Everyday Morning Devotions], 이사야서

매일 아침 묵상을 통해 매일의 삶의 예배에서하나님과 동해하는 삶을 이뤄냅시다.Through morning devotions each day, let’s live our daily lives as worship and walk with God.Rev. Kim. (Th.M; Old Testament Theology)Full Gospel Somang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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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일서 4.1-6 영을 분별하는 법

    2. 내 삶에 적용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모든 영을 그대로 믿지 말고 분별하라고 말한다.우리는 누군가가 하나님, 성령, 계시를 말하면 그 말 자체에 쉽게 권위를 부여할 수 있다. 특별한 체험을 이야기하거나, 많은 사람이 따르거나, 신앙적인 표현을 사용한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무조건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라 분별하는 사람이다.첫 번째 기준은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다.중요한 것은 단순히 예수님의 이름을 말하는가가 아니라, 예수님을 누구라고 고백하는가이다.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신 참된 인간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하는지를 살펴야 한다.그래서 새로운 가르침을 들을 때 단순히 “좋은 말인가?”, “감동적인가?”, “유명한 사람이 말했는가?”를 먼저 볼 것이 아니라, 그 가르침이 예수님을 어떻게 증언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또한, 오늘 본문에서 시험받는 것은 말하는 사람만이 아니다.듣는 사람도 시험받는다.하나님께 속한 공동체와 개별 신자가 예수님에 대하여 신실하게 증언할 때, 내가 그 말에 어떻게 반응하는가도 중요하다.나는 진리를 듣기 원하는가 아니면 내가 듣고 싶은 말만 찾아다니고 있는가?하나님의 진리가 내 생각과 욕망을 지적할 때도 그것을 받아들이는가? 미혹은 거짓을 말하는 데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는 데서도 시작된다. 또한 많은 사람이 받아들인다는 사실 자체가 진리의 증거가 되는 것도 아니다.우리 역시 조회수, 영향력, 유명세, 사람들의 반응을 진리의 기준으로 삼기 쉽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듣느냐가 아니라 그 말이 누구에게 속한 것인가이다.그래서 분별의 기준은 인기보다 진리이고, 새로움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고백이다.그리고 분별은 단순히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알아내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진리가 무엇인지 알았다면 그것을 내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 진리가 내 생각과 판단과 선택을 바꾸도록 해야 한다.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는다.나는 영적인 말이라는 이유만으로 너무 쉽게 믿고 있지는 않은가?나는 진리를 찾는가, 아니면 내가 듣고 싶은 말을 찾는가?하나님께 속한 공동체와 신자들의 신실한 증언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나는 많은 사람이 좋아한다는 사실을 진리의 기준으로 삼고 있지는 않은가?그리고 분별한 진리를 실제로 내 삶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목소리를 무비판적으로 따라가는 사람이 아니다.성령님을 의지하여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분별하고, 예수님을 신실하게 증언하는 진리에 귀를 기울이며, 세상의 인기와 반응을 기준으로 삼지 않고, 분별한 진리를 자기 삶의 기준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다.진리의 영으로 분별하며 사는 삶은 어떤 것인가?How? 1) 내가 듣고 싶은 말만 골라 듣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하기 2) 새로운 신앙적 주장이나 가르침을 들을 때 바로 받아들이지 말고 그 중심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존재하는지 먼저 확인하기3) 인기보다 진리를 선택하고, 분별한 진리를 행동으로 옮기기 3)-1 조회수, 유명세를 위해 진리 버리지 않기[참고문헌] 불트만, 루돌프, and 마르틴 디벨리우스. 『요한서신/목회서신』 김득중 역. 국제성서주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3).앙커, 마르쿠스. "요한1서." In 취리히성경해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서울: 대한성서공회, 2021.Brown, Raymond E. The Community of the Beloved Disciple: The Life, Loves, and Hates of an Individual Church in New Testament Times. New York, Ramsey, Toronto: Paulist Press, 1979.Haas, C., M. de Jonge, and J.L. Swellengrebel. A Translator's Handbook on the Letters of John. London, New York, Stuttgart: United Bible Socities, 1972.Ignatius. The Epistle of Ignatius to the Ephesians.———. The Epistle of Ignatius to the Smyrnaeans.Law, Robert. The Tests of Life: A Study of the First Epistle of St. John. Edinburgh: T & T Clark, 1909.Lieu, Judith M. Ⅰ, Ⅱ, & Ⅲ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Louisville, London: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8.Malatesta, Edward. Interiority and Covenant. Analecta Biblica 69. Rome: Biblical Institute Press, 1978.Marshall, I. Howard. The Epistles of John.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Eerdmans Publishing Co., 1978.Smalley, S.S. 1, 2, 3 John. Word Biblical Commentary 51; Revised ed.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8.Stott, J.R.W. The Epistles of John: An Introduction and Commentary. Tyndale New Testament Commentaries 19.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64.Westcott, B.F. The Epistles of St. John: The Greek Text with Notes and Essays. 3rd ed.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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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일서 3.13-17 그리스도인의 Give and Take

    2. 내 삶에 적용우리는 보통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하는 대로 돌려주려고 한다.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는 나도 잘해주고, 나를 존중하는 사람은 나도 존중한다. 반대로 나를 무시하거나 상처 주는 사람에게는 나도 마음을 닫고, 때로는 그 사람이 잘못되기를 바라기도 한다.이것이 세상이 익숙하게 살아가는 Give and Take이다.그러나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그리스도인의 Give and Take는 다르다.세상이 우리를 미워한다고 해서 우리도 미움으로 돌려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내어주는 사람들이다.그래서 오늘 본문은 사랑을 단순한 감정의 문제로 다루지 않는다.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내가 생명에 속한 사람이라는 가시적인 표지이다. 반대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망 가운데 머물고 있으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을 본문은 심지어 살인하는 자라고 말한다.이에 따르면 우리는 미움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다.실제로 사람을 해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마음속의 미움은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다. 누군가를 계속 싫어하고, 판단하고, 그 사람이 잘되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나는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다.그러나 오늘 본문은 미움과 살인을 같은 방향 위에 놓는다. 둘 다 상대방의 생명을 긍정하기보다 부정하는 방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따라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이라면 미움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방향으로 살아가야 한다.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인가?요한은 우리의 감정이나 생각에서 사랑을 정의하지 않는다.“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랑한다고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셨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단순히 바라보며 감탄해야 할 사랑이 아니라 우리가 따라 살아야 할 사랑의 본보기이다.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쉽게 생각할 수 있다.“나도 정말 필요한 순간에는 누군가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을 거야.”그런데 17절은 그런 거창한 생각을 매우 현실적인 삶으로 끌어내린다.내 앞에 실제로 도움이 필요한 형제가 있다. 나는 그의 어려움을 보았고, 그것을 알 수 있는 충분한 시간도 있었다. 게다가 그를 도울 수 있는 재물도 가지고 있다.그런데도 마음을 닫는다.요한은 묻는다.“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결국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랑은어느 날 갑자기 등장하는 영웅적인 행동만을 말하지 않는다. 오늘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내 시간과 돈과 관심과 편안함을 내어주는 것에서 시작한다.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는다.나는 지금 누구에게 마음을 닫고 있는가?나는 누구의 어려움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외면하고 있는가?나는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 무엇을 내어주고 있는가?그리스도인의 Give and Take는 계산이 아니다.“저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해주었으니 나도 해준다”가 아니다.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듯이나는 먼저 하나님에게 사랑을 받았듯이 이제 우리가 받은 그 사랑을 하나님과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에게 내어주는 것이다.내가 받은 사랑을 나에게서 끝내지 않는 것.그것이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의 모습이고,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거하고 있다는 증거이다.그러므로 오늘 나는 세상이 나에게 무엇을 주었는지를 계산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무엇을 받았는지를 기억하며 살아가야 한다.하나님께 사랑을 받았으니 사랑을 주고,긍휼을 받았으니 긍휼을 베풀고,생명을 받았으니 다른 사람을 살리는 방향으로 내 것을 내어주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그것이 그리스도인의 Give and Take이다.그러한 삶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How? 1) 내가 미워하거나 마음을 닫고 있는 사람 한 명을 위해 기도하기 2) 이미 알고 있는 누군가의 필요를 외면하지 않고 내 것을 하나 내어주기3) 저녁에 오늘 하루 예수님께 받은 사랑과 은혜 한 가지를 기억하고 감사하기.[참고문헌] 불트만, 루돌프, and 마르틴 디벨리우스. 『요한서신/목회서신』 김득중 역. 국제성서주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3).앙커, 마르쿠스. "요한1서." In 취리히성경해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서울: 대한성서공회, 2021.Law, Robert. The Tests of Life: A Study of the First Epistle of St. John. Edinburgh: T & T Clark, 1909.Malatesta, Edward. Interiority and Covenant. Analecta Biblica 69. Rome: Biblical Institute Press, 1978.Schnackenburg, R. Die Johannesbriefe. Herders Theologischer Kommentar Zum Neuen Testament 13.3. Freiburg, Basel, Wien: Herder, 1984.Smalley, S.S. 1, 2, 3 John. Word Biblical Commentary 51; Revised ed.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8.Stott, J.R.W. The Epistles of John: An Introduction and Commentary. Tyndale New Testament Commentaries 19.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64.Westcott, B.F. The Epistles of St. John: The Greek Text with Notes and Essays. 3rd ed.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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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일서 3.7-12 하나님 소속의 표지

    2. 내 삶에 적용오늘 본문은 내가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지 분명하게 보여준다.표지는 내 삶이다.즉, 내 삶을 통해 내 소속이 드러나는 것이다.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사람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에 따라 행동한다.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은 하나님을 닮아 의를 행하고, 마귀에게 속한 사람은 마귀의 본성을 따라 죄를 행한다. 그래서 우리의 행동은 단순히 좋은 행동과 나쁜 행동을 구별하는 문제가 아니라, 내가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보여주는 표지가 된다.또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도 알려준다.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예수님은 마귀의 일, 즉 인간의 모든 죄를 없애 버리기 위해 오신 것이다. 이는 우리가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예수님에게 속한 자처럼 살아야지 예수님이 이미 멸하신 것을 붙들고 살면 안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모신 순간부터 우리는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존재이다(9절).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본성을 닮았고, 그 본성이 우리 안에 존재한다.하나님의 본성을 가진 우리가 어떻게 ‘죄’를 범할 수 있는가?그럴 수 없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은 죄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게 만드는 면허가 아니라, 오히려 죄를 버리고 하나님을 닮아 살아가도록 나를 이끄는 새로운 존재의 근거가 된다.내가 하나님께 속했다고 말한다면 내 삶에는 그 소속의 표지가 있어야 한다.그 표지는 의를 행하는 삶이고, 죄를 버리는 삶이며, 무엇보다 형제를 사랑하는 삶이다.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형제를 사랑하고 있는가?”가인처럼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충실하면서도,정작 내 형제를 사랑하는 일에는 실패하고 있지는 않은가?내가 옳다는 사실이 다른 사람을 미워해도 되는 이유가 될 수 없다. 내가 신앙적으로 무엇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사랑의 계명을 버린다면, 오늘 본문은 나에게 나의 소속을 다시 점검하라고 요구한다.‘나는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라는 질문 대한 대답은 단순히 내 입술의 고백에만 있지 않다.오늘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 죄를 어떻게 대하는지, 그리고 내 형제자매를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통해 드러난다.그러므로 하나님께 속한 사람답게 살아가야 한다.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고, 예수님께서 멸하러 오신 것을 다시 붙들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의로운 성품에 따라 의를 행해야 한다.그리고 무엇보다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내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사실이 오늘 나의 말과 행동, 그리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 속에서 실제로 드러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이러한 삶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How? 1)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죄 끊어내기 2) 매일 하루의 마지막에 스스로 점검하기 2)-1 “오늘 나의 말과 행동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소속을 드러냈는가?”를 생각하는 것3) 공동체를 위해 하루 5분간 기도하기[참고문헌] 불트만, 루돌프, and 마르틴 디벨리우스. 『요한서신/목회서신』 김득중 역. 국제성서주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3).Law, Robert. The Tests of Life: A Study of the First Epistle of St. John. Edinburgh: T & T Clark, 1909.Lieu, Judith M. Ⅰ, Ⅱ, & Ⅲ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Louisville, London: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8.Smalley, S.S. 1, 2, 3 John. Word Biblical Commentary 51; Revised ed.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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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일서 2.18-29 그의 안에 거하라

    2. 내 삶에 적용오늘 본문은 “지금은 마지막 때”라고 말하면서 시작한다. 그런데 저자가 마지막 때를 말하는 목적은 우리에게 종말의 날짜를 계산하게 하거나 두려움에 빠지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오히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붙들고 어디에 거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알려주기 위함이다.당시 공동체에는 이미 많은 적그리스도가 나타났다.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이 처음부터 교회 밖에 있던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한때 공동체 안에 있었지만 결국 떠났고, 무엇보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다”라는 결정적인 고백을 부인했다.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나에게 신앙생활을 오래 했는지, 교회 안에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만으로 안심할 수 없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도 처음부터 들은 복음을 붙들고 있으며,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그분 안에 계속 거하고 있는가이다.우리 역시 새로운 것에 쉽게 끌릴 수 있다. 처음 듣는 이야기, 특별해 보이는 가르침, 다른 사람은 모르는 것을 나만 알게 된 것 같은 지식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미혹에 맞서는 방법은 새로운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다.“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답은 처음부터 들은 복음에 머무는 것이다.예수님이 누구이신지, 그분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그리고 그분 안에서 우리가 어떤 생명을 받았는지를 계속 붙드는 것이다. 복음이 단지 내가 한때 들었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도 내 생각과 선택과 삶을 지배하도록 해야 한다.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기름 부음이 있다고 말한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진리와 거짓을 분별하도록 가르치신다.중요한 것은 말씀과 성령을 서로 떼어놓지 않는 것이다. 처음부터 들은 복음이 우리 안에 거해야 하고, 동시에 성령님의 가르치심에 의지해야 한다. 새로운 가르침을 좇기보다 이미 주어진 말씀 안에 머물면서 성령님의 도움으로 그 말씀을 더욱 바르게 깨닫고 살아가야 한다.요한은 반복해서 “거하라”고 말한다. 복음이 우리 안에 거해야 하고, 성령의 기름 부음이 우리 안에 거하며, 우리는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해야 한다.신앙은 한 번 믿었다는 과거의 사건에만 머물지 않는다. 오늘도 예수님 안에 머물고, 내일도 그분 안에 머물며, 끝까지 그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우리는 지금 어디에 거하고 있는가?내 마음속에 무엇이 가장 오래 머물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인가, 아니면 세상의 수많은 목소리인가?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처음부터 들은 복음과 성령님의 가르침을 기준으로 삼고 있는가, 아니면 새롭고 자극적인 이야기와 내 욕망을 따라가고 있는가?특히 오늘 본문에서 “거함”은 단순히 생각이나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마지막 29절에서는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에게 반드시 삶의 열매가 나타난다고 말한다.하나님과의 관계는 결국 삶을 통해 나타나야 한다. 예수님 안에 거한다면 그분의 진리가 내 선택에 영향을 주고, 그분의 의가 내 행동 속에서 점점 나타나야 한다.그리고 이렇게 예수님 안에 계속 거하는 사람에게는 마지막에 대한 두려움보다 담대함이 주어진다.본문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정확한 시기와 방법을 알려주지 않는다. 대신 그날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는 분명하게 알려준다.“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마지막 때를 준비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종말에 관한 더 많은 정보를 모으는 것이 아니다. 오늘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들은 복음을 붙들고, 성령님의 가르치심을 의지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그 고백에 걸맞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는다.나는 새로운 것에 끌리느라 처음부터 들은 복음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내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다른 목소리가 더 오래 머물고 있지는 않은가?나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진리와 거짓을 분별하고 있는가?내가 예수님 안에 거한다고 말하는 고백이 실제로 의를 행하는 삶으로 나타나고 있는가?우리는 마지막 때를 두려움으로 살아가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이 아니다.처음부터 들은 복음을 우리 안에 거하게 하고, 성령님의 가르치심을 의지하며, 아들과 아버지 안에 계속 머물도록 부름받았다.그러므로 새로운 것을 찾아 흔들리기보다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진리를 붙들어야 한다. 그리고 오늘도, 내일도,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그의 안에 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성령님과 함께 하나님 안에서 거하는 자의 삶은 어떤 삶인가?How? 1) 처음부터 들은 복음이 내 안에 계속 거하도록 하기 1)-1 예수님에 대한 첫 사랑 기억하기 2) “성령님 함께 해주세요”라고 기도하기3) 이 다짐과 기도를 삶에서 실천해보기 3)-1 남들에게 정직하기, 용서하기, 먼저 사랑하기, 도움이 필요한 사람 돕기[참고문헌] 불트만, 루돌프, and 마르틴 디벨리우스. 『요한서신/목회서신』 김득중 역. 국제성서주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3).앙커, 마르쿠스. "요한1서." In 취리히성경해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서울: 대한성서공회, 2021.Lieu, Judith M. Ⅰ, Ⅱ, & Ⅲ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Louisville, London: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8.Malatesta, Edward. Interiority and Covenant. Analecta Biblica 69. Rome: Biblical Institute Press, 1978.Smalley, S.S. 1, 2, 3 John. Word Biblical Commentary 51; Revised ed.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8.Stott, J.R.W. The Epistles of John: An Introduction and Commentary. Tyndale New Testament Commentaries 19.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64.Westcott, B.F. The Epistles of St. John: The Greek Text with Notes and Essays. 3rd ed.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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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일서 2.12-17 누가 영원한 자가 되는가

    2. 내 삶에 적용오늘 본문은 먼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확인시켜 준다.우리의 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함을 받았고, 우리는 아버지를 알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고 있고, 악한 자를 이긴 사람들이다.그리고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본문은 말한다.“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그러므로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명령은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이 아니다. 이미 하나님께 속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그 말씀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답게 무엇을 사랑하며 살아갈 것인지를 선택하라는 요청이다.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방식으로 조직되어 있고,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며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사랑하도록 만드는 ‘세상의 방식’을 말한다.오늘 본문은 그것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고 말한다.결국 문제는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보다 무엇을 욕망하고 있느냐에 있다.나는 더 많이 가지고 싶어 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보면서 나도 가져야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지나치게 민감해지고, 내가 가진 것과 내가 이룬 것을 보여주며 나의 가치를 증명하고 싶어 할 수도 있다.그리고 이러한 욕망을 단지 세상이 나쁘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쉽다.하지만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기억해야 하는 것은 이것이다.개혁은 내면에서 시작되어야 한다.세상을 바꾸려고 하기 전에 먼저 내 안을 보아야 한다. 세상의 가치가 왜 그렇게 쉽게 나를 흔드는지, 다른 사람의 성공을 보면 왜 마음이 불편해지는지, 더 많이 소유하고 인정받아야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느끼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살펴야 한다.문제는 단순히 내 주변에 세속적인 것이 많다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을 사랑하고 붙들고 싶어 하는 내 안의 욕망이 문제다.그래서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은 세상과 완전히 단절해서 살아가라는 말이 아니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세상의 욕망이 내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라는 것이다.특히 오늘 본문은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묻게 한다.나는 하나님보다 무엇을 더 많이 생각하고 있는가?무엇을 잃을까 봐 가장 두려워하는가?무엇을 얻으면 내 인생이 성공했다고 생각하는가?사람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인정받고 싶은가?이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이 내가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그리고 본문은 매우 분명한 이유를 제시한다.“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내가 지금 그렇게 가지고 싶어 하는 것도 지나간다. 사람들이 나를 향해 보내는 칭찬, 내가 자랑하고 싶어 하는 성취와 지위도 지나간다. 그것을 붙들기 위해 내 삶을 모두 사용한다면 결국 지나갈 것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된다.하지만 한 가지는 지나가지 않는다.“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영원한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다. 가장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은 사람도 아니다. 자신의 욕망을 가장 많이 채운 사람도 아니다.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영원히 거한다.그러므로 나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이 무엇을 주는지 계속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묻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도록 하며 그 말씀에 따라 선택하는 것이다.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는다.나는 지금 무엇을 가장 사랑하고 있는가?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내 선택을 움직이고 있지는 않은가?나는 지나갈 것을 붙들기 위해 영원한 것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그리고 오늘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행하지 않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이제 우리는 그 정체성에 맞게 살아가야 한다.그러한 삶을 어떻게 살 수 있을까?How? 1) 내 안의 욕망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매일 점검하기 1)-1 오늘 내가 가장 많이 원했던 것을 한 가지 적고 돈, 인정, 소유, 성공, 비교 중 나를 가장 쉽게 흔드는 욕망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2) 매일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는 것에서 끝내지 말고 한 가지 실행하기3) 내 안에서 개혁을 어떻게 이뤄낼지 고민하고 방법 찾기[참고문헌] 불트만, 루돌프, and 마르틴 디벨리우스. 『요한서신/목회서신』 김득중 역. 국제성서주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3).앙커, 마르쿠스. "요한1서." In 취리히성경해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서울: 대한성서공회, 2021.Law, Robert. The Tests of Life: A Study of the First Epistle of St. John. Edinburgh: T & T Clark, 1909.Lieu, Judith M. Ⅰ, Ⅱ, & Ⅲ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Louisville, London: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8.Malatesta, Edward. Interiority and Covenant. Analecta Biblica 69. Rome: Biblical Institute Press, 1978.Marshall, I. Howard. The Epistles of John.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Eerdmans Publishing Co., 1978.Smalley, S.S. 1, 2, 3 John. Word Biblical Commentary 51; Revised ed.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8.Stott, J.R.W. The Epistles of John: An Introduction and Commentary. Tyndale New Testament Commentaries 19.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64.Westcott, B.F. The Epistles of St. John: The Greek Text with Notes and Essays. 3rd ed.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50.

  6. 76

    요한일서 2.7-11 어디에 거할 것인가

    2. 내 삶에 적용오늘 본문은 내가 어디에 거하고 있는지를 묻는다. 빛 가운데 있는가, 아니면 어둠 가운데 있는가?우리는 우리가 빛 가운데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보다 실제로 형제자매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통해 내가 어디에 거하고 있는지가 드러난다고 말한다.“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결국 중요한 것은 나의 자기 확신이 아니라 삶이다. 내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다고 아무리 확신하더라도, 형제자매를 계속 미워하고 있다면 그 확신은 실제 삶을 통해 다시 검증되어야 한다.나 역시 누군가를 미워하면서 그 마음을 쉽게 정당화할 때가 있다. “저 사람이 먼저 잘못했으니까”, “저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나는 미워하는 게 아니라 그냥 가까이하지 않는 것뿐이야”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과의 관계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그러나 오늘 본문은 사랑과 미움을 단순한 인간관계의 문제로 보지 않는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빛 가운데 거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모습이고, 형제를 미워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의 모습이라고 말한다.그리고 사랑하라는 계명은 우리에게 새로운 말도 아니다.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들어왔다. 문제는 이 말씀을 몰라서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으면서도 살아내지 않는 데 있다.그러나 이 오래된 사랑의 계명은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나타났다. 예수님은 사랑을 말로만 가르치지 않으셨다. 자신의 삶과 죽음을 통해 사랑이 무엇인지를 실제로 보여주셨다. 그리고 그 사랑이 이제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삶 속에서도 계속해서 실현되어야 한다.따라서 나는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그 사랑이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말과 행동 속에서 실제로 나타나야 한다.특히 미움은 상대방에게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다. 본문은 어둠 가운데 계속 걷는 사람이 결국 갈 곳을 알지 못하게 되고,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한다고 말한다.처음에는 누군가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생긴 미움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미움을 계속 품고 정당화하다 보면 점점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될 수 있다. 미움이 내 판단을 흐리게 하고, 상대방의 모든 행동을 나쁘게 해석하게 만들며, 결국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까지 보지 못하게 할 수 있다.그래서 미움은 그냥 내버려 두어도 되는 감정이 아니다. 내가 계속 머물고 있으면 결국 나를 어둠 속으로 끌고 가는 힘이 될 수 있다.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는다.나는 지금 누구를 사랑하지 못하고 있는가?누군가를 미워하면서도 하나님과의 관계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사랑하라는 말씀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있지는 않은가?내가 품고 있는 미움이 나의 판단과 영적인 방향을 흐리게 하고 있지는 않은가?내가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빛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다.그리고 빛 가운데 살아간다는 것은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삶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사람을 계속 미워하는 삶에 머물 수는 없다.그러므로 나는 오늘 어디에 거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미움과 어둠 가운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빛 가운데 거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따라 내가 만나는 형제자매를 실제로 사랑하고, 미움을 붙들기보다 내려놓으며, 서로 사랑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내가 어디에 거하고 있는지는 결국 내가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지를 통해 드러난다.그 사랑을 드러내는 삶을 어떻게 살 수 있을까?How? 1) 내가 미워하는 사람에 대한 감정을 숨기지 말고 하나님께 고백하기 1)-1 “주님, 이 미움 속에 계속 거하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기 2) 형제들을 위해 중보기도하기3) 매일 밤 “오늘 나는 어디에 거했는가?”를 점검하기[참고문헌] 불트만, 루돌프, and 마르틴 디벨리우스. 『요한서신/목회서신』 김득중 역. 국제성서주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3).앙커, 마르쿠스. "요한1서." In 취리히성경해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서울: 대한성서공회, 2021.Bultmann, Rudolf. The Johannine Epistles: A Commentary on the Johannine Epistles. Translated by R. Philip O'Hara, Lane C. McGaughy, Robert W. Funk. Hermeneia.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3.Lieu, Judith M. Ⅰ, Ⅱ, & Ⅲ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Louisville, London: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8.Marshall, I. Howard. The Epistles of John.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Eerdmans Publishing Co., 1978.Smalley, S.S. 1, 2, 3 John. Word Biblical Commentary 51; Revised ed.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8.“πάλιν”. F.W. Danker. in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0): 752–53.

  7. 75

    요한일서 2.1-6 하나님을 아는 자의 책임

    2. 내 삶에 적용오늘 본문은 죄를 짓지 말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그런데 동시에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위해 대언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시다.이 두 가지는 서로 반대되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마음껏 죄를 지어도 된다는 허락이 아니다. 오히려 용서받은 사람이 다시 같은 죄에 머물지 않고새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이끄는 은혜이다.우리 역시 종종 하나님의 용서를 너무 가볍게 생각할 때가 있다. 잘못한 뒤에 “회개하면 되지”라고 생각하면서 같은 죄를 반복하거나, 하나님의 은혜를 내가 변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처럼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말하지 않는다. 죄를 범했을 때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동시에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분명히 말한다.하나님의 은혜는 죄 가운데 편안하게 머물게 하는 은혜가 아니라 죄에서 다시 일어서게 하는 은혜이다.그리고 3절부터 본문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우리는 하나님을 안다고 말한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예배한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내가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를 묻기보다 그 앎이 내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묻는다.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성경 지식이 많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해 설명할 수 있다는 것도 아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분리되지 않는다. 순종은 하나님을 알고 난 뒤 선택적으로 붙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본질적인 모습이다.그러므로 나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나는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는가, 아니면 실제로 하나님을 알고 있는가?두 가지는 같지 않을 수 있다. 말씀을 많이 알고 신앙적인 말을 잘하면서도 정작 내가 순종하기 싫어하는 말씀은 계속 외면할 수 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가족과 공동체 안에서는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오늘 본문은 그런 고백을 매우 강하게 평가한다.“거짓말하는 자요.”이 말은 내 신앙을 정직하게 돌아보게 한다. 내 입술의 고백과 실제 삶은 얼마나 일치하고 있는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면서 계속해서 순종을 미루고 있는 영역은 없는가?특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은 형제를 사랑하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하나님께 받은 사랑은 내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하나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내 삶 속에서 온전하게 드러난다.그리고 오늘 본문의 마지막은 더욱 구체적이다.“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결국 기준은 예수님이다.나는 중요한 선택을 할 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가?”를 기준으로 삼기 쉽다. 세상 사람들이 이 정도는 괜찮다고 하는지, 다른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사는지를 보며 내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내 삶의 기준을 다른 사람에게 두지 않는다.예수님이 어떻게 사셨는가를 보라고 한다.예수님은 어떻게 사람을 사랑하셨는가? 어떻게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으셨는가?어떻게 하나님께 순종하셨는가? 어떻게 자신을 내어주셨는가?예수님 안에 산다고 말한다면 그분의 삶이 점점 나의 삶에도 나타나야 한다.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는다.나는 하나님의 용서를 죄를 반복할 수 있는 핑계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은가?나는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면서 순종하기 싫은 말씀은 외면하고 있지 않은가?나의 신앙 고백과 실제 행동은 일치하고 있는가?그리고 내 삶의 중요한 선택에서 예수님의 삶을 기준으로 삼고 있는가?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지식을 하나 더 얻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에게는 그 앎에 따르는 책임이 있다.그 책임은 완벽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넘어졌을 때 대언자이자 화목제물이신 예수님을 의지하여 다시 일어나고,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나타내고, 조금씩 예수님이 걸으신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는 데서 멈추지 말아야 한다. 오늘 내가 내리는 선택과 행동을 통해 정말 하나님을 알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어떻게 주변에 내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안다고 보여줄 수 있을까?How? 1) 하나님의 용서를 같은 죄를 반복하는 핑계로 사용하지 않기 2) 알고 있지만 미루고 있는 말씀 한 가지에 실제로 순종하기3) 예수님을 내 삶의 본으로 삼기.[참고문헌] 불트만, 루돌프, and 마르틴 디벨리우스. 『요한서신/목회서신』 김득중 역. 국제성서주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3).앙커, 마르쿠스. "요한1서." In 취리히성경해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서울: 대한성서공회, 2021.Lieu, Judith M. Ⅰ, Ⅱ, & Ⅲ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Louisville, London: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8.Smalley, S.S. 1, 2, 3 John. Word Biblical Commentary 51; Revised ed.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8.

  8. 74

    요한일서 1.5-10 누가 거짓말쟁이인가

    2. 내 삶에 적용오늘 본문은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곧바로 내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묻는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단지 입으로 하는 고백만으로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통해 드러난다는 것이다.그리고 본문은 인간이란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임을 알려준다.나는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말하면서 어둠 가운데 걷고 있지는 않은가? 예배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읽으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하나님을 닫아버리고 내 뜻대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요한은 그런 삶을 단순한 부족함이라고 말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한다”고 말한다. 믿음과 삶을 따로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그렇다고 빛 가운데 걷는다는 것이 죄가 전혀 없는 완벽한 사람이 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오늘 본문에서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거짓말하는 사람이다. “나는 괜찮다”, “나는 별로 잘못한 것이 없다”, “이 정도는 죄가 아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우리도 내 잘못을 쉽게 인정하지 않을 때가 있다. 누군가를 상처 입히고도 상대방이 예민했다고 생각하고,잘못된 말을 하고도 상황이 그랬다고 합리화한다. 내 욕심과 교만을 보면서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그래도 나는 괜찮다”고 스스로를 변호한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서는 좋은 신앙인인 것처럼 행동할 수 있다.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죄가 없는 사람인 척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죄를 숨기지 않고 인정하며 고백하는 것이다.“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 죄가 있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가져갈 때,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신다라는 사실. 나는 완성된 사람이 아니라 계속해서 하나님의 용서와 정결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그러므로 빛 가운데 걷는 삶은 내 죄를 감추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드러내는 삶이다. 빛 앞에서는 감출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이미 나를 알고 계시며, 그분의 목적은 나를 정죄하는 데 있지 않고 예수님의 피로 계속해서 깨끗하게 하시는 데 있기 때문이다.또한 빛 가운데 걷는 삶은 공동체와의 사귐으로 나타난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면서 다른 신자들과의 관계는 계속 끊어버리고, 용서하지 않고, 혼자만의 신앙을 고집한다면 내 삶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과의 사귐은 실제 삶에서 다른 사람과의 사귐으로 나타나야 한다.오늘 본문은 나에게 묻는다.나는 다른 사람의 거짓을 찾기 전에 내 삶을 먼저 들여다보고 있는가?나는 죄를 인정하기보다 변명하고 합리화하고 있지는 않은가?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제 삶은 그 고백과 다르게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그리고 죄를 발견했을 때 숨기는가, 아니면 하나님께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는가?결국 “누가 거짓말쟁이인가”라는 질문은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 위한 질문이 아니다. 나의 고백과 삶이 일치하고 있는지를 살피기 위한 질문이다.그러므로 나는 죄 없는 사람처럼 살아가려고 애쓰기보다, 빛이신 하나님 앞에서 내 모습을 정직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죄가 보이면 변명하지 않고 고백하고, 예수님의 피가 나를 깨끗하게 하심을 의지하며 다시 빛 가운데 걸어가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사귐이 내 말에만 머물지 않고 공동체와의 사귐과 실제적인 삶의 변화로 드러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그러한 삶을 어떻게 살 수 있을까?How? 1) 오늘의 말과 행동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걸리는 부분을 하나 적고 회개하기 2) 내가 말하는 믿음과 실제 행동이 일치하는지 점검하기3) 내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있지 않은지 점검하기[참고문헌] 불트만, 루돌프, and 마르틴 디벨리우스. 『요한서신/목회서신』 김득중 역. 국제성서주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3).앙커, 마르쿠스. "요한1서." In 취리히성경해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서울: 대한성서공회, 2021.Lieu, Judith M. Ⅰ, Ⅱ, & Ⅲ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Louisville, London: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8.Smalley, S.S. 1, 2, 3 John. Word Biblical Commentary 51; Revised ed.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8.

  9. 73

    요한1서 1:1-4 사귐으로의 초대

    2. 내 삶에 적용오늘 본문의 저자는 자신이 보고 들은 예수님을 혼자 간직하지 않는다. 그 경험은 증언으로 이어지고, 그 증언은 다시 다른 사람에게 전해진다. 즉, 예수님을 참으로 경험했다면 그 생명은 나에게서 멈추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야 한다.우리 역시 말씀과 예배를 통해 위로받고, 기도 응답을 경험하고, 예수님으로 인해 삶이 변화되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 경험은 증언으로 이어지고 있는가? 오늘 본문은 경험이 증언으로, 증언이 다시 복음 전파로 이어져야 함을 보여준다.그런데 저자가 복음을 전하는 목적을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것으로 말하지 않습니다.“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오늘의 한마디가 “사귐으로의 초대”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사람을 논쟁에서 이기거나 나를 좋아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으로 초대하는 것이다.동시에 하나님과의 사귐은 개인적인 신앙으로 끝나지 않는다. 저자는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과의 사귐은 다른 신자들과 함께 복음의 일에 참여하고, 서로 연합하며,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삶으로 드러나야 한다.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사람과의 관계는 가볍게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예배와 기도는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형제자매를 돌보고 사랑하는 일에는 무관심하지 않은가? 요한1서가 강조하듯 참된 믿음과 사랑은 분리될 수 없다. 하나님이 내 안에 머무신다면 그 사귐은 반드시 삶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그리고 이 모든 사귐의 중심에는 예수님이 계신다. 아버지는 오직 아들을 통해 알 수 있으며, 하나님과의 참된 사귐 역시 예수님에 대한 참된 증언을 통해 가능하다. 그러므로 내가 원하는 하나님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야 한다.그 사귐의 결과가 4절의 “충만한 기쁨”이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의 사귐을 누리고, 그 생명을 다른 사람과 나누며,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할 때 기쁨이 충만해진다.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는다.나는 예수님을 통해 경험한 생명을 다른 사람에게 증언하고 있는가?사람들을 하나님과의 사귐으로 초대하고 있는가?하나님과의 사귐을 말하면서 형제자매를 향한 사랑은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받은 생명을 나만 누리고 끝내서는 안 된다. 내가 보고 듣고 경험한 예수님을 증언하고, 사람들을 복음 안의 사귐으로 초대하며, 형제자매를 실제로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귐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충만한 기쁨을 함께 누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그렇다면 이러한 사귐을 누리고 나누는 삶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How? 1) 내가 경험한 하나님을 혼자서라도 구체적으로 증언하기 2) 사람들을 하나님과의 사귐으로 초대하기3) 오늘 하루 공동체원을 위해 최소 5분간 기도하기[참고문헌] 불트만, 루돌프, and 마르틴 디벨리우스. 『요한서신/목회서신』 김득중 역. 국제성서주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3).앙커, 마르쿠스. "요한1서." In 취리히성경해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서울: 대한성서공회, 2021.Ehrman, Bart D. Forgery and Counterforgery: The Use of Literary Deceit in Early Christian Polemic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3.Lieu, Judith M. Ⅰ, Ⅱ, & Ⅲ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Louisville, London: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8.Marshall, I. Howard. The Epistles of John.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Eerdmans Publishing Co., 1978.Méndez, Hugo. The Epistles of John: Origins, Authorship, Purpos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6.Smalley, S.S. 1, 2, 3 John. Word Biblical Commentary 51; Revised ed. Grand Rapids, MI: Zondervan, 2008.

  10. 72

    요한복음 21.20-25 너는 나를 따르라

    2. 내 삶에 적용오늘 본문의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자신의 마지막이 어떠할 것인지 듣고 “나를 따르라”는 명령까지 받았다. 그런데 그는 곧바로 뒤를 돌아 사랑받는 제자를 바라보고는 예수님께 묻는다.“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베드로는 자신의 길을 들었지만 다른 사람의 길이 궁금했다. 어쩌면 자신의 길과 비교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죽음에 이르는 길을 가야 한다는데 저 친구는 어떻게 되는지, 나와 같은 길을 걷는지 아니면 더 편한 길을 걷게 되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매우 단호하게 말씀하신다.“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예수님은 요한에게 맡기실 길을 베드로에게 설명해 주지 않으셨다. 요한이 어떤 길을 걷든 그것은 베드로에게 맡겨진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베드로에게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사명이 주어졌는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길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었다.우리 역시 다른 사람의 길을 너무 자주 바라본다. 나는 이렇게 힘든데 왜 저 사람의 삶은 더 편해 보이는지, 나는 오랫동안 기다리는데 왜 저 사람은 쉽게 기회를 얻는지, 나는 이런 사명을 감당하는데 왜 저 사람에게는 다른 길이 주어졌는지를 비교한다. 다른 사람의 은사와 사역, 환경과 결과를 바라보다 보면 어느 순간 예수님보다 그 사람이 더 크게 보인다.그때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이 말씀은 다른 사람에게 무관심하라는 뜻이 아니다. 요한을 무시하라는 것도 아니다. 베드로와 사랑받는 제자는 모두 교회를 위해 필요한 사람들이었고, 둘 다 예수님께서 교회에 주신 선물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받은 은사와 사명은 같지 않았다.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똑같은 방식으로 사용하지 않으신다. 어떤 사람에게는 베드로와 같은 길을 맡기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사랑받는 제자와 같은 길을 맡기신다.중요한 것은 어떤 사명이 더 크고 좋은지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맡겨진 사명에 충실한 것이다.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받은 것을 부러워하면서 내가 받은 것을 작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다른 사람의 사역이 더 눈에 띈다고 해서 내 사명이 덜 중요한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길이 더 편해 보인다고 해서 하나님이 나를 덜 사랑하시는 것도 아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길이라면 그 길이 내가 걸어야 할 길이다.또한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둘러싸고 공동체 안에 잘못된 이야기가 퍼진다. 예수님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라고 말씀하셨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그 제자는 죽지 않는다”는 말로 바꾸어 받아들였다.이 모습 역시 나를 돌아보게 한다. 나도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듣기보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해석할 때가 있다. 다른 사람의 삶을 보면서 “하나님은 저 사람에게 이렇게 하셨으니 나에게도 반드시 이렇게 하실 것이다”라고 생각하거나, 내가 기대하는 결론을 먼저 정한 뒤 말씀을 그 결론에 맞추려고 할 수 있다.하지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요구하신 것은 다른 사람의 미래를 추측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었다. 나 역시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하실지를 지나치게 궁금해하기보다오늘 나에게 주신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그리고 요한복음은 마지막에 사랑받는 제자의 증언이 참되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예수님의 모든 일을 기록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알아가는 데 필요한 증언이 우리에게 주어졌다.그러므로 나는 새로운 무엇인가를 계속 찾아다니기보다 이미 주어진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더 깊이 알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 말씀을 읽을 때마다 보혜사 성령님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 동일한 성령님께서 기록된 증언을 통해 살아 계신 예수님을 더욱 깊이 알고 경험하도록 나를 이끌어 주시기 때문이다.오늘 본문은 나에게 묻는다.나는 지금 누구의 길을 바라보며 내 삶과 비교하고 있는가?다른 사람이 받은 은사와 기회와 환경 때문에 내가 받은 사명을 작게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예수님께서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는데도 다른 사람의 삶을 바라보느라 내게 맡겨진 길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내 생각대로 확대하거나 해석하기보다, 성령님의 도움을 구하며 그 말씀을 그대로 듣고 있는가?베드로에게는 베드로의 길이 있었고, 사랑받는 제자에게는 사랑받는 제자의 길이 있었다. 두 사람의 길은 달랐지만 둘 다 예수님께서 맡기신 길이었다.그러므로 나도 다른 사람의 길을 부러워하거나 비교하면서 살아갈 필요가 없다. 내가 물어야 할 것은 “왜 저 사람에게는 저런 길을 주셨습니까?”가 아니라“주님, 오늘 제가 따라야 할 길은 무엇입니까?”이다.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맡기는가는 주님의 일이다.내가 해야 할 일은 나에게 맡겨진 자리에서 주님을 바라보며 끝까지 따르는 것이다.“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이 말씀을 붙들고 다른 사람의 길이 아니라 나에게 맡겨진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그렇다면 다른 사람의 길을 바라보지 않고,나에게 맡겨진 길에서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 까?How? 1) 남과 비교하는 순간 “너는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 기억하기 1)-1 “주님이 오늘 나에게 맡기신 것은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것 2) 나에게 맡겨진 사명 한 가지를 분명히 하고 끝까지 충실하기3) 말씀을 내 기대에 맞추지 말고 성령님의 도움을 구하며 그대로 듣기 3)-1 성경을 읽기 전에 “성령님, 제가 듣고 싶은 말이 아니라 주님이 하신 말씀을 듣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기.[참고문헌] 바레트, 찰스 K. 『요한복음 (Ⅱ)』 국제성서주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5).비슬리-머리. 『요한복음』 이덕신 역. Word Biblical Commentary 36 (서울: 솔로몬, 2001).크루즈, 콜린 G. 『요한복음』 배용덕 역.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4 (서울: CLC, 2013).Michaels, J. Ramsey. The Gospel of John.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10.Thompson, Marianne Meye.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1 ed.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5.

  11. 71

    요한복음 21.15-19 베드로의 재소명

    2. 내 삶에 적용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3번 부인함으로 배신했던 베드로에게 3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다. 베드로의 실패를 모르는 척 넘어가신 것도 아니고, 그 실패 때문에 그를 버리신 것도 아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넘어졌던 바로 그 자리와 마주하게 하시면서 다시 그를 부르신다.그런데 예수님의 관심은 단순히 “베드로야, 이제 괜찮아”라고 위로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사랑 고백을 들으실 때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신다.이것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이 말로만 끝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베드로가 정말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돌보는 것으로 나타나야 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는 고백 뒤에는 “그렇다면 내가 맡기는 사람들을 돌보라”는 사명이 따라온다.나 역시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쉽게 고백한다. 찬양할 때도, 기도할 때도, 예배할 때도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내게 그 사랑이 실제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묻는다.내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이 내 곁에 맡겨 주신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가정의 가족, 교회의 지체, 함께 일하는 사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귀찮은 존재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는 무관심할 수 있다.특히 베드로에게 맡겨진 양들은 베드로의 양이 아니라 예수님의 양이었다. 예수님은 계속 “내 양”이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내가 누군가를 섬기고 돌볼 때 그 사람을 내 뜻대로 바꾸거나 소유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사람은 내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람이다. 나는 주인이 아니라 예수님께 속한 사람을 돌보는 목자일 뿐이다.또 하나 주목할 것은 첫 번째 질문에서 예수님이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더 이상 자신의 사랑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전의 베드로였다면 “다 버릴지라도 나는 아닙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패를 경험한 베드로는 이제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한다.나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할 때가 많다. “그래도 나는 저 사람보다 낫다”, “나는 저 사람보다 더 많이 섬긴다”, “나는 저 사람보다 믿음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내게 물으시는 것은 “네가 저 사람보다 낫느냐?”가 아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이다.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하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신앙이 아니다.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사랑 때문에 오늘 맡겨진 사람을 돌보고 있는지가 중요하다.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여기서도 끝나지 않는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인지 말씀하신 뒤 마지막으로 “나를 따르라”고 하신다.결국 예수님을 사랑하는 삶은 양을 돌보는 것을 넘어 자기 자신까지 내어놓으며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이다. 베드로는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양을 돌보는 목자가 되어야 했고, 결국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처럼 자신의 생명까지 내놓는 길을 걷게 된다.그래서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은 결코 가벼운 질문이 아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지 예수님을 좋아하고 감동받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내 시간과 편안함과 자존심을 내려놓고, 주님이 맡기신 사람을 돌보며, 때로는 내가 원하지 않는 길이라도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다.오늘 본문은 나에게 묻는다.나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그 사랑을 말로만 고백하고 있지는 않은가?예수님이 내게 맡기신 사람들을 실제로 돌보고 있는가?다른 사람과 나의 신앙을 비교하기보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정직하게 고백하고 있는가?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내 계획과 편안함을 내려놓아야 하는 길이라도 계속 따라갈 수 있는가?예수님은 실패했던 베드로를 다시 부르셨다. 그러나 단순히 과거의 실패를 지워 주시는 것으로 끝내지 않으셨다.“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내 양을 돌보라.” “그리고 나를 따르라.”나 역시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말로만 남겨 두어서는 안 된다. 내가 맡겨 받은 사람을 돌보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으며, 필요한 순간에는 나의 시간과 권리와 편안함까지 내어놓으면서 예수님을 따라가야 한다.그것이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을 삶으로 증명하는 길이다.그러한 삶을 어떻게 실천하며 살 수 있을까?How? 1)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오늘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는지를 점검하기 2) 예수님이 내게 맡기신 사람 한 명을 실제로 돌보기3)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내가 내려놓아야 할 것 하나를 실제로 내려놓기 3)-1 이번 주 내가 지키려고 붙잡고 있는 시간, 편안함, 자존심, 권리 가운데 한 가지를 정하기[참고문헌] 바레트, 찰스 K. 『요한복음 (Ⅱ)』 국제성서주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5).비슬리-머리. 『요한복음』 이덕신 역. Word Biblical Commentary 36 (서울: 솔로몬, 2001).크루즈, 콜린 G. 『요한복음』 배용덕 역.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4 (서울: CLC, 2013).폽케스, 엔노 에드자르트. "요한복음." In 취리히성경해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서울: 대한성서공회, 2021.Michaels, J. Ramsey. The Gospel of John.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10.Schnackenburg, R. 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 Translated by David Smith, G.A. Kon. Herder's Theologic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3 vols. New York, NY: Crossroad, 1987.Thompson, Marianne Meye.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1 ed.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5.

  12. 70

    요한복음 21.1-14 예수님 없이는 ( )

    2. 내 삶에 적용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일을 하고 있다.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원래 어부였고, 밤은 고기를 잡기에 가장 좋은 시간이었다.경험도 있었고, 기술도 있었고, 함께 일할 동료들도 있었다.그런데 밤새도록 애썼지만 결과는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였다.오늘의 한마디에 “예수님 없이는 ____”_하고 뒤를 비워 놨다.여기에 무엇이 들어갈지는 여러분도 다 아실 것이다.바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이다.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이 이미 말씀하신 것처럼,예수님을 떠나서는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이 말은 예수님이 없으면 직장생활도 못하고, 공부도 못하고,돈도 벌 수 없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제자들은 예수님 없이도 배를 띄웠고 그물을 던졌다.밤새 열심히 일할 수도 있었다.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맡기실 사명,곧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는 자신들의 경험과 능력만으로 만들어낼 수 없었다.나 역시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내 경험과 계획, 노력과 능력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그래서 일이 잘되지 않으면 더 많이 움직이고,더 많이 고민하고, 더 세게 밀어붙이려고 한다.그러나 오늘 본문은 내가 얼마나 열심히 하고 있는가보다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움직이고 있는가를 묻는다.제자들의 상황을 바꾼 것은 더 좋은 기술이나 더 많은 노력이 아니었다.“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는 예수님의 말씀이었다.그들은 이미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다.그럼에도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다시 그물을 던졌을 때들 수 없을 만큼 많은 물고기가 잡혔다.그러므로 내 삶에서도 중요한 것은내가 원하는 곳에 계속 그물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예수님께서 어디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시는지를 듣는 것이다.나는 열심히 살고 있지만 예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움직이고 있지는 않은가?결과가 없는데도 내 경험과 방법만 고집하고 있지는 않은가?예수님의 말씀이 내가 생각한 방법과 다를 때에도그 말씀에 순종하여 다시 그물을 던질 수 있는가?사랑받는 제자는 풍성하게 잡힌 물고기를 보고 “주님이시라”고 말한다.그는 예수님과 함께했던 경험을 통해예수님의 말씀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알고 있었다.그래서 가득 찬 그물을 보면서 자신이 잘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예수님을 알아보았다.나도 내 삶에 열매가 맺혔을 때그것을 통해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증명하려 해서는 안 된다.어떤 일이 잘되고, 사람이 변화되고, 사역에 열매가 생겼다면“내가 잘했다”가 아니라 “주님이시라”고 고백해야 한다.예수님의 도움으로 얻은 열매라면 그 열매의 주인도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고 말씀하신다.예수님께서 잡게 하신 것을 다시 예수님께 가져오라고 하신다.나에게 주어진 성취와 재능, 관계와 물질,그리고 사역의 결과 역시 마찬가지다.그것을 나의 성공으로 붙잡는 것이 아니라“주님이 주셨습니다”라고 고백하며 다시 예수님께 드려야 한다.그런데 놀라운 것은 제자들이 물고기를 가져오기 전에예수님께서 이미 숯불과 생선과 떡을 준비해 놓으셨다는 사실이다.제자들이 예수님을 위해 식사를 준비한 것이 아니라예수님께서 밤새 아무 것도 잡지 못한 제자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셨다.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명만 맡기시는 분이 아니라먼저 먹이시고 돌보시는 분이다.나도 때때로 예수님께 무엇인가를 보여드려야인정받고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열매를 많이 맺어야 하고, 사역을 잘해야 하고,좋은 결과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그러나 오늘 본문의 제자들은 빈손이었을 때부터 예수님의 초대를 받는다.예수님은 먼저 그들을 먹이시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신다.그러므로 사명은 예수님께 인정받기 위해 하는 일이 아니라이미 나를 먹이고 돌보시는 예수님의 은혜에 대한 응답이다.오늘 본문은 나에게 묻는다.나는 지금 예수님 없이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밤새 그물을 던지고 있지는 않은가?내 경험과 방법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더 신뢰하고 있는가?열매가 맺힐 때 그것을 내 성취로 붙잡는가,아니면 예수님께 가져가는가?그리고 내가 먼저 무엇인가를 이루어야 한다고 조급해하기보다나를 먼저 먹이고 채우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받고 있는가?예수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그러나 예수님과 함께하면 빈 그물이 가득 찰 수 있다.그러므로 나는 내 힘으로 결과를 만들어내려고 몸부림치기보다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따라 그물을 던져야 한다.그리고 열매가 맺혔을 때 “내가 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주님이시라”고 알아보고,주님께 받은 열매를 다시 주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열매를 주님께 드리는 삶이란 무엇인가?How? 1) 열매가 맺혔을 때 “내가 했다”가 아니라 “주님이시라”고 고백하기 2) 결과가 없더라도 말씀대로 던져야 할 그물이 있다면 다시 던지기.3) 주님이 주신 열매를 다시 주님을 위해 사용하기[참고문헌] 바레트, 찰스 K. 『요한복음 (Ⅱ)』 국제성서주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5).비슬리-머리. 『요한복음』 이덕신 역. Word Biblical Commentary 36 (서울: 솔로몬, 2001).크루즈, 콜린 G. 『요한복음』 배용덕 역.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4 (서울: CLC, 2013).Michaels, J. Ramsey. The Gospel of John.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10.Thompson, Marianne Meye.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1 ed.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5.

  13. 69

    요한복음 20.24-31 우리를 이미 축복하신 예수님

    2. 내 삶에 적용오늘 본문의 도마는 다른 제자들의 증언만으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직접 보고, 손으로 만져 확인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믿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도마를 버리거나 정죄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도마가 요구했던 자리까지 찾아오셔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그를 믿음으로 초대하셨다.그리고 도마는 결국 예수님을 향해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다. 가장 강하게 의심했던 사람이 요한복음에서 가장 강력한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예수님은 도마의 의심을 마지막으로 남겨두지 않으시고, 그를 믿음의 자리까지 이끌어 가셨다.이 모습은 나에게도 위로가 된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의심이 생길 수 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보이지 않고, 기도에 응답이 없는 것 같고, 정말 예수님이 살아 계시는지 흔들릴 때도 있다. 그러나 의심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예수님이 나를 포기하시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의심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다시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다.그러나 예수님은 도마의 고백에서 이야기를 끝내지 않으신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없었던 이후의 신자들, 곧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이다. 우리는 도마처럼 못 자국을 직접 볼 수도 없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볼 수도 없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런 우리를 이미 “복되다”고 선언하셨다.나는 때때로 “나도 예수님을 직접 봤으면 더 잘 믿었을 텐데”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직접 본 제자들만 특별한 사람들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보지 않고도 신뢰할 만한 증언을 통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복을 선언한다. 나는 부활 현장에 없었다는 이유로 불리한 신앙인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복되다고 선언하신 사람이다.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더 보아야 믿을 수 있는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증언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이다. 도마는 “내가 직접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 역시 하나님께 내가 원하는 방식의 증거를 요구할 때가 있다. “이 기도가 응답되면 믿겠습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면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겠습니다”라고 조건을 붙인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께 내가 원하는 증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신뢰하는 것이다.그래서 요한은 자신이 이 복음서를 기록한 이유를 분명히 말한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고, 그 믿음을 통해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다. 결국 요한복음을 읽는 목적은 예수님에 관한 지식을 많이 쌓는 데 있지 않다. 기록된 증언을 통해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으로 계속 믿으며 그분 안에서 생명을 누리는 데 있다.오늘 본문은 나에게 묻는다. 나는 여전히 하나님께 내가 원하는 증거를 보여 달라고 요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예수님께서 이미 주신 말씀과 증언을 충분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요한복음을 읽고 묵상하면서 예수님에 관한 지식만 쌓았는가, 아니면 나의 믿음이 더 견고해지고 생명이 더 풍성해졌는가?예수님은 우리에게 “직접 보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우리를 미리 바라보시며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축복하셨다. 그러므로 나는 부족한 증거를 찾아 헤매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신뢰할 만한 증언을 붙들고 살아 계신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며 그 이름 안에서 생명을 누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그 생명을 누리는 삶은 어떤 삶인가?How? 1) 내가 하나님께 요구하는 ‘믿음의 조건’ 내려놓기 2) 매일 아침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나의 신앙 하나님께 고백하기3) 불안·낙심·두려움이 올라올 때 상황을 반복해서 생각하기보다, 그날 붙든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읽기[참고문헌] 바레트, 찰스 K. 『요한복음 (Ⅱ)』 국제성서주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5).비슬리-머리. 『요한복음』 이덕신 역. Word Biblical Commentary 36 (서울: 솔로몬, 2001).크루즈, 콜린 G. 『요한복음』 배용덕 역.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4 (서울: CLC, 2013).Dodd, C.H. The Interpretation of the Fourth Gospel. Lond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53.Michaels, J. Ramsey. The Gospel of John.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10.Thompson, Marianne Meye.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1 ed.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5.

  14. 68

    요한복음 20.19-23 세상으로 나가게 하는 샬롬

    2. 내 삶에 적용오늘 본문의 제자들은 문을 닫고 숨어 있었다. 마리아에게 부활의 소식을 들었지만 여전히 유대인들이 두려웠다. 더구나 이들은 예수님이 붙잡히셨을 때 그를 버리고 도망갔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에게 나타나 가장 먼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신다.예수님은 실패한 제자들을 먼저 책망하지 않으셨다. “왜 나를 버렸느냐”, “왜 아직도 믿지 못하느냐”고 몰아붙이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에게 샬롬을 선언하신다.제자들의 실패보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더 컸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버렸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다.나 역시 실패하면 스스로 자격을 잃었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믿음대로 살지 못했거나, 두려움 때문에 물러섰거나, 해야 할 순종을 하지 못했을 때 “이제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지 않으시겠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실패한 제자들을 폐기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들에게 다시 사명을 맡기신다.“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예수님의 평강은 제자들이 안전한 방 안에 계속 머물도록 주어진 평강이 아니었다. 닫힌 문을 열고 다시 세상으로 나가게 하는 평강이었다. 두려움에서 회복시키신 이유는 다시 보내시기 위해서였다.이 말씀은 나에게도 묻는다. 나는 예수님께 받은 평강과 은혜를 내 마음의 위로로만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예배를 통해 위로받고, 말씀을 통해 힘을 얻으면서도 다시 내가 있어야 할 세상으로 나가는 것은 피하고 있지는 않은가? 예수님의 제자는 평강을 받은 사람인 동시에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다.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명만 주시고 알아서 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그들에게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사명은 인간의 결심이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대리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은 성령에게서 온다.나도 하나님의 일을 내 힘으로 해내려고 할 때가 많다. 잘 말해야 하고, 잘 설득해야 하고, 내가 사람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결과가 없으면 지치고 낙심한다. 그러나 내가 해야 할 일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의지하여 예수님을 드러내는 것이다. 사람의 죄를 용서하고 생명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제자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선포하는 사람이다.오늘 본문은 나에게 묻는다. 나는 실패 때문에 아직도 닫힌 문 뒤에 숨어 있지는 않은가? 예수님이 주시는 평강을 받고 다시 일어나고 있는가? 나는 내가 있는 가정과 직장과 교회와 관계 속에서 예수님께 보냄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사명을 내 힘으로 감당하려 하는가, 성령을 의지하고 있는가?부활하신 예수님은 두려움 속에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 찾아오셨다. 평강을 주셨고, 다시 보내셨으며, 성령을 주셨다. 그러므로 나도 실패에 갇혀 있을 필요가 없다. 예수님의 평강으로 다시 일어나고, 성령을 의지하여 내가 있는 자리로 나아가, 하나님께서 이루신 용서와 생명을 세상에 증언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예수님이 주신 샬롬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삶은 어떤 것인가?How? 1) 실패에 낙심하거나 숨지 말고, 예수님의 ‘샬롬’을 먼저 받아들이기 2) 내가 있는 자리를 ‘예수님이 나를 보내신 곳’으로 보기3) 상대를 설득하고 바꾸려 하기보다 내가 경험한 예수님의 용서와 생명을 정직하게 말하기 3)-1 내 생각과 가치관을 앞세우지 않고, 성령님을 의지하여 증언하는 것.[참고문헌] 비슬리-머리. 『요한복음』 이덕신 역. Word Biblical Commentary 36 (서울: 솔로몬, 2001).크루즈, 콜린 G. 『요한복음』 배용덕 역.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4 (서울: CLC, 2013).Michaels, J. Ramsey. The Gospel of John.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10.Thompson, Marianne Meye.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1 ed.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5.

  15. 67

    요한복음 20.11-18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다

    2. 내 삶에 적용오늘 본문의 마리아는 빈 무덤을 보고도 부활을 생각하지 못했다. 천사들을 보고, 심지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고 대화하면서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이미 마음속에 “누군가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갔다”는 결론이 있었기 때문이다. 눈앞에 새로운 현실이 나타나도 자신이 내린 결론 안에서만 상황을 해석하고 있었다.사실 우리의 모습도 이러한 마리아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너무 빨리 결론을 내릴 때가 있다. “이건 끝났다”, “방법이 없다”, “하나님이 나를 돕지 않으신다”, “저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한번 내린 결론에 갇히면 하나님이 다른 일을 하고 계셔도 보지 못할 수 있다.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바로 앞에 계셔도 자신의 생각 때문에 그분을 동산지기로 보았다.그런 마리아를 변화시킨 것은 더 많은 정보가 아니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라고 그녀의 이름을 부르신 순간이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이 내렸던 결론에서 벗어나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본다. 믿음은 내가 모든 상황을 정확하게 분석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시작된다.그래서 내 생각과 현실이 충돌할 때 나는 먼저 결론을 내리기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실패라고 부르는 것이 정말 끝인지, 내가 절망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새로운 일을 하고 계시지는 않은지 말씀 앞에서 다시 보아야 한다.그런데 예수님을 알아본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자신을 붙들고 머물라고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라”고 말씀하셨다.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은 개인적인 위로로 끝나지 않고 사명으로 이어진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붙잡고 자기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제자들에게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나 역시 예수님에게서 받은 은혜를 나만 가지고 있을 수 없다. 말씀을 통해 위로받았다면 누군가를 위로해야 하고, 소망을 얻었다면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그 소망을 전해야 한다. 부활 신앙은 “나는 위로받았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를 보았다”는 증언으로 이어져야 한다.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처음으로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시며,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지 죽음을 이기신 사건이 아니라 제자들의 관계와 신분까지 새롭게 만든다. 예수님의 아버지가 그들의 아버지가 되고, 그들은 예수님의 형제라 불린다. 그러므로 나는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내가 누구에게 속한 사람인지 기억해야 한다.오늘 본문은 나에게 묻는다. 나는 내 생각과 결론에 갇혀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상황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가? 그리고 내가 받은 은혜와 소망을 붙잡고 있기만 하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있는가?마리아는 울면서 무덤을 바라보던 사람에서 “내가 주를 보았다”고 증언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그 변화는 예수님께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실 때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나도 내 판단에 갇히기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으로 상황을 새롭게 바라보며, 내가 만난 부활의 주님을 삶과 말로 증언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그러한 사람이 어떻게 될 수 있을까?How? 1) 힘든 일이 생겼을 때 바로 “끝났다”, “안 된다”, “저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결론 내리지 않기 2) 매일 “나는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다”라고 정체성을 다시 붙잡기3) 내 삶에 있었던 하나님의 역사 증언하기[참고문헌] 바레트, 찰스 K. 『요한복음 (Ⅱ)』 국제성서주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5).비슬리-머리. 『요한복음』 이덕신 역. Word Biblical Commentary 36 (서울: 솔로몬, 2001).크루즈, 콜린 G. 『요한복음』 배용덕 역.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4 (서울: CLC, 2013).Michaels, J. Ramsey. The Gospel of John.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10.Thompson, Marianne Meye.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1 ed.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5.

  16. 66

    요한복음 19.28-37 하나님의 사역의 완성

    2. 내 삶에 적용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다. 이 말은 단순히 고통이 끝났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받은 사명을 끝까지 완성하셨다는 선언이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 완성되는 자리였다.나는 어떤 일을 시작하는 것에는 익숙하지만 끝까지 완성하는 데에는 약할 때가 많다. 처음에는 열심히 하다가 힘들어지면 포기하고, 기대한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방향을 바꾸고 싶어 한다. 특히 순종에 고통이 따르기 시작하면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그러나 예수님은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까지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다. “내가 목마르다”는 말씀조차 성경을 이루는 과정 가운데 있었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생명까지 스스로 내어주셨다. 예수님의 순종에는 중간에 멈추는 지점이 없었다. 아버지께서 맡기신 일을 끝까지 이루셨다.이 말씀은 나에게 묻는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셨는데 아직 끝내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미루고 있는 순종은 없는가? 시작했다가 힘들다는 이유로 내려놓은 것은 없는가? 사람을 사랑하는 일, 용서하는 일, 책임을 다하는 일,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서 나는 너무 쉽게 “이 정도면 됐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은가?또한 오늘 본문은 겉으로 실패처럼 보이는 상황 안에서도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죽으셨고 군인은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나 요한은 그 모든 사건을 성경의 성취로 바라본다. 뼈가 꺾이지 않은 것도, 옆구리가 찔린 것도 하나님의 계획 밖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그래서 나는 지금의 상황만 보고 하나님의 일을 실패라고 단정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기대와 다르고, 심지어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고 계실 수 있다. 십자가가 끝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완성되는 자리였던 것처럼 말이다.특히 예수님의 죽음에서는 피와 물이 흘러나온다.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이 나온다. 이것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하나님의 방식과 다르다. 나는 잃으면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죽음을 통해 생명을 주시고, 내려놓음을 통해 새로운 것을 시작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고 순종할 때 하나님이 만들어내실 생명을 기대해야 하며 순종으로 움직여야 한다.오늘 본문은 나에게 묻는다. 나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끝까지 순종하고 있는가? 눈앞의 고통과 실패만 보고 하나님의 일을 너무 빨리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내려놓아야 할 것을 붙잡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생명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실제로 끝까지 이루셨다. 그러므로 나도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감당해야 한다. 결과가 내 기대와 달라도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고, 내가 내려놓아야 할 것은 내려놓아야 한다. 나의 목표는 편안하게 끝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끝까지 순종하여 “다 이루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삶을 사는 것이다.끝까지 순종하는 삶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How? 1) 좋은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귀찮아서, 힘들어서 중단한 일 다시 시작하기 2) 힘들 때 중단하지 않도록 ‘끝까지 가는 장치’ 만들기 2)-1 혼자 다짐하면 쉽게 포기할 수 있으니, 다짐한 내용의 증인 1명 만들기(친구 등). 2)-2 매주 한 번 “시작했는가?”가 아니라 “끝까지 가고 있는가?”를 점검하기.3) 실패처럼 보이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계획을 믿고 다음 순종 실행하기[참고문헌] 바레트, 찰스 K. 『요한복음 (Ⅱ)』 국제성서주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5).비슬리-머리. 『요한복음』 이덕신 역. Word Biblical Commentary 36 (서울: 솔로몬, 2001).크루즈, 콜린 G. 『요한복음』 배용덕 역.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4 (서울: CLC, 2013).폽케스, 엔노 에드자르트. "요한복음." In 취리히성경해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서울: 대한성서공회, 2021.Dodd, C.H. Historical Tradition in the Fourth Gospel. Lond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3.Michaels, J. Ramsey. The Gospel of John.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10.Thompson, Marianne Meye.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1 ed.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5.

  17. 65

    요한복음 19.25-27 서로 사랑하라의 참 의미

    2. 내 삶에 적용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까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셨는지를 보여준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만을 바라보고 계시지 않았다. 십자가 곁에 있는 어머니를 보셨고, 사랑하는 제자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 제자는 예수님의 어머니를 자기 집에 모셨다.이 장면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서로 사랑하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사랑은 단순히 서로 좋아하고 좋은 말을 해주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연결된 사람을 내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그의 필요를 살피며, 때로는 그의 삶을 실제로 책임지는 것이다.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새로운 가족이 만들어진다. 혈연으로 연결되지 않은 두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어머니와 아들 관계가 된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는 단순히 같은 장소에서 예배드리는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다. 예수님 안에서 서로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도록 부름받은 공동체다.그런데 나는 교회 안의 사람들을 정말 가족처럼 대하고 있는가? 가족이라고 부르면서도 내가 편한 사람들하고만 관계 맺고 있지는 않은가? 누군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누가 알아서 도와주겠지”라고 지나치고 있지는 않은가? 함께 예배드리지만 그의 아픔과 필요에는 아무 관심 없이 살아간다면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아직 실제 삶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일 수 있다.특히 오늘 본문의 사랑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난다. 사랑하는 제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제로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 사랑에는 공간을 내어주는 일이 포함된다. 시간도 내어주어야 하고, 물질도 필요하며, 마음의 여유도 필요하다. 누군가를 가족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내 삶의 일부를 그 사람에게 내어준다는 뜻이다.그래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생각보다 무거운 명령이다. 서로에게 친절하라는 수준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서로에게 가족이 되어 주라는 요청이다. 외로운 사람에게 곁이 되어주고, 아픈 사람을 돌보고, 어려움에 있는 사람의 짐을 함께 지며, 공동체 안에서 혼자 버려지는 사람이 없게 하는 것이다.오늘 본문은 나에게 묻는다. 나는 교회 공동체의 사람들을 정말 가족으로 여기고 있는가? 지금 내 주변에 내가 돌아보아야 할 사람이 있는가? 말로는 사랑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시간과 물질과 마음을 내어주지 않고 있지는 않은가?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새로운 가족을 만드셨다. 그리고 그 가족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러므로 나는 사랑을 감정이나 말에만 머물게 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이 나에게 맡기신 사람을 보고, 그의 필요를 외면하지 않으며, 실제 삶의 일부를 내어주는 것. 그것이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살아내는 구체적인 모습이다.How? 1) 오늘 공동체 안에서 한 사람을 ‘가족처럼’ 돌보기 1)-1 공동체원이 여러분의 가족임을 기억하세요. 힘들다면 먼저 연락 ㄱㄱ 2) 내 시간과 공간을 누군가에게 내어주기3) 연락을 기다리기보다 먼저 하기[참고문헌] 바레트, 찰스 K. 『요한복음 (Ⅱ)』 국제성서주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5).비슬리-머리. 『요한복음』 이덕신 역. Word Biblical Commentary 36 (서울: 솔로몬, 2001).크루즈, 콜린 G. 『요한복음』 배용덕 역.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4 (서울: CLC, 2013).Michaels, J. Ramsey. The Gospel of John.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10.Thompson, Marianne Meye.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1 ed.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5.

  18. 64

    요한복음 19.17-22 소 뒷발에 쥐 잡은 격

    2. 내 삶에 적용오늘 본문의 빌라도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준 사람이다. 십자가 위에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를 붙인 것도 예수님을 왕으로 믿어서가 아니라 유대인들을 조롱하기 위해서였다.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빌라도가 조롱하려고 쓴 말이 진실을 말하게 된다. 예수님은 정말 왕이시다. 더구나 그 말은 히브리어와 라틴어와 헬라어로 기록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힌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왕권을 선포할 생각이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예수님이 왕이심을 널리 알리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정말 ‘소 뒷발에 쥐 잡은 격’이다.이 장면은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일하심보다 하나님이 훨씬 크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나는 종종 모든 상황이 좋아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일이 꼬이고, 누군가 나를 반대하고, 계획과 다른 결과가 나오면 하나님의 일이 방해받았다고 생각한다.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을 조롱하려는 빌라도의 행동마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증언하는 결과를 만든다. 그렇다고 빌라도의 악한 의도가 선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간의 잘못된 의도도 하나님의 진리를 무너뜨릴 수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죠.십자가 자체도 그렇다.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패배한 자리였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독자에게 십자가는 예수님의 왕권이 드러나는 자리다. 인간은 예수님을 없애려고 십자가에 달았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이 어떤 왕이신지가 드러난다.이 사실은 내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만났을 때 쉽게 절망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된다. 내 계획이 어그러졌다고 해서 하나님까지 실패하신 것은 아니다. 누군가의 악의로 어려움을 겪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이 멈춘 것도 아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실 수 있다.대제사장들의 모습도 나를 돌아보게 한다. 그들은 십자가 위에 적힌 글을 읽고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라”고 요구한다. 눈앞에 진실이 있는데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바꾸려 한다.나도 말씀을 그렇게 대할 수 있다. 말씀이 나를 불편하게 하면 말씀에 나를 맞추기보다 말씀을 내 생각에 맞추고 싶어 한다. 사랑하라, 용서하라, 내려놓으라, 정직하라는 말씀이 불편할 때 그것을 다른 뜻으로 돌리고 싶어 한다.오늘 본문은 나에게 묻는다. 나는 하나님이 내가 예상한 방식으로만 일하셔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을 너무 빨리 실패라고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이 내 생각과 충돌할 때 내가 말씀 앞에 서는가,아니면 말씀을 내 생각에 맞게 고치려고 하는가?빌라도의 조롱도, 대제사장들의 반대도 예수님이 왕이시라는 진실을 바꾸지 못했다. 그러므로 나는 눈앞의 상황만 보고 하나님의 일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일하실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우연히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예수님이 왕이심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그러한 삶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How? 1) 예상 밖의 상황에서도 하나님 신뢰하기 1)-1 그 상황조차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음을 인지하자 2) 말씀을 내 뜻에 맞게 수정하는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3)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왕권을 삶에서 드러내기 3)-1 식사기도 등[참고문헌] 바레트, 찰스 K. 『요한복음 (Ⅱ)』 국제성서주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5).브라운, 레이몬드 E. 『요한복음 Ⅱ: 영광의 책』 최흥진 역. 앵커바이블 (서울: CLC, 2019).비슬리-머리. 『요한복음』 이덕신 역. Word Biblical Commentary 36 (서울: 솔로몬, 2001).폽케스, 엔노 에드자르트. "요한복음." In 취리히성경해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서울: 대한성서공회, 2021.Bultmann, Rudolf. The Gospel of John: A Commentary. Translated by G.R. Beasley-Murray. Edited by R.W.N. Hoare, J.K. Riches. Philadelphia, PA: Westminster Press, 1971.Michaels, J. Ramsey. The Gospel of John.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10.

  19. 63

    요한복음 19.12-16 누가 나의 왕인가

    2. 내 삶에 적용 오늘 본문은 나에게 아주 단순하지만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누가 나의 왕인가?” 입으로 누구를 왕이라고 고백하는지가 아니라, 실제 삶에서 누구의 평가를 두려워하고 누구의 뜻을 따라 움직이는지를 묻는다.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고 그를 놓아주려고 했다. 그러나 “이 사람을 놓아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라는 말 앞에서 흔들렸다. 예수님이 무죄라는 사실보다 자신의 자리와 정치적 안전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결국 빌라도의 결정적인 왕은 진리가 아니라 카이사르였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판단한 것을 끝까지 지킬 만큼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나 역시 그렇다. 무엇이 옳은지 알고 있으면서도 사람들의 평가 때문에 다른 선택을 할 때가 있다. 직장에서 불이익을 받을까 봐, 공동체에서 미움받을까 봐, 관계가 불편해질까 봐, 내가 가진 자리와 평판을 잃을까 봐 예수님의 말씀보다 사람들의 시선을 먼저 생각한다. 입으로는 예수님이 왕이라고 말하지만, 내 결정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사람의 인정과 나의 안전이라면 실제 나의 왕은 다른 존재일 수 있다.대제사장들의 모습은 더욱 충격적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 결국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라고 선언한다. 예수님을 거부하려다가 자신들이 누구에게 속한 사람인지까지 포기한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이 보내신 왕을 버리고 카이사르를 왕으로 선택한다.예수님을 제거하는 것이 너무 중요해진 나머지, 자신들이 무엇을 고백하고 있는지조차 보지 못한다.나에게도 이런 순간이 있을 수 있다. 내가 너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혹은 너무 지키고 싶은 것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의 왕권을 밀어낼 수 있다. 돈을 지키기 위해 말씀을 타협하고, 관계를 지키기 위해 진실을 숨기고,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용서하지 않고, 내 계획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뒤로 미룰 수 있다. 그 순간 내가 실제로 왕으로 섬기는 것이 무엇인지 드러난다.특히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아이러니는 빌라도와 대제사장들이 서로 다른 이유로 결국 같은 곳에 서게 된다는 것이다. 빌라도는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카이사르를 두려워하고,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을 없애기 위해 카이사르를 왕이라고 고백한다. 서로 다른 욕망이지만 결국 둘 다 예수님보다 다른 것을 선택한다.그래서 신앙은 “예수님은 나의 왕입니다”라는 고백만으로 끝날 수 없다. 예수님이 나의 왕이라면 그 사실은 선택의 순간에 드러나야 한다. 내 자리와 예수님의 말씀이 충돌할 때, 사람들의 인정과 예수님께 대한 충성이 충돌할 때, 내가 원하는 결과와 예수님의 뜻이 충돌할 때 누구를 선택하는지가 내가 실제로 섬기는 왕을 보여준다.오늘 본문은 나에게 묻는다. 나는 무엇을 잃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가? 사람들의 인정인가, 돈인가, 자리인가, 관계인가, 자존심인가? 나에게 카이사르가 있는가?예수님은 빌라도의 재판석 앞에 서 계시지만, 역설적으로 진짜 왕은 예수님이시다. 그러므로 나는 세상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넘겨주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내 삶의 왕좌에는 카이사르도, 사람들의 평가도, 나의 성공도, 나 자신도 아니라 예수님이 계셔야 한다. “누가 나의 왕인가?” 이 질문 앞에서 내가 지키고 싶은 것보다 예수님을 선택하고, 내 뜻보다 왕이신 예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모시는 삶을 일상에서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How?  1) 오늘 내가 잃을까 봐 가장 두려워하는 것 하나를 적기  1)-1 그것이 나의 카이사르임을 인정하고 예수님으로 대체하기 2) 화가 나거나 손해를 볼 때 즉시 행동하지 말고 “지금 내가 무엇을 지키려고 하는가?”를 먼저 묻기  2)-1 우리는 자존심이 아닌 진리를 지켜야 함3) 사람의 평가와 예수님의 말씀이 충돌할 때 말씀 편에 서기 [참고문헌] 바레트, 찰스 K. 『요한복음 (Ⅱ)』 국제성서주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5).비슬리-머리. 『요한복음』 이덕신 역. Word Biblical Commentary 36 (서울: 솔로몬, 2001).크루즈, 콜린 G. 『요한복음』 배용덕 역.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4 (서울: CLC, 2013).폽케스, 엔노 에드자르트. "요한복음." In 취리히성경해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서울: 대한성서공회, 2021.Michaels, J. Ramsey. The Gospel of John.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10. Thompson, Marianne Meye.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1 ed.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5.

  20. 62

    요한복음 19.6-11 ‘권한’ 논쟁

    2. 내 삶에 적용오늘 본문을 보면 겉으로 가장 큰 권한을 가진 사람은 빌라도처럼 보인다. 예수님은 붙잡혀 있고,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 줄 수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내가 가진 권한을 모르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권한의 진짜 출처를 말씀하신다.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이 말씀은 내가 세상의 권한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사람의 권력, 돈, 지위, 평가가 내 삶을 결정하는 최종 권한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직장의 상사, 조직의 책임자, 나를 평가하는 사람, 내 앞길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이 너무 크게 보일 때도 있다. 그래서 사람의 눈치를 보고, 사람에게 인정받으려고 애쓰며, 사람에게 버림받는 것을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보다 더 두려워하기도 한다.그러나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으셨다. 빌라도에게 권한이 없어서가 아니다. 실제로 그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길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권한조차 궁극적으로는 “위에서” 허락된 제한된 권한이었다. 빌라도가 예수님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아버지의 주권 밖에 있지 않음을 알고 계셨다.이것은 나에게 큰 자유를 준다. 세상의 권한을 무시하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의 권한을 사람의 권한만큼만 두라는 것이다. 사람을 하나님 자리에 올려놓지 않는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영향을 줄 수는 있지만, 그 사람이 내 삶의 최종 주권자가 될 수는 없다. 내가 사람들의 평가와 결정 때문에 두려워질 때마다 “이 권한도 위에서 허락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반대로 나에게 어떤 권한이 주어졌을 때도 마찬가지다. 부모로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공동체에서 누군가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위치에 있다면 그것은 내 것이 아니다. 내가 사람을 마음대로 움직이고 판단하라고 받은 권한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권한이다. 빌라도의 문제는 자신에게 권한이 있다는 사실만 알았지, 그 권한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알지 못했다는 데 있다. 나 역시 내가 가진 지위와 영향력을 내 소유처럼 사용한다면 빌라도와 다르지 않을 수 있다.또한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책임을 없애지 않는다. 빌라도의 권한이 위에서 주어졌다고 해서 빌라도에게 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고 말씀하신다. 더 큰 죄가 있다는 것은 빌라도에게도 죄와 책임이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뜻이 결국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가지고 내가 한 잘못을 합리화할 수 없다.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겠지”라고 말하면서 내가 해야 할 옳은 선택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오늘 본문은 나에게 묻는다. 나는 누구의 권한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가? 사람의 평가와 결정이 하나님의 주권보다 더 크게 보이고 있지는 않은가? 반대로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권한을 내 권리처럼 사용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을 핑계 삼아 내가 져야 할 책임을 피하고 있지는 않은가?신앙은 세상의 권한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 모든 권한 위에 하나님의 권한이 있음을 믿는 것이다. 빌라도가 자신이 예수님을 판단한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예수님은 누가 진정한 권한의 주인인지 알고 계셨다. 그러므로 나도 사람을 하나님처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동시에 나에게 맡겨진 권한을 내 것처럼 휘두르지도 말아야 한다. 모든 권한은 위에서 주어진 것이다. 이것을 기억하며 사람 앞에서는 담대하고, 하나님 앞에서는 겸손하게 살아가야 한다.How? 1)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거짓말하거나 신앙적 기준을 포기하지 않기 2) 내게 맡겨진 권한을 ‘내 것’처럼 휘두르지 않기3) 하나님이 모든 일 위에 있음을 인지하기[참고문헌] 바레트, 찰스 K. 『요한복음 (Ⅱ)』 국제성서주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5).비슬리-머리. 『요한복음』 이덕신 역. Word Biblical Commentary 36 (서울: 솔로몬, 2001).크루즈, 콜린 G. 『요한복음』 배용덕 역.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4 (서울: CLC, 2013).Michaels, J. Ramsey. The Gospel of John.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10.Thompson, Marianne Meye.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1 ed.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5.

  21. 61

    요한복음 18.33-40 진리의 증언자, 예수

    2. 내 삶에 적용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어떤 왕이신지를 보여 준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이 생각하는 방식의 왕이 아니셨다.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나라가 세상과 아무 상관없는 나라라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의 왕권은 세상의 방식과 다른 기원, 다른 질서, 다른 방식으로 온다는 뜻이다.세상의 왕권은 힘으로 자신을 지키고, 폭력으로 상대를 제압하고, 정치적 계산으로 자기 자리를 보존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왕권은 그렇게 드러나지 않는다. 예수님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종들을 싸우게 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무력으로 왕권을 증명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시고, 십자가의 길을 통해 자신이 어떤 왕이신지를 드러내신다.이 말씀은 나에게 묻는다. 나는 어떤 왕을 원하는가? 나는 예수님을 왕이라고 고백하지만, 실제로는 세상의 방식으로 나를 지켜 주는 왕을 원하고 있지는 않은가?내 문제를 힘으로 해결해 주고, 내 편을 들어 주고, 내 억울함을 즉시 풀어 주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이겨 주는 왕을 기대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방식의 왕이 아니시다. 예수님은 진리의 증언자로 오셨고, 십자가를 통해 왕이심을 드러내셨다.예수님의 사명은 진리를 증언하는 것이다(37절). 그리고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는다”고 하신다. 그러므로 중요한 질문은 내가 진리를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가 아니다. 나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있는가? 나는 예수님이 드러내시는 진리 앞에 서 있는가? 아니면 빌라도처럼 “진리가 무엇이냐”고 말하면서도, 정작 예수님의 대답을 들을 생각은 없는가?를 돌아봐야 한다.오늘 본문은 내가 빌라도의 자리에 설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진리를 앞에 두고도 진리를 외면할 수 있다. 예수님이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예수님 편에 서지 않을 수 있다. 아무 죄를 찾지 못했다고 말하면서도, 실제 선택에서는 예수님을 내어 줄 수 있다. 그러므로 신앙은 단지 예수님이 옳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참된 신앙은 진리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진리 편에 서는 것이다.또한 무리는 예수님 대신 바라바를 선택했다. 바라바는 단순한 약자가 아니라 폭력적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인물에 가까웠다. 사람들은 진리를 증언하시는 예수님보다,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힘을 행사하는 바라바를 원했다. 이것도 나의 모습이다. 나는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더 빠르고 강하고 자극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한다. 십자가의 길보다 바라바의 방식을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그러나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예수님께 속한 사람도 세상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 없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은 힘으로 이기려 하지 않고, 진리 안에서 서려고 한다. 억울해도 거짓으로 자신을 지키지 않고, 손해가 있어도 예수님의 방식으로 반응하려 한다. 세상이 바라바를 선택해도, 제자는 진리의 증언자이신 예수님께 속해야 한다.오늘 본문은 나에게 다시 묻는다. 나는 진리에 속한 사람인가? 나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있는가? 나는 예수님이 왕이심을 고백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바라바의 방식을 선택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진리를 알면서도 빌라도처럼 정치적 계산과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타협하고 있지는 않은가?신앙은 예수님을 왕이라고 부르는 말에서 끝나지 않는다. 참된 신앙은 예수님의 왕권 방식에 나를 맞추는 삶이다. 예수님은 진리의 증언자로 오셨고, 십자가를 통해 왕이심을 드러내셨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진리를 피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의 방식으로 선택하며, 세상의 힘과 폭력과 타협이 아니라 진리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야 한다. 진리의 증언자이신 예수님이 나의 왕이시라면, 나의 삶도 그 진리 편에 서는 증언이 되어야 한다.진리를 증언하는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삶은 어떤 것인가?How? 1) 중요한 선택을 하기 전, 먼저 “예수님이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 보실까?”를 묻기 2) “다들 그렇게 하니까”라는 핑계를 버리기3) 상대를 이기기 위한 말 대신 진실하고 온유한 말을 선택하기[참고문헌] 바레트, 찰스 K. 『요한복음 (Ⅱ)』 국제성서주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5).비슬리-머리. 『요한복음』 이덕신 역. Word Biblical Commentary 36 (서울: 솔로몬, 2001).크루즈, 콜린 G. 『요한복음』 배용덕 역.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4 (서울: CLC, 2013).Dodd, C.H. Historical Tradition in the Fourth Gospel. Lond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3.Michaels, J. Ramsey. The Gospel of John.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10.Thompson, Marianne Meye.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1 ed.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5.

  22. 60

    요한복음 17.20-26 나를 향한 예수님의 기도

    2. 내 삶에 적용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누구를 위해 기도하셨는지를 보여 준다. 예수님은 눈앞에 있는 11제자만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셨다.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셨다(20절). 이것은 예수님의 기도가 그 시대 제자들에게만 머물지 않고, 제자들의 증언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될 모든 사람에게까지 확장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단지 과거 제자들을 위한 기도가 아니다. 이 기도는 나를 향한 예수님의 기도이다.이 사실은 큰 위로가 된다. 나는 내가 예수님을 붙들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보다 먼저 예수님이 나를 위해 기도하고 계셨다. 내가 예수님을 알기도 전에, 내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 예수님은 제자들의 증언을 통해 믿게 될 사람들 안에 나까지 포함시키셨다. 신앙은 내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고 애쓰는 것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아버지께 데려가시기 위해 기도하신 것에서 시작된다.예수님이 나를 위해 구하신 것은 단순히 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믿는 자들이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셨다. 이 하나 됨은 단순히 싸우지 않고 지내는 정도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께서 아버지 안에 계신 것처럼, 믿는 자들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 됨은 인간적인 친분이나 취향의 일치가 아니라, 예수님과 아버지에 대한 헌신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순종하는 삶이다.이 말씀은 나에게 묻는다. 나는 예수님의 기도에 맞게 살고 있는가? 예수님은 내가 공동체 안에서 하나 됨을 이루기를 기도하셨는데, 나는 오히려 내 감정과 자존심과 판단으로 공동체를 나누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붙들기보다, 나와 맞는 사람만 가까이하고 불편한 사람은 마음속에서 밀어내고 있지는 않은가?예수님은 믿는 자들의 하나 됨을 통해 세상이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을 믿고 알게 되기를 원하셨다. 세상은 보이지 않는 영적 연합 자체를 볼 수 없다. 그러나 세상은 믿는 자들이 서로에게 보이는 사랑을 볼 수 있다.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품고, 용서하고, 세워 주고, 끝까지 사랑하는 모습을 통해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하나 됨은 단지 교회 내부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세상을 향한 증언이다.이것은 무겁게 다가온다. 내가 공동체 안에서 사랑 없이 말하고 행동할 때, 그것은 단지 한 사람과의 관계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나누어 주신 영광, 곧 예수님을 드러내는 사명을 흐리게 할 수 있다. 반대로 내가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을 품고, 내 자존심보다 예수님의 명령을 앞세우고, 공동체의 하나 됨을 위해 나를 낮출 때,그 삶은 예수님이 아버지께로부터 오신 분이라는 증거가 된다.또한 예수님은 자신이 있는 곳에 믿는 자들도 함께 있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신앙은 예수님과 함께 있고 예수님의 영광을 보는 자리로 부름받은 삶이다.오늘 본문은 나에게 다시 묻는다. 나는 나를 향한 예수님의 기도를 기억하며 살고 있는가? 나는 예수님이 기도하신 하나 됨을 깨뜨리는 사람인가, 이루어 가는 사람인가? 내 삶은 세상으로 하여금 예수님이 아버지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보게 하는가, 아니면 오히려 예수님의 이름을 흐리게 하는가? 나는 아버지의 사랑이 내 안에 있고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신 사람답게 살아가고 있는가?신앙은 나 혼자 예수님을 잘 믿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고, 우리가 하나 되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나를 향한 예수님의 기도 앞에서 살아야 한다. 공동체 안에서 사랑을 선택하고, 하나 됨을 깨뜨리는 말과 태도를 내려놓고, 세상 속에서 예수님을 드러내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기도하셨다면, 나의 삶도 그 기도에 응답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예수님의 기도에 응답하는 삶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How? 1) 예수님이 나를 위해 직접 기도하신 사실을 기억하기 2) 공동체 안에서 하나 됨을 깨뜨리는 말과 태도 내려놓기 2)-1 맞는 말보다 부드러운 말하기3) 교회 밖 사람 앞에서도 예수님 믿는 사람답게 반응하기 3)-1 불평 대신 감사[참고문헌] 바레트, 찰스 K. 『요한복음 (Ⅱ)』 국제성서주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5).비슬리-머리. 『요한복음』 이덕신 역. Word Biblical Commentary 36 (서울: 솔로몬, 2001).크루즈, 콜린 G. 『요한복음』 배용덕 역.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4 (서울: CLC, 2013).폽케스, 엔노 에드자르트. "요한복음." In 취리히성경해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서울: 대한성서공회, 2021.Michaels, J. Ramsey. The Gospel of John.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10.Schnackenburg, R. 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 Translated by David Smith, G.A. Kon. Herder's Theologic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3 vols. New York, NY: Crossroad, 1987.Thompson, Marianne Meye.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1 ed.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5.

  23. 59

    요한복음 16.25-33 세상 별거 없노

    2. 내 삶에 적용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떠나심 앞에서 불안해하는 제자들에게 주신 마지막 위로의 말씀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떠나신다는 말을 들으며 근심했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그 떠나심 이후에 더 분명한 계시와 더 직접적인 기도의 길이 열릴 것을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시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직접 구하게 된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친히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요 16:25-27).이 말씀은 당시 제자들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큰 위로가 된다. 우리도 기도할 때 하나님이 멀리 계신 분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내 기도가 부족해서, 내 믿음이 약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자격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친히 제자들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믿는다면, 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다. 기도는 멀리 계신 하나님을 설득하는 일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께 나아가는 일이다.그러나 제자들의 모습은 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제자들은 “이제야 믿습니다”라고 고백했지만(요 16:30), 예수님은 곧 그들이 흩어지고 자신을 혼자 둘 것을 아셨다(요 16:32). 그들의 믿음에는 고백은 있었지만 위기를 버틸 만큼 충분하지 않았다. 나도 그렇다. 예배 자리에서는 믿는다고 말하지만, 막상 두려움과 손해와 위기가 오면 쉽게 흩어진다.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고백하지만, 현실 앞에서는 제각기 내 자리로 도망가고 싶어 한다.그럼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의 연약함을 아시고도 그들을 버리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그들이 자신을 혼자 둘 것을 아시면서도, 그들에게 평안을 주기 원하셨다. 그들이 나중에 자신들의 실패를 떠올리며 무너질 때,“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는 말씀으로 다시 일어서기를 원하셨다. 이것이 은혜이다. 예수님은 내가 강해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다. 내가 흩어질 것을 아시면서도 사랑하시고, 다시 붙드시며, 사명을 맡기신다.예수님 안에서 보면 “세상 별거 없노”라고 충분히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세상의 환난이 가볍다는 뜻이 아니다. 세상은 실제로 제자들을 흔들고, 두렵게 만들고, 흩어지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이 마지막 말을 가지고 우리를 정의하지 못한다. 예수님이 이미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이다. 세상은 나를 불안하게 할 수는 있어도, 예수님 안에서 주어진 평안을 빼앗을 수는 없다. 세상은 나를 흔들 수는 있어도, 예수님의 승리를 무효로 만들 수는 없다.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기도하고 있는가? 나는 내 믿음을 과신하고 있지는 않은가? 위기 앞에서 흩어질 만큼 연약한 나를 아시면서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나는 붙들고 있는가? 나는 세상의 환난을 예수님의 승리보다 더 크게 보고 있지는 않은가?신앙은 세상에 환난이 없다고 말하는 삶이 아니다. 세상에서 환난은 있다. 그러나 신앙은 그 환난보다 크신 예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는 삶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내 연약함을 숨기지 않고 아버지께 나아가야 한다. 흩어질 만큼 약한 믿음이라도 예수님께 다시 붙들려야 한다. 그리고 세상이 나를 흔들 때마다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셨다. 그리고 앞서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러므로 세상에서의 환난은 우리를 정의하는 마지막 말이 아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이 우리를 정의하는 마지막 말이다. 예수님 안에서 세상, 별거 없다.How? 1) 나의 모습이 어떻든 하나님은 ‘친히’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붙들고 기도하기 1)-1 기도하기 전, 일어나서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사랑하신다’고 고백하기 2) 내 믿음 과신하지 말고 나의 연약함 솔직하게 인정하며 회개하기3) 세상의 환난보다 예수님의 승리를 더욱 크게 보기 3)-1 불안이 올 때 세상이 마지막 말을 던지는가? 예수님이 던지는가? 생각하기[참고문헌] 바레트, 찰스 K. 『요한복음 (Ⅱ)』 국제성서주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5).비슬리-머리. 『요한복음』 이덕신 역. Word Biblical Commentary 36 (서울: 솔로몬, 2001).크루즈, 콜린 G. 『요한복음』 배용덕 역.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4 (서울: CLC, 2013).폽케스, 엔노 에드자르트. "요한복음." In 취리히성경해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서울: 대한성서공회, 2021.Michaels, J. Ramsey. The Gospel of John.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10.Thompson, Marianne Meye.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1 ed.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5.

  24. 58

    요한복음 16.7-15 책망 or 인도

    2. 내 삶에 적용오늘 본문은 성령님이 하시는 일을 두 방향으로 보여 준다. 하나는 세상을 책망하시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제자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일이다. 성령님은 세상의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한 잘못된 판단을 폭로하시고, 제자들이 예수님의 계시를 바르게 이해하도록 이끄신다. 그래서 성령님의 사역은 “책망 or 인도”로 정리할 수 있다여태까지 나온 성령님의 사역을 정리하면성령님은 새 가족을 창조하시고(3:3, 5), 참된 예배를 가능하게 하시며(4:24), 교회의 실천들, 곧 정결과 선포의 실천들에 생명을 불어넣어 그것들이 열매 맺게 하시고(6:63; 14:17), 육신이 되신 말씀으로서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신다(요 15:26). 그리고 성령님은 세상의 불신앙, 하나님이 예수님을 자신의 우편에 앉히신 것, 예수님이 심판의 주인이라는 것을 폭로하신다(요 16:8-11).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모든 계시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신다(요 14:26; 16:14).그러므로 성령님은 단지 내 마음을 편하게 해 주시는 분이 아니다. 성령님은 내가 무엇을 잘못 보고 있는지 드러내시는 분이다.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 선택의 자리에서는 예수님보다 내 생각과 감정과 세상의 기준을 더 신뢰할 때가 많다. 예수님의 길이 옳다고 말하면서도 손해를 보면 피하고, 십자가가 영광이라고 말하면서도 편안함과 인정받는 길을 더 좋아한다. 성령님은 바로 이런 내 안의 불신앙과 잘못된 판단을 책망하신다.그러나 성령님의 책망은 나를 무너뜨리기 위한 정죄가 아니다. 그것은 나를 거짓된 판단에서 깨우는 은혜이다. 내가 죄를 죄로 보지 못하고, 의를 의로 보지 못하고, 심판을 심판으로 보지 못할 때, 성령님은 내 눈을 열어 주신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책망 앞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변명하거나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난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이다.또한 성령님은 나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여기서 진리는 내가 알고 싶은 모든 정보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드러내신 계시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지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떠나심의 의미를 처음부터 온전히 감당하지 못했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말씀을 들어도 다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하면서도 현실 앞에서는 흔들릴 때가 많다. 그러나 성령님은 그런 나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예수님의 것을 가지고 알게 하신다.성령님의 인도는 결국 예수님을 더 깊이 알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왜 실패가 아니라 영광인지, 예수님의 떠나심이 왜 상실이 아니라 유익인지, 예수님의 길이 왜 참된 길인지 깨닫게 하신다. 그래서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자기 뜻을 더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뜻을 더 바르게 이해하고 따르는 사람이 된다.이러한 성령의 일을 인식하려면 성령을 가져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신실하게 그에게 매달리고 그를 따를 때, 그들의 공동체적 실천과 선포는 성령의 임재를 증언한다. 성령님을 받은 사람은 혼자 감동받고 끝나지 않는다. 그의 삶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실천이 나타나고, 그의 입술에는 예수님을 증언하는 선포가 나타난다.오늘 본문은 나에게 묻는다. 나는 성령님의 책망 앞에서 회개하는가, 아니면 방어하는가? 나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예수님의 진리 가운데로 들어가고 있는가? 내 삶과 공동체의 실천과 선포는 성령님의 임재를 증언하고 있는가?신앙은 성령님을 내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삼는 것이 아니다. 참된 신앙은 성령님께 책망받고, 성령님께 인도받는 삶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성령님의 책망을 피하지 말고, 성령님의 인도를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성령님의 책망 앞에서 돌이키고, 성령님의 인도하심 안에서 예수님을 더 깊이 알고 드러내는 제자로 살아가야 한다.그러한 제자도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How? 1) 양심을 통해 말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무시하지 않기 2) 성령님이 책망하실 때 분노가 아닌 회개로 반응하기3) 나의 모든 행동이 예수님을 드러낸다는 것을 기억하기[참고문헌] 비슬리-머리. 『요한복음』 이덕신 역. Word Biblical Commentary 36 (서울: 솔로몬, 2001).크루즈, 콜린 G. 『요한복음』 배용덕 역.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4 (서울: CLC, 2013).폽케스, 엔노 에드자르트. "요한복음." In 취리히성경해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서울: 대한성서공회, 2021.Michaels, J. Ramsey. The Gospel of John.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10.Thompson, Marianne Meye.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1 ed.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5.“ἐλέγχω”. Gerhard Kittel. in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Geoffrey W. Bromiley (Grand Rapids, MI: Eerdmans Publishing, 1964): 47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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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15.22-27 예수님을 증언하는 성령 그리고 우리

    2. 내 삶에 적용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예수님의 말씀과 일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계시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 예수님은 이미 말씀하셨고, 이미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셨다. 그러므로 나는 더 이상 “몰랐다”고 핑계할 수 없다. 문제는 말씀을 몰라서가 아니라, 말씀 앞에서 내 어둠을 내려놓기 싫어하는 데 있다.예수님의 말씀은 내 죄를 드러낸다. 그러나 그 드러남은 나를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둠에서 나오게 하기 위한 은혜이다. 그런데 나는 말씀 앞에서 회개하기보다 불편해하고, 피하고, 합리화할 때가 많다. 예수님의 말씀이 내 욕망과 교만과 불순종을 건드릴 때, 나는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다시 어둠 속으로 숨으려 하는가?예수님을 거부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 예수님 안에서 아버지가 드러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막연히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으로 드러나야 한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피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도 충돌한다.또한 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증언하는 삶으로 나를 부른다. 세상은 예수님을 불편해하고, 때로는 이유 없이 미워한다. 그래서 나도 예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일을 부담스러워한다. 사람들이 불편해할까 봐, 나를 이상하게 볼까 봐, 관계가 어색해질까 봐 예수님의 이름을 숨기고 싶을 때가 있다.그러나 예수님을 증언하는 일은 내 힘과 말솜씨로 예수님을 증명하는 일이 아니다. 진리의 성령께서 예수님을 증언하시고, 나는 그 증언에 내 삶과 입술을 내어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두려움 때문에 침묵하지 말아야 한다. 성령님께서 내 삶과 입술을 통해 예수님을 증언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오늘 본문은 나에게 묻는다. 나는 말씀 앞에서 핑계하고 있는가, 순종하고 있는가? 나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끄러워하고 있는가, 증언하고 있는가? 나는 세상이 불편해할까 봐 예수님을 숨기고 있지는 않은가?신앙은 예수님에 대해 많이 아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참된 신앙은 말씀 앞에서 내 죄를 숨기지 않고, 진리의 성령 안에서 예수님을 증언하는 삶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말씀 앞에서 핑계를 내려놓고, 내 삶과 입술을 성령님께 내어 드려야 한다. 세상이 불편해해도, 예수님을 증언하는 성령 안에서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한다.성령님과 함께하는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삶의 방향은 무엇인가?How? 1) 예수님이 나를 정죄한다고 생각하지 말기 1)-1 예수님의 말과 사역은 정죄가 아닌 우리로 하여금 회개로 하나님께 돌아올 기회를 제공하는 것임 2) 예수님의 말씀이 이미 내게 분명히 보여 준 부분이 무엇인지 돌아보기 ex) 용서해야 할 사람, 끊어야 할 습관, 정직하게 말해야 할 일, 회복해야 할 예배3) 성령님이 내 입을 통해 증언하는 예수님을 말로만 증언하지 않고 삶으로도 증언하기 ex) 불평대신 감사[참고문헌] 비슬리-머리. 『요한복음』 이덕신 역. Word Biblical Commentary 36 (서울: 솔로몬, 2001).크루즈, 콜린 G. 『요한복음』 배용덕 역.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4 (서울: CLC, 2013).폽케스, 엔노 에드자르트. "요한복음." In 취리히성경해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서울: 대한성서공회, 2021.Michaels, J. Ramsey. The Gospel of John.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10.Thompson, Marianne Meye.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1 ed.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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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15.18-21 Like Father Like Son (부전자전)

    2. 내 삶에 적용오늘 본문은 예수님께 속한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것을 말씀한다. 예수님은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고 하신다. 제자들이 미움받는 이유는 단순히 성격이 이상하거나 세상과 어울리지 못해서가 아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속한 자들이며, 예수님의 이름을 대표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세상은 자기에게 속한 자를 사랑한다. 그러나 제자들은 더 이상 세상의 소속과 가치관 안에 머무는 사람들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세상에서 택하셨고, 그들의 정체성과 충성의 대상은 예수님께로 옮겨졌다. 그러므로 세상이 제자들을 낯설어하고 미워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한마디처럼 이것은 “Like Father Like Son”, 곧 부전자전의 삶이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속하셨고, 아버지를 드러내셨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께 속했고, 예수님의 이름을 대표한다. 아들이 아버지를 닮아 아버지의 일을 행하셨듯이, 제자는 예수님을 닮아 예수님의 길을 걷는다.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했다면, 예수님께 속한 제자들도 같은 미움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그러나 이 말씀은 제자들을 겁주기 위한 말이 아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떠난 뒤 세상에 남아 있을 제자들에게 위로와 확신을 주신다. 세상의 미움은 제자들이 실패했다는 증거가 아니라, 그들이 예수님께 속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물론 모든 비난이 복음 때문은 아니다. 나의 교만, 무례함, 지혜 없음 때문에 받는 비난을 박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예수님의 뜻을 따르기 때문에 미움을 받는다면, 그것은 내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다는 표시이다.예수님은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는 말씀을 기억하라고 하신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박해했다면 제자들도 박해할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보다 더 편한 길, 더 좋은 대우, 더 안전한 신앙을 기대할 수 없다. 예수님이 세상으로부터 거절당하셨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도 세상의 인정을 최종 목표로 삼을 수 없다. 신앙은 세상에게 사랑받기 위해 예수님을 적당히 숨기는 삶이 아니라, 예수님께 속한 자로 분명히 서는 삶이다.그러나 예수님은 박해만 말씀하지 않으신다.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고 하신다. 세상은 제자들을 미워하고 박해하겠지만, 모든 사람이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지킨 사람들이 있었듯이, 제자들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의 말씀을 지킬 사람들도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명은 두 가지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어떤 사람들은 박해하고, 어떤 사람들은 말씀을 지킨다.제자는 박해 때문에 증언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오늘 본문은 세상의 미움의 근본 이유도 밝혀 준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제자들에게 이 모든 일을 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은 하나님의 아들을 미워했고, 하나님의 아들에게 속한 제자들도 미워한다. 반대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속한 자에서 예수님께 속한 자로 정체성이 바뀐다. 그는 예수님의 친구이며,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오늘 본문은 나에게 묻는다. 나는 누구에게 속한 사람인가? 나는 세상의 인정과 사랑을 얻기 위해 예수님께 속한 정체성을 흐리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받는 불편함과 손해를 부끄러워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세상이 싫어할까 봐 예수님의 말씀을 숨기고 있지는 않은가?신앙은 세상에게 미움받기 위해 일부러 거칠게 사는 것이 아니다. 참된 신앙은 예수님께 속한 자로서 예수님의 이름을 대표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드러내셨듯이, 제자는 예수님을 드러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세상의 사랑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숨기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께 속한 자답게, 예수님의 이름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박해와 거절 속에서도 말씀을 지킬 사람들을 기대하며 증언하는 제자로 살아가야 한다.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님을 닮는 삶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가?How? 1)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하기1)-1 예수님을 믿는 사람임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드러내기ex) 식사 기도하기, 신앙적 가치관 말하기, 예배와 공동체를 우선순위에 두기 2) 세상의 억까 앞에서 “예수님도 먼저 이 길을 걸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견디기3) 오늘 예수님을 드러낼 수 있는 작은 기회를 찾기ex) 힘든 사람에게 말씀으로 위로하기, 복음적 가치관 나누기[참고문헌] 바레트, 찰스 K. 『요한복음 (Ⅱ)』 국제성서주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5).크루즈, 콜린 G. 『요한복음』 배용덕 역.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4 (서울: CLC, 2013).폽케스, 엔노 에드자르트. "요한복음." In 취리히성경해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서울: 대한성서공회, 2021.Michaels, J. Ramsey. The Gospel of John.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10.Thompson, Marianne Meye.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1 ed.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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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15.12-17 친구 아이가

    2. 내 삶에 적용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이 사랑은 막연한 감정이나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정도가 아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다. 사랑의 기준은 내가 생각하는 친절함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자기희생적 사랑이다. 예수님은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 사랑을 말로만 설명하지 않으시고, 실제로 제자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 주심으로 보여 주셨다.이 말씀은 나에게 묻는다. 나는 예수님께 사랑받은 사람답게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가? 나는 사랑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내 시간과 감정과 편안함이 손해 보는 것은 피하고 있지 않은가? 예수님의 사랑은 계산하는 사랑이 아니었다. 제자들이 완전해서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친구로 삼으시고 죽기까지 사랑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자기중심적 사랑에 머물 수 없다. 사랑은 내 감정이 허락할 때만 하는 선택이 아니라, 예수님이 명하신 계명이다.예수님은 제자들을 친구라 부르신다. 왜냐하면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지만, 친구는 주인의 뜻을 알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들은 것을 제자들에게 알게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친구라는 말은 단지 친밀한 감정만을 뜻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마음과 뜻을 알고, 그 뜻에 참여하도록 부름받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나를 멀리 세워 두지 않으시고, 자신의 마음과 아버지의 일을 알려 주시는 친구로 불러 주셨다.오늘 우리에게 말하신다 “마 우리 친구 아이가”그러나 친구 됨은 특권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예수님은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명령을 행해야 친구가 된다는 공로의 조건이 아니다. 예수님의 친구로 부름받은 사람이 그 관계 안에서 마땅히 보여야 할 응답이다. 예수님의 친구는 예수님의 뜻을 알고도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의 방식대로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다.또한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고 말씀하신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속한 이유는 그들의 행실이나 자격 때문이 아니다. 먼저 사랑하시고 먼저 선택하신 예수님의 주도권 때문이다. 이것은 큰 위로이지만 동시에 소명이다. 예수님께 선택받았다는 것은 편안히 머무르기 위한 특권이 아니라, 가서 열매를 맺으라는 부르심이다. 제자의 순종과 열매는 선택받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선택받은 사람의 응답이며 목적이다.예수님은 제자들이 가서 열매를 맺고 그 열매가 항상 있게 하려고 그들을 세우셨다. 여기서 열매는 세상을 향한 사명과 연결된다. 제자들이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이끌고, 예수님의 사랑을 공동체 안에서 드러내며, 예수님의 일을 계속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열매는 인간의 능력으로 맺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할 때 주어지는 응답 안에서 맺힌다. 그러므로 사명은 내 힘으로 증명하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며 감당하는 일이다.오늘 본문은 나에게 다시 묻는다. 나는 예수님의 친구답게 살고 있는가? 나는 예수님의 마음과 뜻을 알면서도 내 편안함만 선택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예수님이 나를 선택하신 목적을 잊고, 열매 없는 신앙에 머물고 있지는 않은가?신앙은 예수님과 적당히 가까운 사이가 되는 것이 아니다. 참된 신앙은 예수님께 친구로 불림받고, 그분의 뜻을 알며, 그분이 보여 주신 사랑을 서로에게 실천하는 삶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친구 아이가”라는 부르시는 예수님의 목소리 앞에서 내 삶을 돌아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나를 친구로 삼으셨다면, 나도 예수님의 친구답게 사랑해야 한다. 나를 먼저 사랑하시고 선택하신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서로를 위해 내 것을 내어 주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며, 항상 열매를 맺는 제자로 살아가야 한다.예수님의 친구 된 제자의 삶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How? 1) 섬긴 뒤에 알아주지 않아도 “예수님이 나를 친구로 사랑하셨다”는 마음으로 원망하지 않기 2) 예수님의 친구답게 주님의 뜻을 먼저 묻는 습관 기르기3) 예수님께로 인도해야 할 한 사람의 이름을 적고, 그 사람을 위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기[참고문헌] 바레트, 찰스 K. 『요한복음 (Ⅱ)』 국제성서주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5).비슬리-머리. 『요한복음』 이덕신 역. Word Biblical Commentary 36 (서울: 솔로몬, 2001).크루즈, 콜린 G. 『요한복음』 배용덕 역.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4 (서울: CLC, 2013).Michaels, J. Ramsey. The Gospel of John.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10.Thompson, Marianne Meye.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1 ed.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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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15.1-11 너는 누구냐

    2. 내 삶에 적용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단순한 포도나무가 아니라 참포도나무이시다. 이스라엘이 맺지 못했던 열매를 맺으시는 분이며, 가지들에게 생명을 공급하시는 근원이시다. 그리고 아버지는 농부로서 가지를 제거하시고, 열매 맺는 가지를 더 깨끗하게 하셔서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이 말씀은 우리에게 가장 먼저 정체성을 묻는다. “너는 누구냐?” 나는 내 능력, 성취, 실패, 사람들의 평가로 정의되는 존재가 아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어야 사는 가지이다. 가지는 스스로 생명을 만들 수 없다. 가지의 존재 이유는 포도나무에 붙어 생명을 공급받고 열매를 맺는 데 있다. 그러므로 나의 신앙은 예수님 없이 무엇인가를 해내려는 삶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삶이어야 한다.예수님은 “내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신다. 거한다는 것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생명 주는 임재에 마음을 열고, 그분 안에 머물기로 의지적으로 결단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 거함은 내 의지로 만들어 내는 종교적 성취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내 안에 거하시고, 성령을 통해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일이다. 그래서 제자는 결단해야 하지만, 그 결단의 근거는 자기 힘이 아니라 예수님의 지속적인 임재이다.예수님을 떠나서는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것은 겸손한 고백이 아니라 생존의 진실이다. 열매는 내가 만들어 내는 인공물이 아니다. 열매는 세상의 삶 한가운데서 내 안에 재생산되는 예수님의 생명이다. 그러므로 열매 맺는 삶은 단순히 착한 일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성품과 뜻이 내 삶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내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반응할 때, 그 말씀이 내 생각과 마음속에 뿌리내릴 때, 내 태도와 행동이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기 시작한다.예수님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개인의 욕심을 다 이루어 주겠다는 약속이 아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면, 나의 기도도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는 방향으로 바뀐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관철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구하는 기도가 된다. 그런 기도는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기도이다.예수님은 열매를 많이 맺을 때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고 말씀하신다. 사람들은 제자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게 된다. 그러므로 내 삶은 하나님을 흐리게도 할 수 있고, 하나님을 드러나게도 할 수 있다.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여 사랑과 순종과 진실의 열매를 맺을 때, 사람들은 내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게 된다.그러나 오늘 본문의 절정은 9절이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단순히 서로 사랑하라고 반복하지 않으신다. 먼저 제자들에게 자신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신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나의 정체성으로 삼으라는 말이다.오늘 본문은 나에게 묻는다. “너는 누구냐?” 나는 실패한 사람인가? 인정받아야만 가치 있는 사람인가? 열매를 스스로 만들어 내야 하는 사람인가? 아니다. 나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자이다. 나는 참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는 가지이다. 나는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하고,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예수님의 생명이 내 삶에 열매로 드러나야 하는 사람이다.신앙은 내가 누구인지 잊어버린 채 무언가를 증명하려 애쓰는 삶이 아니다. 참된 신앙은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나의 정체성을 다시 찾고, 그 사랑 안에 머물며, 예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삶이다. 그 결과는 충만한 기쁨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의 사랑의 대상이 됨으로 기쁨도 함께 경험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나를 세상의 평가로 정의하지 않고, “나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자”라는 정체성 안에 거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열매를 맺는 가지로 살아가야 한다.열매 맺는 삶을 위해 실천해야 하는 것들은 무엇인가?How? 1) 스스로를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자”로 정의하기 1)-1 매일 아침 거울 앞에서 이렇게 고백하는 것. 2) 매일 묵상하며, 성경 어플에서 주는 말씀을 읽고 삶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기3) 내 욕심이 아닌 하나님의 뜻 구하기[참고문헌] 바레트, 찰스 K. 『요한복음 (Ⅱ)』 국제성서주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5).크루즈, 콜린 G. 『요한복음』 배용덕 역.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4 (서울: CLC, 2013).폽케스, 엔노 에드자르트. "요한복음." In 취리히성경해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서울: 대한성서공회, 2021.Bultmann, Rudolf. The Gospel of John: A Commentary. Translated by G.R. Beasley-Murray. Edited by R.W.N. Hoare, J.K. Riches. Philadelphia, PA: Westminster Press, 1971.Michaels, J. Ramsey. The Gospel of John.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10.Thompson, Marianne Meye.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1 ed.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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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14.25-31 The Same Page

    2. 내 삶에 적용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떠남 이후를 준비시키시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아직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 말씀하셨지만, 곧 제자들은 예수님의 물리적 부재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홀로 버려두지 않으신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실 보혜사 성령님이 오셔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26절).이것이 제자들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그 말씀의 의미를 아직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일어나기 전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같은 자리에서, 같은 방향으로, 같은 의미로 바라보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성령님이 오시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을 부활의 빛 안에서 바르게 기억하고 이해하게 된다.성령님은 제자들을 예수님과 같은 페이지 위에 서게 하시는 분이다.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중요하다. 우리도 말씀을 많이 듣고 읽지만, 내 생각과 감정과 욕망의 페이지 위에서 말씀을 해석할 때가 많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보다 내가 원하는 위로를 먼저 찾고, 예수님의 뜻보다 내 상황의 유리함을 먼저 계산한다. 그러면 말씀을 들어도 예수님과 같은 페이지에 서지 못한다. 참된 신앙은 내 생각에 예수님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가르치심 안에서 내가 예수님의 말씀에 맞추어지는 것이다.예수님은 또한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신다(27절). 이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르다. 세상은 문제가 없어야 평안하다고 말한다. 힘으로 질서를 만들고, 상황이 안정되어야 안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갈등의 부재가 아니라, 환난과 박해 속에서도 마음이 무너지지 않는 평안이다. 이 평안은 보혜사 성령님이 오심으로 경험할 수 있는 평안이다.그러므로 나는 평안을 상황에서만 찾지 말아야 한다. 일이 잘 풀리고, 사람들이 나를 인정하고, 문제가 사라져야만 평안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세상이 주는 평안의 방식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평안이 아니라 “나의 평안”을 주신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임재 안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붙들어 주는 평안이다.제자들은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지 못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떠남을 자신들의 상실과 불안의 관점에서만 보았다. 예수님과 같은 관점에서 그 사건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이다.그럼에도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한 길임을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떠나셔야 성령님이 오시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새로운 임재를 경험하게 된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같은 페이지에 있었다면, 그 떠남을 단순한 이별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보았을 것이다.우리도 제자들과 다를 바가 없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내 손해와 불안의 관점에서만 볼 때가 많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일이 진행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부재처럼 느끼고, 내가 붙들고 싶은 것이 떠나가면 실패처럼 여긴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묻는다. 나는 지금 이 일을 내 페이지에서만 보고 있는가, 아니면 예수님의 페이지에서 보고 있는가? 성령님은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자리에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다시 보게 하신다.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 세상 임금에게 당하는 패배가 아니라, 아버지를 향한 사랑과 순종을 드러내는 사건임을 말씀하신다(29-31절). 예수님은 쉬운 길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명하신 길을 가신다. 십자가는 세상의 눈에는 수치와 패배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에게는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에 순종하시는 길이다.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성령님의 가르치심 안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바르게 기억하고 있는가? 나는 세상이 주는 평안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을 붙들고 있는가? 나는 내 상황을 내 페이지에서만 읽고 있는가, 아니면 예수님과 같은 페이지 위에서 읽고 있는가?신앙은 예수님을 내 뜻에 맞추는 것이 아니다. 참된 신앙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예수님의 평안을 붙들며,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내 불안과 계산의 페이지를 내려놓고, 성령님이 열어 주시는 예수님의 페이지 위에 서야 한다. 그 자리에서만 나는 흔들리는 현실 속에서도 평안을 누리고, 아버지를 사랑하는 순종의 길을 걸을 수 있다.예수님과 같은 페이지 위에 어떻게 설 수 있을까?How? 1) 말씀을 읽기 전, 읽은 후 바로 내 상황에 끼워 맞추지 말고, “성령님, 예수님의 뜻을 바르게 기억하게 해 주세요”라고 먼저 기도하기 2)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 붙잡기 2)-1 마음이 근심하거나 두려워지는 순간 예수님이 내게 평안을 주셨다라고 소리내어 고백하기3) 쉬운 길이 아닌 하나님이 명하신 길로 걸어가기 3)-1 매일의 걸음을 침대 위에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같은 페이지인지 복기하기[참고문헌] 바레트, 찰스 K. 『요한복음 (Ⅱ)』 국제성서주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5).비슬리-머리. 『요한복음』 이덕신 역. Word Biblical Commentary 36 (서울: 솔로몬, 2001).크루즈, 콜린 G. 『요한복음』 배용덕 역.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4 (서울: CLC, 2013).폽케스, 엔노 에드자르트. "요한복음." In 취리히성경해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서울: 대한성서공회, 2021.Michaels, J. Ramsey. The Gospel of John.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10.Thompson, Marianne Meye.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1 ed.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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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14.15-17 또 다른 보혜사

    2. 내 삶에 적용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과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감정적으로 예수님을 좋아하거나, 은혜로운 분위기 속에서 감동을 느끼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믿음과 순종으로 반응하는 삶이다. 이 말씀은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만, 정작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에는 무뎌질 때가 많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미루고, 용서하라는 말씀은 외면하며, 예수님을 따르라는 부르심은 부담스럽게 여긴다. 그러나 예수님 사랑은 말로만 증명되지 않는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은 예수님의 계명들에 대한 순종으로 드러난다.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또 다른 보혜사를 약속하신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구하시고, 아버지께서는 제자들에게 보혜사 성령님을 주신다. 이 약속은 제자들의 경건이나 능력에 근거하지 않는다. 성령님이 제자들에게 주어지는 이유는 예수님의 간구 때문이다. 그래서 이 약속은 흔들리지 않는다. 한 번 주신 성령님을 하나님은 다시 빼앗아 가시지 않으신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이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이 사실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 우리는 자주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지 않는 것처럼 느낀다. 기도가 약하고, 순종이 부족하고, 믿음이 흔들리면 성령님도 나를 떠나신 것처럼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성령님이 우리의 완벽함 때문에 오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간구에 따라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 속에서도 성령님의 함께하심을 붙들 수 있다.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를 받지도, 보지도, 알지도 못한다. 세상은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를 인정하지 않고, 성령님을 통해 제자들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제자들은 성령님을 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고, 예수님을 보고 믿었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세상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주어져 그들과 함께하시고 그들 안에 거하신다.이 말씀은 우리가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야 함을 가르친다. 세상은 성령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리보다 자기 욕망과 기준을 따라간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과 함께 살아간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이 당연하게 여기는 방식에 끌려가지 말아야 한다. 거짓과 속임, 자기중심성과 불순종이 아니라, 성령님이 알게 하시는 진리 안에서 예수님의 계명을 따라 살아야 한다.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예수님의 계명에 순종하지 않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성령님이 내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을 잊은 채, 내 힘으로만 신앙생활을 하려 하지는 않는가? 나는 세상과 구별되어 진리의 영을 따르고 있는가?신앙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말에서 끝나지 않는다. 참된 신앙은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의 계명을 지키고,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의 함께하심 안에서 순종하는 삶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내 감정과 의지만 의지하지 않고, 내 곁에 계시며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의지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답게,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그 사랑을 드러내야 한다.How? 1) 오늘 하루 끝에 “나는 오늘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만 했는가, 계명에 순종했는가?”를 점검하기 2) 성령님이 내 곁에, 내 안에 계심을 기억하며 반응하기3) 오늘 내가 세상의 기준을 따라가고 싶은 순간을 표시하기 예: 거짓말로 넘어가기, 남을 깎아내리기, 욕망대로 소비하기, 편한 길만 선택하기[참고문헌] 바레트, 찰스 K. 『요한복음 (Ⅱ)』 국제성서주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5).비슬리-머리. 『요한복음』 이덕신 역. Word Biblical Commentary 36 (서울: 솔로몬, 2001).크루즈, 콜린 G. 『요한복음』 배용덕 역.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4 (서울: CLC, 2013).Michaels, J. Ramsey. The Gospel of John.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10.Thompson, Marianne Meye.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1 ed.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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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14.8-14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2. 내 삶에 적용오늘 본문은 빌립의 간청으로 시작된다.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는 예수님과 오래 함께 있었지만, 아직 예수님 안에서 아버지를 보고 있지 못했다. 빌립은 불안과 의심을 없애 줄 더 직접적인 하나님 체험을 원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 예수님 밖에서 또 다른 증거를 찾을 필요가 없다. 예수님이 아버지를 계시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이 말씀은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게 한다. 우리도 빌립처럼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더 확실한 증거와 더 강한 체험을 요구할 때가 있다. 기도가 즉시 응답되지 않으면 불안해하고, 상황이 흔들리면 하나님이 함께하시는지 의심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요청 앞에서 자신을 보라고 말씀하신다. 신앙은 내가 원하는 방식의 증거를 붙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아버지를 보고 신뢰하는 것이다.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자신 안에 계신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말은 스스로 지어낸 말이 아니며, 예수님의 일은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서 행하시는 일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단순히 한 위대한 선생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 안에서 말씀하시고 일하시는 아버지를 믿는 것이다.예수님의 말과 일은 아버지께 근거하고, 그 말과 일은 제자들이 믿어야 할 근거가 된다.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자가 자신이 하는 일을 할 뿐 아니라 그보다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제자들이 예수님보다 더 큰 능력을 가진다는 뜻이 아니다.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신 이후,제자들을 통해 예수님의 일이 계속되고 확장된다는 뜻이다.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고, 죄 용서가 선포되며, 하나님 나라의 축복과 권세가 이 땅에 드러나는 일이 제자들을 통해 이어진다.그러나 그 일은 제자들의 독자적인 능력에서 나오지 않는다. 예수님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라”고 약속하신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 안에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형식적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의 뜻과 목적에 맞게, 그리고 예수님을 위하여 구하는 것이다.이 지점에서 우리는 기도의 목적을 다시 점검해야 한다. 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내 욕심과 편안함과 성공만 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는 내 뜻을 관철하는 도구가 아니라, 예수님의 뜻에 나를 맞추는 자리이다. 예수님이 구하실 것을 구하고, 예수님이 기뻐하실 일을 구하며, 예수님의 일에 참여하기를 구하는 것이 참된 기도이다.예수님이 제자들의 기도에 응답하여 행하시는 목적은 아버지께서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물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가? 답은 하나님이 각자에게 맡기신 일에 대한 순종이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말과 일을 따라 행하심으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셨듯이, 제자들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고 예수님의 일에 순종함으로 아버지께 영광을 돌린다.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예수님 안에서 아버지를 보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다른 증거만 요구하고 있는가? 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서도 내 욕심만 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예수님이 떠나신 뒤에도 제자들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계속 일하시는 분임을 믿는가?신앙은 불안을 없애 줄 더 강한 체험을 요구하는 삶이 아니다. 참된 신앙은 예수님 안에서 아버지를 보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며, 부활하신 예수님의 계속되는 일에 순종으로 참여하는 삶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내가 원하는 방식의 응답만 구하지 않고,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일을 구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자리에서 순종함으로, 예수님의 일이 오늘 내 삶을 통해 계속되게 해야 한다. 아버지께 영광 돌리는 삶은 무엇인가?How? 1)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의 참 의미 가슴에 새기기 1)-1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일을 구하는 것 2)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일, 순종으로 하나 수행하기.3) 지금 떠오르는 한 사람을 위해 구체적으로 기도하기[참고문헌] 바레트, 찰스 K. 『요한복음 (Ⅱ)』 국제성서주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5).비슬리-머리. 『요한복음』 이덕신 역. Word Biblical Commentary 36 (서울: 솔로몬, 2001).크루즈, 콜린 G. 『요한복음』 배용덕 역.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4 (서울: CLC, 2013).Michaels, J. Ramsey. The Gospel of John.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10.Schnackenburg, R. 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 Translated by David Smith, G.A. Kon. Herder's Theologic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3 vols. New York, NY: Crossroad, 1987.Thompson, Marianne Meye.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1 ed.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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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13.31-35 그리스도인의 군번줄

    2. 내 삶에 적용오늘 본문은 유다가 나간 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고별 선언이다.예수님은 십자가의 때를 앞두고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다”고 말씀하신다. 세상은 십자가를 수치와 실패로 보지만, 예수님은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고 말씀하신다. 죄인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시는 사랑 안에서 예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아들을 내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영광도 드러난다.그리고 예수님은 바로 이어서 “서로 사랑하라”라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무조건 따라야 할 계명을 소개한다.바로 직전에 예수님은 주와 선생이심에도 자신이 먼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이 사랑의 본을 보이셨다.예수님은 자신에게 부여된 권위를 앞세우며 자기에게 사랑을 주기를 명령하지도, 바라지도 않으셨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제자들에게 베푼 사랑을 제자들이 자신에게 갚아 주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게 흘려보내기를 원하셨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대한민국 교회의 현실을, 그 교회 안에 있는 ‘나’의 현실을 직면해야 한다.과연 우리 교회는 그 사랑을 옆으로 전파하고 있는가?과연 나는 예수님이 본을 보이신 사랑을 내 공동체에게 행동으로 전파하고 있는가?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옆에 있는 지체를 사랑하는 일에는 인색할 때가 많다.오늘날 정보의 발달로 설교가 정말 말 그대로 넘쳐난다. 유튜브, 블로그, 인스타그램 등 수많은 곳에서 손쉽게 설교를 접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의 부작용으로 많은 이들이 유명세를 위해 그리스도인이라면 필히 초점을 맞춰야 하는 의무와 책임에 대해 심한 경우 언급도 하지 않고 그저 위로와 좋은 말로만 가득한 설교로 볼 수 없는 설교를 온라인 상에 업로드한다.즉, 설교의 주된 진입점이 예수님의 사랑의 모범을 따라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보다, 청중 개인의 상처·불안·실패·정체성·위로에 더 자주 놓여 있는 것이다.물론 위로와 회복을 말하는 것은 필요하다.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이 공동체를 향한 사랑과 책임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새 계명을 온전히 따르는 것이 아니다.이러한 오늘의 상황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무너졌던 주후 2세기 교회를 비판한 클레멘트의 지적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현대 교회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공동체 간의 사랑곧,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회복하는 것이다.왜냐하면 서로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인식표이며 군번줄이다. 지식이 많고, 말이 유창하고, 신앙의 경력이 길어도 서로 사랑이 없다면 예수님의 제자 됨을 드러낼 수 없다. 사랑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제자가 반드시 살아 내야 할 의무이며 책임이다.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답게 공동체 안에서 그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가? 나는 말로만 사랑을 말하고, 실제로는 내 자존심과 편리함을 더 지키고 있지는 않은가? 신앙은 예수님의 사랑을 감동적으로 듣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참된 신앙은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지체를 사랑하는 삶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그리스도인의 군번줄인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고, 공동체 안에서 낮아져 섬기는 제자로 살아가야 한다.그러한 제자의 삶을 어떻게 일상에서 이루어 낼 수 있을까?How? 1) ‘위로’만 찾지 않기1)-1 위로에서 멈추는 것이 아닌 순종으로 연결되어야 함.1)-2 사람의 책임이 없는 메시지를 무비판적으로 소비하지 않기 2) 공동체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군번줄임을 기억하기3) 공동체를 향한 사랑을 중보로 표현하기[참고문헌] 바레트, 찰스 K. 『요한복음 (Ⅱ)』 국제성서주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5).크루즈, 콜린 G. 『요한복음』 배용덕 역.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4 (서울: CLC, 2013).Bultmann, Rudolf. The Gospel of John: A Commentary. Translated by G.R. Beasley-Murray. Edited by R.W.N. Hoare, J.K. Riches. Philadelphia, PA: Westminster Press, 1971.Michaels, J. Ramsey. The Gospel of John.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10.Thompson, Marianne Meye.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1 ed.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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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13.12-20 우리가 따라야 할 삶의 모범

    2. 내 삶에 적용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뒤, 그 행동의 의미를 설명하시는 장면이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고 물으신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선생이요 주로 불렀다. 그 말은 옳았다. 그러나 그들이 아직 알지 못한 것은, 참된 주와 선생이 자신의 지위와 존엄을 붙들고 군림하는 분이 아니라, 친히 낮아져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분이라는 사실이었다.예수님은 자신이 주와 선생이 되어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으니, 제자들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단순히 한 번의 예식을 따라 하라는 말이 아니다. 큰 자가 낮아져 작은 자를 섬기는 모든 사랑의 행동을 지속적으로 하라는 말이다. 예수님께 씻김 받은 제자는 이제 다른 사람을 씻기고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사랑과 섬김은 예수님으로 인해 깨끗하게 된 제자의 표지이다.이 말씀은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낮아지는 일을 불편해 할 때가 많다. 섬김을 받는 것은 좋아하지만, 누군가의 발을 씻기는 자리에는 쉽게 내려가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는 지위와 명예를 보존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자신을 낮추어 사랑하는 사람이다. 신앙은 높은 고백만이 아니라 낮은 자리의 행동으로 드러난다.예수님은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신다. 복은 아는 데서 끝나지 않고, 아는 것을 행할 때 주어진다. 제자는 예수님의 사랑을 이해하는 사람일 뿐 아니라, 그 사랑을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실천하는 사람이다. 서로 발을 씻기는 일은 특별한 순간에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가정에서, 공동체에서, 불편한 관계 속에서, 내가 먼저 낮아지고 섬기는 작은 행동들 속에서 구체화된다.그러나 예수님은 모두가 이 복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유다는 예수님과 함께 떡을 먹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예수님을 멸시하고 배신했다. 그는 가까이 있었지만 참 제자는 아니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두려운 경고가 된다. 예수님 곁에 있는 것처럼 보여도, 예수님의 길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참 제자의 삶과는 멀어지는 것이다.제자도는 가까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데 있다.예수님은 유다의 배신을 미리 말씀하신다. 이는 일이 일어날 때 제자들로 하여금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실패가 아니다. 배신과 죽음의 순간조차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이루시는 일을 드러내는 자리이다. 제자는 이해되지 않는 고난 속에서도 예수님이 여전히 주님이심을 믿어야 한다.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자신이 보낸 자를 영접하는 것이 곧 자신을 영접하는 것이며, 자신을 영접하는 것이 곧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대리자 개념은 이제 제자들에게도 적용된다. 제자들은 서로를 섬기는 책임을 가질 뿐 아니라, 세상 속에서 예수님을 대표하는 자로 살아야 한다.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예수님을 주와 선생으로 부르면서도 낮아지는 섬김을 피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말씀을 아는 데서 멈추는가, 아니면 알고 행하는 제자인가?나는 가까운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 만족하는가, 아니면 예수님의 삶의 방식을 실제로 따르기까지 하는가?신앙은 예수님을 높이 부르는 말에서 끝나지 않는다. 참된 신앙은 예수님께 씻김 받은 사람답게 다른 사람의 발을 씻기는 삶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지위와 자존심을 붙들기보다, 주와 선생이신 예수님처럼 낮아져 섬기는 제자의 길을 걸어야 한다.본을 보이신 예수님의 삶을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How? 1) 내가 먼저 낮아질 자리 하나 선택하기 1)-1 작은 섬김부터 시작하는 것. ex) 설거지, 자리 정리, 안부인사 먼저하기 등 2) 내가 외우는 말씀을 삶으로 실천하기3) 나의 언행은 예수님을 대표한다고 생각하고 지키기 3)-1 짜증보다 격려와 존중의 말을 하기 3)-2 말하기 전 “이 말이 예수님을 대표하는 사람다운 말인가?” 점검하기[참고문헌] 바레트, 찰스 K. 『요한복음 (Ⅱ)』 국제성서주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5).브라운, 레이몬드 E. 『요한복음 Ⅱ: 영광의 책』 최흥진 역. 앵커바이블 (서울: CLC, 2019).비슬리-머리. 『요한복음』 이덕신 역. Word Biblical Commentary 36 (서울: 솔로몬, 2001).크루즈, 콜린 G. 『요한복음』 배용덕 역.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4 (서울: CLC, 2013).폽케스, 엔노 에드자르트. "요한복음." In 취리히성경해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서울: 대한성서공회, 2021.Bishop Eric, F.F. "'He That Eateth Bread with Me Hath Lifted up His Heel against Me.'-Jn Xiii. 18 (Ps Xli. 9)." The Expository Times 70, no. 11 (1959): 331–33.Michaels, J. Ramsey. The Gospel of John.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10.Thompson, Marianne Meye.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1 ed.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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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12.44-50 말씀의 끝은 순종

    2. 내 삶에 적용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공적 사역을 마무리하는 요약 선언이다.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단순히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을 드러내시는 아버지의 대리자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것은 곧 아버지를 믿는 것이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은 실제로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일이다.이 말씀은 우리의 믿음을 점검하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는 선택적으로 반응할 때가 있다. 나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은 붙들지만, 나를 꺾고 순종하게 하는 말씀은 피하려 한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받아들이는 믿음이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 없다.예수님은 또한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을 보는 것이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보는 사람은 그 안에서 아버지를 보게 된다. 예수님의 말과 행동, 긍휼과 순종, 십자가를 향한 길은 모두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신앙은 막연한 하나님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알고 보는 것이다.예수님은 자신이 빛으로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신다. 그 목적은 믿는 자들이 어둠에 머물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어둠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이다. 예수님은 그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계시를 가져오시는 빛이시다. 그러나 빛이 왔다는 것은 동시에 책임이 주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빛을 보았는데도 어둠에 머물기를 선택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말씀을 거부하는 일이 된다.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에 온 목적이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일은 궁극적으로 세상을 향한 사랑의 사명이다. 어둠 가운데 빛을 가져오고, 죽음에 맞서 생명을 가져오는 일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받지 않는 자는 마지막 날 그 말씀에 의해 심판을 받는다.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한 권면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주신 생명과 심판의 기준이다.이 지점에서 우리는 말씀을 듣는 태도를 돌아보아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은 듣기만 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지켜 순종하라고 주어진 말씀이다. 말씀을 많이 아는 것과 말씀에 의해 사는 것은 다르다. 말씀을 듣고도 내 방식대로만 살면, 그 말씀은 나를 살리는 빛이 아니라 마지막 날 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그러므로 말씀 앞에서 중요한 것은 감동이 아니라 순종이다.예수님은 자의로 말하지 않으셨다. 아버지께서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셨고,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존재와 사역은 아버지의 말씀에 대한 완전한 순종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리고 그 명령은 영생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을 주셨고, 예수님은 그 말씀을 온전히 전하셨다.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예수님 안에서 아버지를 보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원하는 하나님을 따로 만들고 있는가? 나는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말씀 앞에 나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어둠에 머물기를 선택하고 있는가?신앙은 예수님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참된 신앙은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를 믿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빛으로 오신 예수님 앞에 서야 한다. 그리고 나를 살리기 위해 주어진 말씀을 가볍게 듣지 않고, 그 말씀에 의해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그렇다면 말씀에 의해 살아가는 사람의 삶은 어떤 것인가?How? 1) 말씀을 고르지 말고 주시는 대로 받기 2) 어둠에 머물게 하는 습관 하나 끊기3) 말씀을 듣는 것에서 머물지 말고, 순종으로 마무리 하기.[참고문헌] 비슬리-머리. 『요한복음』 이덕신 역. Word Biblical Commentary 36 (서울: 솔로몬, 2001).크루즈, 콜린 G. 『요한복음』 배용덕 역.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4 (서울: CLC, 2013).폽케스, 엔노 에드자르트. "요한복음." In 취리히성경해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서울: 대한성서공회, 2021.Michaels, J. Ramsey. The Gospel of John.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10.Thompson, Marianne Meye.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1 ed.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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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12.12-19 호산나, 나귀를 타고 오시는 왕

    2. 내 삶에 적용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장면을 보여 준다. 명절을 쇠기 위해 온 큰 무리는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맞으러 나간다. 그들은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외친다. 이 환호는 예수님을 향한 기대와 열광을 보여 준다. 그러나 그들이 기대한 왕은 로마를 물리치고 눈에 보이는 승리를 가져올 왕에 가까웠다. 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부르고 있었지만, 그 왕이 십자가를 통해 영광을 받으실 분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이 말씀은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게 한다. 우리도 예수님을 왕이라고 고백하지만, 실제로는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일하시는 왕을 기대할 때가 많다. 나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 왕, 내 문제를 빨리 해결해 주는 왕, 내가 원하는 승리를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주는 왕을 바란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의 기대에 맞춰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군사력과 폭력으로 왕권을 세우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으로 왕권을 드러내시는 평화의 왕이시다.예수님은 무리의 환호를 거절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 환호를 그대로 받아들이지도 않으신다.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심으로 자신이 어떤 왕이신지를 보여 주신다. 예수님은 세상의 왕처럼 힘으로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겸손과 평화의 방식으로 오셨다. 사람들은 승리의 왕을 외쳤지만,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해 가시는 왕으로 입성하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내 방식의 승리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는 것이다.제자들도 처음에는 이 일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곧 십자가 죽음과 부활 이후에야 이 일이 성경에 기록된 것과 맞닿아 있음을 기억했다. 이는 믿음의 깨달음이 언제나 즉각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님을 보여 준다. 지금은 이해되지 않는 사건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빛 안에서 다시 보게 될 때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된다. 믿음은 모든 것을 당장 해석하는 능력이 아니라, 이해되지 않는 순간에도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며 나중에 기억하고 깨닫는 삶이다.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을 본 무리는 예수님에 대해 증언했고, 또 다른 무리는 그 증언을 듣고 예수님을 맞이했다. 예수님의 생명 주는 표적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졌고, 그 증언은 또 다른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이끌었다. 이것은 믿음의 공동체가 해야 할 일을 보여 준다. 우리는 내가 본 예수님의 일을 침묵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경험한 은혜, 죽음 같은 자리에서 나를 살리신 주님의 일을 증언할 때, 누군가는 그 증언을 듣고 예수님께 나아올 수 있다.바리새인들은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라고 말한다. 그들의 말은 과장된 탄식이지만,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복음의 미래를 가리킨다. 예수님은 당장 군중의 환호로 세상을 얻으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내어 주심으로 세상을 얻으신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그의 영향력의 끝이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는 새로운 세계적 선교의 시작이 된다.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예수님을 내 기대를 이루어 주는 왕으로만 따르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시는 평화의 왕이심을 받아들이는가? 지금 이해되지 않는 일 앞에서도 십자가와 부활의 빛 안에서 주님의 뜻을 기다리는가? 또한 나는 내가 본 예수님의 은혜를 증언하며 다른 사람을 예수님께로 이끄는 삶을 살고 있는가?마지막으로 나는 내 인생의 역사를 예수님으로 해석하고 있는가?신앙은 예수님을 향해 열광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참된 신앙은 내가 원하는 왕이 아니라, 십자가를 향해 가시는 평화의 왕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예수님께 내 방식의 승리를 요구하기보다, 예수님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을 신뢰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경험한 생명의 주님을 증언하며, 세상이 아니라 십자가의 왕을 따르는 제자로 살아가야 한다.그렇다면 십자가를 향해 가시는 평화의 왕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어떤 것인가?How? 1) 일이 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 “지금 주님은 어떤 방식으로 나를 이끌고 계신가?”를 먼저 묻기 2) 이해되지 않는 상황을 십자가와 부활의 빛 안에서 다시 보기 2)-1 지금 이해되지 않는 일 하나를 적고, 말씀에 비춰 해석해보자3) 내가 본 예수님의 은혜를 말로 증언하기 3)-1 증언하고, 중보로 이웃을 돕자[참고문헌] 바레트, 찰스 K. 『요한복음 (Ⅱ)』 국제성서주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5).비슬리-머리. 『요한복음』 이덕신 역. Word Biblical Commentary 36 (서울: 솔로몬, 2001).크루즈, 콜린 G. 『요한복음』 배용덕 역.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4 (서울: CLC, 2013).폽케스, 엔노 에드자르트. "요한복음." In 취리히성경해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서울: 대한성서공회, 2021.Michaels, J. Ramsey. The Gospel of John.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10.Thompson, Marianne Meye.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1 ed.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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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12.1-8 지위에 발언과 행동의 무게가 담기지 않음

    2. 내 삶에 적용오늘 본문은 유월절 엿새 전,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는 장면에서 시작된다(1절). 그곳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었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위해 잔치를 열었다. 마르다는 일을 함으로 섬기고,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었다(2절). 죽음에서 살아난 나사로가 예수님 곁에 앉아 있는 이 장면은 예수님이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보여 준다.동시에 이 잔치는 예수님의 죽음이 가까이 왔음을 드러내는 자리이기도 하다.그 자리에서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는다. 이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 곧 한 해 품삯에 해당할 만큼 값비싼 것이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것을 아끼지 않고 예수님께 드린다(3a절). 그녀의 사랑은 말에 머물지 않고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예수님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가장 귀한 것을 드리는 일을 낭비로 여기지 않는다. 마리아의 행위는 단순한 감사 표현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을 예고하는 장례를 준비하는 기름 부음이 된다. 본문은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했다고 말한다(3b절).이 향기는 앞서 나사로의 무덤에서 났던 죽음의 악취를 떠올리게 한다. 죽음의 냄새가 있던 자리에 이제는 향유의 향기가 가득하다. 마리아의 향유는 예수님의 죽음을 가리키지만, 동시에 예수님 안에서 죽음이 마지막 결말이 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예수님은 죽음을 통과하시지만, 썩음에 머물지 않고 생명과 영광으로 일으켜지실 분이시다.그러나 향기로운 헌신의 자리에서 가룟 유다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다. 그는 ‘이 향유를 왜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에게 안 주냐’고 말한다. 겉으로 보면 그의 말은 합리적이고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는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요한은 유다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해서 말한 것이 아니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가던 도둑이었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유다의 말은 그럴듯했지만, 그 안에는 사랑이 아니라 탐욕이 있었다.이 말씀은 우리의 말과 동기를 돌아보게 한다. 우리도 유다처럼 옳은 말을 할 수 있다. 누군가의 헌신을 보며 더 효율적인 방법을 말하고, 더 합리적인 사용처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말이 정말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는지, 아니면 내 계산과 불편함과 욕심을 감추기 위한 말인지 살펴야 한다. 신앙적인 말이 언제나 신앙적인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말은 이웃을 위하는 것처럼 보여도, 마음은 자기 이익을 붙들고 있을 수 있다.마리아와 유다는 선명하게 대조된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공경하기 위해 자기 것을 아낌없이 드린다. 그러나 유다는 자기 것이 아닌 것까지도 탐욕스럽게 움켜쥔다. 마리아의 행동은 집 안에 향기를 가득하게 하지만, 유다의 말은 헌신의 자리에 계산과 불신을 끌어들인다. 제자의 지위가 있다고 해서 말과 행동에 저절로 무게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말과 행동의 무게는 지위가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진실한 헌신, 곧 ‘마음’에서 나온다.예수님은 유다의 말을 반박하시며 마리아를 옹호하신다. 사람들은 향유의 값을 계산했지만, 예수님은 그 행위에 담긴 사랑과 장례의 의미를 보셨다. 또한 예수님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의 죽음과 떠남을 드러내신다. 마리아의 헌신은 예수님의 죽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준비하는 사랑의 행동이었다.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예수님의 가치를 알고 가장 귀한 것을 드리는 사람인가, 아니면 그럴듯한 말로 내 계산과 욕심을 감추는 사람인가? 나는 다른 사람의 헌신을 볼 때 사랑을 먼저 보는가, 아니면 비용과 효율을 먼저 따지는가? 신앙은 그럴듯한 말을 많이 하는 삶이 아니라, 예수님께 나의 가장 귀한 것을 드리는 삶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유다의 계산과 탐욕이 아니라 마리아의 사랑과 헌신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 예수님의 발 앞에 나의 가장 귀한 것을 내려놓고, 죽음의 냄새가 나는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의 향기를 드러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의 향기를 드러내는 삶은 어떤 것인가?How? 1) 예수님께 가장 귀한 것을 실제로 드리기1)-1 내가 가장 아까워하는 것을 생각해보고 그것을 드리기 ex) 시간, 돈, 체력, 자존심, 계획, 인정 욕구 등 2) 남을 정죄하고 싶을 때 10초 멈추기3) 오늘 내가 있는 자리에 그리스도의 향기 풍기기 3)-1 오늘 하루는 불평없이 살아보기[참고문헌] 브라운, 레이몬드 E. 『요한복음 I: 표적의 책』 최흥진 역. 앵커바이블 (서울: CLC, 2013).비슬리-머리. 『요한복음』 이덕신 역. Word Biblical Commentary 36 (서울: 솔로몬, 2001).크루즈, 콜린 G. 『요한복음』 배용덕 역.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4 (서울: CLC, 2013).폽케스, 엔노 에드자르트. "요한복음." In 취리히성경해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서울: 대한성서공회, 2021.Lincoln, Andrew T. 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 Black's New Testament Commentary. Peabody, MA: Hendrickson, 2005.Michaels, J. Ramsey. The Gospel of John.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10.Schnackenburg, R. 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 Translated by Cecily Hastings, Francis McDonagh, David Smith, Richard Foley. Herder's Theologic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2 vols. New York, NY: Crossroad, 1987.Thompson, Marianne Meye.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1 ed.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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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11.25-27, 41-44 절망의 끝에서 생명의 시작으로

    2. 내 삶에 적용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다. 마르다는 이미 마지막 날의 부활을 믿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을 단지 먼 미래의 사건으로만 두지 않으시고, 그 부활과 생명이 바로 예수님 자신 안에 있음을 드러내신다. 부활은 예수님이 주시는 어떤 선물일 뿐 아니라, 예수님 자신에게 속한 생명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떠나서는 부활도 생명도 존재할 수 없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반드시 죽음을 이기는 생명이 있다.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육체적 죽음을 피한다는 뜻이 아니다. 믿는 자도 나사로처럼 죽음을 통과한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다. 예수님은 죽음 이후에도 자기 백성을 생명으로 일으키시는 분이다. 또한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자가 이미 하나님과의 생명 관계 안에 들어갔으며 그 관계를 죽음도 끊을 수 없다는 뜻이다. 죽음은 여전히 현실이지만, 예수님 안에서는 더 이상 마지막 권세가 아니다.이 말씀은 오늘 우리의 믿음을 깊이 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부활을 교리로는 믿지만, 실제 죽음과 상실 앞에서는 쉽게 무너진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끝난 것 같은 관계, 회복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 앞에서 우리는 죽음이 마지막 말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신앙은 죽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보다 크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의 소망은 죽지 않는 삶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시는 생명의 근원 예수님께 있다.마르다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다. 이 고백은 매우 크고 깊은 고백이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단순한 선생이나 기적 행하는 분이 아니라, 죽은 자를 생명으로 건져 내시는 메시아임을 고백한다. 그러나 동시에 마르다는 그 고백의 함의를 아직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뒤에서 예수님이 돌을 옮기라고 하셨을 때, 그녀는 죽은 지 나흘이 되어 냄새가 난다고 말한다. 입술로는 생명의 주님을 고백하지만, 무덤 앞에서는 여전히 죽음의 현실을 먼저 본 것이다.이 지점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고백을 점검해야 한다. 우리도 예수님을 생명의 주님이라고 고백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죽음의 냄새를 더 크게 느낄 때가 있다. 예수님이 하실 수 있는 일보다 현실의 불가능성을 먼저 계산한다. 믿음의 언어는 가지고 있지만, 그 믿음이 삶의 자리에서 실제 신뢰로 이어지지 못할 때가 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참된 믿음은 예수님에 대한 바른 고백에서 멈추지 않고, 그 고백이 무덤 앞에서도 예수님을 신뢰하는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사실이다.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아버지께 감사하신다. 이 기도는 예수님이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외식적 기도가 아니다. 예수님은 둘러선 무리를 위해 공개적으로 기도하신다. 그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는 사실을 믿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의 기도는 말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응답은 보이는 사건으로 주어진다. 죽은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오는 사건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시며, 예수님이 하나님의 생명 주는 일을 행하시는 분임을 드러낸다.예수님은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고 부르신다. 이 음성은 단지 한 사람을 무덤에서 불러내는 소리가 아니다.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부르실 부활의 음성을 미리 보여 주는 소리이다. 나사로는 수족이 베로 동인 채 무덤에서 나온다. 그는 살아났지만 여전히 풀어져야 할 것이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관심은 기적을 보고 사람들이 자신을 칭찬하는 데 있지 않다.예수님의 관심은 생명을 회복한 사람이 자유롭게 살아가도록 돌보는 데 있다.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예수님을 부활과 생명 그 자체로 믿고 있는가, 아니면 죽음과 현실의 한계 앞에서 그 고백을 잊고 있는가? 나는 마르다처럼 바른 신앙고백을 하면서도, 실제 무덤 앞에서는 냄새와 불가능성만 보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예수님의 음성이 죽은 자를 불러내는 생명의 음성임을 믿는가? 또한 나는 생명을 회복한 사람을 풀어 놓아 다니게 하는 일에 참여하고 있는가?신앙은 부활을 말로만 고백하는 삶이 아니라, 죽음의 자리에서도 생명의 근원 되신 예수님을 신뢰하는 삶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현실의 무덤 앞에서 절망을 마지막 말로 삼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부르시면 죽은 자도 살아난다. 그리고 생명을 얻은 사람은 묶여 있는 자리에서 풀려나 걸어가야 한다. 나는 부활과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생명을 받은 사람답게 살아가야 한다.그렇다면 예수님을 신뢰하는 자로 살아가는 삶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How? 1) 현실의 무덤 앞에서 절망을 마지막 말로 선택하지 않기 1)-1 거대한 벽 앞에서 ‘와 이건 끝났다’가 아닌 ‘와 이거 개꿀잼인데?’하기 2) 말씀을 듣고 마음에 걸리는 순종이 있다면 미루지 말고 오늘 하나 실천하기 2)-1 잘못한 것에 대한 사과, 헌신, 연락, 끊어야 할 습관 멈추기 등3) 오늘 하루 공동체원을 위해 5분 기도하기[참고문헌] 라이트, N.T., and M.F. 버드. 『신약성경과 그 세계: 첫 그리스도인들의 역사, 그들이 남긴 문헌, 그리고 그들의 신학』 박규태 역. (서울: 비아토르, 2024).바레트, 찰스 K. 『요한복음 (Ⅱ)』 국제성서주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5).브라운, 레이몬드 E. 『요한복음 I: 표적의 책』 최흥진 역. 앵커바이블 (서울: CLC, 2013).비슬리-머리. 『요한복음』 이덕신 역. Word Biblical Commentary 36 (서울: 솔로몬, 2001).크루즈, 콜린 G. 『요한복음』 배용덕 역.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4 (서울: CLC, 2013).Fuller, Reginald H. Interpreting the Miracles. London: SCM, 1963.Loisy, Alfred Firmin. Le Quatrième évangile: Les épîtres Dites De Jean. 2e éd. refondue. ed. Paris: E. Nourry, 1921.Thompson, Marianne Meye.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1 ed.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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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11.6-16 부활의 주, 예수

    2. 내 삶에 적용오늘 본문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시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사랑하지 않으셔서 지체하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지체는 하나님의 영광과 제자들의 믿음을 위한 시간이 된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뒤에 가심으로 죽음까지도 깨우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지체는 무관심이 아니라, 더 큰 믿음을 일으키기 위한 하나님의 시간이다.이 말씀은 오늘 우리의 조급함을 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즉시 움직이지 않으시면 사랑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기도했는데 상황이 그대로이면 하나님이 침묵하신다고 느끼고, 내가 원하는 때에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하나님이 늦으신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지체가 실패가 아니라 믿음을 위한 준비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내가 보기에는 늦어진 시간이라도, 예수님 안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시간이 될 수 있다.그 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유대로 다시 가자”고 말씀하신다. 유대는 예수님께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방금도 예수님을 돌로 치려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두려워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친구 나사로를 깨우기 위해 위험과 죽음이 기다리는 곳으로 직접 나아가신다. 예수님의 사랑은 안전한 자리에서 말로만 표현되는 사랑이 아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친구를 살리기 위해 자신이 죽을 수 있는 자리로 들어가시는 분이다.이 지점에서 우리는 우리가 따르는 예수님의 길을 다시 보게 된다. 신앙은 위험 없는 길만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과 함께 걷는 길은 때로 두려움이 있는 곳으로 향할 수 있다. 누군가를 살리고 세우기 위해 내 시간과 평안과 안전을 내어놓아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둠을 향해 무모하게 뛰어드시는 분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정하신 낮의 시간 안에서 걸어가시는 분이다.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은 세상의 빛을 보며 걷기 때문에 실족하지 않는다.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잠”이라고 말씀하신다. 제자들은 이 말을 문자적으로 오해하여 나사로가 쉬고 있으면 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다고 분명히 말씀하시며, 자신이 그를 깨우러 간다고 하신다. 예수님 안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잠과 같다. 죽음은 인간에게 절망의 마지막 말처럼 보이지만, 예수님께는 깨우실 수 있는 잠이다. 나사로의 죽음은 예수님이 마지막 날에 자기 백성을 깨우실 부활의 능력을 미리 보여 주는 표적이다.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죽음에 대해 묵상하게 만든다. 예수님은 죽음을 “잠”으로 바꾸어 부르시고, 그 잠을 깨우러 가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가까운 이의 죽음을 절망의 끝이라고 단정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마지막 날에 우리 모두, 죽은 자는 무덤에서 새로운 몸을 입고,죽지 않은 자는 새롭게 변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그곳에 있지 않았던 것을 제자들을 위해 기뻐한다고 말씀하신다. 이는 제자들이 나사로 사건을 통해 결정적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의 지체와 나사로의 죽음은 제자들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결국 그들의 믿음을 세우는 표적이 된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을 단순한 병 고침의 경험에 머물게 하지 않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생명의 주님을 보게 하신다.도마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한다. 이 말은 예수님을 따르려는 용기와 헌신을 보여 주지만, 동시에 예수님의 죽음의 참 의미를 아직 알지 못하는 말이기도 하다. 도마는 예수님과 함께 죽겠다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단지 죽으러 가시는 분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고 생명을 주러 가시는 분이다. 그럼에도 도마의 말은 부활 이후를 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진리를 남긴다. 바로 그리스도의 참 제자는 자기 안전만 붙들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길까지도 따르는 사람이다.오늘 본문은 나에게 묻는다. 나는 예수님의 시간이 내 기대보다 늦어질 때에도 그분의 사랑과 영광을 신뢰하는가? 나는 유대처럼 두려운 자리로 가자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빛을 따라 걷는가? 나는 죽음을 바라볼 때 끝이라 단정하고 두려워 떠는가, 아니면 죽음 이후의 부활을 보며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님께 소망을 두는가?신앙은 내가 원하는 때에만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아니라, 예수님의 빛 안에서 끝까지 걸어가는 삶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지체하시는 예수님을 오해하지 않고, 죽음의 자리까지 생명을 가져오시는 주님을 신뢰하며, 그분과 함께 걷는 제자의 길을 선택해야 한다.제자도의 길을 걷는 삶은 무엇인가?How? 1) 하나님의 시간이 늦어 보일 때, 조급한 판단 멈추기 1)-1 기다림의 시간을 즐기자 2) 두려운 자리에서도 예수님의 빛을 따라 한 걸음 걷기 2)-1 예수님을 영접했다면, 우리 각 사람 안에는 빛이 있음을 기억하세요3) 죽음을 마주한다면, 충분히 애도하고 부활의 소망 가지기[참고문헌] 바레트, 찰스 K. 『요한복음 (Ⅱ)』 국제성서주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5).브라운, 레이몬드 E. 『요한복음 I: 표적의 책』 최흥진 역. 앵커바이블 (서울: CLC, 2013).비슬리-머리. 『요한복음』 이덕신 역. Word Biblical Commentary 36 (서울: 솔로몬, 2001).크루즈, 콜린 G. 『요한복음』 배용덕 역.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4 (서울: CLC, 2013).Thompson, Marianne Meye.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1 ed.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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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10.7-15 본이 되는 목자, 예수

    2. 내 삶에 적용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신다(7절). 양이 문을 통과해야 우리 안으로 들어가고 보호를 받는 것처럼, 사람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과 생명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예수님은 여러 길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양들에게 생명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이시다. 그러므로 신앙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뿐이다.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지 않고서는 참된 생명과 구원의 길로 들어갈 수 없다.예수님은 자신보다 먼저 온 자들을 도둑과 강도로 말씀하신다. 그들은 양을 돌보는 데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자들로 자신들의 이득에만 관심이 있다. 반대로 예수님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오셨다(10b절). 여기서 풍성한 생명은 단지 오래 사는 삶이나 물질적으로 넉넉한 삶이 아니다. 풍성한 생명이란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서 누리는 생명이며, 사랑과 기쁨과 평화로 나타나는 삶이고, 마지막 날 부활의 생명으로 완성될 영원한 생명이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믿고 있는가, 아니면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도 내 방식으로 충분히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또 나는 풍성한 생명을 예수님 안에서 찾고 있는가, 아니면 세상이 약속하는 성공과 안정과 인정에서 찾고 있는가? 예수님은 양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지만, 도둑은 양을 이용하고 소모시킨다. 내가 붙드는 어떤 길이 나를 예수님께 더 가까이 이끌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과의 교제와 사랑과 평화를 무너뜨린다면 그것은 생명의 길이 아니라 도둑의 길인 것이다.예수님은 이어서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신다(11, 14절). 선한 목자는 삯꾼과 다르다. 삯꾼은 양이 자기 양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면 양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의 관심은 양의 생명이 아니라 자신의 안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다. 예수님의 목자 되심은 말뿐인 돌봄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드러난 자기희생이다. 예수님은 양을 이용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양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으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선한 목자 곧, 본이 되는 목자이시다.이 지점에서 우리는 우리가 따르는 목자의 모습을 분별해야 한다. 내 욕망은 나에게 좋은 목자인 척하지만 결국 나를 소모시킨다. 세상의 인정은 나를 세워 주는 것 같지만 결국 더 큰 불안으로 몰아넣는다. 자기중심적인 삶은 나를 자유롭게 하는 것 같지만 결국 나를 고립시킨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를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놓으신 목자이시다. 그러므로 나는 나를 이용하는 거짓 목소리를 따라가지 말고, 나를 아시고 사랑하시며 생명으로 이끄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따라야 한다.예수님은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안다”고 말씀하신다. 이 앎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친밀한 관계다.예수님과 양의 관계는 가볍고 일시적인 관계가 아니다. 예수님은 자기 양을 사랑 안에서 아시고, 양은 믿음과 감사와 순종 안에서 그 목자를 알아간다. 참된 신앙은 예수님에 대해 아는 지식을 쌓는 데서 끝나지 않고, 예수님께 알려지고 예수님을 알아가며 그분의 음성에 응답하는 관계로 살아가는 것이다.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예수님을 생명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으로 믿고 있는가? 나는 풍성한 생명을 예수님 안에서 누리고 있는가, 아니면 도둑처럼 나를 소모시키는 것들을 따라가고 있는가? 나는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양인가, 아니면 삯꾼과 도둑의 목소리에 더 익숙한 사람인가? 예수님은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선한 목자이시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며, 나를 생명으로 이끄시는 예수님을 따라가야 한다.그러한 삶을 오늘 어떻게 일굴 수 있을까?How? 1) 예수님이 아닌 다른 문으로 구원을 바랬다면 회개하기 1)-1 내가 예수님보다 더 의지하려는 문이 무엇이었는지 돌아보기 2) 참된 목자와 도둑의 음성 분별하기 2)-1 나를 살리는 목소리가 ‘참된, 본이 되는 목자’의 목소리임3) 예수님을 본받아 한 사람을 살리는 선택하기 3)-1 오늘 만나는 이웃에게, 가족에게 회복의 말 건내기 3)-2 집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섬김 실천하기(ex. 분리수거하기, 밥하기, 정리하기 등)[참고문헌] 바레트, 찰스 K. 『요한복음 (Ⅱ)』 국제성서주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5).브라운, 레이몬드 E. 『요한복음 I: 표적의 책』 최흥진 역. 앵커바이블 (서울: CLC, 2013).비슬리-머리. 『요한복음』 이덕신 역. Word Biblical Commentary 36 (서울: 솔로몬, 2001).크루즈, 콜린 G. 『요한복음』 배용덕 역.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4 (서울: CLC, 2013).폽케스, 엔노 에드자르트. "요한복음." In 취리히성경해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서울: 대한성서공회, 2021.Schnackenburg, R. 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 Translated by Cecily Hastings, Francis McDonagh, David Smith, Richard Foley. Herder's Theologic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2 vols. New York, NY: Crossroad, 1987.Thompson, Marianne Meye.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1 ed.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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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9.1-7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2. 내 삶에 적용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시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제자들은 그 사람을 보며 곧바로 원인을 묻는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자기 죄 때문입니까?, 그의 부모 죄 때문입니까?” 그들에게 이 사람의 고통은 누군가의 죄, 곧 책임을 추적해야 하는 문제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질문의 방향을 바꿔이 사람의 죄도, 그의 부모의 죄도 아닌,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고통받는 사람을 정죄의 대상으로 보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일과 영광이 드러날 자리로 보신다.이 말씀은 오늘 우리의 시선을 돌아보게 한다. 우리도 누군가의 아픔이나 실패를 볼 때 쉽게 원인을 찾으려 한다. “저 사람이 뭘 잘못했길래 저렇게 되었을까?” “저 가정에 무슨 문제가 있었길래 저럴까?”라고 생각하며, 고통받는 사람을 이해하기보다 판단하려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시선을 원인 추적에서 하나님의 일로 옮기신다. 신앙은 누군가의 고통 앞에서 정답을 빨리 내리는 일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어떤 일을 이루실 수 있는지를 바라보는 것이다.예수님은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내가”가 아니라 “우리가”라고 말씀하신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만 하시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함께 참여해야 할 일이다. 제자들은 맹인을 죄의 결과로 해석하려 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사람으로 부르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고통받는 사람을 판단하는 자리에 머물 것이 아니라,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증언하며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예수님은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뒤, 곧바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다. 말씀과 행동이 분리되지 않는다. 예수님은 빛을 선언하실 뿐 아니라 실제로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빛을 가져오신다.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은 단지 육체적으로 보지 못하는 사람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는 본성적으로 빛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의 영적 상태를 보여 준다. 우리는 스스로 본다고 생각하지만, 참 빛이신 예수님이 비추시기 전에는 하나님을 바로 볼 수 없고, 나 자신도 바로 볼 수 없다.예수님은 진흙을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신다. 맹인은 그 말씀을 듣고 간다. 그는 나아만처럼 의심하거나 따지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 그리고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돌아온다. 치유는 실로암 물의 특별한 효능 때문이 아니라, 보내신 분이신 예수님과 그 말씀에 대한 순종 속에서 일어난다. 실로암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는 설명도 이 점을 더 분명히 한다. 맹인을 고친 것은 물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분이신 예수님이다.이 말씀은 나에게 묻는다. 나는 고통받는 사람을 볼 때 원인을 따지는 사람인가, 아니면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일을 바라보는 사람인가? 나는 예수님을 세상의 빛으로 믿으면서도 여전히 내 판단과 편견의 어둠 속에 머물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하나님의 일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지는 않은가?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나는 누군가의 아픔 앞에서 판단을 멈추고, 빛이신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의 일에 참여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되지 않을 때에도, 실로암으로 간 맹인처럼 말씀에 순종하며 한 걸음 나아가야 한다.예수님의 제자된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How? 1) 정죄함으로 하나님의 일하심 막지 않기 1)-1 내가 누군가를 정죄한 적이 있다면 회개해야 함 2) 나도 하나님의 사역을 해야 하는 것 기억하기 2)-1 내 삶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드러낼지 고민하고 실천하기3) 나를 통해 하나님이 일하실 때 내가 잘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뛰어나신 것을 인지하고 찬양하기 3)-1 능력이 일어난다고 스스로를 높이는 자에게 미혹되지 말 것 3)-2 실로암 못에 능력이 있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능력이 있던 것임.[참고문헌] 바레트, 찰스 K. 『요한복음 (Ⅱ)』 국제성서주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5).브라운, 레이몬드 E. 『요한복음 I: 표적의 책』 최흥진 역. 앵커바이블 (서울: CLC, 2013).비슬리-머리. 『요한복음』 이덕신 역. Word Biblical Commentary 36 (서울: 솔로몬, 2001).크루즈, 콜린 G. 『요한복음』 배용덕 역.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4 (서울: CLC, 2013).Michaels, J. Ramsey. The Gospel of John.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10.Thompson, Marianne Meye.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1 ed.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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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8.37-41a, 44-47 말과 행동이 일치되는 신앙

    2. 내 삶에 적용오늘 본문은 믿음을 저버린 유대인과 예수님과의 논쟁이다.예수님은 유대인들이 혈통상 아브라함의 후손인 것은 부정하지 않으신다.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행동에 근거하여 그들의 진정한 아버지가 아브라함이 아닌마귀임을 밝히신다. 본문은 참된 자녀됨이 단순한 혈통이나 소속으로 결정되지 않음을 보여주며누구에게 속했는지는 무엇을 듣고 무엇을 행하는가를 통해 드러나는 것을 보여준다.유대인들은 입으로는 아버지가 아브라함이라고 주장하지만,행동으로는 아브라함의 행위와는 정반대로 행함으로써 자신들의 참된 아버지가 아브라함이 아님을 주장하고 있다.즉,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사자들을 알아보고 대접했지만,이와 달리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죽이려 하고 있다.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이러한 역설을 꿰뚫어 보신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아버지를 ‘마귀’로 정의하신다. 이것은 유대인을 민족적으로 정죄하는 말이 아니라, 진리를 거부하고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영적 상태를 드러내는 말씀이다.이러한 예수님의 판단은 오늘 우리의 신앙을 비춘다. 우리도 교회에 속해 있고, 신앙의 언어를 사용하고, 오랜 시간 말씀을 들어 왔다는 이유로스스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소속의 이름보다말씀이 내 안에 실제로 자리하고 있는지를 물으신다. 또한 그것이 실제 삶 속에서의 실천으로 나타나야 한다.예수님의 말씀이 내 안에 있을 곳이 없다면, 또 삶이 이전과 동일하다면,나는 신앙의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내 욕망과 고집과 거짓의 소리를 따라 살고 있는 것이다. 믿음은 내가 누구의 자녀라고 주장하는 데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의 말을 듣고 누구의 일을 행하는가에서 드러난다.유대인과 달리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보이신 것을 말하시는 분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아버지께로부터 온 진리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바로 그 진리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 그들의 문제는 증거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받아들일 마음이 없는 것이다.진리는 때로 내 욕심을 드러내고, 내가 붙들고 싶은 거짓을 무너뜨리며, 내 안의 살해적 태도를 폭로한다. 그래서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진리를 듣고도 믿지 않고, 오히려 진리를 말하는 사람을 밀어내려 한다.이 지점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나는 예수님의 말씀이 나를 고치도록 자리를 내어 주고 있는가, 아니면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내 생각과 감정과 욕망으로 막고 있는가? 내가 불편한 말씀을 들을 때, 회개로 반응하는가 아니면 방어와 분노로 반응하는가? 누군가가 진실을 말할 때, 그 말을 통해 나를 돌아보기보다 그 사람을 미워하고 깎아내리려 하지는 않는가? 본문이 말하는 마귀의 일은 단지 극단적인 살인만이 아니라, 진리를 거부하고 거짓을 붙들며 생명을 무너뜨리는 모든 태도 속에서도 드러날 수 있다.예수님은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소리가 귀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많이 들었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이 내 안에서 자리를 얻고 내 삶을 변화시키고 있는가이다. 말씀을 듣고도 변화되지 않는다면, 나는 하나님께 속했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다른 소리에 더 깊이 붙들려 있는 것이다.오늘 본문은 나에게 묻는다. 나는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주장하듯 신앙의 이름만 붙들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인가? 예수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할 자리가 있는가, 아니면 내 욕망과 거짓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나는 진리를 말하는 예수님께 순종하는가, 아니면 진리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그 말씀을 밀어내고 있는가?신앙은 내가 하나님께 속했다고 주장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의해 살아가는 삶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예수님의 말씀이 내 안에 자리하도록 마음을 열어야 한다. 내 욕심과 거짓의 소리를 따라 살지 않고, 아버지께로부터 온 진리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한다.ps. 오늘 본문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었던 자들로, 마귀의 속삭임에 넘어간 자들임. 따라서 마귀의 그런 참소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는 말씀과 기도로 늘 무장해야 함.아버지께로부터 온 진리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의 삶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How? 1)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시간 따로 내어드리기 2) 분별이 잘 안 될 땐 멈춰서 기도하기 2)-1 교회의 전도사님, 목사님 활용하기3) 하나님 눈치 보면서 지었던 매우 구체적인 죄, 오늘 회개하기[참고문헌] 바레트, 찰스 K. 『요한복음 (Ⅱ)』 국제성서주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5).브라운, 레이몬드 E. 『요한복음 I: 표적의 책』 최흥진 역. 앵커바이블 (서울: CLC, 2013).비슬리-머리. 『요한복음』 이덕신 역. Word Biblical Commentary 36 (서울: 솔로몬, 2001).크루즈, 콜린 G. 『요한복음』 배용덕 역.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4 (서울: CLC, 2013).폽케스, 엔노 에드자르트. "요한복음." In 취리히성경해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서울: 대한성서공회, 2021.Thompson, Marianne Meye.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1 ed.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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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8.31-36 끝까지 간다

    2. 내 삶에 적용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믿었다고 보도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된다”고 하신다. 즉, 그들이 처음 신앙을 저버린 것을 예수님은 아신 것이다. 참 제자는 한순간 믿음의 언어를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 안에 계속 머물며 그 말씀에 의해 살아가는 사람이다. 믿음은 시작만이 아니라 끝까지 말씀 안에 거하는 것으로 드러난다.예수님께서 말씀 안에 거하라고 하신 이유는 그 말씀 안에서 진리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씀처럼, 말씀 안에 거하는 사람은 단순히 성경 지식을 쌓는 데서 멈추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과 자유를 경험한다. 말씀을 붙들 때 우리는 죄와 심판과 어둠과 사망의 권세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구원의 길을 보게 된다.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자유에 관한 말씀을 오해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자유는 혈통과 언약적 특권에서 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자랑을 죄의 문제 앞에서 다시 해석하신다. 제 아무리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부해도, 죄를 범하는 자는 죄의 종이다. 참된 자유를 가로막는 것은 외적인 조건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죄의 종살이다.이 말씀은 오늘 우리의 신앙을 비춘다. 우리도 내가 가진 신앙의 배경, 교회 생활, 직분, 성경 지식, 오래된 신앙 경험을 자유의 근거로 착각할 수 있다. 나는 이미 믿는 사람이고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무는 삶은 놓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처음 믿었다는 사실보다 지금도 그 말씀 안에 거하고 있는지를 물으신다. 말씀을 듣지만 순종하지 않고, 신앙의 이름은 있지만 죄의 습관에 매여 있다면, 우리는 자유롭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죄의 종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예수님은 죄의 종 된 인간이 스스로 자유를 얻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하신다. 종은 집에 영원히 거하지 못하지만, 아들은 영원히 거한다. 자유는 종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거하시는 아들이 주시는 선물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고 말씀하신다. 참된 자유는 내 의지력이나 종교적 자부심에서 오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죄의 종 된 나를 해방시키실 때 주어진다.오늘 본문은 내게 묻는다. 나는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참 제자인가, 아니면 잠시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말씀 앞에서 반발하는 거짓된 제자인가? 나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된 자유를 구하는가, 아니면 신앙의 배경과 경험을 붙들고 자유롭다고 착각하는가?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죄의 노예 상태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가?신앙은 시작만 하고 멈추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 안에 끝까지 거하는 삶이다. 그러므로 나는 스스로 자유롭다고 착각하지 말고, 오늘도 말씀 안에 머물러야 한다. 그리고 죄의 종살이에서 나를 자유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의지해야 한다.죄의 종에서 벗어난 우리의 삶은 어때야 하는가?How? 1) 한 순간‘만’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영원히 예수님의 제자이길 노력하기1)-1 예수님은 우리를 쫓아내지 않으시지만,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는 있음1)-2 그렇기에 늘 말씀으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회복하기 2) 내가 진정 자유로워지기 위해 하루에 5분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기 2)-1 버스, 지하철, 택시, 자동차, 자기 전 침대 위 등 어느 곳에서도 가능3) 오늘 하루 “예수님이 나를 자유케 하셨다”라고 3번 고백하기[참고문헌] 바레트, 찰스 K. 『요한복음 (Ⅱ)』 국제성서주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5).브라운, 레이몬드 E. 『요한복음 I: 표적의 책』 최흥진 역. 앵커바이블 (서울: CLC, 2013).비슬리-머리. 『요한복음』 이덕신 역. Word Biblical Commentary 36 (서울: 솔로몬, 2001).크루즈, 콜린 G. 『요한복음』 배용덕 역.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4 (서울: CLC, 2013).Bultmann, Rudolf. The Gospel of John: A Commentary. Translated by G.R. Beasley-Murray. Edited by R.W.N. Hoare, J.K. Riches. Philadelphia, PA: Westminster Press, 1971.Dodd, C.H. Historical Tradition in the Fourth Gospel. Lond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3.Thompson, Marianne Meye.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1 ed.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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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8.21-30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2. 내 삶에 적용오늘 본문의 22절, 25절, 27절을 통해 우리는 계속되는 오해와 믿기를 거부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다”고 말씀하신다.이 말의 참 의미는 예수님이 죽음을 통해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는 일을 가리킨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그가 자결하려는가”라고 오해한다(22절).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말씀하시지만, 그들은 계속 땅의 차원에서만 생각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예수님은 그들의 오해가 단순한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그들이 속한 세계의 문제임을 드러내신다.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 유대인들은 아래에 속한 자의 시선으로 예수님을 판단하고 있었고, 그래서 위로부터 오신 예수님의 정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의 문제는 예수님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죄는 단순히 여러 잘못들의 목록이 아니라, 예수님을 부인하고 믿지 않는 근본적인 불신앙을 가리킨다.이 말씀은 오늘 우리의 신앙도 비춘다.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여전히 아래의 기준으로만 해석할 때가 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보다 내 현실이 어떻게 풀릴지에 더 관심을 두고, 예수님의 뜻보다 내가 원하는 답을 먼저 찾으려 한다. 그러나 이렇게 예수님을 아래의 기준으로만 이해하려 하면,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분을 내 세계 안에 가두게 된다. 예수님은 내 필요를 채워 주는 수단이 아니라, 위로부터 오신 생명의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은 예수님을 내 기준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내 기준이 깨어지는 것이다.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내가 그다”라는 말씀을 듣고도 “네가 누구냐”고 묻는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미 자신을 드러내셨음에도, 그 말씀 속에 담긴 참된 의미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예수님은 자신이 스스로 말하고 행동하는 분이 아니라, 보내신 아버지께 들은 것을 말하고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행하시는 분이라고 밝히신다. 예수님의 정체와 가르침은 모두 아버지께 근거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모른다는 것은 결국 아버지를 모른다는 뜻이고,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한다는 것은 아버지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과 같다.이 지점에서 우리는 신앙의 익숙함을 점검해야 한다. 말씀을 오래 들었다고 해서 반드시 예수님을 바로 아는 것은 아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과 대화하고 있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이 가리키는 아버지를 깨닫지 못했다. 우리도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듣고 신앙의 언어를 사용하지만, 정작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을 수 있다. 말씀을 듣고도 순종하지 않으면, 그것은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일 수 있다.예수님은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신다. 인자가 들린다는 것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포함하는 사건이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의 참된 정체를 깨닫게 되는 때는 이미 예수님을 거절하고 난 뒤이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두려운 경고다. 지금 믿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믿지 않으면, 나중에 깨닫는 것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아니, ‘예수님 잃고 신앙 고치기’가 될 수 있다. 예수님이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 아직 초청이 열려 있을 때, 우리는 그분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오늘 본문은 나에게 묻는다. 나는 예수님을 위로부터 오신 생명의 주님으로 믿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아래의 기준으로 예수님을 판단하고 있는가? 예수님의 지금 자신을 믿으라는 초청에 ‘아 주님, 나중에요’라고 미루지는 않는가?그러므로 나는 더 늦기 전에, 내 기준과 오해를 내려놓고 예수님께 나아가야 한다. 신앙은 나중에 깨닫고 후회하는 삶이 아니라, 지금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며, 부활의 기쁨에 동참하고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실천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내가 선 곳에서부터 이루는 삶이다.그렇다면, 후회 없는 신앙 생활을 위해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할까?How? 1) “이 정도면 충분하지”라는 생각 넣어놓고, 최선을 다하기 1)-1 나의 직장, 가정, 교회라는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주님으로부터 힘을 얻는 것 2) 오늘 하루 미뤘던 일, 하나 해결하기3) 교회 공동체를 위해 오늘 5분간 기도하기[참고문헌] 바레트, 찰스 K. 『요한복음 (Ⅱ)』 국제성서주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5).브라운, 레이몬드 E. 『요한복음 I: 표적의 책』 최흥진 역. 앵커바이블 (서울: CLC, 2013).비슬리-머리. 『요한복음』 이덕신 역. Word Biblical Commentary 36 (서울: 솔로몬, 2001).크루즈, 콜린 G. 『요한복음』 배용덕 역.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4 (서울: CLC, 2013).폽케스, 엔노 에드자르트. "요한복음." In 취리히성경해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서울: 대한성서공회, 2021.Thompson, Marianne Meye.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1 ed.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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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7.45-52 자기 객관화

    2. 내 삶에 적용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잡으러 갔던 아랫사람들이 빈손으로 돌아오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그들은 예수님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고 갔지만, 예수님을 붙잡아 오지 못했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기 때문입니다.이는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단순한 사람의 말로 듣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의 임무를 멈추게 할 만큼 강한 권위를 지닌 말씀이었고, 그 권위 앞에서 그들은 예수님을 함부로 체포할 수 없었다.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 반응을 보고도 예수님의 말씀 앞에 서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아랫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압도된 것을 믿음의 가능성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미혹당한 것으로 몰아간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가진 진리성이 아니라, 자신들이 세워 놓은 종교적 판단과 권위가 유지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고 말하며 자신들의 판단을 진리의 기준처럼 내세운다.이 모습은 오늘 우리의 신앙을 비춘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이 나를 흔들고 찌르면 말씀 앞에 엎드리기보다 먼저 방어하려 할 때가 있다. 말씀의 권위가 나를 바꾸도록 허용하기보다, 내가 이미 가진 기준과 경험과 신학적 확신으로 말씀을 통제하려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가 아니라, 그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순종할 수 있는가이다.바리새인들의 교만은 무리를 향한 멸시에서도 드러난다. 그들은 예수님과 그를 믿는 무리를 “율법을 알지 못하는 저주받은 자”로 규정한다. 자신들은 율법을 알고 있고, 무리는 무지하기 때문에 잘못된 길로 간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이들의 태도를 아이러니하게 드러낸다. 율법을 안다고 자부한 그들이 오히려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율법의 기본적인 원칙조차 지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이 지점에서 니고데모가 등장한다. 그는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따르는 제자처럼 행동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율법의 절차를 근거로 성급한 정죄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의 말은 거창한 신앙고백은 아니지만, 바리새인들의 판단이 율법적으로도 정당하지 않음을 드러낸다. 하나님을 말하고 율법을 말하는 사람이라도, 자기 객관화가 안 되어 있다면자기 확신과 집단적 편견에 갇혀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수 있는 것이다.우리 역시 신앙의 이름으로 사람을 쉽게 판단할 수 있다. 내가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더 바른 전통과 기준 위에 서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믿음과 반응을 가볍게 무시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위험한 것은 무지 자체보다, 자신이 알고 있다고 확신하면서도 말씀의 정신을 잃어버리는 교만이다. 신앙의 지식이 사랑과 공의와 겸손으로 이어지지 않을 때, 그것은 사람을 살리는 도구가 아니라 사람을 정죄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그들의 마지막 반응은 더 노골적이다. 니고데모의 말에 논리적으로 답하지 못하자, 그들은 갈릴리를 조롱한다. 예수님을 제대로 살펴보려 하기보다, 출신 지역에 대한 편견으로 문제를 덮어 버린다. 결국 그들은 진리를 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편견을 지키기 위해 진리를 보는 것을 선택하지 않은 것이다.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의 권위 앞에 멈추는 사람인가, 아니면 내 기준을 지키기 위해 말씀을 밀어내는 사람인가? 나는 신앙의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내가 가진 편견 때문에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을 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예수님의 말씀은 지금도 사람을 멈추게 하는 권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 앞에서 먼저 겸손해야 한다. 내가 아는 것, 내가 가진 기준, 내가 속한 집단의 판단을 절대화하기보다, 예수님의 말씀이 나를 판단하고 새롭게 하도록 자신을 열어야 한다. 신앙은 내가 옳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내가 먼저 고쳐지는 일이다.How? 1) 말씀으로 나 자신을 객관화하기 1)-1 말씀 앞에 불편함이 올라온다면 방어나 변명하지 말고 “주님 제가 고쳐야 할 부분을 보여주세요”라고 고백하기. 2) 신앙의 지식으로 동역자 정죄하지 않기3) 내 생각보다 더 크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기[참고문헌] 바레트, 찰스 K. 『요한복음 (Ⅱ)』 국제성서주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5).브라운, 레이몬드 E. 『요한복음 I: 표적의 책』 최흥진 역. 앵커바이블 (서울: CLC, 2013).비슬리-머리. 『요한복음』 이덕신 역. Word Biblical Commentary 36 (서울: 솔로몬, 2001).크루즈, 콜린 G. 『요한복음』 배용덕 역.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4 (서울: CLC, 2013).Michaels, J. Ramsey. The Gospel of John.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10.Talbert, Charles H. Reading John: A Literary and Theological Commentary on the Fourth Gospel and the Johannine Epistles. Reading the New Testament Revised ed. Macon, GA: Smyth & Helwys Publishing, 2005.Thompson, Marianne Meye.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1 ed.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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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7.37-39 생수의 근원 예수, 그리고 나

    2. 내 삶에 적용오늘 본문은 초막절 마지막 날, 곧 명절의 가장 중요한 날에 예수님께서 외치신 말씀을 다룬다. 초막절의 7일차에 시행되던 물 붓기 의식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비와 생명과 구원을 주시기를 구하는 상징적 행위였다. 사람들은 성전에서 물을 붓는 의식을 보며 하나님이 주실 생명과 구원, 성령을 기대했다. 그런데 바로 그 절정의 자리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시선을 성전의 의식이 아니라 자신에게로 돌리신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예수님의 이 초청은 단순한 종교적 위로나 일시적인 갈증 해소를 말하지 않는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스스로 생명을 채울 수 없는 존재다. 세상의 물로 잠시 목을 축일 수는 있지만, 하나님을 향한 근원적인 갈증은 해결할 수 없다. 성전의 물 붓기 의식이 생명과 구원을 상징했다면, 예수님은 그 상징이 가리키던 참된 실체가 자신이심을 드러내신다. 참된 생수, 곧 성령은 성전 의식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전이신 예수님 자신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다.이 말씀의 선언은 오늘 우리에게 선포된다. 우리도 목마름을 느낄 때 예수님께 나아가기보다 다른 물을 찾을 때가 많다. 인정, 성공, 관계, 돈, 안정감, 종교적 습관으로 내 안의 갈증을 채우려 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잠시 갈증을 잊게 할 수는 있어도 생명을 주지는 못한다. 예수님은 목마른 자에게 더 많은 의식이나 자격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자신에게 와서 마시라고 초청하신다.예수님은 이어서 자신을 믿는 자에게서 성경이 말한 것처럼 생수의 강이 흘러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생수는 성령을 가리킨다. 성령의 근원은 언제나 예수님이시지만, 예수님께 나아와 그를 믿는 자는 성령을 받아 생수의 강처럼 흘려보내는 사람이 된다. 참된 믿음은 내 갈증만 채우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예수님께 받은 생명은 내 안에서 흘러나와 다른 사람에게도 생명의 영향을 끼치게 된다.우리가 누리는 성령의 생명은 값싼 감정적 체험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승천을 통해 열린 구원의 선물이다. 성령은 예수님 없이 따로 주어지는 능력이 아니라, 영광 받으신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생명의 선물이다.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구한다고 말하면서도 예수님 없이 능력만 구하는 신앙을 경계해야 한다. 성령은 나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나를 예수님께로 더 깊이 이끌고 예수님의 생명을 흘려보내게 하시는 분이다. 성령 충만은 단순히 뜨거운 감정이나 특별한 체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목마른 내가 예수님께 나아가 생수를 마시고, 그 생명이 내 삶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흘러가게 하는 것,즉 삶 속에서의 실천을 통해 완성된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내 목마름을 가지고 정말 예수님께 나아가고 있는가? 나는 예수님이 아닌 다른 물로 내 갈증을 채우려 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성령을 받은 사람답게 생명의 물을 흘려보내는 삶을 살고 있는가? 예수님은 오늘도 목마른 자를 부르신다. “내게로 와서 마시라.”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물을 찾아 헤매는 삶을 멈추고,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님께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영광 받으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성령 안에서, 우리 안에 받은 생명을 다른 사람에게 흘려 보내는 삶을 살아야 한다.예수님의 생수를 마신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How? 1) 인정, 돈, 관계, 안정감으로 내 갈증을 채우려 하기 전에 먼저 기도하기 2) 성령 충만을 구할 때, 내 문제 해결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과 생명이 내 삶에서 흘러가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기.3) 내 안에 고인 신앙이 아니라 흘러가는 신앙으로 살기 3)-1 받은 은혜가 있다면, 혼자 간직하는 것에서 주변에게 나누기[참고문헌] 바레트, 찰스 K. 『요한복음 (I)』 국제성서주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01).브라운, 레이몬드 E. 『요한복음 I: 표적의 책』 최흥진 역. 앵커바이블 (서울: CLC, 2013).비슬리-머리. 『요한복음』 이덕신 역. Word Biblical Commentary 36 (서울: 솔로몬, 2001).크루즈, 콜린 G. 『요한복음』 배용덕 역.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4 (서울: CLC, 2013).폽케스, 엔노 에드자르트. "요한복음." In 취리히성경해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서울: 대한성서공회, 2021.Bernard, J.H.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 The International Critical Commentary Vol. 1, Edinburgh: T&T Clark, 1928.Boismard, M.E. Du Baptême à Cana: (Jean 1,19 - 2,11). Lectio Divina 18; Paris: Les Edition du Cerf, 1956.Bultmann, Rudolf. The Gospel of John: A Commentary. Translated by G.R. Beasley-Murray. Edited by R.W.N. Hoare, J.K. Riches. Philadelphia, PA: Westminster Press, 1971.Dodd, C.H. The Interpretation of the Fourth Gospel. Lond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53.Schnackenburg, R. 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 Translated by Cecily Hastings, Francis McDonagh, David Smith, Richard Foley. Herder's Theologic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2 vols. New York, NY: Crossroad, 1987.Thompson, Marianne Meye.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1 ed.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5.

  46. 36

    요한복음 7.31-36 '나중에'는 위험해

    2. 내 삶에 적용오늘 본문은 예수님을 향한 두 가지 반응을 보여준다. 한쪽에는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을 보고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이보다 더 많은 표적을 행하시겠느냐”고 말하며 예수님을 믿는 무리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그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잡으려는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이 있다. 같은 예수님의 표적을 두고도 누군가는 그분이 누구신지를 향해 나아가지만, 누군가는 오히려 그분을 제거하려 한다. 예수님의 행위는 그의 메시아적 정체성을 증언하지만, 그 증언 앞에서 모든 사람이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은 아니다. 표적은 믿음을 낳을 수도 있지만, 동시에 완악한 자들의 적대감을 더 드러내기도 한다.이 모습은 오늘 우리의 신앙을 정면으로 비춘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보면서도 그분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보다, 오히려 내 기준과 질서가 흔들린다는 이유로 불편해할 수 있다. 예수님이 내 삶을 위로하고 도와주실 때는 쉽게 받아들이지만, 그분이 내 생각과 계획을 깨뜨리실 때는 마음속에서 그분을 밀어내려 한다. 결국 문제는 예수님의 표적이 부족한 데 있지 않다. 문제는 예수님의 행위가 드러내는 그분의 정체를 내가 믿음으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내 기준과 지위를 지키기 위해 거부하느냐에 있다.그런 적대감 앞에서 예수님은 흔들리지 않으신다.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이 아랫사람들을 보내 예수님을 잡으려 하지만, 예수님은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운명은 사람들의 음모나 종교 지도자들의 체포 시도에 달려 있지 않다. 예수님은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께로부터 오셨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시간은 인간의 분노와 계획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 안에서 움직인다.이 사실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기준을 준다. 우리는 종종 사람들의 반응과 상황의 압박이 내 인생을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누가 나를 반대하는지, 어떤 환경이 나를 막는지, 어떤 문제가 나를 붙들고 있는지에 마음을 빼앗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손에 붙들려 끌려가는 분이 아니셨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 안에서 자신의 길을 걸어가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사람의 시선과 상황의 위협보다, 하나님이 정하신 뜻과 때를 더 신뢰해야 한다.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동시에 엄중한 경고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은 무한정 열려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듣지 않고, 지금 예수님이 자신을 계시하실 때 믿지 않으면, 나중에는 찾고 싶어도 찾지 못하는 시간이 올 수 있다. 예수님을 거부한 자들은 결국 예수님이 계신 곳, 곧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없다.그러므로 신앙에서 가장 위험한 태도는 “나중에”라는 말이다. 나중에 회개하겠다고 말하고, 나중에 순종하겠다고 말하고, 나중에 예수님께 더 가까이 가겠다고 말한다. 본문은 예수님을 미루는 것이 단순한 지연이 아니라 불신앙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예수님께서 지금 말씀하실 때 듣고, 지금 부르실 때 반응해야 한다. 믿음은 언젠가의 결심이 아니라, 지금 내 앞에 계신 예수님께 응답하는 것이다.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님이 “내가 있는 곳에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예수님이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나 헬라인들에게 가서 가르치려는 것으로 생각한다.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셨고하나님께로 돌아가신다는 계시였지만, 그들은 여전히 땅의 차원에서만 예수님을 이해했다. 예수님의 정체는 그의 이동 경로나 출신을 따진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이 오해는 오늘 우리에게도 반복된다. 우리는 예수님을 안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그분을 땅의 차원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을 내 문제를 해결해 주는 분, 내 종교적 안정감을 지켜 주는 분, 내 필요를 채워 주는 분 정도로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충분히 보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설명하고 통제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계시자이시며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을 보고 그분이 누구신지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이 내 양심을 찌르기에 마음속에서 그분을 밀어내고 있는가? 나는 예수님께서 지금 부르실 때 반응하고 있는가, 아니면 언젠가 다시 찾으면 된다고 미루고 있는가? 나는 예수님을 땅의 차원에서만 이해하려 하는가, 아니면 그분을 보내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는가?예수님은 인간의 계획에 붙들리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내 생각과 기준 안에 가두려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들어야 하고, 예수님께서 부르실 때 믿음으로 반응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을 미루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지금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믿음이다.“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미루지 않기 위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How? 1) 믿음의 동역자와 선배들과 대화하며 하나님에 대한 식견 넓히기 1)-1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체험해보는 것 2) ‘나중에 해야지’ 대신 “오우 이거 개꿀잼이네?”하고 지금 시작하기 2)-1 개꿀잼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말하고 시작하는 것3)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위해 매일 아침 기도와 말씀으로 시작하기3)-1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 한 가지 적고 실천하기[참고문헌] 바레트, 찰스 K. 『요한복음 (Ⅱ)』 국제성서주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5).브라운, 레이몬드 E. 『요한복음 I: 표적의 책』 최흥진 역. 앵커바이블 (서울: CLC, 2013).비슬리-머리. 『요한복음』 이덕신 역. Word Biblical Commentary 36 (서울: 솔로몬, 2001).크루즈, 콜린 G. 『요한복음』 배용덕 역.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4 (서울: CLC, 2013).폽케스, 엔노 에드자르트. "요한복음." In 취리히성경해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서울: 대한성서공회, 2021.Bultmann, Rudolf. The Gospel of John: A Commentary. Translated by G.R. Beasley-Murray. Edited by R.W.N. Hoare, J.K. Riches. Philadelphia, PA: Westminster Press, 1971.de Boer, Martinus C.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The International Critical Commentary Vol. 1, London, New York, Oxford, New Delhi, Sydney: T&T Clark, 2025.Martyn, J. Louis. History and Theology in the Fourth Gospel. The New Testament Library 3 ed. Louisville, London: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3.Meeks, Wayne A. The Prophet-King: Moses Traditions and the Johannine Christology. Supplements to Novum Testamentum 14; Leiden: E.J. Brill, 1967.Thompson, Marianne Meye.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1 ed.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5.

  47. 35

    요한복음 6.66-71 “너희도 가려느냐”

    2. 내 삶에 적용오늘 본문은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난 뒤의 장면이다. 그들은 예수님과 아무 상관없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표적을 보았고, 예수님을 따라다녔으며,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들이 기대하던 방식과 달라지고, 더 이상 자신들의 욕망을 채워 주는 말씀으로 들리지 않자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걷는 길을 포기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처럼 보였지만, 정작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는 끝까지 머물지 못한 것이다.이러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신다.“너희도 가려느냐”(67절). 이 질문은 단순히 제자들의 마음을 확인하는 질문이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사람은 끝까지 중립에 머물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질문이다. 많은 제자들이 떠난 것처럼 열두 제자도 떠날 수 있다. 표적을 보았다는 사실, 예수님 가까이에 있었다는 사실, 제자의 무리 안에 있었다는 사실이 끝까지 예수님께 머무는 믿음을 저절로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사람은 떠나는 자가 되든지, 남는 자가 되든지 해야 한다.이 질문 앞에서 베드로는 열두 제자를 대표하여 고백한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68절) 베드로가 붙든 것은 더 쉬운 길도 아니고, 더 많은 떡도 아니고, 더 큰 표적도 아니었다. 그는 예수님께 영생의 말씀이 있음을 보았다. 그래서 떠나는 사람들의 흐름 속에서도 예수님께 남을 수 있었다. 참된 제자는 예수님이 주시는 유익 때문에 남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께만 영생의 말씀이 있음을 알기에 남는 사람이다.그러므로 신앙은 예수님이 내 기대에 맞아떨어질 때만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나를 불편하게 하고, 내 욕망을 꺾고, 내가 원하던 길과 다른 길로 이끌 때에도 그 말씀만이 생명을 주는 말씀임을 믿고 머무는 것이다. 예수님이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신다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해하지 못해도 “주께 영생의 말씀이 있다”고 고백하며 그분께 붙어 있는 것이 믿음이다.베드로는 이어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로 고백한다. 이는 예수님을 단순한 선생이나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거룩하신 구원자로 인정하는 놀라운 고백이다. 예수님께 남는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 공동체 안에 남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룩하신 분께 나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영생의 말씀을 가진 분이 예수님이시며, 하나님께 속한 거룩하신 분이 예수님이시기에, 그분을 떠나서는 갈 곳이 없다는 고백이 참된 제자의 고백이다.이러한 베드로의 모습은 참되고 흔들리지 않는 예수님의 제자가 지녀야 할 올바른 태도를 보여 주는 본보기가 된다. 그러나 본문은 베드로의 고백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예수님은 열둘을 택하셨지만,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마귀라고 말씀하신다. 가룟 유다는 열둘 중 하나였고, 예수님 가까이에 있었으며, 제자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예수님을 팔 자였다. 이것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는 자리 가까이에 있어도, 욕심과 불신실함이 사람을 배반의 길로 끌고 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신앙의 자리, 직분, 공동체 안의 소속이 참된 순종을 대신할 수는 없다.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유다에게 속으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택한 열둘 가운데 누가 자신을 팔 자인지 알고 계셨다. 사람은 겉모습과 소속으로 자신을 포장할 수 있지만, 예수님은 누가 진정으로 자신께 속했는지 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예수님 곁에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으로 안심해서는 안 된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예수님께 속한 사람인가, 예수님의 말씀 앞에 끝까지 머무는 사람인가 하는 것이다.이 말씀은 오늘 우리의 신앙을 정면으로 비춘다. 우리도 예배의 자리에 있고, 말씀을 듣고,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안전하다고 여길 수 없는 것이다.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이 내 기대와 맞지 않을 때, 예수님이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일하지 않으실 때, 내 욕심을 내려놓으라고 말씀하실 때 마음으로는 얼마든지 예수님을 떠날 수 있다. 겉으로는 여전히 남아 있어도, 실제로는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걷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사람인가, 아니면 예수님께 속한 사람인가?나는 예수님의 말씀이 어려워질 때 떠나는 사람인가, 아니면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음을 믿고 남는 사람인가? 나는 신앙의 자리와 직분과 익숙한 종교생활로 나를 안심시키고 있지는 않은가?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문은 오늘 우리를 향해 똑같이 던져진다.“너희도 가려느냐.” 이 질문에 대한 중립적 입장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베드로처럼 고백해야 한다. “하나님! 하나님 말고 누가 우리의 구원자이겠습니까?” 예수님께 영생의 말씀이 있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시기에, 우리는 떠나는 자가 아니라 끝까지 그분께 머무는 제자도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그러한 제자도의 길을 어떻게 삶 속에서 걸어갈 수 있을까?How? 1) 세상이 나를 억까해도, 예수님에게서 떠나지 않기1)-1 오직 영생의 말씀, 생명의 떡은 예수님이시기에 예수님으로부터 힘을 얻자2) 날마다 생명의 말씀에 귀 기울이기2)-1 늘 새롭게 아침마다 말씀으로 하나님께 힘을 얻어야 함(사 50:4)2)-1 아침묵상을 못하더라도 최소 성경 어플에서 띄워 주는 말씀 한 구절 읽기3) 내 ‘욕심’을 하나님보다 위에 두지 않기 3)-1 매일 아침 ‘주님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으로 하루를 시작하기3)-2 내 욕심을 점검하고 그 위에 말씀을 선포하자[참고문헌] 바레트, 찰스 K. 『요한복음 (I)』 국제성서주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01).브라운, 레이몬드 E. 『요한복음 I: 표적의 책』 최흥진 역. 앵커바이블 (서울: CLC, 2013).비슬리-머리. 『요한복음』 이덕신 역. Word Biblical Commentary 36 (서울: 솔로몬, 2001).크루즈, 콜린 G. 『요한복음』 배용덕 역.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4 (서울: CLC, 2013).폽케스, 엔노 에드자르트. "요한복음." In 취리히성경해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서울: 대한성서공회, 2021.de Boer, Martinus C.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The International Critical Commentary Vol. 1, London, New York, Oxford, New Delhi, Sydney: T&T Clark, 2025.Thompson, Marianne Meye.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1 ed.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5.

  48. 34

    요한복음 6.35-40 생명의 떡, 예수

    2. 내 삶에 적용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신지를 분명하게 선언하신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35절)앞에서 무리들은 계속해서 하늘에서 오는 떡을 요구했지만, 예수님은 참된 떡이 물질이나 기적의 산물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 자신임을 밝히신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고,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 이는 인간의 깊은 결핍, 곧 하나님을 알고 생명을 얻고자 하는 근원적인 주림과 목마름이 예수님 안에서만 참되게 충족된다는 뜻이다.그러나 본문은 동시에 무리의 불신앙을 드러낸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았지만 믿지 않았다. 오병이어의 표적을 보았고, 떡을 먹었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참되고 신뢰할 만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들은 표적을 통해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께 이끌려야 했지만, 그들은 예수님 자신보다 예수님이 계속 채워 줄 떡에 더 마음을 두었다.이 모습은 오늘 우리의 신앙을 정면으로 비춘다. 우리도 말씀을 듣고, 은혜를 경험하고, 예배의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예수님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믿지 않을 수 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보다 예수님이 내 필요를 얼마나 채워 주시는지에 더 민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신앙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이라기보다, 예수님이 주시는 유익만 붙드는 기복 신앙일 뿐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지만, 단지 우리의 필요를 해결하기 위해 존재하는 분은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시다.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렇게 보고도 믿지 않는 인간의 완악함 앞에서도 구원의 주도권이 아버지께 있음을 밝히시며 예수님은 놀라운 선언을 하신다.‘내게 오는 자는 아무도 내쫓지 않을 것이다.’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주시는 자는 다 예수님께로 올 것이며, 예수님께 오는 자는 결코 내쫓기지 않는다. 사람은 밀어낼 수 있고, 공동체는 쫓아낼 수 있으며, 내 죄와 연약함은 나 자신을 자격 없는 사람처럼 느끼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는 결코 내쫓기지 않는다.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이유도 분명하다. 예수님은 자기 뜻을 행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 오셨다. 그 뜻은 예수님께 주신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내 감정의 상태나 결심의 강도에만 달려 있지 않다. 아버지의 뜻과 아들의 순종 안에 붙들려 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잃어버리지 않으시며, 마지막 날 그들을 다시 살리시는 분이다.그러므로 믿는 자의 삶은 현재와 미래를 함께 붙드는 삶이다. 지금 예수님께 나아와 그분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마지막 날에는 예수님께서 다시 살리신다. 영생은 먼 미래에만 주어지는 약속이 아니라, 지금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에게 주어지는 생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떡으로 내 삶을 채우려는 자리에서 돌이켜야 한다. 예수님이 주시는 유익만 붙드는 신앙에서 벗어나, 예수님 자신께 나아가야 한다.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는다.나는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않는 사람인가? 나는 예수님을 구하고 있는가, 아니면 예수님이 주시는 떡만을 구하고 있는가? 나는 내 연약함 때문에 예수님께 나아가기를 주저하고 있지는 않은가?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은 자신에게 오는 자를 결코 내쫓지 않으시며, 아버지께서 주신 자를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 다시 살리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숨지 말고, 다른 떡을 붙들지 말고,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께 나아가야 한다.그렇다면 오직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붙드는 삶은 어떤 것인가?How? 1) 복‘만’을 구하는 신앙에서 벗어나기 1)-1 복을 구하는 게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복만’을 구한다면 잘못된 것 2) 내 연약함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얼굴 가리지 않기 2)-1 예수님은 자신에게 나아온 자를 절대로 거절하지 않으심을 기억하기3)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조차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하기[참고문헌] 바레트, 찰스 K. 『요한복음 (I)』 국제성서주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01).브라운, 레이몬드 E. 『요한복음 I: 표적의 책』 최흥진 역. 앵커바이블 (서울: CLC, 2013).비슬리-머리. 『요한복음』 이덕신 역. Word Biblical Commentary 36 (서울: 솔로몬, 2001).크루즈, 콜린 G. 『요한복음』 배용덕 역.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4 (서울: CLC, 2013).Borgen, Peder. "Observations of the Midrashic Character of John 6." ZNW 54, no. 3-4 (1963): 232–40.de Boer, Martinus C.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The International Critical Commentary Vol. 1, London, New York, Oxford, New Delhi, Sydney: T&T Clark, 2025.Thompson, Marianne Meye.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1 ed.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5.

  49. 33

    요한복음 6.28-34 하나님의 일 = 예수님을 믿는 것

    2. 내 삶에 적용오늘 본문은 무리의 질문에서 시작된다.“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28절)이 질문은 얼핏 신앙적인 질문처럼 보인다.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다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그러나 그들의 관심은 여전히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머물러하나님 앞에서 어떤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지를 묻고 있다.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그들의 단단한 오해를 뒤집어 엎으신다.“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29절)하나님의 일은 여러 종교적 업적을 쌓는 것이 아니다.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인간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무리의 관심을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공로주의에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을 믿는가’라는 신뢰의 관계로 단숨에 옮기신다.그럼에도 무리는 곧바로 다시 표적을 요구한다.이미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표적을 행하셨음에도, 그들은 또 다른 표적을 요구한다.믿기 위해 표적을 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실제로는 예수님 자신보다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의 증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무리는 예수님을 받아들이기보다,자기들이 납득할 수 있는 조건과 증거를 먼저 요구한 것이다.즉, 모세보다 더 크다고 주장한 예수님에게모세보다 더 큰 표적을 이룸으로 스스로 증명하라는 뜻임. 그들의 주장에 예수님은 그들의 성서 오독을 바로잡으신다.만나를 준 이는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이며아버지께서 현재 하늘에서 참된 떡을 주고 계시다는 것이다.바로 예수님이 ‘참 떡’이신 것을 선언하신 것이다.이 참된 떡은 예수님과 그의 가르침을 말한다.하지만 무리는 예수님의 이 선언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 이야기가 가리키는 참된 생명의 떡을 보지 못한 것이다.예수님의 선언을 듣고도 그들이 구한 것은 여전히 자기 필요를 계속 채워 줄 지상의 떡이었다(34절).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주 묻는다.“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물론 순종은 중요하다.그러나 우리는 너무 쉽게 신앙을 내가 해야 할 일, 내가 쌓아야 할 업적,내가 증명해야 할 열심으로 바꾸어 버린다.그러다 보면 예수님을 믿는 일보다, 내가 무엇을 했는지를 더 붙들게 된다.또 우리는 무리처럼 계속 표적을 요구할 때가 많다.이미 말씀을 들었고, 이미 은혜를 경험했음에도, 여전히 하나님께 또 다른 증거를 요구한다.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응답해 주시면 믿겠다고 말하고,내 필요가 채워질 때에만 하나님이 일하신다고 여긴다.그러나 그런 신앙은 예수님 자신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내가 원하는 떡을 주시는 예수님을 붙드는 신앙일 수 있다.예수님은 단순히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는 분이 아니다.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떡이다.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는다.나는 하나님의 일을 내 종교적 성취로 이해하고 있지는 않은가?나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계속 내가 원하는 표적을 요구하고 있지는 않은가?나는 예수님을 구하고 있는가, 아니면 예수님이 주시는 떡만을 구하고 있는가?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그러므로 우리는 내 행위와 열심으로 나를 증명하려는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또한 끊임없이 더 큰 표적을 요구하는 자리에서도 벗어나야 한다.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증거가 아니라,하늘에서 내려와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참으로 믿는 것이다.그런 믿음의 사람으로 걸어가는 걸음은 어떤 삶인가?How? 1) ‘공로주의’를 내려 놓고 하나님과 신뢰의 관계 회복하기 1)-1 하나님은 내게 어떤 일을 해내기보다, 자신과 깊이 교제하길 원하신다 2) 자판기 신앙 버리기 2)-1 내 요구만이 아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묻기3) 콩고물보다 진정한 주인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시선을 두기 3)-1 삶 속에서 늘 ‘기도’가 선행되는 삶을 사는 것[참고문헌] 바레트, 찰스 K. 『요한복음 (I)』 국제성서주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01).브라운, 레이몬드 E. 『요한복음 I: 표적의 책』 최흥진 역. 앵커바이블 (서울: CLC, 2013).비슬리-머리. 『요한복음』 이덕신 역. Word Biblical Commentary 36 (서울: 솔로몬, 2001).크루즈, 콜린 G. 『요한복음』 배용덕 역.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4 (서울: CLC, 2013).폽케스, 엔노 에드자르트. "요한복음." In 취리히성경해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서울: 대한성서공회, 2021.Borgen, Peder. "Observations of the Midrashic Character of John 6." ZNW 54, no. 3-4 (1963): 232–40.de Boer, Martinus C.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The International Critical Commentary Vol. 1, London, New York, Oxford, New Delhi, Sydney: T&T Clark, 2025.Russell, D.S. The Method and Message of Jewish Apocalyptic: 200 Bc - Ad 100. The Old Testament Library Philadelphia, PA: Westminster Press, 1964.Thompson, Marianne Meye.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1 ed.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5.

  50. 32

    요한복음 6.1-15 내 계산에 예수님이 있는가

    2. 내 삶에 적용오늘 본문은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익숙한 ‘오병이어의 기적’을 다룬다.그러나 이 사건은 단순히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많은 사람을 먹이신 기적이 아니다.본문은 인간의 계산과 욕망을 드러내고, 그 한계를 넘어 풍성하게 공급하시는 예수님의 신적 권능을 보여준다.요한은 이 사건이 유월절 가까이에 일어났다고 말한다.유월절은 출애굽과 광야의 만나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절기다.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스스로 먹을 수 없었지만, 하나님은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그들을 먹이셨다.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굶주린 무리 앞에서 빌립에게 묻는다.“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이 질문은 예수님이 방법을 몰라서 하신 질문이 아닌,빌립을 시험하기 위한 질문이었다.빌립의 대답은 매우 충실했다.그러나 문제는 빌립이 예수님을 계산 안에 넣지 못했다는 사실에 있다.빌립은 이백 데나리온이라는 현실적인 계산을 내놓았지만, 그 계산 안에는 예수님의 풍성한 공급이 없었다.안드레도 마찬가지였다.그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소년을 데려왔지만, 곧바로 말한다.“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그는 작은 가능성을 예수님께 가져오기는 했지만, 그것이 예수님의 손에 들릴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보지 못했다.빌립과 안드레는 모두 현실을 보았지만, 현실을 넘어 일하시는 예수님을 충분히 보지 못했다.그러나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이 먹던 값싼 보리떡 다섯 개를 들어 축사하시고, 무리가 원하는 만큼 먹게 하셨다.부족함은 예수님의 손에서 풍성함이 되었고, 남은 조각은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찼다.요한복음이 강조하는 것은 단순히 기적의 크기가 아니다.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먹이시고, 남은 조각 하나도 버려지지 않게 하시는 분이다.이 표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들을 끝까지 보존하시는 생명의 수여자이심을 보여준다.문제는 이 표적을 본 무리의 반응이다.그들은 예수님을 “세상에 오실 그 예언자”로 알아보았다.그러나 곧 예수님을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 했다.그들이 원한 것은 예수님 자신이 아니라, 자신들의 필요를 채워 줄 왕이었다.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주고, 자신들의 배고픔과 현실 문제를 해결해 줄 정치적 메시아였다.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런 무리에게 붙들리지 않으신다.왜냐하면 예수님의 권위와 왕권은 군중의 열광이나 인간의 야망에서 나오지 않고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리의 욕망이 만든 왕좌에 앉지 않으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신다.이 말씀은 오늘 우리의 신앙을 정면으로 비춘다.우리도 빌립과 안드레처럼 결핍과 위기 앞에서 먼저 계산기를 두드린다.내 돈, 내 시간, 내 능력, 내 경험, 내 가능성을 따져 보고 “이것으로는 부족하다”고 결론내린다.그러나 그 계산 안에 예수님이 빠져 있다면, 그것은 현실적인 판단이 아니라 불신앙의 계산일 수 있다.동시에 우리는 무리처럼 예수님을 내 욕망의 왕으로 삼으려 할 때가 많다.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내 배를 불려 주고, 내 문제를 해결해 주고, 내 계획을 이루어 줄 분으로만 붙들려 한다.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내가 원하는 타이밍에, 내가 원하는 결과를 주시는 예수님을 기대한다.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욕망을 채워 주는 수단으로 전락하지 않으신다.주님은 우리의 필요를 풍성히 채우시는 분이지만, 우리의 욕망에 이용당하는 분은 아니다.그러므로 신앙은 주님을 내 뜻대로 움직여 왕으로 세우는 것이 아니다.신앙은 주님이 행하시는 생명의 표적 앞에서 내 계산기를 내려놓고, 그분의 통치 아래로 들어가는 것이다.내 손에 있는 것이 보리떡 다섯 개처럼 작아 보여도, 그것을 예수님께 드려야 한다.그리고 예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공급하시든, 그분이 생명의 주이시며 참된 왕이심을 신뢰해야 한다.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묻는다.나는 예수님을 따르는가, 아니면 예수님이 주시는 유익만을 따르고 있는가?나는 부족함 앞에서 예수님을 계산 안에 넣고 있는가, 아니면 내 한계만 바라보고 있는가?나는 예수님을 내 욕망을 이루어 줄 왕으로 붙들려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참된 왕으로 믿고 있는가?오병이어의 표적은 부족함의 자리가 절망의 자리가 아님을 보여준다.그 자리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새롭게 보게 되는 자리다.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적인 계산과 야망을 내려놓고, 우리를 먹이시고 보존하시는 생명의 주 예수님을 참된 왕으로 모셔야 한다.그렇다면 인간적인 계산과 야망을 내려놓고, 우리를 먹이시고 보존하시는 예수님을 참된 왕으로 모시는 삶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How? 1) 현실적 제약에 갇혀 주님의 능력을 내 계산 밖으로 제외했던 불신앙을 회개하기 1)-1 앞으로의 계산에 ‘예수님’을 넣어야 함. 2) 내 손에 쥔 ‘보리떡’을 주님께 드리기 2)-1 초라해 보여도 내가 가진 시간, 재능, 섬김 하나를 정해서 주님께 드리기.3) 주님을 내 욕망을 채울 ‘수단’으로 조종하려는 이기심 내려놓기[참고문헌] 바레트, 찰스 K. 『요한복음 (I)』 국제성서주석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01).브라운, 레이몬드 E. 『요한복음 I: 표적의 책』 최흥진 역. 앵커바이블 (서울: CLC, 2013).크루즈, 콜린 G. 『요한복음』 배용덕 역. 틴데일 신약주석 시리즈 4 (서울: CLC, 2013).폽케스, 엔노 에드자르트. "요한복음." In 취리히성경해설 성경전서 개역개정판. 서울: 대한성서공회, 2021.Audet, J.-P. "Esquisse Historique Du Genre Littéraire De La "Bénédiction" Juive Et De L'"Eucharistie" Chrétienne." Revue Biblique 65, no. 3 (1958): 371–99.Dodd, C.H. Historical Tradition in the Fourth Gospel. Lond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3.Guilding, Aileen. The Fourth Gospel and Jewish Worship.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60.Martyn, J. Louis. History and Theology in the Fourth Gospel. The New Testament Library 3 ed. Louisville, London: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3.Newbigin, Lesslie. The Light Has Come: An Exposition of the Fourth Gospel. Grand Rapids, MI: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82.Thompson, Marianne Meye. John: A Commentary. The New Testament Library 1 ed.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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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묵상을 통해 매일의 삶의 예배에서하나님과 동해하는 삶을 이뤄냅시다.Through morning devotions each day, let’s live our daily lives as worship and walk with God.Rev. Kim. (Th.M; Old Testament Theology)Full Gospel Somang Church

HOSTED BY

Chi Hyun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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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묵상을 통해 매일의 삶의 예배에서하나님과 동해하는 삶을 이뤄냅시다.Through morning devotions each day, let’s live our daily lives as worship and walk with God.Rev. Kim. (Th.M; Old Testament Theology)Full Gospel Somang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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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묵상] [Everyday Morning Devotions], 이사야서 is created and hosted by Chi Hyun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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